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1부 9장 22
<오후 8시 08분, 신서울 서부 평야.>
준비는 끝났다. 백의종군하는 이승형이 비행정에 승선하면서 히어로들은 모두 배에 올라탔다.
"정말 괜찮겠느냐?"
총리 백세준은 안절부절못하며 집행관에게 물었다. 검은 단발의 소녀는 이제는 슬슬 짜증이 난다는 식으로 입꼬리를 미미하게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원도 문제없고 항로도 문제없습니다. 비행 허가도 받았으니 그저 드라이브만 잠깐 하면 됩니다."
"그래도 혹시나 중간에 그 정체불명의 세때라도 만난다면...."
"...히어로들을 백 명 넘게 태워가는데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아요?"
집행관은 표정을 풀고 긴장을 내려놓았다. 공적인 관계에서의 딱딱한 말투와는 달리, 지금의 대화는 외조부와 외손녀 사이에 이루어지는 편안한 대화였다. 내용은 아닐지 몰라도.
"외할아버지. 외할아버지께서는 다음 정권 잡을 준비를 하세요. 이거 다 외할아버지 권력 좀 잡아보시라고 제가 앞으로 나서는 거니까."
"그, 그래."
백 총리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보다 삼분지 일도 되지 않는 나이였지만, 그 총기나 결단력은 어지간한 사내대장부 이상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손녀였지만 사내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 외손녀인 <집행관>은 여러모로 팔방미인이었다.
"조기 대선이 언제 될 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탄탄하게 세력을 다져놓으시라고요. 선의철 밑에서 딸랑거리던 놈들이랑은 인연 끊으시고."
"그래도 그 친구들 나랑 한솥밥 먹던 친구들인데...."
"할아버지 그러다가 사고나요. 저 중국 가는 동안 이상한 사람이랑 절대로 어울리시면 안 돼요. 아셨죠?"
"......알겠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백 총리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은 단발의 소녀는 옆에 걸어둔 흰 베레모를 쓰며 제복을 걸쳤다.
"그러면 총리 님. 출항하겠습니다."
"그래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집행관>. ...희아야, 조심해라. 알겠지?"
"걱정마시라니까요."
집행관, 백희아가 백 총리에게 인사한 뒤 백나로 호에 몸을 실었다. 이승형을 위시한 히어로들이 한창 시선을 끌며 승선하던 곳과는 정 반대의 장소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몰래 '자신의 배'에 올라탔다.
"함장님. 오셨습니까?"
미리 대기하고 있던 <운사> 박라온이 그를 맞이했다. 집행관은 각자 좌석에 서서 경례를 하는 이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군대도 아닌데 무슨."
"안전운전 부탁드린다는 의미에서 그러는 겁니다."
"다들 저 놀리는 거 아닙니까?"
"에이, 그럴리가 있겠는가. 끌끌끌."
집행관은 히어로들을 둘러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베레모를 고쳐쓰며 가운데 통로를 지나, 집행관 또한 자신의 자리를 찾아 착석했다. 함교의 한 가운데, 오퍼레이터들을 내려다보는 위치의 붉은 의자-함장석으로.
"출항 준비는 모두 완료됐습니다."
오퍼레이터로 자리를 잡은 히어로들의 보고에 집행관은 목걸이에 걸어둔 쇠막대를 집어들었다. 자신의 자리 바로 앞에는 그 쇠막대가 들어갈만한 작은 홈이 있었고, 집행관은 그 홈에 '열쇠'를 집어넣으며 마력을 불어넣었다.
"아아. 코드 변경. 지금부터 <집행관>은 <함장>으로 여러분의 중국행을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좌석에 착석해서 안전벨트 착용하세요. 안전벨트 안 하면 가는 길에 황해 한 가운데 던져버리겠습니다."
함장은 제법 무서운 협박을 하며 열쇠를 모두 들이밀었다. 함장의 눈이 검은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했고, 곧 그의 시야는 배 전체로 확장되었다.
"...<템페스트 레이디>. 놀러가는 거 아닙니다. 수통에 넣은 와인 당장 버리세요."
"윽."
"<풍백> 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포션 통에 넣은 막걸리 빼시고 안전벨트 착용하세요."
"거 까탈스럽기는. 끙."
히어로들은 귀신같이 문제를 잡아내는 함장의 이능력에 감탄했다. 소문으로만 들었고 이번이 첫 출전인만큼 짖궃은 히어로들은 함장의 능력을 테스트하고자 했고, 함장은 아주 수월하게 그들의 장난을 파훼했다.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지만 제 이능력은 '동기화(同期化)'. 이제 이 배는 저와 한 몸입니다. 그러니 이상한 짓은 하지 말아주세요."
함장은 자리에서 다리를 꼰 채 엔진에 불을 붙였다. 엔진룸에 자리잡은 코어들이 피스톤운동을 하며 마력을 방출하기 시작했고, 곧 비행정은 아주 천천히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면 <백나로 호>, 출항합니다. 항로는 북경을 지나 청해. 예상 도착 시간은...."
함장이 히어로들의 앞 디스플레이에 경로와 도착 예정 시간을 띄웠다.
"22시 30분. 두 시간 정도 걸리니 편안히 정비하시길 바랍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마시고. 중간에 화장실 가시고 싶으신 분은 미리 얘기하시고. 기내식은 디스플레이 누르면 X로이드들이 가져다 드릴테니 그걸로 이용하시고. 어, 또...."
히어로들이 하나 둘 이어폰을 끼며 귀를 막기 시작했다.
"혹시나 비행정이 폭발할 경우를 대비해 좌석 아래에는 구명조끼가 있으니 그거 착용하시고, 행여나 비행 괴수의 습격을 받았을 경우에는 당황하지 마시고 함장의 지시에 따라 요격을 개시하며...."
집정관의 뒤를 이어 새로이 히어로들을 이끌게 된 집행관, 함장은 집정관 이상으로 잔 걱정이 많은 소녀였다.
- 엄마도 아니고....
나쁘게 말하면, 잔소리가 많은 여인이었다.
"엔진 룸에는 당연히 들어가시면 안 되고, 또...."
출발 후 약 30분.
30분 황해 바다 한 가운데를 지나는 순간까지도 함장의 입은 쉬지를 않았다.
* * *
<오후 9시 33분, 북경 상공>
"닌 또 왜 나오고 난리인데?"
[마중 나온 거다.]
"마중은 고마운데 그 꼴로 마중나와야겠나?"
나는 허름한 검은 로브로 내 괴인형의 몸을 가린 채, 하늘에서 얼음의 날개를 펼친 석하랑을 마중나왔다. 석하랑은 발로 허공을 차면서도 굳이 나를 들여보내지는 않았다.
[정체는 숨겨야 하니까.]
"평소에는 잘만 모습 드러내고 다니더니만."
[그건 햇빛 쨍쨍할 때나 가능한 얘기지. 지금은 여러모로 제약이 많아.]
"...? 니 밤에는 그럼 약해지는 기가?"
[전투 외적인 부분에서 제약이 많다는 거다.]
대표적으로 햇빛에 몸을 숨긴다거나 하는게 불가능해지기에, 이렇게 거적데기같은 걸로 갑주를 휘감아 모습을 감춰야했다.
"완전 거렁뱅이가 따로 없는데?"
[아무렴 누구 돼지우리만 할까.]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니한테 들으니까 좀 빡치는데."
[피도 안 마른 21살 짜리가 아주 못하는 말이 없어.]
"지는 나이 얼마나 처먹었다고. 완전 꼰대네. 몇 살인데? 민증 함 까봐라. 청화 꺼 말고 니 진짜 나이."
[.......]
석하랑은 은근슬쩍 내 신상을 캐물으려했다. 나는 원작 주인공의 나이를 언급해야할 지, 아니면 내 원래 나이를 언급해야할 지 감이 오지 않았다. 전자로 이야기하면 석하랑과 같은 나이가 되겠지만 괜히 석하랑에게 얕보이기는 싫었다.
[스물다섯...?]
"다섯이면 다섯이지 확신이 없는 이유는 뭔데?"
[기억이 애매하니까.]
대충 그 정도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석하랑은 손가락을 접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니랑 내랑 네 살 차.... 헐."
[불확실하다니까.]
"궁합도 안 본다는 그 네 살 차이 아이가? 히히."
[일단 상극이라는 건 확실하군.]
나는 하나 급히 공수해 온 아날로그 손목 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각 9시 35분. 이제 슬슬 문제의 비행정이 북경 상공을 지나갈 때였다.
"니도 참 희안하네. 지보다 네 살이나 어린 여자애가 따박따박 반말 내뱉는데 안 빡치더나?"
[네 반말은 익숙.... 아니, 됐다. 애초에 네게서 존댓말 들을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으니.]
"그럼 이렇게 불러줄까? 크흠."
석하랑이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오빠야?"
[미친 년.]
"이게 미친나, 어디서 바로 욕질인데?"
[닭살 돋는 말은 하지마라. 나 참, 어이가 없어. 간다. 마침 저기 오는군.]
나는 석하랑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비행정을 향해 밀었다. 석하랑은 눈을 찡그리며 내게 으르렁거렸지만, 별다른 공격은 하지 않았다.
[......성질이 좀 많이 죽었구나.]
"흐흥, 강한 사람이 아량을 베풀어야하지 않겠나? 응? 낮에만 강하고 밤에는 한없이 약한 사람 배려해야지. 아. 그러고보니 니 지금 완전 그거네, 그거."
석하랑이 날개를 펼쳐 내게 슥 다가왔다. 멀리서 해도 될만한 말을 굳이 내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이는게 영 우스워서 가만히 내버려두기로 했다.
"낮이밤져. 으히힛!"
[......하아.]
저 왈가닥을 어떻게 조져야할까.
[사람이 기껏 마중을 나왔더니 못하는 말이 없어.]
"맞잖아! 꼬우면 나중에 밤에 한 번 붙어보던가! 흐흐흐, 이제 밤에만 만나야겠네~ 내는 간다! 밤길 조심하고! 알긋나?!"
[너나 조심해라. 괜히 방심하다가 사고나지 말고.]
석하랑은 혀를 내밀며 동쪽으로 날았다. SS급에 이르러 마하의 속도로 공중을 날 수 있게 된만큼, 비행정의 속도에 맞추어 공중에서 도킹을 하듯 합류할 생각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석하랑이 점으로 보일 때까지 한참 그 뒤를 바라보았다.
[설야의 힘을 이어받아서 그런가.]
밤이 되서 그런지 상당히 강력한 공격을 일삼는다. 나는 가슴을 툭툭 주먹으로 두드려 일렁이는 마력을 잠재웠다.
[낮이밤져....]
침대 위에서는 한 번도 이긴적 없는 처녀가 저런 말을 내뱉으니 가당치도 않았다. 그 순간, 동남쪽에서 굉음을 울리며 날아오는 비행체의 기척이 느껴졌다.
[왔나.]
병실이 아니라 이곳 상공까지 나온 이유는 둘. 석하랑을 마중나온 것도 있지만, 내 눈으로 데스디-현재 이름 '백나로 호'를 직접 보고자 거적데기까지 두르며 이곳까지 날아왔다.
[여전하군.]
저 멀리 수 km 떨어진 곳에서 날아오는 비행정이 눈에 들어왔다. 배 안에 타고있는 수많은 이능력자들의 마력반응이 먼저 느껴졌고, 뒤이어 비행정과 동기화하여 하나가 된 암속성의 마력이 훤히 느껴졌다.
[행동력 하나는 정말 빠르단 말이야.]
백희아.
원작 극후반, 주인공에게 함장의 자리를 넘겨주기 전까지 주인공 일행의 공중거점인 데스디나스 호의 키를 잡은 함장이자 조타수. 외국으로 나갈때면 항상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왜 벌써부터 나온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차차 알아보면 될 일. 지금은 그저 날아가는데 도움이나 주고 다시 병실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키이이익!!
백나로 호의 뒤로 비행 괴수들이 따라붙었다. 전부 B급 수준의 거대 괴조 수준이었지만, 두 다리를 딛고 설 수 없는 공중에서 따라붙는 괴수들은 상당히 골칫거리였다.
[오.]
눈이 마주쳤다. 함교의 함장석에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백희아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마력을 최대한 줄여서 숨어있었는데 어떻게 본 걸까. 여러모로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고보니 서해무기가 서울로 들어갔다고 했지.]
그렇다면 영종도를 '청소'하는 임무는 전부 끝마쳤으리라. 나는 백희아에게 전용 활주로로 영종도 전체를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최종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출국은 영종도의 옛 활주로를 이용하는 편이 더 나을테니.
[그럼 다치지말고 잘 다녀와라.]
나는 백희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베레모를 눌러쓴 백희아는 당황한 듯 얼떨결에 손을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백희아의 이능력은 믿을만 했지만, 그가 동기화하고 있는 배의 이름이 '백나로'인게 너무나도 거슬렸다.
[비행정 이름이 저러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있나. 원.]
키에엑!!
괴조들이 내가 살짝 흘린 마력을 눈치채고 나를 향해 선회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력을 꺼뜨려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괴조들을 유인했다. 더이상 비행정의 뒤를 쫓는 괴조는 없었다.
[조만간 신서울에도 한 번 들러야겠어.]
나는 가장 먼저 부리를 벌리며 낙하하는 괴조의 대가리를 차올렸다.
역시 가만히 병실에 누워있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았다.
나는 지상으로 낙하하며 괴조들의 모가지를 뽑아버렸다.
* * *
"함장. 왜 그러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백희아는 방금 자신이 본 것이 환각이 아니었음을 직감했다. 석하랑과 관악에서 맞붙어 손쉽게 승리를 따냈고, 광검을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SS급 빌런-<피닉스>. 그는 마치 자신에게 인사하듯 손을 흔들었고, 백희아는 자신도 모르게 화답했다.
화답하지 않았으면 공중에서 폭사당했을까? 백희아는 입이 바싹 말랐다.
"함장. 괴조들이 지상으로 머리를 돌렸습니다. 더이상 쫓아오지 않습니다."
레이더 상에는 괴조들이 속도를 낮추고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왜?"
"예?"
"왜 도와주는 거지?"
"뭘 말입니까?"
빌런이 히어로들을 돕는다?
어째서?
백희아는 석하랑이 날개를 접고 배에 승선할 때 까지, 피닉스의 의도에 대해서 고뇌할 수 밖에 없었다.
"설마 돌아오는 길에 하이잭을 해서 다 죽이려는 건...?"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백희아는 베레모를 쥐어뜯었다.
"여유를 부린 건가? 한 번은 살려준 거야? 그러면 귀국 항로를 변경해야 해? 으으, 도대체 왜 갑자기 거기서 나타난 거야?!"
"의, 의사! 누가 함장님 좀 진정시켜봐요!"
피닉스가 그저 비행정을 한 번 보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백희아는 청해에 도착하는 순간까지도 피닉스의 진의에 대해 고뇌하고 또 고뇌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