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1부 9장 28
백염대협께서 손수 어둠을 밝히심에, 흑사갈의 거체가 모습을 드러내더이다.
태산처럼 우뚝 솟아오른 흑사갈의 아래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소. 가까이 있던 영웅은 한낱 개미 새끼가 되었지요.
뭇 작은 자들이 분을 참지 못하여 병장기를 집어들었고, 흑사갈은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으로 난동을 부렸소이다.
그 몸서리는 아직도 눈에 선하오. 실력이 부족했던 나는 그저 멀리서 얼음 속에 갇힌 흑사갈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오.
깎아지른 빙벽에서 강림하신 설화령께서 우리에게 디딜 땅을 마련해주셨으나, 그 누구도 쉬이 언덕을 넘을 생각을 하지 못했소.
전장은 너무나도 어두웠고, 백염대협께서는 쉬이 불꽃을 피우지 못하셨소. 아아, 하늘은 어찌 백염대협에게 사자같은 용력을 주셨으면서, 왜 협객의 의기까지 더해주셨단 말인가!
괴수조차도 아녀자로 대하는 대협의 마음씨는 고왔으나, 뭇 많은 남정네들의 아쉬움을 자아냈지요.
그래서 의협심 많은 협객들이 대협이 남긴 횃불을 들고 모여들었소.
그렇소.
대협께서 죽인 흑전갈의 꼬리요. 우리는 그것을 횃불처럼 들고 어둠을 밝혔고, 비로소 흑사갈이 전신을 드러냈소이다.
아!
그 얼마나 창백하고 소름돋는 외형이란 말인가. 그리도 인간을 꼭 닮을 수 있다니. 그리고 죽은 새끼들에 분노해 울분을 토하는게 너무나도 섬뜩했소.
그래서야 마치 인간같지 않은가?
동지들도 익히 보았을 것이오. 월궁의 항아가 내려온 것인가? 저 멀리 서역에서 말하는 미의 여신이 강림한 것인가? 동방의 도 교수는 말했다오.
"괴수인 흑사갈은 여인의 궁극적인 미를 추구한 결과다."라고 말이오.
궁극적인 미(美)!
우리는 수천의 새끼를 보듬어 살피던 흑사갈의 흘러 넘치는 모성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했소. 그것이 모성이 아니고서야 무어라 표현할 수 있겠는가!
아.
아직도 눈에 선하다오.
흑사갈이 작은 것들의 분에 괴로워하던 비명을. 어찌 인간은 그리도 어리석은 자들이란 말인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간을 가르고 말다니! 질투심에 눈이 멀어 효수하던 순간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오!
오호통재로다.
아......
그래서 흑사갈의 자태가 궁금하시다?
안 알랴줌ㅋㅋ.
<히어로 협회에 의해 정지된 채널입니다.>
- 6월 23일, 히어로 커뮤니티 스트리밍 사이트. '[인증] 흑사갈 왕찌찌 본 썰 푼다' 중에서.
* * *
석하랑은 텅 비어버린 가슴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청해 호 전체에 빙판을 깔기 위해서는 모비딕을 상대하며 동해 바다를 얼리던 순간보다 더 많은 마력이 필요했다.
"후아아."
석하랑의 입에서 입김이 흘러나왔다. 차가운 밤공기와 석하랑이 만든 빙판이 만나, 전장의 기온은 확 내려앉았다.
"비켜어어어!"
"횃불을 들어라! 흑전갈 꼬리를 치켜들어!"
히어로들이 화권이 만들어놓은 모닥불에서 흑전갈의 꼬리를 들고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60m 크기의 거대 괴수를 상대로 직접 맞딱뜨리기에는 힘이 부족했지만,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 흑사갈과 맞서 싸우는 S급 히어로들을 지원했다.
"어둠이여, 물러나라아!"
"흑사갈에게 불을 비쳐! 히어로들이 어두워서 잘 안 보일지 모른다!"
호수 동쪽에 길게 뻗어있던 백염이 호수 중앙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원은 점점 지름이 작아지며 흑사갈을 에워싸는 또다른 포위망이 되었고, 히어로들은 흑전갈의 꼬리를 높이 치켜들며 봉화를 밝혔다.
"오오오!"
"보인다, 보여!!"
횃불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자 거대한 불빛이 되었다. 히어로들의 염원은 호수 중앙에 닿아 흑사갈의 몸을 비추는 등대가 되었다.
"우오오오오오오!!"
"가라아아아아!"
히어로들이 누군가의 이명을 외치기 시작했다. 나이와 국적, 히어로의 등급에 상관없이 그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누군가의 이명을 연호했다.
"""화! 권! 화! 권!"""
단순한 응원으로 마력이 늘어날 리는 없었지만, 남정네들의 시커먼 욕망은 화권의 주먹에 확실히 깃들었다.
"흐아아압!!"
화권이 빙판을 뛰어올라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는 정말 '어쩔 수 없이' 마력을 일으켰고, 자연히 마력이 전신을 돌며 주먹에서 불꽃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
흑사갈은 팔을 길게 뻗으며 화권을 낚아채려했다. 빙판위로 돋아난 여인의 상체가 크게 흔들렸다.
"꺄아아아악!!"
"우오오오오오!!"
여인들은 비명을 질렀고, 남정네들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화권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손바닥을 보자마자 발 아래에 불꽃을 모아 터뜨렸다.
콰앙!
불꽃이 터지며 화권이 허공에서 뛰어올랐다. 흑사갈은 애꿎은 불꽃만 손에 쥐게 되었고, 백염의 열기에 화들짝 놀라 손을 크게 흔들었다.
꺄아아아아아악!!
흑사갈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빙판 아래 갇혀버린 전갈의 몸도 크게 들썩였다.
[원거리 딜러들은 포격 개시! 쏘세요!]
집행관의 명령과 동시에 우사와 풍백이 물폭단을 집어던졌다. 온갖 마탄과 화살이 흑사갈의 복부를 향해 날아갔고, 흑사갈은 손으로 자신의 배를 막았다.
쿠웅!
흑사갈의 몸이 크게 출렁거렸다. 허공에 떠있던 화권은 숨을 고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공중에서 낙하하며 주먹을 내지를 참이었다.
■■■!!
"앗차!"
흑사갈은 아래에서 위로 손을 뻗으며 화권을 붙잡았다. 화권은 자신을 조여오는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흑사갈의 손가락 사이에 끼여버린 슈트 상의를 해제하고 아래로 슥 빠져나왔다.
"으아아악!"
순간적으로 마력의 컨트롤이 꼬인 화권은 허둥지둥 대다가 경사진 언덕에 안착했다. 화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전장은 갑자기 고요해졌다.
"......?"
화권은 자신이 밟고 있는 바닥을 발로 쓸었다. 분명히 눈으로 보기에는 단단한 흑전갈의 외피였지만, 그 색은 자신의 백염마냥 희었다.
"어...? 여기 설마-"
[어딜 올라가있는 거예요?!]
집행관이 일갈하며 화권의 정신을 일깨웠다. 떨리는 목소리에는 약간의 수치심까지 담겨있었다.
[당장 내려오지 못해요?!]
"아, 아니. 제가 지금 어디에 올라와 있-"
[흑사갈 가슴 위에!]
"헉."
화권은 고개를 치켜올렸다. 그는 약 10m 위에서 검은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흑사갈과 눈이 마주쳤다.
■■■■.
흑사갈은 분명 무언가 말했다. 하지만 화권은 괴수가 아닌지라 들을 수 없었다. 그저 지금 밟고 있다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하, 하지만 여기라면 약점을...."
[당장 내려오지 못해요?!]
"아, 아니, 집행관. 절호의 기회인데-"
[내려오라고오오!]
비명을 지르는 집행관의 명령에 귀에 꽂아놓은 이어폰이 망가질 것 같았다. 화권은 우선 문제의 장소에서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어, 어어?!"
갑자기 경사가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화권은 자신의 몸이 아래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건 자신이 아니라 흑사갈이 직접 상체를 숙이며 생긴 경사였다.
"으어어억?!"
화권은 외피에 미끄러졌다. 손을 뻗어 무언가 잡으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으아악!"
화권의 아래에는 날카롭게 번들거리는 독침이 기다리고 있었다. 흑사갈은 강력한 꼬리의 힘을 이용해 빙판을 뚫어 꼬리를 꺼내는데 성공했고, 그 최초의 타깃은 자신의 몸에 기어올라온 화권이었다.
"하압!"
미끄러 떨어지기 직전. 화권은 본능적으로 딱딱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손으로 잡았다.
"휴우."
[야 이 변태새끼야아아아아아!!]
"지, 집행관. 무슨-"
[어딜 만지는 거야!]
"어디라니. ...흡."
화권은 그제서야 자신이 붙잡은 부분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어, 으어, 어어억! 저, 저는 절대 일부러 이러려는게?!"
화권은 당황해 전방으로 마력을 터뜨렸다. 화권을 중심으로 거대한 백염이 폭발했고, 화권은 그 반동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빙판에 처박혀 바닥을 굴렀다.
끼아아아아악?!
흑사갈은 자신의 흉부에서 터진 거대한 폭발에 몸이 옆으로 휘어버렸다.
단단한 외피 덕분에 상처는 전혀 없었지만, 팔꿈치로 빙판을 짚을 정도로 흑사갈의 몸은 무너졌다.
"""와아아아아아!!!"""
"역시 백염 대협!"
"역시 S급!"
히어로들은 흑사갈에게 큰 일격을 먹인 화권을 칭송했다. 점점 더 많은 횃불들이 모여 빙판을 하얗게 밝혔다.
"우리도 질 수 없지!"
"타격계는 전부 모여라! 베는 건 소용이 없어!"
이국의 S급 히어로들이 둔기를 들고 빙판을 뛰었다. 누군가는 화권처럼 높이 뛰어오르고, 누군가는 호선을 그리며 흑사갈의 옆구리를 노렸다.
■■■■■■!!
흑사갈은 몸을 일으켜 다시 팔을 휘저었다. 호기롭게 뛰어오른 히어로를 낚아채 호수 반대편까지 집어던지고, 꼬리를 날카롭게 세워 빛처럼 찔렀다.
카가가강!
옆구리를 노리려던 히어로의 전방에 얼음으로 된 꽃이 만개했다. 독침은 꽃을 절반가까이 꿰뚫었으나 전부 뚫지 못했고, 히어로는 활짝 웃으며 거대한 망치를 크게 휘둘렀다.
"나이스 어시스트, 설화령!"
콰----앙!
냉장고만한 망치가 흑사갈의 옆구리를 때렸다. 빙판이 크게 갈라지며 흑사갈의 몸이 옆으로 갸우뚱 기울었다.
■■■...!!
흑사갈은 주먹을 쥐며 빙판을 내리쳤다. 막대한 진동이 울려 히어로들의 자세가 흔들렸고, 넓게 퍼진 마력의 진동에 몇몇 히어로들이 넘어지고 말았다.
캬아아악!
흑사갈의 아랫배가 세로로 열리며, 그 안에 숨어있던 흑전갈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흉흉한 집게발과 독침을 번뜩이는 흑전갈들은 무늬만 S급이 아닌 진짜배기 S급 괴수들이었다.
"미친! 뱃속에서 강화시킨 거야?!"
"D급 천 마리보다 S급 세마리가 더 낫지! 괜찮아! 잡으면 돼!"
[A급 히어로들은 진을 구축하세요! 3인 1조로 흑전갈들을 대응합니다! S급 여러분은 계속 흑사갈의 공략을 그리고...!]
집행관은 굳이 첨언했다.
[화권같은 짓은 행여나라도 하지 마요...! 국격 떨어지니까!]
집행관은 상당히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히어로들은 과연 그게 나라의 격을 떨어뜨리는 행위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냥 괴수 아닌가...?"
"너무 과민반응인 것 같은데."
"닥치고 싸우기나 하세요!"
템페스트 레이디가 바람을 일으켜 동료들을 앞으로 내몰았다. 떠밀리다시피 앞으로 튀어나간 히어로들은 흑전갈의 집게발과 꼬리를 틀어막았다.
"운사야!"
"먹겠습니다!"
풍백이 스틱을 휘둘러 집게발과 합을 겨루고, 그 뒤에서 운사가 뛰어오르며 창을 찔렀다. 창끝 뭉게뭉게 떠오른 탐식운이 독침을 집어삼키며 꼬리를 씹고 뜯었다.
A급 히어로들은 철저히 조를 짜 움직이며 S급 흑전갈을 상대했다. 그건 비단 한국 뿐만 아니라 다른 방위에서 달려온 히어로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위험합니다!"
"괜찮습니다!"
유황숙이 쌍검을 교차해 꼬리를 튕겨올리고, 그 옆으로 천자가 검을 찔러넣었다. 회색의 환염이 흑전갈을 위협했다. 마침 입을 벌리고 있던 흑전갈은 큰 화상을 입으며 뒤로 물러섰다.
■■■■■!!
흑사갈은 두 주먹으로 빙판을 내리쳐 부수기 시작했다. 빙판 위로 올라오려는 듯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댔고, 흑사갈의 움직임을 봉하고 있던 빙판은 서서히 금이가기 시작했다.
"설화령!!"
"하아, 하아."
석하랑은 땀을 뻘뻘 흘리며 아래로 손을 뻗고 있었다. 아무리 마력이 차고 넘쳐도 소모한 마력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카드득, 카가각!
하지만 흑사갈이 날뛰는 통에 마력을 회복할 틈도 없었다. 석하랑이 마력을 해제하는 순간, 흑사갈은 빙판 위로 뛰쳐나올게 분명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석하랑.]
"어!"
석하랑은 저도 모르게 입으로 소리를 내었다. 주변에서 석하랑을 부축하려던 히어로들이 깜짝 놀라 옆으로 물러섰다.
"크, 크흠!"
[왜!]
[약점 가르쳐줄까?]
[어!]
[...꽤나 빠르게 대답하는군. 좋다.]
석하랑은 뜸을 들이는 피닉스를 찾아가 멱살이라도 쥐고 싶었다.
[흑사갈의 세컨드 페이즈는 힘의 응집이다. 겉으로는 하나로 보여도 결국에는 수천의 흑전갈들을 마력으로 뭉쳐 만들어낸 '군체'인데, 이걸 공략하기 위해서는-]
[본론만 빨리!]
[......안에 직접 들어가서 심장의 '모체'를 노려야 해.]
[고마워!]
석하랑은 다시 머리핀을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박고 앞을 향해 달렸다. 그곳에는 히어로들의 호위를 받으며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 집행관이 있었다.
"집행관! 심장을 노려야 해요! 그 안에 모체가 있어요!"
"예? 심장이요?"
"예! 저 안에 들어가서 모체를 노려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 순간. 바람이 일었다. 전장의 모든 히어로들은 갑작스레 동남쪽에서 불어온 질풍에 자세가 무너졌고, 흑사갈의 머리칼은 깃발마냥 반대로 휘날렸다.
"바람...?"
집행관의 베레모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늘높이 용솟음 치듯 올라간 베레모는 흑사갈의 어깨에 착지한 누군가의 손에 잡혔다.
"도모, 질풍객입니다."
흑사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미녀가 베레모를 쓰며 고개를 숙였다. 히어로들은 갑작스레 난입한 그의 등장에 당황하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치 않았다.
"질풍객! 위험-"
"이건 이미 죽어있다."
질풍객은 반이 부러진 칼을 어깨에 걸치며 목덜미를 발로 툭 건드렸다.
키에에에....
흑사갈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고개가 앞으로 숙여지며, 맥없이 툭 목에서 떨어져 가슴을 타고 굴러내려갔다.
"헙."
모두가 굳어버렸다. 이제는 다른 의미로 청소년 관람불가가 되어버린 흑사갈의 모습에도 질풍객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왠지 잘라버리고 싶어서 깔끔하게 잘랐는데 왜? 문제있어?"
여러모로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히어로들은 입을 꾹 닫았다.
질풍객의 이전 이명은 살인귀.
불평을 내뱉었다가는 분명 흑사갈처럼 목이 달아날 것이 뻔했다.
"아니 진짜 왜 그래? 내가 사람 죽였어?! 괴수 죽였잖아?!"
질풍객은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의 편을 들어주는 이는 어쩐지 그와 체형이 비슷한 여성 히어로들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