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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80화 (180/1,497)

〈 180화 〉1부 9장 14

엄밀히 따졌을 때 봉효가 잘못한 것은 아니다.

봉효는 자신의 주군인 환룡에게 가장 최선이 되는 방향으로 모든 계획을 짜냈고, 실제로 세 괴수 중 하나인 지파룡을 쓰러뜨리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봉효의 성공이 내 성공은 아니다.

나는 환룡을 각성시킨 만큼 하루 정도는 휴식을 취하려했다. 석하랑을 보내고 은유하와 조우해 코어에 대한 배분을 확정한 다음, 이틀에 한 마리씩 잡으며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봉효는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 내가 건드리기 전에 S급 코어 셋을 모두 환룡에게 바친다는 작전을 세운 모양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내 뒷통수를 치는 식으로 작전을 실행하고 말았다.

만약 그가 내게 대화를 요청했다면, 나는 기꺼이 둘이라도 내놓았을 것이다. 내 목적은 괴수의 코어보다는 큐브에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봉효의 입에서 튀어나온 '큐브'라는 말에 너무 놀라서 휘두르던 덕배를 멈추지 못했다. 결국 나는 봉효가 큐브의 존재 또는 그 행방을 안다는 것만 확인하게 되었고, 봉효를 부활시키려면 환룡의 힘이 필요했다.

"꼬일대로 꼬였네요. 하하."

나는 어지간한 빌딩 보다도 거대한 체구를 가진 흑사갈의 자태에 입꼬리가 씰룩였다.

키야아아악!!

지상에 발을 디디고 있는 10m 정도는 거대화한 흑전갈의 모습이지만, 그 몸통의 가운데에서 돋아난 여인의 상반신은 무려 20m를 넘었다. 검은 머리칼로 눈을 가린 흑사갈의 입에는 몸통이 반쯤 잘린 환룡단 단원들이 물려있었다.

"흐음."

상당히 아름다운 미인의 육체였지만, 문제가 있다면 괴수답게 나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29금의 나체.

"거기에…."

카가가각. 카가가각.

모래바닥을 뚫고 흑전갈들이 튀어나왔다. 흑사갈이 낳은 흑전갈들은 하나같이 S급이었다.

"정확히는 엄청나게 다산을 하고 새끼들끼리 잡아먹게해서 강해진 거지만요."

육안으로 보이는 흑전갈의 수만 무려 100. 거기에 흑사갈 본체를 비롯해 지하에 숨어있을 괴수들의 수를 생각하면 족히 수백은 넘을 것이다.

"많네요. 엄청."

이대로 사막을 벗어나면 차원문보다 더 큰 재앙이 될 것이다. 나는 봉효의 시신을 불태운 다음 코어를 챙겨,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떻게 할까…."

캬아아악!!

흑사갈이 내게 팔을 휘둘렀다. 나는 유유히 날개를 움직여 느린 공격을 피했고, 흑사갈의 주먹에 붙잡힌 괴인 하나를 발견했다.

"어이쿠, 임대 나간 배신자 괴인이시네요?"

"......."

황제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이유로 봉효에게 가담해 내 통수를 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머니 손에 꼭 붙잡힌 모습이 영 보기 우스웠다.

"그러길래 왜 딴 맘을 품었어요?"

나는 흑사갈의 주먹을 따라 날며 황제에게 재잘댔다. 황제는 귀까지 막으며 대화를 거부했고, 흑사갈은 비명을 지르며 나를 떨어뜨리려했다.

카앙!

나는 흑사갈의 반대편 손을 발로 차서 떨어뜨렸다. 흑사갈의 몸이 급격히 아래로 쏠렸고, 나는 주먹이 벌어진 틈을 타서 황제를 구출해냈다.

"당신이 도와주니까 봉효가 S급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 아니겠어요? 왜 도운 거예요?"

"내 후손이니까. 내가 세운 제국의 후예들을 내가 돕겠다는데 그것도 안 되나?"

"......아, 그럼 인정합니다."

설마 여기서 핏줄을 챙길 줄이야. 나는 2천5백년이 흘렀음에도 후손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황제의 마음씨에 존경스럽기도 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반도에 있는…. 아, 그러면 고인 능욕인가."

"이미 너는 나를 능욕하고 있다. 당장 내려놓지 못해?!"

황제는 몸을 아둥바둥거리며 화를 냈다. 나는 그를 구출하기 위해 꼬리를 잡았다. 꼬리만 잡았다. 황제는 사지가 바닥을 향해 축 늘어져 있었다.

"그래도 좋은 미끼가 될 것 같은데."

캬아아아악!!

흑사갈이 포효하며 나와 황제를 낚아채려고 했다. 신경질과 분노까지 더해진 손짓은 새끼가 납치당한 어미 짐승의 본능처럼 느껴졌다.

"호오."

재미있는 생각이 났다. 나는 황제의 말을 곱씹으며 손을 놓았다.

"으아아악?!"

"놓아달라고 하셔서."

날지 못하는 황제는 사막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흑사갈이 화들짝 놀라 손바닥을 겹치며 떨어지는 황제를 받으려 했고, 그 사이 나는 흑사갈의 겨드랑이 아래로 파고들었다.

"빈틈!"

족히 애드벌룬 사이즈만한 밑가슴 아래에 손톱을 박아넣었다. 생긴 건 인간처럼 생긴 주제에 피부는 또 흑전갈의 외피처럼 단단해, 손톱을 박아넣기가 여간 어려웠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흑사갈은 괴성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나를 붙잡았다. 나는 밑가슴 아래 접히는 부분에 찔러넣은 손톱으로 마력을 흘려넣었다.

"......역시."

큐브가 있다. 심장 안쪽에 큐브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나는 흑사갈에 의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지만, 그보다 큐브의 존재를 확인한 게 더 중요했다.

"후후. 후."

흑전갈들의 그림자가 내 위를 덮기 시작했다. 20m 높이에서 떨어졌으니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시체를 뜯어먹으려 올 셈인 듯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럼 어쩐다."

콰득! 콰드득!

흑전갈들이 열심히 집게발을 놀리고 이빨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으로는 내 보호막은 뚫지 못한다.

"어쩐다."

카드득! 카드드득!

흑전갈들이 열심히 나를 깨무는 동안, 나는 이 사단을 어떻게 수습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냥 싹다 도륙을 내버릴까.'

"정말…. 사람 짜증나게 만들고."

아직 태양은 하늘에 반짝 걸려있다. 내가 작정하고 몸을 숨기기만 한다면 그 누구도 나를 찾지 못할 것이다. 봉효가 괜히 흑사갈을 건드린 바람에 흑사갈과 수백 마리 흑전갈들은 이제-

"아."

나는 신묘한 계책이 떠올랐다.

"모두가 만족할 계획...푸흐흐."

내가 아주 야아아아악간 욕심을 버리기만 한다면, 모두가 만족할 그런 흉계가 떠올랐다. 나는 내 다리를 물고 늘어지는 흑전갈의 대가리를 차올린 뒤, 몸을 일으켜 땅을 박차고 점프했다.

키이이익?!

흑사갈이 젖을 좌우로 흔들었다. 하지만 딱딱한 유두 바로 위에 안착한 나를 떨어뜨릴 수는 없었다.

"거 참 떽떽거리네. 부끄러우면 누구처럼 옷이라도 하나 걸쳐야지!"

키이이익!!

흑사갈은 내 말을 분명히 알아들었다. 인간이 되기를 바란 건지 아니면 인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어서 인간의 성향이 나타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가슴에 큐브를 담아둔 이상 죽일 수 밖에 없다.

"큐브만 없었으면 어디 가두고 흑전갈만 낳게 하는…. 아, 그건 너무 비윤리적인가?"

캬아아아아아악!!

흑사갈이 나를 먹어 치우려 입을 쩍 벌렸다. 나는 입꼬리가 씰룩이는 것을 간신히 참고, 외려 흑사갈의 가슴 위를 달려 그의 입안으로 점프했다.

"그러길래 왜 인간의 모습으로 거인이 돼서 이런 약점을 만드시나. 푸흐흐."

외피가 단단한 흑사갈의 약점은 당연히 안쪽이다. 흑전갈의 입 안에도 독액이 가득했지만, 그걸로는 나를 녹일 수 없었다.

푸쉬이이---

녹이기 전에 태우면 그만이니까. 아마 흑사갈의 입장에서는 입속에 불덩이가 굴러들어온 느낌일 것이다.

"그러면."

나는 발을 굴렀다. 불꽃에 달구어진 구둣발을 혓바닥에 비볐다.

키이이이익!!

"까불면 아예 다 태워버린다."

……..

내 엄포에 흑사갈의 행동이 멈췄다. 여전히 입안은 나 때문에 불이 났지만, 그래도 인간의 몸이 터지는 건 원치 않은 눈치였다.

"흠."

제법 정교하게 만들어진 혓바닥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목젖 아래 어둠만이 가득한 식도가 낭떠러지처럼 아래를 향해있었고, 나는 아무 망설임없이 점프해 식도 아래로 내려갔다.

흑사갈의 외형은 인간과 다를게 없었으나, 그 안은 인간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카드득. 카드득.

인간의 여체 안에 숨어있던 새끼 흑전갈들이 내가 피운 불빛에 이빨을 갈며 괴로워했다. 나는 유유히 흑전갈의 심장으로 날아, 미리 위치를 확인했던 큐브의 존재를 살폈다.

키이이익!!

심장에서 흑사갈의 여체와 똑같은 모습의 여자 상반신이 돋아났다. 크기는 평범한 인간 여성의 상반신이었으나, 그 아래는 흑전갈의 하체와 똑같은 형태의 괴수였다.

"그래. 네가 흑사갈의 본체지."

키기이잇….

흑사갈은 밑가슴이 뚫리는 순간부터 나와 자신 사이에 있는 힘의 격차를 직감한 듯 했다.

"나는 다른 거 안 바란다. 큐브. 큐브만 있으면 돼."

키기기긱.

흑사갈은 자신의 가슴을 양팔로 가리며 도리질을 쳤다. 나는 흑사갈에게 손바닥을 내밀며 표정을 굳혔다.

"열 셀 동안 큐브를 내놓지 않으면 코어까지 같이 가져가겠다. 하나, 둘, 셋."

키기긱.

흑사갈은 갈등하는 듯 했다. 새끼들과 힘을 합치면 나를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갈등하는 눈초리였고, 나는 그저 가소로워서 헛웃음이 났다.

"열. 끝."

기긱?

"열 셀 동안이라고 했지 열까지 셀 동안이라고 안했다."

키기긱!

'개소리!'인지 '비겁하다!'인지는 알 수 없다. 화속성 괴수라면 대충은 알아들을 수 있어도 흑사갈이 뭐라 지껄이는 지 나는 알 방도가 없었다.

"그러니 큐브 가져간다."

나는 공중을 박차고 달려 흑사갈의 뒤로 손을 뻗었다. 쭉 뻗은 손바닥에서 불꽃이 방사되어 거대 흑사갈의 심장을 휘감았다.

화르륵!

키에에엑!

불똥이 등에 튄 흑사갈의 본체가 질겁을 하며 떨어졌다. 거대괴인의 심장은 금방 불꽃에 휩싸여 타들어갔고, 나는 그 속에서 벌겋게 익어가는 작은 큐브 조각을 발견했다.

"......이제 네 번째 큐브인가. 하아."

큐브를 움켜쥐어 심장에서 뜯어냈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흑사갈의 본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새끼 흑전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사사삭.

마치 바퀴벌레 때가 움직이듯, 새끼 흑전갈들은 아래를 향해 달렸다. 다른 놈의 등을 타고 내려가다 떨어지는 놈도 있었고, 앞의 놈들을 치고 가며 아래로 달리는 넘도 있었다.

"집이 무너지니 도망쳐야죠. 푸흐흐."

큐브를 빼버리면서 흑사갈의 아늑한 집은 무너졌다. 이제 30m 인간 빌딩 안에서 수 백 수 천마리의 새끼 흑전갈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나도, 중국도, 히어로들도, 환룡단도 만족하는 최선의 결과가 되겠네요."

화륵!

나는 날개를 펼쳐 거대 흑사갈의 몸 안에서 빠져나왔다. 태양빛 아래 다시 몸을 숨기고 내려다보는 흑사갈의 거체는 유지력의 근원인 큐브를 잃고 사상누각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키아아악!!

캬아아악!!

성체인 S급 흑전갈들이 오도방정을 떨며 비명을 지른다. 형제인 새끼들과 어미가 걱정스러운 듯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사태의 원흉인 나를 향해 날카로운 꼬리를 번뜩이고 있다.

"일단 하나."

나는 마력을 피워올렸다. 남들이 모르는 큐브 하나를 얻었으니, 재빨리 조치를 취해야 했다.

"일단 황제 코어 좀 물어와줄래?"

-알겠다는 거시야.

내 검지 끝에 앉아있던 미니피닉스가 아래로 활강하며 흑전갈 괴인의 코어를 찾아 입에 물었다. 흑전갈들이 미니피닉스에게 독꼬리를 휘둘렀으나, 워낙에 크기가 작고 빨라 전혀 맞지를 않았다.

-받으라는 거시야.

미니피닉스는 내 손바닥에 황제의 코어를 놓았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새라서 눈은 없지만, 시선은 분명 내가 품안에 넣어둔 큐브를 향하고 있었다.

“.......”

-.......

미니피닉스는 눈치를 보고 있다. 내가 무신의 시체에서 빼낸 큐브를 가을에게 맡겼으니, 이것 하나 정도는 자신에게 쓰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였다.

“이걸로 괴수들 생산을-”

-.......

“하는 건 의미가 없으니. 여기.”

나는 큐브를 미니피닉스의 입에 밀어넣었다. 미니피닉스는 잽싸게 큐브를 집어삼켰고, 곧 우리의 육체는 빠르게 바뀌었다.

[그렇게 좋은가?]

나는 괴인형인 피닉스가 되었고,

“오랜만에 바깥나들이해서 좋네요. 푸흐흐.”

그는 인간형인 창염이 되었다.

나는 전지전능한 만능의 물건인 큐브를 고작 창염을 만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당연히 후회는 없다.

[그래서 나를 도와 세계를 구할 생각은 들었나?]

“푸흐흐. 무슨 벌써. 당신이 모은 모든 큐브를 제가 써도 모자를 판인데요?”

창염만 나를 도와준다면 나는 바로 신화의 단계-SSS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창염은 한사코 그걸 거부하고 있으며, 그게 내가 환룡에게 정령으로서의 증거를 보이지 못하고 있던 이유였다.

“그래서 저는 왜 불렀어요? 뭐 도와달라고 하려는 건-”

[그냥. 보고싶어서 불렀다.]

“.......”

창염은 말이 없었다. 나는 바퀴벌레마냥 들끓는 흑전갈 무리들을 가리켰다.

[나중에 성주가 오면 저거보다 더 심하게 쏟아지겠지?]

“......전세계에 차원문이 도시마다 생기겠죠. 그리고 거기서 온갖 괴수들이 튀어나오고.”

[그래. 그걸 막아야지. 그래서 나는 정령 하나를 각성시켰다. 혼돈환룡을 환룡으로 말이야.]

“축하드려요. 이제 남은 정령은 넷이네요.”

창염은 담담히 내 전과를 칭찬했다. 나는 창염에게 손을 건넸다.

[지금부터 환룡을 보러 갈 생각인데, 직접 보러 가겠나?]

“아뇨.”

창염은 쓰게 웃으며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존재에 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세요. 당신이 제 몸을 빼앗은 순간부터, 당신이 창염이고 피닉스니까.”

[......알겠다. 그러면.]

나는 창염을 안았다. 창염은 순순히 내 팔에 안기며 게슴츠레 웃었다.

“푸흐흐. 이렇게 하면 꼬셔질 줄 알아요?”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다.]

“좋으실대로 하세요~ 그래봐야 안 넘어가겠지만.”

그러면서도 정작 창염은 자신의 팔을 내 목에 걸었다. 나는 순순히 창염을 안고 하늘로 높이 날아올랐다.

[북경까지 느긋하게 날지.]

“어머? 바쁜 거 아니었어요?”

[이럴 때 여유부리려고 지금까지 바쁘게 움직인 것 아닌가? 흐흐.]

“.......”

창염은 아무 말이 없었다.

수 천 마리의 흑전갈들이 사방으로 퍼지지만 알 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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