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화 〉1부 9장 18
봉효, 백청영과의 대화는 제법 큰 소득이 있었다.
제멋대로 나대는 부하의 기강을 강하게 잡았고, 샤오린의 비밀 동영상을 하나 확보했으며, 큐브 하나의 행방을 알게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환룡에게 찾아오라고 하고 싶은데.'
모택평이라는 자가 스위스까지 날아가서 은행을 방문하게 되면 필히 큰 이슈가 될 것이다. 중국의 괴수관리대책국의 국장이 스위스에 방문할 일도 없고, 다른 큐브의 향방을 찾으려면 어쩔 수 없이 은행에 보관해두어야 했다.
'그러면 이제 사실상 다 끝난 셈인데.'
중국에서의 볼 일이 단 1박2만에 끝나버렸다. 비행기에 오른 시간까지 포함하면 30시간도 되지 않을 짧은 시간에 환룡을 각성시키고, 모택평을 제압해, 중국에서 얻을 수 있는 큐브를 두 개나 얻었다.
'호로관의 호로놈은 어쩔까.'
S급 괴물인 이유는 다른게 아니다. 낙양 성의 동쪽 민가에 사는 한 청년의 몸에 이상한 귀신이 씌였는데, 이 귀신이 애비 바꾸기를 밥먹듯이 하는 괴물이 깃들어버렸다.
그래서 S급 괴수가 아닌 S급 괴'물'. 중국 땅 안에서 철저히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는 자다. 그래봐야 S급이지만.
'일단 좀 쉬자.'
김해공항을 출국한 이후 중국 전역을 뛰거나 날거나 하여 이동한 거리 수만 1만 km를 훌쩍 넘길 정도였다. 급한 불은 전부 꺼놨으니 나는 충분히 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봉효."
"예."
"가서 이것 좀 사오세요."
"......저기."
봉효는 내가 메모한 물건에 난색을 표했다. 자신을 심부름꾼 부리는 것에 자존심이 조금 상했는 지, 메모지를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요? 탕후루 사오는 게 어려워요?"
"아뇨. 그거야 쉽습니다만.... 예. 사오죠. 그런데 딸기만 사오라고 하시는 건?"
"딸기 말고는 가치가 없어요."
"...그렇군요. 후후."
백청영은 우선으로 하관을 가렸다. 미묘하게 휘어진 눈꼬리는 나를 보고 웃는 것 같았다. 절로 기분이 나빠져 돈을 주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나는 100원짜리 하나 던져주고 빵이나 사오게 할 악질이 아니다.
"받아요. 환전은 알아서 하시고."
나는 속에서 대충 B급 정도 되는 코어를 그에게 던졌다. 백청영은 공중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코어를 허겁지겁 두 손으로 받았다.
"이, 이건?"
"사탕값."
"예?"
"쓰고 남는 거는 나중에 환룡단 단원들이랑 식사하는데 쓰세요. 아니면 환염령들이랑 같이 단체 회식하는 데 쓰거나."
제값받고 파는 B급 코어가 족히 10억은 할 테니, 520명 가량의 식대로는 차고 넘칠 것이다.
"이렇게 큰 돈을 주셔도 되는 겁니까?"
"푼돈이죠. 원래라면 저기 전갈들 잡으면서 S급 코어 얻고 다녀야했을텐데."
오늘부로 시중에 풀리는 S급 코어들이 넘쳐나기 시작하면 가격이 상당히 내려앉을 것이다. 환룡이 강하게 외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이니, 수천 개의 코어는 전세계로 뻗어나가 곳곳에 요긴하게 쓰이게 될 것이다.
"아쉽네요. 지파룡 코어 하나 얻고 흑전갈들 코어 못 얻어서."
"......어쩔 수 없죠. 환룡단은 그걸로 만족하겠습니다."
"예. 그럼 다녀오세요. 저는 TV 좀 보고 있을게요."
백청영은 빠르게 영체가 되어 사라졌다. 나는 소파에 몸을 편안히 뉘여 TV 채널을 돌렸다. 거의 모든 채널들이 괴수들의 움직임을 찍고 있었고, 그 중 절반 가량이 화이허의 괴수 대격돌을 촬영하고 있었다.
[크아아아!]
[키에에엑!]
흑염룡은 여전히 공중을 선회하며 브레스를 뿜었고, 물지기는 물속을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며 수탄을 집어던졌다.
"음. 역시."
흑염룡은 상당히 고전하고 있었다. 내가 사막에서 큐브를 탈취해, 북경까지 느긋하게 날아, 각자 임무를 부여하고 백청영과 대담을 하는 동안 흑염룡은 물지기를 잡지 못했다.
호언장담과는 달리 흑염룡은 상성의 차이에서 상당히 어려움을 느낀 듯 했다.
"도와줄까...."
곤란해하는 부하를 직접 도와야하는가, 아니면 그의 힘을 믿고 맡겨야 하는가. 어느쪽을 선택해도 애로사항은 꽃피겠지만, 일단 흑염룡에게 전투를 일임하기로 했다.
"물지기 코어 없다고 세계 못 구하는 것도 아니고...."
"사왔습니다."
마침 백청영이 내게 탕후루 한 상자를 건넸다. 딸기만 속속들이 꼬치에 꿰인 탕후루는 윤기나는 설탕 코팅에 흠뻑 절어있었다.
"고마워요. 한 입 드실래요?"
"저는 괜찮습니다. 제 거 따로 사왔으니까요."
백청영은 청포도가 꽂힌 꼬치를 꺼냈다. 혹시나 창염이 좋아하는 기호가 청포도일까하여, 나는 백청영과 하나씩 1:1 교환을 시도했다.
"한 개씩 바꾸죠."
"...차라리 종류별로 하나씩 사올 걸 그랬나요?"
"아뇨. 뭘 그렇게까지. 앉아서 당신도 구경해요. 사람들 어떻게 괴수 잡나."
나는 스크린을 네 개로 분할했다. 흑염룡과 물지기가 싸우는 중계 영상이 둘, 그리고 흑전갈들의 움직임을 담은 영상이 둘. 총 넷 이었다.
"재미있는 거 하나 알려드릴까요?"
"무엇입니까?"
"흑염룡이랑 물지기 싸우는 거, 점점 시청률 떨어지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이것도 시험입니까? 좋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백청영은 청포도를 핥으며 화면을 노려봤다. 나도 그 틈에 흑전갈들의 이동을 주시했다. 그들은 제법 빠른 속도로 이곳 북경을 향해 달려, 꼬박 하루 정도가 지나면 북경에 닿을 것이다.
실시간으로 싸우고 있는 두 괴수.
그리고 북경에 하루 정도 뒤면 도착할 수 천의 전갈들.
흑염룡에게는 유감스러우나, 대중의 시선은 조금씩 전갈들에게로 꽂히고 있었다.
"아. 알겠습니다."
"뭐죠?"
"사람들이 흑전갈 쪽에 더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 아닐까요?"
"10점."
나는 딸기 한 알을 강하게 깨물었다. 실수로 나무 꼬치까지 베어무는 바람에 살짝 짜증이 일었다.
"몇 점 만점입니까?"
"17점 만점이요."
백청영의 대답은 살짝 실망스러웠다. 나는 그와 환룡에 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나눌 수는 있어도, 역시 비전투원은 싸움을 보는 눈이 조금 부족한 모양이었다.
"됐어요. 환룡에게 가서 보좌하세요."
"......실례하겠습니다."
"나중에 정답지는 환룡편으로 알려드릴게요."
백청영은 얼굴까지 붉히며 사라졌다. 인정을 바라는 이가 내게 대놓고 면박을 당했으니 굴욕감을 느낀 모양이지만, 진짜로 백청영의 대답은 17점 만점에 10점짜리 수준이었다.
"그러면 다음 타자."
나는 백청영이 사라진 자리에 코어 하나를 던졌다. 갈색의 코어는 금방 불꽃이 피어올라 육체을 형성했고, TV 스크린의 빛에 반짝이는 대머리 거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여? 난 또 왜 불러? 한국 들어갈 때 까지 코어 상태로 있는 거 아니었어?"
"B급 승급한 기념으로 질문이에요."
나는 백청영에게 했던 질문을 그대로 덕배에게 물었다. 덕배는 흑염룡과 물지기의 전투를 유심히 보다가 중얼거렸다.
"그냥 개노잼인데?"
"왜요? S급 괴수들이 붙는 게 얼마나 화려하고 멋진데."
"붙으면 한 성깔 하게 생긴 놈들이 몸 사리면서 멀찍이 깨작거리고 있는게 뭐가 멋지냐?"
"17점입니다."
나는 덕배를 칭찬하며 흑염룡이 가진 한계를 지적했다.
"인간이 괴수가 된 케이스라 그런지 생각의 방식이 아직 인간적이에요. 강제로 코어를 S급으로 각성시킨 반동이기도 하죠. 육체는 S급이라도 정신이 A급이니까."
"그건 이해하지. 나도 화염거인 쓰니까."
C급 시절부터 A급 화염 거인의 힘을 써왔던 덕배의 입장으로서는 흑염룡의 현상태에 더 잘 이해할 것이다. 그가 정령석의 힘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한 것 처럼, 흑염룡도 육체 전체의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 하나 더 있어요. 덕배 학생 이야기한 것에서 나아가서. 뭘까요?"
"......사람처럼 싸우는 거?"
"하산하십시오. 덕배 학생."
역시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을 사용하는 동지들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덕배는 흑염룡이 무엇이 부족한지 금세 깨달았다. 나는 흑염룡의 전투 방식을 지적했다.
"공중에서 브레스. 하강하면서 브레스. 수탄을 요격하며 브레스. 저래서야 스펙이 웁니다. 스펙이."
"그래서 어쩔 거냐. 저거 그래도 보고 있을 거야?"
"아뇨. 그래서 실험을 하나 할 거예요."
"이 □□?!"
덕배가 기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험이라는 말에 진절머리가 난 것도 있을테지만, 항상 내 실험의 1등 모르모트는 부하 2호 조덕배였다.
"그럼 화이허로 가도록 하죠. 괜찮아요. 당신이 메인이 될 테니."
"뭔 소리야! 나 화염 거인으로 해도 A급 밖.... 야. 잠깐만. 혹시 네가 생각하는 게 이거냐?"
소곤소곤.
덕배가 내 귀에 작게 속삭였고, 나는 너무 놀라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떻게 알았어요?"
"척하면 척이지. 흐흐, 그래. 그렇단 말이지?"
모르모트가 상당한 의욕을 보였다. 이전의 실험들과는 달리 덕배가 메인이 되는 전투인 만큼, 그는 상당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좋아요. 대신 지면 당분간 신발이에요."
"뭐 이 신발?"
"말 예쁘게!"
"나 욕 안했다!"
듣기에 기분이 나빴다. 나는 덕배를 코어로 바꾸고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제 서서히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나는 내 호기심과 지지부진한 전투를 끝내기 위해 회수로 전속력으로 날았다.
* * *
캬아아아!
흑염룡이 다시 브레스를 뿜었다. 물지기는 수탄을 날릴 겨를도 없이 부리나케 몸을 옆으로 굴려 브레스를 피했다.
쿠---웅!
흑염룡의 브레스는 애꿎은 수면을 때렸다. 거대한 물줄기가 사방으로 터졌으며, 흑염룡은 인상을 찌푸리며 하늘로 다시 날아올랐다.
파바밧-!
물지기가 날린 고압수탄이 흑염룡이 있던 곳을 찔렀다. 물지기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팔을 이용해 물장구를 치며 수탄을 날렸고, 그 속도와 파괴력은 마치 메이저 리그의 너클볼 전문 투수라도 되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는 끝도 없겠어.]
흑염룡은 허공에 멈추어 마력을 골랐다. 강제로 S급까지 확장된 덕분에 마력은 차고 넘쳤지만, 그걸 활용하는 자신이 아직 S급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키기긱!
그에 비해 상대인 S급 괴수 물지기는 그 힘을 완벽히 다루어내고 있다. 상성에서 밀린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시간이 끌리는 건 흑염룡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래서야 그 분을 볼 면목이 없군.]
"그렇죠?"
[......신?]
흑염룡은 자신의 등 뒤에 올라탄 피닉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느새, 라는 생각을 할 틈도 없이, 피닉스는 흑염룡의 등을 탕탕 두드렸다.
"수고했어요. 지금부터는 배턴 터치입니다."
[신! 저는 아직 승리를-]
"반성하세요. 그리고 왜 계속 밀렸는지 생각하시고."
나는 흑염룡을 공중에서 코어로 바꾸었다. 두 괴수의 격돌을 촬영하고 있던 자들이 화들짝 놀라 장비를 챙기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엑!!
물지기는 승리의 포효를 부리며 사방으로 수탄을 던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짜증나게 하던 드래곤이 사라졌으니, 이 화이허라는 영토는 여전히 자신의 것임을 과시하는 몸부림이었다. 그게 자신의 마지막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실험을 시작하지."
챠가챠각.
나는 양손에 든 코어들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한쪽에는 조덕배의 코어와 정령석을,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정령석을 먹고 강제로 확장된 흑염룡의 코어를 들고 흔들었다.
"너무 오래 시간 끌면 진짜 도망친 줄 알테니까."
키기긱?!
난동을 부리던 물지기가 내 마력을 느끼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S급의 상대를 하다가 갑자기 그 위의 존재를 보고 놀란 모양이다.
"안심해라. 너를 상대할 자는 내가 아니니."
광검, 샤오린, 혼돈환룡. 숱한 SS급 강자들을 상대해 온 나로서는 이제 SS급이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몸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물지기가 아무리 상성상 불리하다고 하더라도, 내가 직접 나서면 한 주먹거리도 안 될 약자에 불과했다.
화르륵!
내 몸을 중심으로 거대한 불꽃의 구가 형성되었다. 직경 직경 십미터에 이르는 불꽃의 구는 마치 '알'과 같은 형태가 되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전조가 되었다.
"조덕배, 기상!"
화륵.
조덕배가 부활했다. 덕배는 일언반구도 없이 내 앞에서 자신의 정령석을 챙겨 심장에 때려박았다.
구궁, 구궁.
코어가 강하게 맥동하며 마력을 끓어오르게 만든다. 덕배의 몸은 푸른 화염을 머금고 거대해져서, 서울을 날뛰던 푸른 화염의 거인이 되었다.
"B급으로 진화하더니 변신 속도가 더 빨라졌네요?"
[여전히 A급인 건 똑같지만.]
"그럼 S급 방어구 달아드리죠. 푸흐흐."
흑염룡은 강제로 괴수가 되었지만, 근간은 괴인이다.
그러니 코어웨폰과 마찬가지로, '무기'로 바꿀 수 있을 터.
"실험 2단계!"
나는 마력을 조작해 흑염룡의 코어를 자극했다. 그리고 그 마력을 덕배의 몸으로 연결시켰다.
□□□□□!!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기합소리와 함께, 화염 거인의 몸에서 검은 비늘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디자인의 모티브는 바로 나, 피닉스의 '괴인화'. 물론 불사조를 닮은 나와 달리, 화염 거인을 둘러싼 갑주의 형태는 흑염룡의 외피였다.
"그러면 1등석에서 구경할까요?"
나는 화염거인의 어깨에 착지했다.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불꽃의 알의 존재에 놀라 다시 이쪽으로 카메라를 돌리고 있다.
"셋, 둘, 하나."
딱.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마자 불꽃의 막이 사라졌다. 허공에 웅크리고 있던 화염거인이 중력에 이끌려 수면으로 낙하했다.
쿠웅--!
화염 거인은 마력을 방사하며 수면 위에 착지했다. 물지기는 심상찮은 화염 거인의 흉흉한 기세에 뒷걸음질을 쳤다.
"부하 2호."
[왜?]
"3분 드릴게요."
[...충분하지!]
드래곤의 갑주를 입은 화염 거인이 수면을 달렸다.
역시 싸움은 직관이지.
키에에엑!!
[입 다물어라, 입 냄새난다!]
화염 거인의 건틀릿이 물지기의 하관을 날렸다.
...찔리는 이유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