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89화 (189/1,497)

〈 189화 〉1부 9장 23

<오후 11시 38분, 중국 칭하이성 칭하이 호(靑海湖) 근처.>

천자가 최초 요격지로 선포한 청해에 각국의 히어로들이 모여들었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이들은 역시 중국의 히어로들이었고, 그들 외에도 인도, 러시아 등 중국 인근 국가들에서 파견나온 히어로들도 있었다.

"난감해졌네요."

멀리서 착륙해 걸어온 100여명의 한국 이능력자들은 이미 선점당한 자리에 난색을 표했다. 위치적으로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이 접근하기가 더 편했고, 백나로 호는 중국을 절반 이상 가로질러와야했다.

"그래도 일본 보다는 빨리 왔으니 됐잖나. 껄껄."

"영감님, 의미없는 소리 마쇼. 지금 우리도 개털되게 생겼구만."

"어떻게 부탁이라도 해볼까요? 협회에 중재를 요청하면 될 것 같기도 한데."

히어로들이 좋은 방어선 위치를 찾는 사이, 히어로들 사이에서 큰 소란이 일었다. 금발의 서양인들과 흑발의 동양인들이 번역기의 도움으로 서로 논쟁을 주고받고 있었다.

"이 곳은 우리가 먼저 자리잡았습니다! 협회에 인정받은 곳이라고요!"

"하지만 전력이 약하잖습니까?! B급 10명이서 지키고 있다가 S급 흑전갈이 하나라도 오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그냥 순순히 전선을 공유하세요!"

"놉!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코어를 벌어가야합니다!"

"아, 정말! 말이 안 통하네! 여기 뚫리면 바로 인구 밀집 지역으로 흑전갈들이 돌파한다니까!"

언쟁은 한 곳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협회의 직원들이 열심히 중재를 나서도 수 천명에 이르는 히어로들이 벌이는 영역 싸움을 모두 중재할 수는 없었다.

"집행관. 저희 이제 어디로 가면 좋겠습니까?"

화권 이승형이 대표로 물었다. 백희아는 함장인 동시에 부대의 지휘를 이끄는 지휘관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으며, 이번 파견 부대의 실질적인 책임자기도 했다.

"......."

그런 백희아는 비행정에서 내리기 전부터 지금까지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빠져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뭔가 속으로 중얼거리는걸 쉽사리 건드리기 무서워 아무도 나서지 않았지만, 이제는 누가 총대를 매고 백희아를 깨워야했다.

"집행관 님?"

"화권. 당신은 혹시 '불사조'와 싸워본 적이 있습니까?"

"...아뇨. 아쉽게도 단 한 번도. 하랑이…설화령이 싸운 적 있지 않습니까. S급 시절이기는 해도 붙어본 경험이 있죠."

"하지만 설화령은 지금…."

백희아는 입맛을 다시며 뒤로 고개를 돌렸다.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얼음 나비는 청해를 둘러싸는 넓은 산맥을 중심으로 거대한 얼음의 방벽을 쌓고 있었다.

"저래서야 이야기를 나눠볼 수도 없겠군요. 그래서 불사조에 대한 이야기는 왜 하신 거죠?"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겁니다."

백희아는 당장 눈앞의 흑전갈들을 두고 히어로들의 동요를 일으킬 수는 없었다. 자신의 염려가 그저 억측이기를 바라며, 백희아는 열심히 돌아다니는 협회의 직원을 불러세웠다.

"대한민국 히어로 협회 소속, <집행관> 백희아 입니다. S급 화권을 위시한 히어로 107인이 원군으로 왔습니다."

"아, 한국...이요."

직원은 고마우면서도 난감한 얼굴로 주변을 훑었다. 언성을 높이며 싸우려던 히어로들이 한국 히어로들의 등장에 궁시렁거리기 시작했다.

-비스트 테이머가 S급 코어 중자로 두 개 쓸어갔는데, 거기서 더 잡겠다고? 너무한 거 아니야?

-서울에 차원문 터진 이후로 코어 수출량이 거의 세 배 가까이 늘어난 걸로 알고있는데 진짜 심하다. 어떻게 바로 옆나라까지 와서 코어를 캐갈 생각을 하지?

-그나마 설화령이 양보해서 망정이지. 으휴.

"엄청 욕먹고 있는 것 같은데요?"

<템페스트 레이디> 양선우는 귓가에 들려오는 사람들의 불평불만에 표정이 굳었다. 그건 다른 히어로들도 별반 다를게 없었다.

"괜찮습니다. 저희는 코어를 벌러 온 게 아니잖아요!"

"흑전갈들과의 전투,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8 화권과 운사는 몸을 풀며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속물적인 생각은 일절 없었고, 그저 흑전갈들을 물리쳐 인류의 위협을 제거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열심히 잡으면 그만큼 코어 쓸어간다고 욕을 먹겠지. 그렇다고 잡은 흑전갈들 코어를 하나도 챙기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고."

"멀리 외국까지 출장왔으면 출장비는 받아야하지 않겠는가들, 끌끌. 그러면 당연히 또 활약하기 힘든 자리에 배치될테고."

우사와 풍백, 연장자들은 현실적인 부분을 지적하며 자신들의 발 아래를 가리켰다. 집행관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직원에게 다시 물었다.

"한국에게 할당된 지역은 이곳이 확실합니까?"

"예. 설화령 님을 도와 최종 방어선에서 대기해달라고, 협회 중앙에서 요청한 사안입니다."

각국의 히어로들은 호수를 중심으로 하여 반달을 그리듯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한국에게 배정된 곳은 그 날개의 한 가운데, 전방이 호수로 가로막혀진 곳이었다.

"말이 요청이지 통보 아닌감? 끌끌. 우리는 뭐 부스러기나 챙겨야겠구만 그래."

"부스러기나 챙기면 다행이게요. 이거 한 마리도 못 잡는 거 아닙니까? 저기 보니까 S급 파견한 나라들도 엄청 많던데요?"

"...이러다 저희 진짜 빈손으로 돌아가는 거 아닙니까?"

히어로들의 입에서 서서히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화권과 운사는 그들을 다독이고 싶어했지만, 대다수의 히어로들은 정의감보다는 사냥한 흑전갈에게서 흘러나올 콩고물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젠장. 이게 다 그 선가놈이 협회 지원을 거부해서 그런 거요. 어디가서 목소리 높이지도 못하지 않소? 8년 동안 히어로들이 어디 파견을 나가기라도 했나. 죽은 광검 어르신한테 오는 요청들 다 씹어버린게 이리 돌아오는 거지."

"그래도 이제 슬슬 바꾸어나가면 되지 않겠어요?"

집행관은 강물 바로 앞까지 다가가 쪼그려앉았다.

"전세계를 아주 깜짝 놀라게 만들어주도록 하죠. 어디선가 보고 있을 빌런 무리들도 아주 경을 치게, 우리 히어로들의 힘을 보여주는 겁니다."

뜬구름을 잡는 집행관의 말에 히어로들은 어깨를 으쓱이거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을 과시하고 싶은 거야 누구나 다 똑같았지만, 그 힘을 세계에 떨칠 환경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저희 지금 자리가...."

"호수를 직선으로 넘어오지 않는 이상 뭐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은데."

방어선은 청해 호를 등지고 서는 위치가 아니라, 청해 호를 앞에 두고 길게 늘어진 모양이었다. 호수에서 나눠지는 두 무리를 양 쪽에서 각개격파하며, 흑전갈들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물'을 최대한 많이 끌어당겨 쓰기 위함이었다.

"나야 이 지형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만...."

"'최대한 많이 사냥한다'는 조건으로 봐서는 최악의 위치죠."

어째서 이 위치에 배정받았는가. 그것은 청화 때문이었다. 청화가 국가에 소속되지 않은 별개의 존재라고는 해도, 다른 나라의 시선에서는 청화는 어찌됐든 한국인이었다. 그래서 청화와 한국 히어로들을 싸잡아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좀 적당히 해먹으라고.

"괜찮습니다. 우리는 흘러들어오는 것들로만 해도 충분합니다."

집행관은 히어로들의 사기를 북돋으려했다. 하지만 이미 떨어질대로 떨어진 그들의 사기는 좀처럼 올라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뭘 그렇게 침울해하고 있어요?"

하늘에서 얼음의 나비가 착지했다. 방어선을 모두 구축하고 내려온 석하랑은 초상집같은 아우라를 느끼고 직접 내려왔다.

"방어선은요?"

"다 구축해뒀어요. 그러고보니 위치가.... 좀 안 좋네요."

석하랑은 침울함의 원인을 대번에 파악했다. 상공에서 전장 전체를 파악하고 있던 만큼, 석하랑도 한국 히어로들이 홀대 아닌 홀대를 받았다는 것에 살짝 짜증이 났다.

"잠시만요."

석하랑이 워치를 눌러 누군가를 호출했다. 집행관을 비롯한 히어로들은 슬쩍 그 상대를 훔쳐봤고, 놀랍게도 상대는 괴수관리대책국의 국장인 모택평이었다.

"저기요? 흠흠. 한국 위치 배정이 왜 여기에요?"

[......그나마 가장 괜찮은 자리라고 생각하는데.]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모택평의 대답은 한국 히어로들의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에 그들은 아연실색했다.

['그'가 말하길 그쪽이 제일 잡기 좋은 곳이라고 하던데.]

"예?"

[직접 물어보시게. 후후. 나는 우리쪽 배치를 해야하니 이만.]

뚝.

모택평은 전화를 끊었고, 석하랑은 눈을 감고 머리에 손을 올렸다. 푸른 나비 머리핀이 야밤에도 반짝이기 시작했고, 약 1분여의 시간이 지나자 석하랑은 헛웃음을 지었다.

"와, 이 씨방새 진짜...."

"설화령. '그'가 누구입니까?"

집행관은 굳은 얼굴로 설화령을 추궁했다. 다른 히어로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서울수복작전의 실패와 광검의 사망 이후, 석하랑의 행보는 히어로 단체로서의 움직임보다 독단적인 행동이 더 많았다. 설령 원탁이라고 하더라도.

"아, 걔요? 음.... 오빠라고 해야하나, 그 새끼라고 해야하나. 여러모로 표현하기 어렵기는 한데. ...말해도 상관없나?"

석하랑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냥 모르는 거 없는 놈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다들 대기하시는 게 좋을 듯."

다시 날개를 펼친 석하랑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저지선의 최후방에서 행여나 도심부로 들어가는 흑전갈들을 격퇴하기 위해, 그는 자신이 세운 수십 미터 높이의 빙벽 위에 홀로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몰래 위치를 옮겨야 하는 거 아니요?"

"몰라. 이제 5분 남았는데 별 수 있나."

"이게 꿀자리라고?"

히어로들은 동요했지만 더이상 물릴 수도 없었다.

"설화령께서 원탁에 들어가셨다고 해도 한국의 히어로입니다. 절대 저희를 배신하거나 함정에 빠뜨릴 분은 아니죠. 믿도록 합시다. 석하랑 님을."

집행관의 선언에 히어로들은 체념어린 결단을 내렸다. 석하랑의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그들은 얼핏 최악으로 보이는 이 위치를 사수해야했다.

"아, 이거 꼭 그 때 같구만."

"뭐요, 영감?"

"호수가 관악산이고, 여기가 안양인게지. 왜 서울수복작전 때도 양 갈래로 가지 않았나."

"그 때랑 지금이랑 땅 면적이 같소? 에휴, 승형아. 어쩌냐? 영감님 말씀에 따르면 여기 서울이라는데. 또 피토하거나 그러는 건 아니지?"

"선배님!"

베테랑들은 이승형을 놀려먹으며 긴장을 풀었다. 서서히 땅 아래에서 희미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고, 그건 곧 자연적인 지진이 아니라 거대한 괴수 무리가 달려오며 생긴 지진이었다.

"총원, 전투준비. 위치를 사수하여 흘러들어오는 괴수를 제압합니다."

집행관은 제발 조금이라도 많은 흑전갈들이 후방까지 밀려오기를 바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 * *

<그 시각, 병실-청화단 임시 비밀 거점.>

"저러면 하나도 못 얻는 거 아니냐? "

덕배는 한국 히어로들의 위치를 지적했다. 그들의 좌우로 늘어진 이능력자 무리들은 하나같이 서로를 견제하며 자신들이 더 많이 사냥하려고 위치를 잡았다.

"그러게. 양 옆으로 다 막혀서 넘어오지를 않겠어. 흑전갈 하나라도 넘어오려나?"

"당연하지."

"무슨 근거로?"

나는 호수를 향해 달려오는 흑전갈 무리를 가리키며, 가을이 깎은 과일을 하나 집어먹었다. 영 엉성하기 짝이 없었지만 지적하지는 않았다.

"지금의 포진은 '흑전갈들이 반으로 갈라져서 호수를 따라 들어온다는 가정'하에 이루어진 포진이다. 전제자체가 무너지면 전선도 당연히 달라지겠지."

"좌우로 흩어지지 않는다는 얘기야?"

"그래."

이제 시각은 1분전. 흑전갈들의 선두가 물가의 지척까지 다다랐다. 호수의 초입에 대기하고 있던 히어로들이 마력을 끌어올리며 흑전갈들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 갈라지겠...어?"

첨벙!

영상 속 흑전갈들이 물위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달려오는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헤엄을 치며 호수를 주파하기 시작했다. 히어로들의 웅성대는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흑전갈들이 사막에서 살아서 생긴 오해지. 쟤들 수영도 잘 해."

오히려 사막을 달리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호수를 헤엄치고 있다. 충돌을 예상하고 있던 히어로들은 벙쪄버렸고, 흑전갈들을 그들을 무시한 채 바로 호수 맞은편으로 움직였다.

"아, 저런. 다들 몰랐나보군. 다들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이야기를 안 했건만."

창과도 같은 진형으로 헤엄쳐오는 흑전갈들의 창끝은 한국의 히어로들을 향하고 있었다. 덕배와 가을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고,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흐흐, 너 아닌 척 하면서도 은근 챙기네? 역시 같은 한국인이라 이건가?"

"......쟤들 챙기는 게 아니다."

하필이면 한국 히어로들의 사냥에 투자를 올-인한 은유하가 불쌍해서 그런 거지. 겸사겸사 박라온이 활약하는 모습도 보고, 울상을 짓는 백희아가 안타까워서 그랬을 뿐이다.

"...직접 보러 갈까? 혹시나 사고 나면 어쩌지?"

"진정하자? 석하랑 있는데 설마 사고나겠어?"

"......그렇겠지?"

시커먼 남정네들 수 천의 안위보다 두 명의 안위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석하랑을 믿어보기로 했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다치게 한다면 위장에 에스프레소를 내시경으로 꽂아버릴 것이다.

"누굴 걱정하는 진 모르겠지만 걱정마. 걔도 갔잖아."

"누구."

"환룡."

"......봉효는 따라갔으려나."

제발 아무 일이 없기를.

그리고 약 30분 뒤. 흑전갈들이 호수를 주파에 뭍에 상륙했다.

그들을 가장 먼저 맞이한 히어로는 화권, 이승형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