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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96화 (196/1,497)

〈 196화 〉1부 9장 30

모체를 잃은 흑전갈들은 히어로들에게 유린당했다. 히어로들은 괴수를 죽여야 한다는 사명하에 흑전갈들을 철저히 사냥했다.

"우오오오!"

히어로들은 극도로 흥분해있었다.

인류의 위협인 괴수를 일거에 소탕한다는 사명감.

괴수 무리를 상대로 압도적은 우세를 점하는 승리감.

막대한 양의 코어를 벌어 고국에 가져다 바칠 고취감.

그리고 누군가는 억울함과 질시를 담아, 히어로들의 손은 쉬지를 않았다.

흑전갈 무리가 전부 토벌당하고, 히어로들은 호수의 아래에 잠잠히 숨어든 흑사갈의 반응을 찾았다.

"레이더에 반응...없는데요?"

"뭐?"

호수를 벌겋게 물들였던 괴수 레이더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히어로들은 주변에 즐비한 흑전갈의 사체를 훑었다.

"설마 이걸로 끝...?"

그 누구도 괴수가 도망쳤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히어로들은 일단 흑전갈들을 토벌했다는 고양감을 만끽하기로 했다.

협회의 레이더망에 잡힌 흑전갈의 개체 수, 무려 5천. 이제 히어로들에게 남은 것은 사태 수습 뿐이었다.

"이건 내가 잡았다고!"

"무슨 소리야?! 우리쪽 딜러진이 화살로 잡은 거잖아!"

"지, 진정하시오! 워치를 돌려서 확인하면 될 터! 우리는 함께 싸운 동지가 아닌가!"

흑전갈 무리를 사냥한 이후, 완전한 정산이 이루어지기 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릴 것 처럼 보였다.

* * *

<6월 15일 새벽 4시. 청해 호 인근 백나로 호.>

바깥에서 아비규환이 벌어지고 있던 그 시각.

비행정으로 돌아론 집행관은 함장석에 풀썩 주저앉았다. 한국을 떠난지 불과 한나절도 지나지 않았지만, 집정관의 뒤를 이어 히어로들을 이끄는 건 막대한 심력이 소모되었다.

"다친 사람은...없네요. 다행히."

"설화령께서 모두를 지켜주셨기 때문 아닙니까?"

운사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들고 함장석으로 다가왔다. 집행관은 종이컵을 건네받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그런데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저는 이게 편합니다."

"...예. 그러셔요."

집정관 유영호만큼 냉정하게 히어로들을 지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시위하도 하는 걸까? 집행관은 운사가 보이는 거리감에 어깨가 움츠려 들었다.

"어렵네요. 정말."

"금방 적응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럼 다행이지만."

집행관은 뺨을 두손으로 비비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추태에 대한 판단은 반성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았고, 당장은 히어로들이 활약한 결과에 대해 정산을 맺어야했다.

띠링.

"아, 도착했네요."

기다리고 기다리던 결과가 마침내 도착했다. 집행관은 침을 꿀꺽 삼키며 협회의 통지표를 받았다.

"......어?"

D급이나 C급 같은 자잘한 코어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집행관의 눈을 휘둥그레 만든 원인은 단연코 S급과 A급 코어의 개수였다.

"A급 108개, S급 21개입니까?"

운사가 모니터에 떠오른 정산 결과를 보고 감탄했다. 전체 S급 개수에 비해 상당히 초라한 것처럼 보이는 실적이었으나, 투입된 이능력자들의 양과 질을 따져보면 엄청난 실적이었다.

"저희 예상 목표치가…?"

"A급은 서른. S급은 다섯이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집행관."

집행관은 눈물이 핑 돌았다. 겉으로는 담담한 척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어쩔 수 없이 안 좋은 자리에 배치되어 하나도 얻지 못할까봐 전전긍긍 하고 있었다.

"근데 어떻게 21개나…?"

집행관은 구체적인 결산 내역을 확인했다. 히어로 협회는 1만여명에 이르는 중국 히어로들의 도움을 받아 99%의 정확도로 흑전갈 사냥의 지분을 정리했다. 집행관은 한국 히어로들이 사냥한 결과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나열했다.

"와."

화권 이승형 - S급 11, A급 3, B급 12….

"정말 독보적이네요."

"화권에 대한 칭송이 아주 자자합니다. 어르신들도 화권을 칭찬할 뿐더러, 외국의 이능력자들도 화권에게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공략의 전체 지분을 따지면 거의 1할 가까이 된다고 들었습니다만."

"으으, 화권이 거기만 안 만졌어도…!"

집행관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활약은 압도적이었고 결과도 좋았으나, 그 과정에서 화권은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켰다.

"괴수 상대로 성희롱만 안 했으면 정말 완벽했을텐데…!"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본인이 일부러 한 건 아니잖습니까. 굳이 따지자면 집행관께서 소리를 지르시는 바람에-"

"그건 저도 반성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잖아요!"

집행관은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만져진 것도 아닌데 괜히 부끄러워졌다.

"그 괴수가 문제예요! 인간을 따라할 거면 최소한 가릴 건 가리고 나왔어야죠!"

"애초에 괴수에게 인간의 성관념을 강요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운사 님, 혹시 저 마음에 안 드시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직언을 드릴 뿐입니다."

운사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서울수복작전에 참가한 이후 그의 창 또한 거침이 없었고, 몸에 거의 딱 달라붙는 바디슈트 또한 거침이 없었다.

"......끄응."

"불편을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습관이라 고치기 어려운 점, 양해바랍니다."

집행관은 운사와의 거리감이 여러모로 불편했지만, 차차 해결해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으으, 사람들 반응 보기가 두렵네요. 까딱 잘못해서 욕먹으면 어쩌죠? 제가 조금만 더 자세히 알았다면 그런 사고는 안 일어났을텐데…."

"너무 잔걱정이 많으십니다. 커뮤니티에서는 집행관 님의 결단력에 경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예?"

"보시길 바랍니다."

운사는 모니터의 일부를 전환했다. 시시각각으로 전해지는 정보 속에서 운사는 집행관과 관련된 정보들을 몇 가지 꺼내 읊었다.

"'화권 데려간다고 까던 놈들 봐봐라. 집행관 님 덕분에 좋은 거 보지 않았냐.', '베레모 날아갈 때 당황하는 거 귀여워 하악하악.', '위치 잘못 잡았다고 욕하던 놈들 싹다 잠수탔죠? 큭큭큭.' ...보시다시피 집행관을 욕하는 자들은 없습니다."

"후, 후우. 그럼 다행이네요."

집행관은 눈치채지 못했다. 집무실에서 뜬눈으로 외손녀의 활약을 지켜보던 모 백발의 노인이 뒤에서 공작을 벌인 것을. 집행관은 자신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만' 보며 자신감을 조금 되찾았다.

"그, 그래도 화권이 떨어뜨린 국격은요? 이대로 가다간 저희 전체가 성희롱범으로…."

"그 조차도 전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직까지 각국별 정산 결과가 공개되지 않아, 대중들의 관심은 화권과 흑사갈에 집중되어있었다.

"다들 화권을 '대협'이라고 칭송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당황해서 불을 꺼뜨려 겁쟁이라고 욕을 먹던 것도 후의 일로 '상남자'라는 평을 받으며…."

"그건 상남자라기보다는…. 쯧. 알겠어요. 어쨌든 욕은 안 먹고 있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삐리리. 집행관의 워치에서 음악 소리가 울렸다. 따로 저장해둔 벨소리인지 집행관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그-"

"저는 전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럼 이만."

운사는 허리를 꾸벅 숙이며 함교를 떠났다. 집행관은 홀로 함교에 남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바쁘신데 전화 한 건 아닌지.]

"아녜요! 다 끝나고 쉬고있었어요. 연락주셔서 감사합니다, 은재민 회장님."

스크린 너머의 상대, 은재민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응당 내가 먼저 할 일이지. 이제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잖아. 대단하네, 역시 희아야. 혹시 코어 얼마나 벌었는지 알 수 있을까?]

"......."

전화를 걸자마자 용건부터 찾는 은재민의 말에 백희아는 섭섭했다. 하지만 끓는 속내를 삼키며 담담히 결과를 전송했다.

"S급 코어 21개. 나머지는 보시는 대로예요."

[...정말 대단한 걸. 희아야. 이거-]

"네. 할아버지께 부탁드려서 유성에서 전부 수급할 수 있도록 말씀 드려놓을게요. 협회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래? 정말 고마워! 희아 덕분에 아저씨가 정말 편안하게 잘 수 있겠어. 한국에 돌아오는 길 편안히 돌아오면 좋겠다.]

"네. 저, 오빠."

[아저씨.]

"...아저씨. 저 나중에 귀국하면 따로 식사라도-"

[...희아야, 미안. 지금 급한 연락이 와서. 나중에 따로 통화하자! 미안!]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은재민의 눈이 마지막에 금빛으로 반짝인 걸 백희아는 보지 못했다. 백희아는 함장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꾸 철벽치네. 유성을 끌어들여야 할아버지 입지가 안전해지는데."

백희아는 홀로 중얼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유성가를 우리 가문에 끌어들여서...재계를 등에 업고...."

"전화는 끝나셨습니까?"

"히익?! 노, 놀랬잖아요...!"

백희아는 가슴을 두드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흑전갈 마저 잡으러 가셨던 거 아니었어요?

"그렇습니다. 혹시나 살아있나 싶어서 잠깐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이것부터 봐주시길 바랍니다."

운사가 워치에서 스크린을 띄워올렸다.

"비었...어요?"

호수 아래.

코어 반응이 없는 거대 흑전갈-흑사갈의 빈 껍데기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 * *

<그 시각, 빙벽 너머.>

"다행이군. 휴우."

흑전갈들이 모두 전멸했다는 보고를 전해받은 봉효 백청영은 빙벽 너머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지 않은가?"

황제가 옆에서 물었다.

환룡단은 행여나 빙벽을 넘어올 흑전갈들을 대비하기 위해 환염령들과 넓은 방어선을 펼치고 있었으나, 흑전갈들이 호수에서 전부 수장됨에 따라 헛걸음이 되고 말았다.

"전혀요."

"어째서?"

"우리는 지파룡의 코어를 획득한 걸로도 만족합니다. ...그분께서 더이상 욕심을 부리시지 않으니, 저희도 이걸로 만족해야죠."

"...끙. 이 땅에서 나온 것을 이국에 넘기는 건 안타깝지만."

황제는 여전히 후손들을 걱정하는 발언을 내뱉었다. 백청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고, 워치를 눌러 모든 환룡단 단원들에게 지시했다.

"각자 맡은 환염령들을 이끌고 복귀합니다. 괴수 레이더 상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응?"

백청영은 수풀 사이를 헤쳐지나가는 인영에 기시감이 들었다. 날짐승은 아닌 것이, 행동은 꼭 날짐승처럼 백청영과 황제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폐하."

"음."

황제는 독꼬리를 들어올렸다. 명목은 S급 괴인인 만큼 그의 근접전 또한 상당히 출중했다.

"......으음?"

황제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그림자에서 어딘가 낯익은 마력의 냄새가 풍겼다.

그 때, 수풀을 가로지르며 나신의 여인이 뛰쳐나왔다.

캬아아악!

산발이 된 머리칼을 휘날리며 손톱을 세운 여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황제를 덮쳤다. 황제는 아무런 반격도 하지 않았다.

키킥, 키기긱!

여인은 광인마냥 황제의 어깨를 깨물었다. 그 행동은 마치 황제를 잡아먹어 힘을 키우려는 괴수들의 습성을 닮아있었다.

"음...?"

백청영 또한 여인의 이상을 감지했다. 괴인이 된 그는 여인의 이상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거...괴수 아닙니까?"

"그래. 아무래도."

황제는 꼬리로 여인의 목을 휘감아 허공에 띄웠다. 여인은 발버둥을 치며 황제를 향해 위협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이 코어의 모체가 아닐지?"

"예?"

"그냥 느낌이다."

황제는 자신의 가슴에 박힌 코어를 가리켰다. 그는 피닉스가 사냥한 흑전갈의 코어로 탄생한 만큼, 여인에게 무언가 특이한 감각을 느낀 듯 했다.

"......흐음."

백청영은 생각에 잠겼다. 황제의 '느낌'과 자신의 '생각'에 따르면, 여인의 정체가 얼핏 짐작이 가기도 했다.

"그분께서는 분명 흑전갈이 아니라 '흑사갈'이라 불렀단 말이죠."

여인을 바라보는 백청영의 눈이 반달을 그렸다.

"이거이거, 멀리까지 나온 보람이 있군요. ......흠?"

백청영의 눈이 여인의 나신을 위아래로 쓸었다.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거대한 가슴은 분명 자신이 영상으로 봤던 그 모습과 똑 닮아있었다.

"흐음, 호오."

백청영은 우선의 깃으로 밑가슴을 쿡쿡 찔렀다.

"햐응?!"

여인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신음을 터뜨렸다. 그에 백청영이 배를 잡으며 웃었다.

"으하하! 그렇군요! 죽을 것 같으니까 인간이 되어 도망쳤다는 말입니까?! 흐허허!"

"생존본능 같은 거지. 이대로 도망쳤으면 큰일 날 뻔 했군. 어떻게, 죽이겠나?"

황제가 손톱을 날카롭게 세웠다. 여인은 자신의 새끼처럼 느껴졌던 존재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에 진한 공포를 느꼈다.

"아뇨, 아뇨.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요. 아주 좋은 '복수'가 될 것 같습니다."

백청영은 그 어느때보다 환한 미소로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흑사갈은 그 미소가 너무나도 섬뜩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설마 또 그 자를?"

"아뇨, 설마요. 이럴 때는 이렇게 써먹어야지요."

백청영은 싱글벙글 웃으며 환룡에게 전화를 걸었다.

[후후, 무슨 일이냐. ...흐아암.]

"주군. 그 분께 흑사갈을 잡았다고 연락을 넣어주시겠습니까?"

[......안 써먹을려고?]

"예. 대신 제가 직접 거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후후후후."

S급 괴수 흑사갈.

환룡단에게 생포.

흑사갈 소동은 끝이 났다.

히어로들은 사라진 흑사갈을의 행방을 찾아 청해 호를 이잡듯이 뒤졌으나,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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