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1부 9장 10
한 시간의 휴식 후.
우리는 다시 본격적으로 다음 논제를 이어나갔다. 내용적으로 외부에 노출할 수 없는 민감한 정보도 있는 만큼, 핵심 멤버들만 자리에 배석해 의제를 나누었다.
논제.
'괴수를 조종하여 쓰러뜨린 뒤, 그 코어는 어떤 식으로 분배할 것인가?'
"당연히 청화 양이 모두 가져야합니다. S급 괴수들을 쓰러뜨리지 못한 건 그 쪽 아닙니까? 당연히 소유권은 청화 양에게 있으며, 전적으로 청화 양 개인의 것입니다."
석하랑은 원탁이기 이전에 한국의 대표로서, 코어의 소유권이 청화에게 있음을 강력히 주장했다.
"중국 땅에 있는 괴수인데도요?"
"중국 땅에 있는 거지 중국이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게 아니잖습니까?"
석하랑은 유황숙과 대치했다. 괴수의 코어는 석유보다도 더 민감한 자원이었고, 당연히 그에 따른 분쟁은 국가간에 민감한 불화로 번지기 일쑤였다.
"아무리 저희가 원탁에 지원을 요청했다고는 하지만 설화령께서 이렇게 나오시는 건 월권입니다. 설화령은 한국의 히어로입니까, 아니면 원탁의 히어로입니까?"
"한국 히어로인데요? 불만있으면 원탁에다가 항의하세요."
"허…."
카메라가 없다는 것을 인지한 석하랑은 말투만 공손하다 뿐이지 금방 본색을 드러냈다. 나는 묵묵히 석하랑에게 대외적인 협상을 맡기고, 정령으로서 환룡과 물밑 협상을 시도했다.
[자꾸 잘 거냐? 뭐하자는 거야, 지금. 네가 나서서 회의 빨리 마무리하고 괴수 잡으러 가야하는 거 몰라?]
[영 귀찮은데. 내가 나선다고 정리 되겠어?]
[정리하라고 그 몸에 깃드는 걸로 이야기를 나눴잖나.]
"흐음."
모택평은 그저 묵묵히 차를 홀짝이며 차를 음미할 뿐이었다. 난 속이 답답해 천불이났지만, 환룡은 그런 내 답답함을 즐기기라도 하듯 여유를 부렸다.
[뭐 그리 급해…. 나 빙의한 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는 시간이 아깝다. 그도 그럴게.]
탁. 석하랑이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배석한 이들의 이목을 끌었다.
"좋아요. 자꾸 귀찮게 굴면 제가 다 잡아서 가겠어요."
"그건 말도 안 되는 행패입니다. 어찌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럼 그건 협회와 중국의 뜻이라고 봐도 좋습니까? 중국의 히어로들이 먼저 나서서 S급 괴수들을 처리할테니, 만약 실패하면 그 뒤에 조종을 하든 죽여서 부활시키든 마음대로 하라는 게?"
"굳이 따지자면…."
유황숙은 시선을 흘렸다. 그의 토끼귀가 쫑긋하며 모택평을 가리키고 있었다. 모택평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당의 의지입니다. 괴수들이 외국으로 탈출한다면 모를까, 아직까지 중국 땅에 있는 괴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설화령께서는 용인하셨겠습니까."
"큭."
석하랑은 진심으로 울컥했다. 정론이고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걸 말한 이가 모택평의 탈을 쓴 환룡이라는게 더 화를 돋구었다.
[쟤 뭐야? 왜 방해하는 거야? 혹시 모택평한테 역으로 잡아먹힌 거 아냐?]
[그럴 리는 없다. 분명히 저건 환룡이 맞아. 정령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나.]
[그런데 왜 자꾸 방해질이냐고.]
석하랑도 인내심이 그리 강한 사람은 아니다. 나도 제법 비점이 낮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환룡이 부리는 몽니는 상당히 짜증이나고 사람을 열받게 만들었다.
"모 국장님."
내가 먼저 그를 불렀다. 사람들은 '드디어 올 것이 왔나'하며 나와 모택평을 번갈아봤다. 나는 그에 신경쓰지 않고 마력까지 방출해 환룡을 압박했다.
"지금은 괴수들의 대략적인 위치만 알고 있지만, 괴수들이 갑자기 일어날 수 있겠죠?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에요."
"......예, 그렇습니다. 또다시 '굿모닝' 소리가 울린다면, 자고 있던 괴수들도 몹시 분노하겠지요. 잠을 깨운 이를 죽여버리고 싶을만큼 말입니다."
"그렇다면 괴수들이 갑자기 대륙 전체에서 들고 일어나기 전에, 자고 있는 틈을 노려서 각개격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제 몸은 하나밖에 없고, 괴수들을 수하로 부리기에는 시간이 좀 걸리니까요."
"과연. 어떠한 '의식'같은 게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의식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할 필요가 있겠군요. 지금은-"
"제 말은."
나는 강하게 목소리를 높여 환룡의 말을 끊었다.
"코어에 대한 분배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으니, 지금 바로 괴수를 쓰러뜨리러 가자는 말이었습니다만."
한 마디로 정리하자.
[닥치고 빨리 끝내라.]
"......후후."
환룡이 결국 포기했다. 빙의말고는 할 줄 모르는 환룡은 내게 마력을 맞받아치지도 않았고, 성을 내며 맞서 싸우지도 않았다.
"청화 양의 의지가 거기까지 강하다면 어쩔 수 없지요. 다만, 청화 양은 협상을 대신할 사람이 있습니까?"
"윽."
석하랑은 눈을 찌푸렸다. 석하랑이 협상자로 나서면 한국적인 입김이 들어가니 협상이 지지부진, 그렇다고 내가 협상을 나서자니 면이 서질 않는다. 그렇다고 협상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그렇다면 협상 전문가를 불러야 할 때군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환룡은 눈을 빛내며 기대하는 눈치를 보였다.
[천가을 아니다.]
[그럼 꺼지라고 해….]
[이게 죽을려고.]
비록 나 혼자 막무가내로 움직이기는 하지만, 이럴 때를 대비해서 협상 하나는 전세계 어디를 내놓아도 꿀리지 않는 최고의 협상가를 모셨다.
"그런 사람이 있어?"
"예. 아마 지금쯤 북경 도착했을 거예요."
어제 불렀으니까. 나는 석하랑을 향해 테이블 아래에서 북두칠성 모양을 그렸고, 석하랑은 금방 눈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같이 돌아갈게."
"...별로 추천은 안 하는데요."
이미지 상 석하랑이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을텐데. 나는 작전회의를 마친 뒤, 중앙당 측에 양해를 구했다.
"저, 협상 전문가를 모시고 싶은데요…."
"정부 측 인사입니까? 그러면 외교적 절차에 따라…."
"아뇨. 평범한 샐러리맨이에요."
"...샐러리맨이라."
환룡을 비롯한 중앙당 측 인사들은 눈썹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졌다. 환룡이야 내 성정을 어렴풋이 알고 있으니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있지만, 다른 이들은 겨우 샐러리맨이 S급 코어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는 것에 이견이 갈리는 눈치였다.
"이거 우리가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청화 양은 서울의 난민이라고 했잖습니까. 그러면 샐러리맨이라고 해봐야…?"
"마음을 굳게 다잡으십시오, 주석님. 아무리 그래도 우선적으로 주석께서는 인민들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천자와 유황숙이 몰래 속삭이지만 다 들렸다. 둘 다 괘씸하니 협상 전문가에게 3%만 벗겨먹으라고 제안해둬야겠다.
"그러면 이 이후는 그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삐리리리.
모든 워치가 동시에 울렸다. 괴수의 출몰을 알리는 경고음에 나는 의문이 치솟았다.
'이 근방에는 나타날만한 괴수가 없는데?'
"야. 뭐야 이거?"
석하랑이 황급히 내게 스크린을 밀었다. 스크린에는 속보로 가득한 내용과 함께, 호수면에 떠서 홀로 날뛰고 있는 괴수의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긴급] 동정호, S급 괴수 출현. <지파룡> 추정.
"이, 이게 무슨?"
"......후우."
나는 일부러 크게 숨을 골랐다. 중앙당 인사들이 내 짜증에 긴장했고, 그 중 특히 모택평이 평정을 잃고 눈이 떨리고 있었다.
"하아."
지파룡은 동정호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 괴수다. 아마도 내 굿모닝 테러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을 정도로 태연한 존재였고, 게임 상에서는 비선공 필드보스로 분류되어있는 지룡이었다.
그런 괴수가 호수면에서 날뛰고 있다. 얼핏보면 홀로 허공을 상대로 쉐도우 레이드를 상대하는 것 같지만, 실상 괴수는 수백에 이르는 유령 군세와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환룡.]
[......왜?]
[봉효는 어디에 있지?]
[.......]
환룡은 찻잔을 들어올렸다. 목이 바싹 마른 듯 살짝 떨리는 손으로 입술을 적신 환룡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쾅!
"처, 청화 양?!"
더이상은 참을 수 없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성큼성큼 걸었다. 밖으로 나가는 문을 향해.
"어딜가시는 겁니까?!"
"사람들 구하러요!"
쾅!
나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밖에서 회담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직원들이 내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
내 바로 뒤에는 유령처럼 따라붙은 샤오린이 있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석하랑과 달리, 샤오린은 그의 마력감응력만큼 상당히 임기응변이 뛰어난 존재였다.
내가 일으킨 소란에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중앙당이나 협회의 인사들이겠지만, 그들이 전한 이 소란은 프레스룸에 대기하고 있을 기자들에게도 전달될 것이다.
"청화 양! 갑자기 무슨?!"
"지금 이 순간에도 괴수가 날뛰면서 사람들이 두려워할 거라고요! 저는 여기서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 없어요!"
쿵쾅쿵쾅!
야단법석을 떨며 복도를 달렸다. 협회의 직원들은 나를 막을 생각조차 못했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내가 달리는 걸 보고 놀랐다.
"하아, 하아."
제법 넓은 공터까지 나온 나는 허리를 숙여 숨을 헐떡였다.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샤오린은 의아한 눈초리였지만 별다른 딴죽을 걸지는 않았다.
"이게 무슨?!"
"저는 갈 거예요!"
"간다니, 어떻게-"
나는 안주머니에 숨겨둔 구슬 하나를 높이 치켜들었다. 내 병실을 촬영하러 온 기자들의 앞에서 내가 황급히 숨겼던 그 구슬-흑염룡의 코어를.
"부......."
아주 중요한 걸 까먹었다. 부활 자체는 그냥 가능하지만, 그 부활에 이르는 과정을 사람들에게 인식 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이 시점에 해야하나?
"......후우."
해야하는 게 아니다.
할 수 밖에 없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하늘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창염개진!"
...그래, 안다. 모두가 흠칫 놀라며 손을 꿈틀거리는 것을.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 같은 것이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 불꽃이여!"
샤오린의 표정이 썩어들어간다. 뒤따라온 석하랑은 아예 귀를 막고 자리를 피한다. 모두가 내 절규어린 비명에 경악하지만, 나는 일단 대사를 끝마쳐야했다.
"지금 그대의 주인이 명하노니, 이 땅에 다시 그 불꽃을 피워올려라! 현현하라!"
화륵.
내가 허공에 띄워올린 코어에서 불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푸른 불꽃이 거대한 드래곤의 형태를 갖추어나가고, 이내 곧 불꽃의 육체에 검은 비늘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번쩍!
흑염룡이 눈을 떴다. 코어가 되었던 그는 나의 영창에 의해 다시 S급 괴수로서 부활하게 되었고, 나는 잽싸게 그의 팔을 타고 달려 등에 올랐다.
"출발!"
캬아아아아아!!
흑염룡이 포효하며 날개를 펼쳤다. 공터에 모여든 사람들은 흑염룡이 펼친 날개의 바람에 고개를 돌렸고, 흑염룡은 땅을 박차고 하늘로 서서히 날아올랐다.
"부활의 패널티가 너무 강한 것 아닙니까?"
어느새 내 옆에 안착한 샤오린은 울 것 같은 얼굴로 간신히 터지려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지상, 건물 안쪽에 숨어있던 석하랑은 얼굴을 가린 채 나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지는 더 심하게 했으면서."
"예?"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듣지 못할 위치이니 나는 더 내숭을 떨지 않기로 했다. 나는 샤오린을 노려보며 그를 추궁했다.
"너도 한 패인가?"
"설마요. 환룡께서는 딱 하나의 명령만 제게 내리셨습니다."
샤오린은 자신의 심장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너 하고싶은 대로 다 해라'.라고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환룡한테 내 발을 묶으라는 명령을 받은 게 아니고?"
"무슨 섭한 말씀을."
"......됐다. 애초에 네가 이런 얄팍한 수에 동참했다면 내가 금방 눈치챘겠지."
샤오린은 거짓말을 잘 할 줄 모른다. 아무리 괴인에 대한 절대명령권까지 사용했다고는 해도, 샤오린 개인의 성정까지는 바꾸지 못한다. 그 예로.
"SR6974."
"!!!!"
샤오린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는 샤오린과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너지?"
"....................ㅖ."
샤오린은 개미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짓말은 전혀 못하고 진실을 중요시하는 성정이니, 그 성정을 나만틈 아는 이는 그런 샤오린을 아예 자신의 흉계에서 빼고 작전을 실행했을 것이다.
"젠장. 환룡 이게 진짜…."
환룡 개인은 어떨지 몰라도, 봉효를 위시한 환룡단 전원은 중국인이다. 환룡도 오히려 나보다 봉효의 의견을 더 많이 따르고 있으니, 봉효가 나서서 나를 뒤통수쳤다면 환룡 또한 그에 거들었을 터.
"저거…. 어휴."
나는 지상에서 나와 흑염룡을 올려다보는 환룡을 향해 남들 몰래 가운데손가락을 들었다. 환룡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눈치였지만, 나는 내 감정을 그대로 던지고 흑염룡의 기수를 돌렸다.
"남쪽으로! 달립니다!"
[알겠습니다, 신이시여!]
크아아아아아아!!
흑염룡이 괴성을 지르며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동정호. 그리고 그 안에 잠들어있는 지파룡.
환룡이 미끼가 되어 국빈 초대 행사로 시간을 끄는 사이, 환룡단은 먼저 S급 코어를 획득하려고 얄팍한 수를 쓴 것이다.
'빼앗기면 안 된다. 절대로.'
지파룡. 물지기. 흑사갈.
세 마리를 모두 죽여 코어를 모아 제단으로 바치는 순간, 문제의 네 번째 S급 괴물인 캘리펠라가 등장하게 되는 기믹이다. 그러므로 무슨 수가 있어도 지파룡의 코어는 빼앗길 수 없다.
그도 그럴게
'큐브가 두 개나 걸려있다고!!'
하나는 라스트 보스인 캘리펠라에게.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랜덤하게 셋 중 하나에게 편성되어있다. 중국 전역에는 총 3개의 큐브가 흩어져 있었고, 그 중 하나는 샤오린이 가져온 무신의 시체에서 뜯어내 가을에게 맡겼다.
'창염 만나서 따져야 한다고…!'
최소한 둘 중의 하나는 내가 몰래 써야만 했다. 아니면 둘 다 내가 몰래 쟁여뒀다가 창염과의 1:1데이, 아니 대화에 써야했다.
"그러니까 더 빨리! 더!"
[최고 속도-아니 그걸 초월한 속도를 신께 보여드리겠습니다.]
흑염룡은 음속까지 초월해 동정호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