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1부 9장 27
"얼마든지 사냥해도 좋습니다. 그저 저는 영웅협객들의 의협심을 믿을 뿐입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청해로 오십시오! 1만의 동지들이 그대들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천자가 보증했다. 사냥한 흑전갈은 철저히 사냥한 자의 것이 되리라고.
"흑전갈의 사체에 불을 붙이세요! 어둠이 밝혀짐과 동시에 냄새를 맡은 흑전갈들이 몰려올 겁니다!"
집행관이 보고했다. 곳곳에서 피어오른 봉화를 보고 흑전갈들이 몰려올 것이라고.
"제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다치는 이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설화령이 선언했다. 자신이 이 전장을 굽어살핌에, 히어로들이 중상을 입지 않도록 하겠다고.
흑전갈들은 청해 한 가운데로 모두 들어오게 되었고, 초기부터 허리를 요격하던 히어로들은 밀려나오는 흑전갈들을 물속으로 쫓아냄으로써 입구를 가두는데 성공했다.
키기기긱!
청해라는 호수에 갇힌 흑전갈들이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이끌던 S급 괴수, 흑사갈은 진퇴양난에 빠진 그제서야 자신이 사지에 발을 디뎠음을 깨달았다.
포위섬멸진.
더이상 말로 할 필요는 없었다. 수천마리의 흑전갈은 호수에 빠져버렸고, 그 사방을 에워싸는 히어로들의 수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당장 천자의 의기에 호응해 신장까지 달려온 중국 이능력자의 수만 무려 1만에 이르렀다.
협회 중간 집계 수 약 2만. 300km에 이르는 호수의 강변에 긴 포위망이 형성되었고, 나머지는 이제 흑전갈들을 사냥하는 일들만 남았다.
키키킥.
흑사갈은 흑전갈들을 가운데로 모았다. 흑사갈을 중심으로 거대한 방진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새끼부터 성체까지 흑사갈을 핵으로 삼아 뭉치기 시작했다.
"뭐야, 저거?"
"아무래도 일점돌파하려는 것 같은데?"
"젠장, 호수 한 가운데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원거리 사격이 가능한 히어로들은 온 마력을 다해 흑사갈에게 마탄을 쏘았다. 하지만 호수 중심부에 이르기까지는 거리가 한참 모자랐고, 아직 가운데로 가지 못한 애꿎은 새끼 흑전갈들만 유탄에 맞아 터져버렸다.
"배 없어요?! 나룻배라도 타고 가야지!"
"젠장, 수면을 달려 그냥!"
"S급이나 가능하지 미친 소리 하지 마요!!"
각 국에서 파견된 S급들이 호수 중심부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는 화권 이승형이 있었고, 그 외에도 수많은 S급들이 경쟁하듯 호수 중앙으로 뛰었다.
"불안한데."
빙벽 위에서 전장을 내려다보던 석하랑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봐도 뭔가 일어날 것 같지만 뭐가 일어날지 몰랐다.
[설화령 님!!]
집행관이 석하랑을 찾았다. 베레모 아래 흘러나온 검은 머리칼은 땀에 푹 절어있었다.
[막아주세요! 위험합니다!]
"뭘 막으라는 거예요?"
[흑전갈들 한테 달려드는 S급 분들이요!!]
"......??"
석하랑은 집행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밀집된 흑전갈들은 샌드백이나 다름없었고, 겉에서 하나 둘 잡아나가면 그만일 일이었다.
"혹시 분배 때문에 걱정하시는 거예요? 걱정 마세요. 일단 국가별로 철저히 나눠지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저기 흑전갈들이 불안해서 그래요! 꼭 안에서 뭔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잠시만요!!"
석하랑은 집행관의 스크린을 잠시 내렸다.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둔 머리핀에서 뜨거운 열기가 튀어올라, 엉덩이에 불이 나는 것만 같았다.
"이게 적당…. 어, 혹시?"
지금 경고하려고 연락한 건가? 집행관 백희아가 불안 증세를 보이는 것과 맞물려, 석하랑 자신도 불안해져서 머리핀을 들어올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는 무슨. 이게 전화냐?]
분령을 통해 전해진 피닉스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피닉스는 고저없이 빠르게 본론을 전달했다.
[세컨드 페이즈 온다. 준비해.]
석하랑은 직감했다. 피닉스는 흑전갈 무리가 어떻게 변화할 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연락을 일방적으로 무시한 건 자신이었다.
[뭐? 또 뭐로 변하는 데?! 또 안에서 기생충 튀어나오는 건 아니지?!]
모비딕을 잡았던 날의 기억은 최악이었다. 내장에서 튀어나오는 아니사키스 무리는 진심으로 혐오스러웠고, 보이는 족족 얼리고 깨부쉈다. 석하랑은 그걸 중국까지 와서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변하긴 변하는데 반대다.]
[알겠어. 일단 S급들 막아야겠지? 쟤들 막 변신에 휩쓸려서 다치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걱정이 많아. 풋.]
[아 빨리 말해! 위험해 안 위험해?!]
석하랑은 발을 동동 구르며 대답을 재촉했다. S급 히어로들은 발 아래에 마력을 방사해 호버링을 하며 수면을 떠다녔고, 흑전갈들이 몸으로 만든 구체의 위에 폭격을 시도했다.
[전혀 위험하지 않아. 아, 어린 친구들한테는 위험하겠어.]
[무슨 소리야?!]
[보면 안다. 이제 곧 변신할테니.]
캬아아아아악!!
흑전갈들의 안에서 짐승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괴수같기도 하고 여인같기도 한 날카로운 비명에 호수 전체가 흔들렸다. 흑전갈 무리 근처에 있던 S급 히어로들이 마력의 파동에 튕겨나갔고, 파공성에 강변을 밝히던 횃불들이 하나 둘 꺼지기 시작했다.
[변신…?]
[그래. 변신. 아, 정정하마. 본체로 돌아간다고 하는게 적절하겠어.]
투둑. 투두둑.
껍질처럼 구체를 감싸던 흑전갈들이 수면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꽃이 개화하듯 흑전갈들이 사방으로 퍼졌고, 그 한 가운데에 검은 머리칼을 흩날리는 여인이 나타났다.
"와."
석하랑은 여인의 미모에 감탄했다. 그리고 그 크기에 넋을 잃었다.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여인의 신장은 자신이 발을 디디고 서있는 빙벽의 높이와 거의 비슷했다.
"어지간한 거대 괴수급인데…?"
['흑사갈'이다. S급 중에서도 최상급을 자랑하는 괴수지. 참고로 저 흑전갈들 모두 흑사갈이 낳은 새끼들이다.]
"엑."
석하랑은 소름이 돋았다.
[그러면 저거 자식들 죽여서 엄청 화난 거 아냐?]
[당연하지. 지금까지 얼추 사백은 죽었나? 생각보다 빨리 변신했어.]
"음…."
자식을 잃은 감정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가족이 살해당한 감정은 절실히 느끼고 있다. 물론 지금에 이르러서야 좋게좋게 해결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석하랑은 당시 아버지같던 스승(실은 아버지)을 죽인 범인에 대해 복수심에 불타있었다.
[걱정마라. 네가 나서지 않아도 돼. 덩치만 크지 지파룡이나 물지기보다 약한 녀석이다. 밑에 달고다니는 새끼들만 주의해라.]
키아아아악!!
흑사갈이 가느다란 팔을 휘저으며 난동을 부렸다. S급 이능력자들이 멀찍이 떨어지며 공격을 피했고, 화권은 오히려 틈을 노려 역공을 펼쳤다.
화르-사르륵!
주먹에 흰 불꽃을 실어 어퍼컷을 날리려던 화권이 갑자기 불꽃을 꺼뜨렸다. 흑사갈을 주시하던 이들도 자신이 본 광경이 착각인가 의심이 들었다.
"쓰벌?"
당연히 석하랑도 불빛이 비친 순간을 목도했고, 자신도 모르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TV 중계를 보던 피닉스도 그걸 봤는지 쓰게 웃었다.
[지금부터는 생중계 끊기겠어. 조심해라. 잡아먹히면 위액에 녹아버릴테니.]
"와. 와. 미친. 와."
석하랑은 피닉스의 조언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럽게 크네…!"
키도 컸다. 덩치도 컸다. 동시에 그곳도 컸다. 문제가 있다면 그 크기가 압도적이라는 점. 석하랑은 자신의 주변에서 볼 수 있던 그 어떤 여자와 비교해도 압승을 거두는 흑사갈의 크기에 넋이 나가버렸다.
"허허, 허."
동시에 모오오오옵시 불편해졌다. 자신이 서있는 빙벽은 어째선지 수직에 가깝게 깎아지르고 있건만, 흑사갈은 괴수 주제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건방지게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
"집행관."
[예! 계속 말없이 헛웃음만 지으시다가 갑자기 뭐예요!]
지금까지 무시당하고 있던 집행관이 눈물을 글썽이며 빽 소리를 질렀다. 석하랑은 순간적으로 상당히 미안했지만, 당장은 저 불편한 골짜기를 눈앞에서 지워버리는게 급선무였다.
"조금 미끄럽기는 해도 발 디딜 수 있는 공간이면 전투에 지장은 없죠?"
[그거야 당연하죠! 그래서 왜 지금까지 제 말에 대답을 안 하신 거예요?!]
"그럼 달릴 준비하세요!"
석하랑은 빙벽에서 뛰어내렸다. 날개를 펼쳤다 접어 조정한 예상 착지 지점은 땅을 넘어 수면 위로 떨어졌다.
"하아아아아!!"
석하랑은 기합과 함께 모든 마력을 손에 집중시켰다. 넓게 펼친 손바닥이 수면을 향해 곧게 뻗어지고, 석하랑의 손이 수면과 닿음과 동시에-
쩌적!
호수 전체가 얼어붙었다. 석하랑을 중심으로 두꺼운 빙판이 넓게 퍼지기 시작했고, 빙판은 곧 흑사갈을 향해 나아가는 대지가 되었다.
"전 히어로들에게 알립니다!"
석하랑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달리세요!!"
* * *
전세계 방송사고가 터졌다. 가을은 입을 떡 벌리며 넋을 잃었고, 덕배는 눈에 불을 켜고 방금 전의 영상을 찾아 클립을 따고 있었다.
"저질렀군."
세컨드 페이즈, 그러니까 흑사갈의 2차전은 본모습은 거대 전갈 괴수로 변하게 되는 보스전이었다. 둥지의 모습은 당연히 그의 원래 육체를 본따 만든 것이었고, 흑전갈은 이제 족히 60m가 넘는 거대 괴수가 되었다.
"사람으로 치면 130은 족히 될 거다."
"와."
가을이 시선을 내렸다. 나도 시선을 돌렸다. 상당히 큰 편에 속하는 가을도 세 자리수에 다다를 정도지, 세자리 수를 훌쩍 넘기고도 20이나 남을 정도는 아니었다. 가을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쟤는 왜 아무런 옷도 안 입는 건데?!"
"괴수가 그런 걸 알리가 있냐? 오우야, 미쳤다 진짜."
덕배는 낄낄 웃으며 녹화된 영상을 다시 재생했다. 이승형이 승룡권을 하듯 주먹에 불을 지르고 어퍼컷을 날렸고, 그 불빛 때문에 배꼽부터 가슴까지 어둠속에서 훤히 드러나게 되었다.
"얘 봐봐. 꼭지 지나니까 당황해서 허둥지둥하는 거."
이승형은 가슴을 지나치자마자 바로 불을 꺼뜨렸다. 앞머리에 가려진 흑사갈의 얼굴은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아우르는 미인상이었다. 가을이 덕배에게 과자를 집어던졌다.
"변태야! 자꾸 뭘 보여주려하는 거야?!"
"뭐 어때. 괴수 아니냐. 사람도 아닌데 뭘."
"미친 놈 진짜."
덕배는 너스레를 떨며 가을과 나를 놀려대고 있지만 나는 확신했다. 저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가을을 놀려먹기 위해 영상을 재생하는 것이라고.
[에.... 잠시 현지의 상황이 양호하지 못한 관계로.... 속보가 들어오는 대로 바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나운서와 패널들은 하나같이 당황해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급히 광고를 송출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흑전갈들의 첫번째 웨이브를 막아내는 히어로들의 활약을 무한 반복하는 곳도 있었다.
"전세계 방송사들이 경고 한 번 먹겠군."
"...그렇겠지? 왜 저렇게 진짜같을까?"
가을은 영상 속 흑사갈의 상체를 가리키며 몸을 떨었다. 나는 검지에 불꽃을 피워 흑사갈의 모습을 불꽃으로 그렸다.
"상체 30m는 인간이고, 나머지 아래는 흑전갈 그대로다. 단일 개체로 성장했으면 5년 뒤에 S+를 족히 노려볼만했겠지만, 아쉽게도 흑사갈은 무수히 많은 새끼를 낳기로 정했지."
"그게 인간의 모습이 된 거랑 무슨 관계가 있어?"
"...몰라. 괴수 취향이겠지."
정확히는 제작사 취향이다. 세컨드 페이즈로 넘어가면 모두를 흥분의 도가니로 빠뜨리는 엄청난 도발 능력을 가진 흑사갈은 분명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 원작이 19금 미연시라서 그런지, 일러스트에도 가리개는 커녕 머리카락을 살짝 걸치게 만들어놓았다.
"이승형은 큰일 났군. 전세계에 19금 누드 영상을 뿌리게 된 셈이니."
"칭송하고 난리났는데?"
"뭣?"
덕배는 클립의 아래에 걸린 댓글들을 읽어내렸다.
"이승형님 덕분에 좋은 거 봤습니다. 역시 S급, 백염대협이라면서 아주 난리다 난리. 왜 더 불 안 밝히냐고 오히려 따지는 놈들은 있어도, 이승형이 잘못했다는 말은 하나도 없다고. 큭큭."
나는 덕배가 넘긴 스크린을 옆으로 치우고, 가을이 보고 있던 커뮤니티의 반응을 살폈다.
"울 승형 오빠, 괴수 나체도 가려주는 마음씨 맴찢...? 뭔 소리야 이건?"
"몰라. 다들 괴수 몸 품평이나 하지 이승형 욕은 안 해. 오히려 괴수 욕하는데? 괴수 주제에 여자 몸으로 남자나 유혹하려고 한다고 말이야."
"허어."
역시 사람은 얼굴이 잘생기면 다란 말인가. 전세계에 민폐를 끼친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형은 남자들에게는 칭송을, 여자들에게는 위로와 동정을 사고 있었다.
"그놈 참...."
"왜? 썸남이 욕먹을까봐 무서워?"
"너한테도 썸남이었잖나. 나 참. 됐다."
가을은 자꾸 나와 이승형을 엮어서 장난을 치려했다. 덕배는 워치와 TV를 연결해 전장을 생방으로 스트리밍하는 히어로의 U튜브 채널로 바꿨다.
[으아아! 여러분! 보셨어요?! 그냥 봐도 O컵, 아니 P컵 넘을 것 같습니다!]
"저런 애들 솎아낸다는 거지? 버젓이 생방으로 저런 거 중계하는 애들."
히어로들은 하나같이 흑사갈에게 불빛을 비추며 모습을 밝히려 했다. 어둠속의 적에게 빛을 비추는 건 괴수 토벌에 있어 전술적으로 상당히 중요했지만, 흑전갈의 꼬리에 백염을 붙여 어둠을 밝히는 남자들의 행동에는 뭔가 다른 욕망이 담겨있었다.
"저정도는 애교로 봐주지. 저런 놈들 말고, 남들 사냥감 뒷통수 치는 놈들을 골라야하는데...."
"사실은 너도 보고싶은 거 아냐? 흑사갈 몸."
"......전혀."
"대답이 늦었는데? 솔직히 내가 봐도 예쁘기만 한데."
"내가 저 몸뚱아리를 봐서 뭐하냐."
거울보면 되는데. 나는 가을을 향해 혀를 차고 고개를 TV로 돌렸다.
혼란도 잠시. 석하랑이 호수 전체에 빙판을 까는 것을 시작으로 흑사갈 레이드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