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1부 9장 20
‘청화가 흑염룡을 변신’시켜 S급 괴수 물지기를 쓰러뜨렸다.
지파룡과 물지기라는 두 S급 괴수를 연달아 쓰러뜨림에 따라 세간의 관심은 다시 청화에게 쏠렸다.
-괴수 코어만 있으면 마음대로 변신시킬 수 있는 건가?
괴수의 사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은 태도 덕분에, 사람들은 괴수의 ‘코어’가 진짜 핵심임을 눈치챘다.
-흑염룡 갑자기 사라진 거 사실은 코어로 바꿨다가 다시 변신 시킨게 아닐까?
격론끝에 제법 정답에 가까운 추론을 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청화가 진실을 밝히지 않기에 그저 추론에 끝날 수 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화염 거인 조덕배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고, 사람들은 ‘흑염룡이 인간으로 변신했구나’하는 선에서 생각을 마쳤다.
-회담 결과 어떻게 됨? 아무리 그래도 두 개 다 가져가지는 않겠지?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 결과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진짜로 S급 괴수 둘을 죽이고 코어를 챙겨갔으니, 그 코어의 소유권에 대해 깊은 논의가 필요했다.
-청화 창염개진(ㅋㅋ) 하는 동안 회담 계속 진행됐다던데?
-저 협회 직원인데 청화 양 아는 사람이 회의 대타로 나왔어요. 유황숙이랑 거의 멱살 잡을 뻔ㄷㄷ
-모택평은 계속 웃기만 하네. 저거 영혼 나간 거 아닌가?
그들은 어떻게 되든 회담이 빨리 결론이 나기를 바랐다.
이렇게 밍기적거리면 흑전갈들이 진짜로 북경까지 다다르지 않을까. 코어 같은 건 줘도 상관없으니 빨리 저 바퀴벌레같이 밀려오는 전갈의 파도를 해결해줬으면 좋겠다.
협회에서는 자체적으로 주민들을 대피시켰으나, 역시 국가의 특성상 당의 우두머리인 주석과 실질적 권력자의 입김 없이는 대대적인 피난이 어려웠다.
사람들의 시선은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는 회담장을 향해 있었고, 이윽고 회담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회담장에 한 유령 하나가 도착한 것을 계기로.
***
흑염룡과 물지기가 서로 멀리서 견제구만 날리던 전투 이상으로, 회담은 지지부진했다. 석하랑이 보증한다고 데려온 보험 설계사 청년은 보이는 바와 달리 압도적인 협상력을 벌이며 중앙당을 압박했다.
"괴수의 코어를 요구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코어를 바탕으로 조종하게 될 괴수의 제어권을 요구하시는 겁니까? 코어라면 청화 양이 이능력을 사용해 직접 잡은 거니 감히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겠죠. 청화 양은 정식으로 초청을 받아 여기에 온 것이니."
"하지만 이 땅에 있었던 괴수입니다. 코어 자체는 양보할 수 있어도 그 이후의 일은 다른 문제지요. 값을 치르라고 하면 치르겠습니다. 아무런 후속 조치 없이 그냥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어찌 될까요? 과연 다른 나라에서도 청화 양을 초청하겠습니까?"
협회의 인사인 유황숙은 졸지에 중앙당의 편에 서서 협상을 주도해야 했다. 천자에게 모든 것을 일임한다며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모택평은 그저 미소를 지은 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은유하(유준) 왈, 코어는 사냥한 자에게 소유권이 있다.
유황숙 왈, 중국 땅 안에서 잡힌 괴수이니 당연히 중앙당과 협상을 해야 한다.
둘이 얼굴까지 붉히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던 와중,
“후후.”
환룡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피닉스가 물지기를 잡으러 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사냥하신 코어 두 개에 대해서는 양보하도록 하지요. 심심한 감사를 표합니다. 그렇다면 흑전갈 무리는 어떻게, 청화 양이 사냥이 가능하십니까? 이제는 더 무리일 것 같습니다만.”
환룡은 유창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옆에 영체가 되어 속삭이는 미청년의 존재에 대해서는 석하랑만이 눈치챌 뿐이었고, 백청영은 피닉스와 나눈 대담의 전말에 대해 넌지시 전했다.
“...예. 흑염룡도 청화 양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제법 무리를 했으니까.”
“그, 그러면 당장 병실을 비워둬야지요! 황숙 공!”
“호들갑 떨지 않으셔도 됩니다.”
병풍처럼 앉아있던 천자가 그제서야 오도방정을 떨었지만, 회담 때문에 날카로워져있던 유황숙은 단칼에 천자를 제압하고 은유하(유준)과 협상을 재개했다.
“그렇다면 흑전갈들에 대해서는 저희 협회와 중앙당에서 협의를 거치도록 하겠습니다.”
“예. 물지기와 지파룡...의 코어는 청화 양의 소유입니다.”
실제 지파룡의 코어는 환룡단이 챙겼으나, 피닉스는 백청영의 트롤링에 대해 체벌을 내리는 것으로 아주 관대하게 넘겼다.
"그럼 지파룡과 물지기, 두 S급의 코어는 청화 양이 귀국할 때 챙겨가도록 하겠습니다."
"예. ...추후 협회를 통해 정식으로 공문을 발송하겠습니다. 코어로 괴수를 부활시켜 흑염룡처럼 운영하는 것에 대해서."
"얼마든지 그러십쇼."
고생하는 건 협회였다. 회담장의 이들은 간략히 코어에 대한 문제를 요약해 합의서를 작성하고, 대리인을 내세워 발표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럼 다음 안건입니다만."
회담은 릴레이로 계속되었다. 이전까지 하유준과 유황숙의 대결이었다면, 지금은 국제적인 문제를 두고 원탁과 중국의 이견 다툼-석하랑과 유황숙의 대결이었다.
"원탁에서 나서겠습니다. 차원문은 아니지만 차원문 급의 재앙이죠?"
"설화령께서 직접 나서실 생각이십니까?"
"예. 온 김에 마저 뿌리를 뽑고 가도록 하죠. 아 참, 원탁이 처치한 괴수에 대한 분배는 어떻게 되는지 알고 계시죠?"
"......알다마다요. 원탁이 사냥한 괴수의 1할 만큼 코어를 챙겨가지 않습니까."
"예. 10%."
원탁이 비록 세계 평화를 위해 움직이는 조직이라고는 하지만 무상으로 움직이는 조직은 아니다. 비행기값, 식비, 기타 등등 파견 요청에 따라 자신이 사냥한 괴수 지분 중 1할을 자기 몫으로 챙겨가게 된다.
"그러니까 제가 나서면 한 번에 쓸어가게 되겠죠?"
"설화령 님. 넓은 아량을 베푸심이 어떠신지요?"
환룡은 나긋나긋한 어조로 석하랑에게 제안했다. 먼저 자존심을 굽히고 들어가는 모택평(환룡)의 태도에 천자와 유황숙은 경악했고, 석하랑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의 제안을 수용했다.
"예. 알겠어요. 저는 이번에 빠질 게요. 괴수 저지선 최후방에서 대기할테니까, 나머지는 알아서 해줘요."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환룡의 시선이 천자에게 돌아갔다. 그는 상당히 겁을 먹었지만, 이전처럼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지는 않았다.
"무, 무슨 생각이오?"
"주석께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저희 괴수관리대책국의 의견은."
환룡이 고개를 숙이며 의견을 타진했다.
"이 수도를 향해 오는 저 전갈 무리들을 상대하기 위해 우리 인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할 때가 아닌가 사료되옵니다."
"...그 말인 즉슨?"
"예."
환룡은 봉효의 지시에 따라, 흑전갈들의 이동 속도와 경로를 파악해 최적의 방어선을 만들어냈다.
우웨이. 과거, 무위라고도 불리우는 도시 아래에 있는 넒은 호수.
"이쪽에서도 전속력으로 달리면 아마도 하루가 넘어가기 직전, 이곳에서 만나지 않을까합니다."
칭하이(青海). 환룡은 중국 내 최대 규모의 호수이자 소금 호수인 곳에서 저지선을 형성하고자 했다.
"그런가."
천자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직접 선언하겠습니다."
천자는 마력까지 일으키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처음으로 전면에 나서서 세계를 향해 언급하는게 '국제사회의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라 자존심도 상할 법 했지만, 천자에게는 그건 중요치 않은 모양이었다.
"황숙 공. 준비를. 국장도 성심성의를 다해 도와주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후후. 물론이지요."
환룡, 백청영, 석하랑, 은유하.
넷은 순진하게 열의를 불태우는 천자를 보며 쓰게 웃었다.
- 저지르겠네.
- 저지를 듯.
- 무리하겠네요.
- 하여튼 객기는.
"당의 영웅들과 더불어, 전세계의 모든 이들의 앞에 제가 직접 서겠습니다!"
천자는 친정을 선포했다.
* * *
잠시 뒤. 북경 상공.
"착륙."
나는 흑염룡을 부활시켰던 곳에 다시 안착시켰다. 이미 멀리서부터 구경을 나온 이들이 광장을 넓게 둘러싸고 있었지만, 흑염룡이 눈을 부라리는 통에 내게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는 듯 했다.
"어서오십시오. 청화 양."
환룡은 나를 직접 맞이하러 나왔다. 중앙당 당원들과 협회의 직원들은 꽤나 분주해보였고, 환룡이 이 자리에 직접 나온 것은 나로서는 상당히 의외였다.
"예. 다녀왔습니다." [회담은 어떻게 됐나?]
"먼 길 고생하셨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끝났어. 은유하라는 애가 알아서 다 정리하던데?]"
나는 환룡의 옆에서 발걸음을 맞췄다. 모택평의 위세 덕분에 우리의 앞 길은 자연스레 좌우로 갈라졌고, 나와 환룡은 적당히 아무 말이나 떠들며 정령끼리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상 흑전갈 무리만 남았다. 그 정도는 너 알아서 할 수 있지?]
[샤오린 쓰면 안 돼? 일일이 쓸어담기 귀찮은데....]
[나도 석하랑 보낼 생각 없다. SS가 나설 타이밍은 아니야.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줘야지.]
어느 한 사람이나 세력이 독점하기에는 흑전갈의 수가 너무 많았다. 그러니 모두에게 숟가락을 올릴 기회를 주어 따가운 시선을 분산시켜야했다. SS들이 나서면 쉽게 전멸시킬 수 있겠지만 흑전갈들은 수가 많을 뿐이지 강한 개체는 아니다.
[눈앞에 놓인 케이크는 하나고 숟가락은 넘쳐나니, 모두가 한 입씩 맛은 볼 기회를 줘야하지 않겠나. 그러면 여기서 질문 하나 하지. 우매한 군중의 시선을 돌리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음, 전부 다 죽이는 거?]
환룡은 가장 심플하고도 깔끔한 답변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건 내가 바라는 답이 아니다.
[전부다 일일이 죽이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힘들텐데.]
[으, 귀찮잖아. 그러면. 그러면 그냥 욕을 먹고 내버려 둘까?]
[그래. 그냥 답을 알려주지. 정답은 불만의 방향이 위가 아니라 옆을 향하게 하는 거다.]
나는 슬쩍 입을 가리켰다. 마침 대화의 주제도 흑전갈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아, 그렇군요. 흑전갈들에 대해서는 각 국의 지원을 요청하기로.... 그런데 모 국장. 어떻게 조율하기로 했어요? 여러 곳에서 원조하겠다고 답했을 것 같은데."
"천자께서 정말 '화끈하게' 기준을 잡으셨습니다. 중국의 이능력자들이 잡은 흑전갈은 중국의 것으로 하되, 타국의 이능력자들이 잡은 것에 대해서는 일절 간섭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걸로 설명이 되었습니까, 청화 양?"
"어후, 그것 참."
대담하다고 해야할 지, 아니면 생각이 짧다고 해야할 지. 어느쪽이든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와 방향은 맞았기에 나는 다시 환룡에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식탁 아래에서 숟가락을 들고 있는 거지들에게 케이크 한 조각을 덜어 바닥에 내려놓는 거다. 그리고 마음껏 먹게하는 거지.]
[...너 진짜 쓰레기구나?]
환룡이 내 계획에 질색을 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않았다.
[인간의 욕심과 질시를 기반으로 한 이간계라고 말해주겠나? 아무튼 그러면 사람들의 눈은 돌아갈 거다. 식탁 위에 보이지도 않을 케이크 7조각 말고, 당장 눈앞에 있는 케이크 한 조각에 말이야.]
[그리고 서로 먹게 되면 다투게 될 거야. 그럼 불만은 당연히.]
[제일 많이 먹은 놈에게 불똥이 튀겠지. 이미 식탁 위에는 케이크 7조각이 홀라당 사라진 것도 모르고 말이야.]
"푸흐흐."
"후후."
쓰레기같은 계획이건 뭐건 환룡도 방해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정령감수성적으로는 인간은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니, 코어를 두고 히어로들이 벌일 아귀다툼에 절로 기분이 흥겨워졌다.
"청화 양!"
"......아, 천 주석님."
복도 반대편에서 천자가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모택평의 얼굴로도 막을 수 없는 유일한 존재가 막아서고 말았다. 나는 적당히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큰 결단을 내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텐데."
"아닙니다. 저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내 모습? 천자는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환하게 웃었다.
"회담장을 뛰쳐나가며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선언하던 그 용기! 저는 당신의 그 용기와 결단력에 반했습니다."
"아, 예."
"후후."
환룡이 고개를 돌려 웃는다. 나는 보이지 않게 마력으로 환룡의 옆구리를 때렸다. 내가 떨떠름하게 대답했음에도 천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저는 깨우쳤습니다. 인류의 위협인 괴수를 눈앞에 두고 해야하는 건 지리멸렬한 말싸움이 아니라, 당장 눈앞의 위기를 처리하는 '행동하는 용기'라는 걸요!"
천자가 눈을 반짝이며 내 손을 붙잡았다. 이 새끼가?
"창염개진! 너무나도 멋진 울림이었습니다!"
"......."
좋다. 얘 죽이자. 죽일까? 그냥 환룡을 주석으로 만들어버려?
"......아픕니다."
나는 간신히 들끓는 화를 삭히며 나직이 읊조렸다. 천자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고, 환룡이 앞을 가로막았다.
"저는 지금 청화 양을 휴식처로 안내하던 중이었습니다. 장시간 비행에 피곤할 터이니, 추후 담소를 나누시지요."
"아, 예! 예! ...청화 양, 죄송합니다! 이 무례는 나중에 사죄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내게 허리까지 숙이며 사과하는 모습은 영 보기 껄끄러웠다. 하지만 주변에서 풍기는 이 훈훈한 아우라는 한 편의 청춘 로맨스 드라마를 연상케하는 분위기였다.
"천 주석님. 지금 가셔야 하는게 아니신지?"
"......! 청화 양,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돌아와서 뵙겠습니다!"
천 주석은 복도를 달려가기까지 하며 자리를 떠났다. 칠칠맞게 흘리고 가는 마력을 손으로 흔들어 치워버린 나는 환룡을 따라 병실로 이동했다.
"천자도 괜찮지 않습니까? 후후."
"주둥아리 꿰메버리기 전에 닥.... 흠흠."
[주둥아리 꿰메버리기 전에 닥쳐라.]
"......허어."
환룡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다행히 주변에는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