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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87화 (187/1,497)

〈 187화 〉1부 9장 21

환룡에 의해 다시 병실로 옮겨진 나는 청화단을 소집했다. 석하랑이 한국으로 귀국을 하지 않는 바람에 천가을은 다른 거점에서 대기하다가 돌아오게 되었고, 나는 미안함에 천가을의 화장 마루타가 되어야 했다.

"그럼 다 왔나?"

조덕배는 부활. 천가을은 내 옆. 방에 들어오지 못하는 흑염룡은 코어로 대기. 내가 중국에 데려온 청화단 간부들은 모두 병실에 자리를 잡았다.

"은유하는?"

"몰라. 자기 급한 일이 있다고 가버렸다."

대충 예상은 간다. 협상은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으니 내가 은유하에게 부탁했던 역할은 모두 끝이 났고, 은유하는 지금 자유롭게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뇌물을 줘서 중국 히어로에게서 코어를 양도받는다거나, 자신의 PMC를 어떻게든 흑전갈 사냥에 끼워넣어 볼 궁리를 한다거나, 자신이 조금 더 영향력을 발휘하기 쉬운 한국 히어로들의 개입을 쉽게 하기 위한 판을 짠다거나.

혹은 그 세 개를 동시에 할 수도 있다. 은유하의 돈욕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그러니 우리는 그냥 느긋하게 히어로들 서로 아귀다툼이나 하는 걸 구경하면 된다 이거지."

"히어로들 서로 싸우게 만들어서 뭐하려고?"

"솎아내는 거지. 타락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히어로들 중에는 후에 빌런으로 타락하거나 괴인이 되는 이들도 있다. 나는 이번 기회에 아시아의 히어로들 만이라도 일차적으로 걸러내고자 했다.

"만약 B급이 S급 흑전갈을 간신히 죽여 쓰러뜨렸다. 그런데 워낙에 혼전이라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고, B급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당연히 구해주지 않겠어?"

이것은 아직은 일반인에 가까운 천가을의 생각. 나는 조금 더 악성향이 짙은 조덕배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연히 죽이고 훔치지 않겠냐?"

역시 조덕배다운 사고다. 나는 둘의 극명한 대비를 짚었다.

"빌런임에도 영웅적인 측면을 보이는 이도 있지만, 히어로임에도 빌런같은 성향을 보이는 자가 있기 마련이지."

"전자야 뭐 부끄럽지만 나일테고, 후자는 또 누구야? 걔는 몇 번째인데?"

"그냥 예시다. 왜 내가 말하면 다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는 거지?"

나는 인상을 찌푸려 천가을을 노려봤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앞서나갔다고 생각한 건지, 가을은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미안. 내가 오해했어."

"아니다."

미안. 그런 애도 하나 있다. 누군지 추궁당할까봐 지레짐작으로 오해한 것 처럼 속여버렸다.

"그러니 이번에 잘 봐야한다. 분리수거 가능한 놈들은 괴인으로 재활용하고, 아닌 놈들은 괴인으로 만들어 평생을 노역만 하게 만들테니."

"죽이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어?"

"살리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있다. ...아야."

천가을은 촉수로 내 머리를 내리쳤다.

"자꾸 장난 칠래?"

"쳇."

S급으로 올라서 그런지 감이 아주 뛰어나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화제를 전환했다.

"뭐...적당히 갱생이 가능한 놈들은 놔둘 거다. 내가 말하는 건 소나무 부대 같은 악질 놈들이야. 봉효 녀석, 동창에서 빼온 환룡단 단원들도 적당히 회색인 놈들을 뽑았더군."

나에게 알이 한 번씩은 다 깨졌던 자들은 전부 회색같은 놈들이었다. 봉효 또한 그 이상 단원들을 늘릴 생각은 없던 것 같았다.

"근데 그런 쓰레기같은 놈들이 이번 토벌 작전에 참가할까?"

"참가하겠지. 와서 잡기만 하면 S급 코어를 가져갈 수 있으니."

병실 TV 스크린에는 기자들의 앞에 서서 당당히 선언하는 천자의 영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영상을 보고 있을 많은 영웅협객들에게 요청합니다. 괴수들은 지금도 사막을 가로지르며 시민들을 습격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해결하고자 하나, 여러 동지들께서 도와주신다면 그 은혜는 반드시 잊지않겠습니다!]

"은혜는 코어겠지?"

"괴수 부산물도 처리해서 대금을 지급해주겠지. 적당히 남겨먹기야 하겠지만."

천자가 연설을 통해 내새운 조건 대해서는 상당히 이견이 갈렸다. 우리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며 왜 외세를 끌어들이냐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천자의 의기에 감동하여 바로 하늘을 날아오는 자들도 존재했다.

"그래서 한국발 숟가락은 어떻게 됐으려나."

석하랑이 자리를 비운 이유는 혹시나 모를 최후 저지선을 구축한다는 조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한국에서 숟가락만 든 채 발을 동동 구르는 한 무리의 히어로들을 끌어들이느라 발벗고 나섰기 때문이다.

"몇이나 오려고 한다니. 조덕배, 너 알아?"

"잠깐만. 와, 서울수복작전 때랑 거의 비슷한 전력인데? 석하랑만 없다."

덕배는 한국 협회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응원군의 전력을 읊었다. 대부분 서울수복작전에 참가했던 이들이었고, 개중에는 선의철이 주관하는 작전에 불참하는 이들의 면면도 있었다.

"<홍판>, <불가사리>, ...? A급들 총출동이야 뭐야?"

"어디봐봐. ...이승형도 오네?"

가을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나는 제 발이 저려서 황급히 손을 들어 변명했다.

"잠깐. 나 이제 이승형 불편하지 않다. 서울에서 신서울까지 같은 차 타고 내려가기까지 했잖나."

"그래서 문제야. 이승형이 너한테 반한 거 아냐? 이승형이랑 너랑 썸탄다고 난리가 났는데."

"뭐? 이 미친."

나는 진심으로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이승형이란 놈은 뭐길래 천가을만으로도 모자라 창염의 피닉스와도 스캔들을 일으키려 한다는 말인가.

"내 스타일 아니다."

"네 얼굴이 걔 스타일 일수도 있지. 내가 예전에 걔랑 드라마 찍으면서 느낀 건데, 걔 거유 좋아해. 은근슬쩍 자꾸 가슴보고 그랬다니까?"

"좋아. 심장 터트리고 오마."

"또 삽질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엉? 걔가 왜 중국 땅까지 날아오려고 하겠냐? 외화벌러 왔겠지, 니들 그 볼품없는 가슴 보려고 와아아아악?!"

나는 덕배의 눈앞에 작은 태양을 터뜨렸다. 덕배는 눈을 부여잡으며 바닥을 굴렀다. 히로인 최고의 몸매를 자랑하는 천가을에 대해서는 품평을 할 수 있어도, 감히 이 몸을 두고 볼품없다고 욕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흠흠. 뭐...좋아. 만약에 이승형이 이 가슴을 보면 눈을 콕 찔러버리도록 하지."

"그러시던가. 그런데 이상하네."

천가을이 덕배를 찌르려던 촉수를 거두어들이며 물었다.

"신서울에서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수단이 있기는 해?"

"있다."

"진짜?"

"그래."

있기는 한데, 설마 지금 이 타이밍에 나올까 싶은 물건이다. 지금이야 건조는 완료되었겠지만, 원작 시점으로 2025년 여름이 넘어서야 나오게되는 이동수단인 만큼 고작 이런 곳에 쓰일 것 같지는 않았다.

"뭔데?"

"......배(船)."

"황해 건너서 오려고? 육로는 달려갈 생각인가? 그러면 늦지 않아?"

"배는 배인데, 조금 다른-"

"야아아!"

쾅! 병실의 문이 강하게 열리며 백발의 왈가닥이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니 뒤질래?! 네가 말한 거 없더구만?! 나만 개쪽 당했다!"

"흠. 역시. 없었군."

"뭐? 역시? 여어어어억시? 임마가 뒤질라고...!"

"고맙다. 석하랑. 큰 도움이 되었어. 정말로."

석하랑은 얼굴을 붉히며 테이블 위에 야식 거리를 집어던지며 성질을 부렸다. 치킨, 피자, 팝콘 등. 지금부터 히어로들이 흑전갈 사냥 파티를 시청하며 먹을 주전부리를 사와달라는 부탁에 석하랑은 흔쾌히 받아들였고, 가는 김에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 좀 사와달라고 얘기했다.

"자요. 덕배 씨는 임마는 외계인. 가을 언니는 아몬드 들어간 거. 니는 이거나 쳐무라."

석하랑은 내게 아이스크림컵을 집어던졌다. 아무거나 먹으라며 집어던진 것 같지만, 석하랑은 딸기맛으로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담아왔다. 나는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에 십자를 그리며 빙빙 휘저었다.

"석하랑."

"와."

"한국 협회에서 뭐 연락 들어온 거 없나? 정기 연락이나 정보 전달 말고, 뭔가 기밀같은 것."

내 물음에 석하랑은 블루베리가 섞인 아이스크림을 스푼으로 떠올리며 눈을 껌뻑였다. 워치까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는데?"

"......그런가. 그러면 그 걸 쓰지는 않겠군."

"뭘?"

"배."

석하랑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한 입 넣었다가 스푼을 내게 겨누며 눈을 번쩍였다. 무언가 짚이는 바가 있는 듯 했다.

"혹시 히어로들 어떻게 오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기가?"

"그래. 행여나 그걸 타고 올까봐싶어서 물었다. 역시 꺼내지는 않는군."

"엉? 무슨 소리야. 히어로들 지금 타고 올라오려고 하는 중인데."

"......예?"

나는 나도 모르게 스푼을 떨어뜨렸다. 가을의 촉수가 귀신같이 내가 반쯤 먹었던 스푼을 다행히 낚아챘다.

"진짜 그걸 타고 온다고?"

"어. 볼래?"

석하랑은 TV를 조정해 한국 쪽의 채널로 바꿨다. 내 활약과 회담에 대해 소개하는 낯간지러운 방송은 차치하고, 한국 방송사들은 크게 두 가지 영상을 송출하고 있었다.

하나는 흑전갈들의 이동 경로와 흑전갈 퇴치에 대한 천자의 연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흑전갈들을 퇴치하기 위해 '배'에 오르는 히어로들의 모습.

"헐."

방금 막 이승형이 승선을 마친 배는 내게 너무나도 그립고 익숙한 비행정이었다.

"저걸타고 지금 중국으로 온다고?"

"왜. 문제 있나?"

문제가 있다마다.

저 배를 운항할 수 있는 사람은 한국에서 딱 한 명 뿐이었고, 그 아가씨는 협회의 도움으로 자신의 이능과 정체를 숨긴 채 원작 시점까지 버텼어야 했다. 다름 아닌 선의철의 견제 때문에-

"아."

선의철 내가 몰락시켰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선의철이 물러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자신의 조커 카드이자 이능력을 내비친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야. 마침 잘됐다 아이가. 돌아가는 길에 저거 타고가면 되겠네. 유하 언니야도 비행기 또 터질까 걱정하더라."

"그, 그래. 터질 일은 없겠지."

단독으로 달까지 올라가는 비행정이 내가 탔다고 터질 리가 없다. 나는 평정을 가장하며 스푼을 다시 집어들었다.

"여기."

"고맙다."

가을은 아주 깨끗해진 스푼을 내게 건넸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으며 문이 닫히는 비행정을 찬찬히 살폈다.

'저걸 벌써부터 보게 될 줄이야.'

비행정 데스디나스 호. 원작 주인공이 타고 전세계를 누비는 발이 되어준 공중거점이자, 최후의 순간에 인류의 희망이 된 날개. 낡은 창고에서 발견되어 먼지가 쌓여있던 5년 후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도색까지 새로 한 듯 빛이 반짝거렸다.

"왜? 니도 타보고 싶나?"

"탈 일이 없다."

피닉스는 한 번도 타지 못한 비행정이며, 나도 앞으로 탈 일이 없을 것이다. 피닉스가 저 비행정을 타게 된다는 말은 딱 두 가지 상황을 의미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신화에 이르는 걸 실패하거나.

주인공에게 뿅가서 반해버리거나.

여러모로 창염의 피닉스 적으로 아웃이었다.

"그래도 모처럼 중국으로 왔으니 한국갈 때 타고갈까."

흑염룡보다 속도는 느리겠지만 심적 안정감은 더 편안할 것이다.

"히어로들이랑 같이 돌아가려고? 껄끄럽지 않겠나?"

"전혀. ...아니지, 괴인들이 문제군."

나야 타는데 아무 지장이 없지만 천가을이나 조덕배가 문제다. 덕배는 출국 때 같이 출국을 했으니 보디가드라고 변명하면 되겠지만, 저 입방정을 생각하면 차라리 천가을을 조덕배로 변신시키는게 더 나았다.

"나 괜찮은데? 코어로 가도 상관 없어."

"난 신발이나 깔창만 아니면 오케이."

"......알겠다. 그러면 갈 때 편안이 가는 걸로."

"그래라. 내 그러면 협회에다가 얘기해둔다? 나중에 갈 때 청화도 같이 태워가자고."

비행기값 내지 않고 공짜로 한국으로 돌아가게 생겼으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나는 석하랑이 사온 야식거리를 적당히 씹어삼키며 하늘로 떠오르는 데스니다스 호를 유심히 지켜봤다.

[아, 말씀드리는 순간 '백나로 호'가 이륙을 시작했습니다.]

"왜 이름이 저따위지?"

"어때서? 나쁘지 않잖아."

"...그, 그렇지."

솔직히 데스디나스같은 요상한 이름보다는 괜찮기야 하지만, 이름에서 오는 어감이 문제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으니까.

"야. 그럼 내 간다? 저거 도착하면 나도 저거 타서 청해로 이동하기로 했거든."

"잘 다녀와라. 괜히 무리하지 말고."

"사람들 지키기만 할 끼다. 다녀올게요."

석하랑은 조덕배와 천가을에게 꾸벅 인사하고 유유히 병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둘과 석하랑이 사온 야식을 먹으며, 이 중국 땅으로 날아오르는 데스, 아니 백나로 호의 이동을 지켜봤다.

"응? 너 또 뭐 봐?"

"누구누구 탔는지 궁금해서."

나는 다시 리스트를 확인했다. 포텐셜 넘치는 동료들, 전투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거기에 S급인 <화권> 이승형까지 아주 면면이 빼어나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지금 당장 내 관심을 끄는 히어로는 한 명 뿐이었다.

<운사> 박라온.

히로인 중 한 명이 마침 비행정에 타고 이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 나는 행여나 그게 터질까봐 마음을 졸였다.

"......기우겠지."

설마 히로인이 둘이나 타고 있는데 터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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