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화 〉1부 9장 24
<6월 15일 새벽 0시 7분, 청해호 강변.>
레이더에는 붉은 점만이 가득했다. 호수가 아무리 넓다고는 해도 워낙에 많은 이능력자들이 몰려있었고, 거기에 수천의 흑전갈까지 모여드니 괴수 레이더는 사실상 기능이 먹통이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젠장! 이래서는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시야가 너무 어두웠다. 호수 주변을 밝혔어야 할 가로등과 같은 인프라들은 이미 괴수들에 의해 파괴되어버렸고, 히어로들의 눈이 되어줄만한 빛은 대부분 전방에 배치되어있었다. 결국 그들은 마력의 희미한 빛에 의지해야했다.
"미친, 저 놈들은 왜 호수를 가로지르고 지랄이야?!"
"누가 물이 약점이래! 수영 잘만 하잖아!!"
흑전갈들은 좌우로 갈라지지 않고 직진으로 달렸다. 수면 아래로 내린 전갈다리는 기이할 정도로 바삐 노를 젓듯 움직였고, 그 속도는 히어로들은 자신이 전갈을 보고 있는 건지 제트스키를 보고 있는 건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누가 불빛 없어?!"
"아무것도 안 보여!"
흑전갈들이 호수 가운데를 지나던 시점, 히어로 한 명이 망원경까지 동원해 흑전갈들의 이동을 파악하고자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황급히 임시 가로등과 조명을 호숫가로 공수하고자 했지만, 빛이 그리 멀리 비치지는 않았다.
"미치겠네, 젠장!"
"중앙에서 통지! 호수 맞은 편에서 흑전갈들의 상륙을 요격하려고 하니, 히어로들은 각자 위치에서 대응!"
"뭐?! 그러면 우리는 개털이잖아!"
최전방에 있던 히어로들이 비명을 질렀다. 어느덧 흑전갈 무리는 절반 이상이 물위를 달리고 있었다. 이대로 자리를 지킨다면 닭 쫓던 개가 지붕만 쳐다보는 신세가 될 게 자명했다.
"...! 전방에 있는 히어로들에게 추가 통지! 상륙 전에 좌우에서 요격하라!"
"그래, 그래야지!"
"아쉽지만 저거라도!"
히어로들이 아직 강으로 들어가기 전의 흑전갈들을 덮쳤다. 양쪽에서 공격하는 히어로들의 공격에 측면의 흑전갈들이 옆으로 퍼지며 대응하기 시작했다.
캬아악!
집게발을 벌리고,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이 될만한 독꼬리를 휘두르는 흑전갈들은 새끼부터 성체까지 크기가 다양했다. 하지만 히어로들의 눈에는 흑전갈의 크기는 다른 것으로 치환되어 보였다.
코어.
흑전갈의 몸체 크기와 코어 등급은 비례했고, 자연히 히어로들이 우선적으로 노리는 것은 A급이나 S급의 크기를 가진 놈들이었다.
"흐흐흐, 잡는 만큼 챙겨갈 수 있다는 거지!"
"차원문이 열 개는 넘개 터져야 나올만한 괴수들이라고!"
"Core! Show Me the Core!!"
과연 이들을 히어로라고 할까, 아니면 코어에 굶주린 망자라고 해야할까. 어느쪽이든 그들은 지금 인류의 위협인 괴수를 향해 무기를 겨누며 뛰었다.
코어에 눈이 먼 히어로들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의 불빛이 비치지 않는 흑전갈들이 어둠속에 스며들기 시작했다는 걸.
* * *
최전방에서 흑전갈 무리의 허리를 요격한 그 시각.
졸지에 흑전갈 무리를 눈앞에서 맞딱뜨리게 된 한국의 히어로들은 혀를 내두르며 무기를 빼들었다.
"이거 하늘이 굽어살피시는 건가?"
"야! 방심하지마! 최전방에서 돌격하는 놈들이라고! 등급도 높을 거야!"
최악처럼 여겨졌던 자리가 졸지에 최고의 위치가 되고 말았다. 배정에 대해 상당히 불만이 많았던 이들은 집행관의 침착함에 감사를 표했다. 집행관이 순순히 협회의 배정을 따르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마 이 자리에서 밀려나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진짜 운이 좋았네요."
"예. 꺼림칙하게도. 정말."
집행관은 몸을 으스스떨었다. 자신들의 위치를 알려주던 모택평의 의미심장한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후후'하는 웃음소리가 아직까지도 귀에 울렸고, 집행관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전선에 집중했다.
"잘 보이십니까?"
전장에는 짙은 안개가 서려있었다. 안그래도 심야 시간이라 빛 한 점 없는데 안개까지 끼지 앞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템페스트 레이디가 바람을 일으켜 안개를 걷어내도 금방 안개가 끼어버렸다.
"이이상은 마력 낭비일 것 같아요. 집행관. 아쉽지만 각자 시야에 의존하는 방법이 최고 일 것 같습니다."
"예.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전원, 마력으로 시야를 강화하세요. 원거리 공격수들이 경계를 부탁드립니다. 레이더로는 언제 도착할 지 판단이 어렵습니다."
명령을 내린 집행관은 히어로들을 넓게 퍼뜨리고 숨을 골랐다. 흑전갈들이 몰려오는 진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해졌다.
"집행관. 협회에서 연락을 보냈습니다. 히어로들이 배정 지역의 공유를 원하고 있습니다."
"...다들 저희 면박주는데 일조한 분들이네요."
집행관은 철면피같은 그들의 행동에 이를 갈았다. 온갖 핑계를 대어 후방에 밀어버리다시피 했던 이들이 지금은 자리를 공유하자고 협회를 통해 제안해 온 것이다.
"좋습니다. 허락하죠."
"집행관?"
"넓게 그물을 펼쳐서 구멍이 뚫리는 것 보다, 강하게 벽을 만드는 게 더 좋을 것 같군요. 운사, 협회에 전해주세요. 저희는 현 지점을 사수할테니 나머지 구역은 알아서 하시라고."
집행관은 기존에 배정된 구역에 퍼뜨렸던 히어로들의 배치를 더욱 협소하게 조정했다. 그들에게 배정된 500m 가량의 구역이 200m 폭으로 크게 줄었지만, 집행관은 개의치 않았다.
"과욕은 금물입니다. 그 누구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가야 합니다. 전열에는 근접, 후열에는 원거리. 진을 두텁게 쌓아 상륙하는 흑전갈들을 상대하겠습니다."
"그러면 기존 구역에는?"
"욕심많은 자들이 알아서 채우겠죠. 나중에 딴 소리 못할 겁니다. 그러니 지금은 흑전갈들에게 집중을 하죠."
구구구.
서서히 땅이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강의 물결이 넘실거리며 첨벙거리기 시작했다. 레이더로는 그 수가 너무 많아서 도저히 파악할 수 없던 흑전갈의 선두가 강변에 상륙하기 직전이었다.
"육시럴, 하나도 안 보이잖나!"
풍백이 눈을 찡그렸지만 흑전갈들의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A급인 그조차도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는 만큼, 다른 히어로들의 형편도 다를 게 없었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차를 300m 전부터 보고 대응하는 것은 어떻게든 가능했지만, 불과 30m 간격을 두고 대응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에게는 빛이 필요했다.
탓-
집행관의 근처에 있던 누군가가 하늘로 뛰어올랐다. 전열의 히어로들을 훌쩍 뛰어넘은 그는 아래를 향해 주먹을 크게 내리쳤다.
콰-앙!
폭음과 함께 하얀 불꽃이 터져나왔다. 화권 특유의 백염(白炎)이 빛을 뿜어내며 주변을 밝혔다.
키에에엑?!
흑전갈들이 괴성을 지르며 물러섰다. 히어로들은 아무 전조도 없이 어느새 물밖으로 튀어나온 흑전갈들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뭐, 뭐야?!"
"언제 여기까지?!"
"정신차려요!"
집행관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며 히어로들의 정신을 다잡으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물밖으로 나온 흑전갈 수천의 무리 중 선두를 달리던 놈들 답게, 하나같이 크기가 거대하고 외피가 딱딱해보였다.
키에엑!!
화권에게 처박힌 괴수가 꼬리를 흔들었다. 죽기 전에 발광을 하듯 사방에 독액을 뿌리는 통에 히어로들이 물러섰다. 치명적인 극독이 안개 사이로 흩어져 퍼졌다. 그 중 한 방울이 포물선을 그리며 집행관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이런-"
집행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이미 독액은 제 얼굴에 닿을 것만 같았다. 피하기에는 늦었다고 판단했다.
그 순간, 하얀 불꽃이 세상을 덮었다.
"아."
희미한 청색을 머금은 불꽃이 허공에 뿌려진 독액을 모두 태워버렸다. 하늘높이 치솟은 불기둥은 등대처럼 어둠을 걷어냈다. 호수를 지나 강변으로 올라오려던 흑전갈들은 튀어오른 불똥에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후우, 후우."
막대한 양의 불꽃을 방출한 화권은 독액을 뿌린 흑전갈의 대가리를 발로 찍었다. 흑전갈의 몸은 안에서부터 타오르기 시작했다.
"모두 괜찮으십니까?!"
화권의 눈동자 속, 하얀 불꽃이 서서히 푸르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의 눈동자 색이 변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지만, 화권이 어떤 맹위를 떨쳤는지는 훤히 알 수 있었다.
키기기긱.
흑전갈들이 조심스레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선두에 달려오던 거대한 흑전갈이 일격에 사망하자 공포를 느낀 기색이었다. 화권은 불꽃에 타고 있는 전갈의 몸에서 내려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후우."
히어로들의 최전방. 화권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수십 쌍의 눈빛이 훤히 보였다. 어둠이 깔린 시각, 짙은 안개마저 시야를 방해하는 호수에서 괴수들을 요격한다는 발상은 최악의 선택이 되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곳의 방어선이 무너지게 되면 흑전갈들은 수십만이 사는 도시를 밀고들어와 파괴행위를 벌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막아야했다.
"......."
이승형은 그 누구도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창염개진...!"
심장이 격렬히 두근대기 시작했다. 부끄러워서? 아니다. 그의 터질듯한 심장은 끓어넘치는 마력을 펌핑하듯 전신에 퍼뜨렸고, 화권의 마력은 그야말로 무한에 가깝게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집행관!"
화권의 목소리가 대기를 흔들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것 처럼 자세를 잡고 있었고, 그의 일갈에 정신을 차린 집행관이 입술을 깨물며 마력을 가다듬었다.
"전원!"
집행관이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요격 개시!"
후열의 히어로들이 원거리에서 사격을 시작했다. 전열의 히어로들은 흑전갈들에게 달리며 무기를 휘둘렀다. 그 선두에는 화권이 있었다.
기기기긱!
흑전갈들 또한 화답하듯 땅을 달렸다. 원거리에서 날아오는 마탄을 몸으로 맞아가며, 독액을 뚝뚝 흘리는 날카로운 꼬리침을 찔렀다. 그들은 분명히 분노하고 있었다.
"화를 내야할 건 우리다!"
"독 조심!"
우사가 수탄을 쏘아 독액을 튕겨냈다. 운사의 탐식운이 흑전갈의 꼬리를 베어물어 독이 흩뿌려지는 걸 원천 봉쇄했다. 안개속에 가려진 구름은 단단한 외피와 독액까지 뜯어먹으며 흑전갈의 꼬리를 집어삼켰다.
키에에엑!
화권은 다시금 집게발을 휘두르는 흑전갈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제 몸집보다 더 큰 흑전갈의 집게발을 상대로 주먹을 휘둘렀고, 굉음과 함께 집게발은 터져버렸다.
"흐아아!!"
화권은 기합을 내지르며 흑전갈의 머리를 밟았다. 턱이 바닥에 찍혀 옴싹달싹 할 수 없는 흑전갈은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꼬리를 잽싸게 움직였다.
휘-익!
화권은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흑전갈이 전력을 쏟은 회심의 일격은 무위로 돌아갔고, 넘쳐나는 마력을 손에 집중시킨 화권은 주먹을 흑전갈의 껍질 사이로 뻗었다.
화르륵.
흰 불꽃이 흑전갈의 안에서 타올랐다. 흑전갈은 몸서리를 치며 화권에게 독액을 뿌려댔으나, 독은 그에게 닿기도 전에 열기에 증발했다.
"후우."
화권은 크게 숨을 고르며 마력을 갈무리했다. 그가 흑전갈 하나를 정리하는 동안 다른 동료 히어로들도 저마다 감당할 수 있는 흑전갈들을 요격했다.
"이걸로 끝...일 리는 없겠죠?"
"당연하지. 물결이 한 번만 치고 말던가? 끌끌."
"......그럼 이게 첫번째 웨이브란 말이네요."
히어로들은 사냥한 흑전갈들을 늘어뜰였다. 뒷열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코어를 사체에서 빼내어 챙겼다. 화권 또한 자신이 잡은 S급 한 마리와 A급 한 마리의 코어를 뽑아 집행관에게 넘겼다.
"집행관! 코어 여기있…. 집행관?"
"......."
집행관은 굳어있었다.
"불."
"예?"
"흑전갈의 사체에 불이...붙네요?"
집행관은 화권이 쓰러뜨린 두 마리의 흑전갈을 가리켰다. 화권은 머리를 긁적이며 집행관의 오해를 정정했다.
"제 불꽃은 꺼지지 않습니다."
"예?"
"영원히 꺼지지 않는 푸른 불꽃. 그게 제 이능력의 원천이죠."
화권은 가슴을 두드리며 화사하게 웃었다. 집행관은 전혀 개의치 않고 불꽃이 비추는 빛을 가리켰다.
"그러면 전장 전체를 밝힐 수도 있겠군요…?"
"아, 아마도요?"
"옵니다! 두 번째 웨이브!"
흑전갈 한 무리가 긴 띠를 그리며 강변으로 올라왔다. 이전에 야습을 당한 것과는 달리 멀리서부터 실루엣이 보여 금방 기습을 눈치챌 수 있었다.
"......."
집행관이 흑전갈과 이승형을 번갈아 쳐가보며 고뇌에 빠졌다.
타닥.
아주 희미한 청색을 머금은 하얀 불꽃은 화권의 말마따나 꺼지지 않고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