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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95화 (195/1,497)

〈 195화 〉1부 9장 29

질풍객 하야테가 흑사갈의 목을 베는 것으로 전장은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우리는 질투에 눈 먼 질풍객을 규탄한다!"

"""규탄한다! 규탄한다!"""

"질투? 뭔 소리야! 잡으면 임자지!"

히어로들과 질풍객은 미묘한 대치를 보였다. 히어로들은 교묘한 단어 선택으로 질풍객을 오해하도록 만들었고, 질풍객은 그들의 음습한 욕망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아아."

석하랑은 그 틈에 마력을 갈무리했다. 호수 한 가운데에서 하는 호흡에 마력은 금방 차올랐고, 벌써 절반 가까이 복구되었다.

"감사합니다, 설화령. 당신 덕분에 수월히 싸울 수 있었습니다."

외국의 히어로 하나가 석하랑에게 다가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이런 막대한 힘을 가지시고도 히어로들을 지원하는데 총력을 기울이시다니. 과연 인류의 새 희망이라고 불리실 만 합니다."

"하하. 할 일을 다 한 것 뿐인 걸요…."

석하랑은 쑥쓰러움에 볼을 긁적였다.

어린 시절부터 S급으로 주변의 칭찬을 받는 것에는 익숙했지만, 한국의 희망에서 이제는 전세계의 유일한 희망으로 격상한 자신의 위상은 적응이 잘 되지는 않았다.

"아녜요. 설화령이 없었으면 뚫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집행관 백희아도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한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하고 있는 덕분인지, 두 사람의 아래에는 그다지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았다.

"......후후."

"헤헤."

둘의 접점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이번 전투를 통해 공감대가 하나 형성되어버렸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설화령."

"아녜요, 뭘. ...집행관. 아까 의도치않게 무시해서 미안해요."

석하랑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집행관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석하랑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변명했다.

"그...어떻게 하면 공략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미쳐 듣지를 못했어요. 절대로 집행관을 무시하려던게 아녜요.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아닙니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집행관의 얼굴이 살짝 풀렸다. 고개를 돌린 집행관은 입꼬리가 살포시 올라가 있었다.

"저기…."

화권이 쭈뼛 대며 둘에게 다가왔다. 집행관의 시선은 오물을 보는 것 마냥 날카로워졌다.

"뭐죠? 저리가주세요, 화권. "

집행관은 이승형을 이명으로 부르며 거리를 두었다. 의도치 않게 여성들의 적이 되어버린 화권은 그저 난감할 뿐이었다.

"제가 무슨 잘못을...?"

"여성을 희롱한 것으로도 모자라 국격을 떨어뜨렸어요. 한 나라의 대표인 히어로가 여성의 유...에잇! 아무튼 적당히 했어야죠! 백의종군 한다른 사람이 논란을 만들면 어떻게 해요?!"

"이, 이건 불가항력 같은.... 아니, 그 괴수를 잡다가 벌어진 일 아닙니까?"

"괴수도 괴수 나름이죠! 외형이 저러면 최소한 신경은 쓰셔야 하는 거 아녜요?! 솔직히 얘기하세요! 출렁거리는 거 보려고 한 거죠?!"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제가 질풍객같은 검사였으면 무조건 베었을 겁니다! 저는 권사라고요! 손대중을 할 만큼 약한 적도 아니잖습니까!"

화권과 집행관의 언쟁이 뜨겁게 불붙었다. 그저 괴수를 쓰러뜨려야한다는 순수하고 사명감 넘치는 히어로의 정신과, 여러 정치적 문제와 논란 거리에 대해 걱정하는 관리자의 불안감이 서로 상충했다.

"...일단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해결하기로 하죠."

석하랑은 목이 잘려 몸통만 남은 흑사갈을 가리켰다.

"집행관. 혹시 흑사갈에 대한 데이터가 있어요? 목 저렇게 가만히 있는 것도 이상한데."

"...하긴, 무언가 특별한 반응이 없군요. 설화령 님 말씀대로 그래서 더 이상합니다."

집행관은 축 늘어진 흑사갈의 몸통을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아래를 향해 축 떨어진 둔덕은 목이 잘렸음에도 여전히 꽉찬 물방울처럼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진짜로 죽은 걸까요?"

"죽었으면 코어를 수급하면 될텐데…. 잠시만요."

석하랑이 엉덩이 뒤의 주머니에 손을 슬쩍 집어넣었다. 푸른 카나리아 모양의 머리핀을 정성스레 머리에 꽂은 석하랑은 점점 표정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아."

"왜 그러십니까?"

"안 죽었대요."

"...예?"

누가? 집행관은 석하랑의 말을 자신이 잘못들었나 착각이 들었다. 집행관은 말꼬리를 늘어잡고 싶었지만, 당황한 석하랑의 모습에 긴장의 끈을 다시 동여매었다.

"모, 모두 전투 준비!"

호수를 퍼져나간 석하랑의 목소리에 히어로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SS급 능력자인 설화령이 이유없이 전투 준비를 선언하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전부 전투준비! 설화령께서 말씀하셨다!"

"질풍객! 내려와...요!"

"뭔 존대야. 부산처럼 말 막...흐어억?!"

덥썩!

죽은 줄 알았던 흑사갈이 질풍객을 손으로 붙잡았다. 흑사갈은 목이 잘렸음에도 여체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오오오오오!"

"흑사갈이 부활했다!"

"기뻐하지마 멍청이들아! 전투에 집중해!"

히어로들은 혼란에 빠졌다. 다시 몸을 출렁거리는 흑사갈에 광분하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그런 그들의 모습에 속이 터져 화딱지가 나는 이들도 있었다.

"아, 진짜!"

석하랑은 전혀 다른 의미로 짜증이 나있었다. 자신이 자존심을 조금만 꺾고 물어보면 쉽게 알게될 약점들인데, 상황이 개판이 되고 나서야 진실을 알게 되었다.

"머리 근처에 있는 히어로들! 물러나세요!!"

"예?!"

히어로들 몇이 잘려나간 목을 워치로 찍느라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번쩍!

흑사갈이 눈을 치켜떴다. 동시에 입이 쩍 벌어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S급처럼 보이는 흑전갈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어억?!"

사각, 사각, 사각사각사각!

머리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신체를 유지하던 본체에서의 마력이 끊긴 나머지, 잘려나갔던 목은 형태가 무너졌다.

파아아앗-!

머리가 터지며 흑전갈 분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으악, 씨발!"

그 순간, 히어로들은 깨달았다.

"전 히어로들 집중! 겉모습에 현혹되지 마세요! 저거 다 흑전갈들 모여서 만들어진 가짜입니다!"

석하랑이 진실을 드러냈다.

"우, 우릴 속였어!"

"으아아아악!"

"죽어라 괴수!"

히어로들이 하나같이 광분하기 시작했다. 집행관은 귓등까지 벌게져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집행관."

"......저 잠깐만 내버려두시겠어요?"

"공격 명령을 내리셔야 저희도 공격하러 갑니다. 괘념치 마시길 바랍니다. 아마 다들 비슷한 마음일 겁니다."

집행관은 운사의 상냥한 마음씨를 느꼈다. 집행관은 정신을 가다듬으며 전방을 향해 떨리는 손가락을 가리켰다.

"고, 공격하세요...."

"명 받았습니다."

운사는 그저 담담히 창을 꼬나쥐고 전방으로 달렸다.

"집행관 아가씨, 너무 그러지마. 첫 출전이잖나."

"젊었을 때 실수하고 그러는 법이지, 끌끌."

우사와 풍백이 운사의 뒤를 따라 달렸다. 집행관은 더 부끄러워져 어딘가로 숨고 싶었다.

"저는 집행관 님 지지해요."

템페스트 레이디는 엄지까지 들어올렸다. 그 또한 얼굴이 상당히 붉어져 있었고,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

"집행관."

"히끅!"

화권이 머리를 긁적였다. 집행관은 차마 화권과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최대한 불꽃을 억제하겠습니다. 저도 나라에 민폐를 끼칠 생각은-"

"아뇨. ...더 크게 불꽃을 피워주세요."

집행관의 머리가 맹렬히 돌아갔다.

"제가 오판했으니까, 당신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저는 괜찮습니다. 운사가 말했잖아요? 괘념치 말라고."

화권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굳이 저를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욕 먹는 건 익숙하니까요."

"......."

"그럼 가겠습니다!"

화권은 다시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십 수 미터를 뛰어오른 그는 흑사갈의 손목을 향해 주먹을 내질러, 사로잡힌 미녀를 구하는데 성공했다.

"후우."

집행관은 크게 심호흡했다. 오판은 오판이고, 실책은 지금부터라도 만회해야했다.

"......질풍객은 계속 팔을 잘라주세요! 떨어지는 신체에서 튀어나오는 흑전갈들은 아래에 있는 히어로들이 요격합니다!"

"오오냐!"

질풍객은 바람을 타고 달리며 검을 휘둘렀다. 또다시 그를 잡으려던 흑사갈의 손가락이 뎅겅 잘려나갔다.

퉁!

흑사갈의 검지가 멀리서 횃불을 밝히고 있던 이들의 앞에 떨어졌다. 인간의 형태가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곧 뭉쳐있던 새끼 흑전갈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죽여!"

이능력자들을 횃불을 휘두르며 흑전갈들을 견제했다. 다른 불꽃은 신경쓰지 않았지만, 유독 화권이 남긴 백염만은 두려워하는 듯 했다.

서걱! 서걱!

질풍객의 검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손목을 가르고, 팔뚝의 살점을 베어내며, 옆구리 살을 잘랐다. 인체를 조각내는 그로테스크한 광경이었으나, 히어로들은 더이상 눈앞의 광경에 현혹되지 않았다.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를 미혹시킬 뿐입니다! 본질은 괴수예요!"

"깎는 겁니다! 살점같아 보여도 다 흑전갈들 뭉친 겁니다!"

S급 히어로들이 흑사갈의 여체를 베고 찌르며 깎아내기 시작했다. 빙판에 던져진 살점에서 튀어나온 흑전갈들은 A급을 위시한 히어로들이 대처했고, 강변에서 달려온 히어로들의 지원사격은 멈출줄 몰랐다.

콰앙! 콰앙!

흑사갈은 빙판 아래에서 꼬리를 휘두르며 S급들을 견제했지만, 흑사갈의 단순한 패턴에 적응된 히어로들은 아주 수월하게 공격을 피하며 몸을 깎았다. 공격 수단인 양 팔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통에, 흑사갈의 여체는 더이상 공격할 수단을 잃고 말았다.

키기기기....

흑사갈의 여체는 토르소가 되었다. 팔이 잘려 축 늘어진 상체는 그저 인체를 본딴 조각상일 뿐, 더이상 인간을 공격할 수단이 마땅찮았다.

"어.... 음...."

히어로들은 난감했다. 내장이나 근육 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 누구도 아직까지 흑사갈의 앞을 건드리지 못했다. 괴수인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차마 직접 손을 대기는 어려웠다.

서걱!

두 개의 언덕이 초승달의 궤적에 떨어졌다. 질풍객은 긴 흑발을 흩날리며 빙판에 착지했다.

"베는 감촉은 정말 좋단 말이야...."

쿵, 쿠웅!

흑사갈의 두 둔덕이 빙판에 떨어졌다. 그곳은 다른 어느 신체부위보다 더 많은 흑사갈을 품고 있었고, 히어로들은 미혹을 떨치고 괴수 사냥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사각, 사각, 사각.

그게 약점이었을까.

흑사갈의 거체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피부부터 시작해 상체 전체가 꿈틀거리며, 인간 여체는 흑전갈들로 무너져 분수가 치솟았다.

새벽 2시 정각.

흑사갈의 여체가 무너졌다.

* * *

흑사갈은 분노했다.

자신의 힘을 무한히 불릴 수 있는 지보를 강탈당한 것도 모자라, 호수 한 가운데에서 인간들에게 능욕당하듯 여체가 잘려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분노만 할 뿐 힘은 너무나도 부족했다.

흑사갈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다음 단계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는 걸 자각했지만, 그 어려운 길을 포기하고 쉬운 길을 선택했다.

부하-자식들의 양산.

하루에도 수 백마리 씩 알을 낳으며 흑전갈들을 낳아, S급에 이르면 흑사갈이 잡아먹으며 자신의 힘을 서서히 불려나갔다.

자식을 키워서 잡아먹는 행위는 인간이건 짐승이건 패륜적인 행위였으나, 괴수인 흑사갈에게는 그저 자신의 힘이 강해지는 것 외에는 중요치 않았다.

그러나 힘이 부족하다.

인간들은 자신이 낳은 새끼들보다 더 많은 머릿수로 자신을 압박했다.

일거에 둥지에서 지보를 훔쳐간 불꽃의 새나 호수를 얼려버린 얼음 나비도 그렇거니와, 호수 전체를 아우르는 수많은 이능력자들은 자신을 죽일 기세가 만만이었다.

패배. 죽음. 소멸.

흑사갈은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고,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도주.

빙판 아래 숨어있던 흑사갈은 상체에 돋아난 여체를 껍찔 째로 뜯어버렸다.

끼기기긱?!

모체로부터 마력이 끊긴 흑전갈들이 당황해 비명을 질렀다. 잘려나간 팔, 가슴, 허리 등지에서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흑전갈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키키긱.

흑사갈은 눈물을 머금고 호수 깊숙한 곳으로 숨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30m에 이르는 거대한 전갈의 육체까지 버려야 했다.

흑전갈의 몸으로는 사냥당한다.

그러니 인간의 몸으로 도망쳐야한다.

나뭇잎을 숨기려면 숲에다 숨기라고 하던가. 흑사갈은 그 이치를 본능적으로 깨달았고, 자신의 코어만 챙겨 달아나기 시작했다.

힘을 갈무리하고, 코어조차 최대한 줄여, 인간의 육체 사이즈를 본따 몸을 형성했다.

인간들이 화수분처럼 쏟아지는 흑전갈들에 정신이 팔린 그 시각.

흑사갈은 도마뱀 꼬리 자르듯, 몸통을 버리고 도망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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