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1부 9장 9
내가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올리려는 놈들이 너무 많다. 석하랑이 혼돈을 너무 쉽게 제압한 게 화근이었나보다.
"아주 개나소나 S급 잡겠다고 난리네요. 정말."
대외적으로는 날뛰기 시작하려는 혼돈을 석하랑이 장강물을 이용해 익사시켜 죽인 것으로 포장되었다. 마르지 않는 장강의 막대한 물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SS급 이능력자의 압도적인 위상을 자랑하는 장이 되기도 하였다.
이거, S급 사실은 그냥 엄청 쉬운 놈들 아니냐? 하는 의식이 팽배해진 모양이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했는가.
"우리니까 버텼지...!"
내가 육탄공격을 감행해 죽어라 상처를 입혔고, 약점에 천가을을 찔러넣어 환룡을 빼냈다. 석하랑이 전장의 이점을 살린 것은 맞지만, 전공으로 따지만 '천가을>>나>>석하랑'일 것이다. 나나 석하랑이 SS가 아니었다면, 혼돈을 잡는 데에는 하루를 꼬박 지새우는 초장기전이 될지도 몰랐다.
"SS급 쉽게 잡으니까 S급도 쉬운 줄아나...."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 존재들이나 쉽게 잡는 거지, 어지간한 S급 괴수들은 레이드를 뛰어야 할 정도로 어려운 괴수다. 실제로 서울의 괴수-시청사의 뱀을 잡을 때도 나를 제외한 당시의 청화단 전력을 때려박아서야 공략이 가능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는 바보들이 자꾸 내 밥상 근처로 다가와 알짱거리려 한다. 조용히 명상을 하던 샤오린이 우리들에게 다가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개수작부리려는 애들이 좀 있어서요."
"숟가락...하나가 아니네."
석하랑은 자신의 워치에 들어온 정보에 질색을 했다. 나또한 스크린에 뜬 정보에 식겁을 했다.
"어쩐지 엉덩이 무거운 양반들이 왜 자존심 꺾고 지원하겠다고 나서나 했는데…."
협회를 통해 들어온 히어로 파견 요청. 그것은 한국에서만 진행된게 아니었다.
"미국, 호주, 남아공, 독일...거기에 영국? 자기네들 히어로 파견하겠다고 하는 국가가 몇이야 지금?"
무수한 숟가락의 요청이 들어오고 있었다.
내게로.
S급 이능력자를 파견하여 원조하겠다는 곳도 있었고, S는 커녕 B급 100명을 파견하여 호위단을 꾸려주겠다는 이들도 있었다. 중국의 2만 이능력자들이 성대하게 환대를 하는 걸 봐서 그런지, 각국은 나를 두고 자존심 싸움을 시작했다.
"이거 청화의 몸값이 너무 뛰는데요. 막 몇천억 단위로 몸값 부르는 나라도 있고. 다음 방문 국가를 자기네 나라로 해주면 100억 즉시 지급? 푸흐흐. 얘네 진짜 급한가보네요."
"야. 니...혹시 딴 맘 품은 건 아니제?"
석하랑의 목소리가 불안한 듯 떨렸다. 나는 그의 속내를 눈치채고 안심하라고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마요. 내 모든 기반이 한국에 있는데 왜 다른 나라로 가겠어요?"
"그러면 다행이지만…."
석하랑은 내가 행여나 다른 나라로 도망갈까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막말로 성주가 내려올 시기로 추정되는 2025년에만 한국에 있으면 되니, 그 기간동안 다른 나라에서 활동할 것을 염려하는 듯 했다.
석하랑 본인은 부산에서 떠날 생각이 없으니까. 나는 그럼에도 불안해하는 석하랑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잡고 토닥여줬다.
"앞으로 해외 출장은 좀 자주 다니겠지만, 대부분은 한국에서 지낼 거예요. 중국에서의 일이 최대한 빨리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거죠. 넉넉잡아 3주로 잡았는데, 3주는 커녕 지금 열흘도 안 걸리게 생겼네요. 이왕 일이 빨리 진행되는 거, 그냥 확 사흘내로 정리해버릴까요? 빨리 귀국하게?"
"...그러면 내야 좋지."
샤오린이 SS에 이르렀기 때문에, 나는 아주 쉽게 S급들을 공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당신은 한국에 먼저 돌아가 있어요. 가서 사람들 불안한 거 다독여주고, 괜히 어줍잖게 숟가락 올리려다 망신 당하는 거 막아주라고요."
"......그냥 한국 이능력자들 데리고 다니면서 S급 사냥하는 건 어떤데? 그 카면 좋다 아이가."
"좋긴 한데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네요."
"왜?"
나는 한국에서 협회를 통해 파견을 나오겠다는 멤버 중 한 남자를 콕 찝어 X자를 그었다.
"전 얘가 마음에 안 들거든요."
"......가을 언니야 때문에 그 카는 거가, 지금?"
석하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나를 경멸했다. 내가 질투 때문에 S급 히어로인 화권을 꺼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뭐, 그런 걸로 치죠. 아니, 그. 얘기해도 돼요?"
"뭔데?"
"신서울에서 내려오는 동안, 얘가 나한테 찍쩝거렸단 말예요."
"알았어. 내가 한국 가서 반 조져놓을게. 혹시나 비행기 타고 오려고 하면 비행기 기수 돌려놓으면 되나?"
"예. 감사합니다."
석하랑은 역시 말이 통하는 정령이었다. 나는 석하랑에게 한국에서 숟가락을 들고 올 이들의 개입을 차단해줄 것을 부탁했고, 석하랑은 다행히 내 설득을 받아들였다.
"만찬 끝나고 저 바로 움직일 거니까, 당신도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요. 알겠죠?"
"알았다. 하늘 날아서 바로 갈게."
"좋아요. 그러면 아귀들이 숟가락 들고 오기 전에 빨리 정리하는 걸로 할까요. 샤오린."
"예."
"준비됐나요?"
"물론입니다."
샤오린은 마력까지 일으키며 열의를 보였다. 나는 내가 알고 있던 군신의 경지에 오른 샤오린을 보며 절로 안심이 들었다.
"그러면 잘 부탁해요. 샤오린."
"예. 후후."
"......?"
저 웃음소리를 듣자마자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졌다. 왠지 모르게 뒷통수가 싸했고,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샤오린에게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붙잡았다.
"혹시 무슨 꿍꿍이 있나요?"
"예? 아, 아뇨. 아닙니다. 그런 거 없습니다."
샤오린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정갈하던 마력마저 흔들리기 시작했고, 나와 석하랑은 금방 그 이상을 눈치챘다.
"석하랑."
"그래."
탁. 눈 깜짝할 새. 손을 괴인형으로 변신시킨 나와 뒤에서 얼음을 펼친 석하랑에 의해 샤오린은 제압되었다. 스스로도 무언가 켕기는 게 있는지, 샤오린은 순순히 우리의 구속을 받아들였다. 나는 목소리를 깔고 샤오린을 위협했다.
"무슨 생각이냐. 혹시 싸우기가 무섭다거나-"
"그, 그런 게 아닙니다. 그저…."
샤오린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저…. 사람들 앞에서 벗고 싸울 것 생각하니까 살짝…. 젖-"
"히이익?!"
석하랑이 질겁을 하며 물러섰다. 나는 샤오린을 누르던 손을 떼어 몸을 일으켰다.
"에휴. 그러면 그렇지. 당신이 무슨."
"......저, 그러면 해도 되나요?"
"내가 당신 주인도 아니고 강제할 수 없죠. 마음대로 해요."
"......감사합니다. 그럼 기대해주십시오. 저의 눈부신 활약을!"
샤오린은 반색을 하며 열의를 보였다. 하지만 나는 행여나 있을 스트립쇼의 방지를 위해, 최소한의 조치를 취해야했다. 아무리 샤오린이 음험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샤오린의 알몸을 다른 놈들에게 보이는 건 사양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속옷 정도는 입도록 하죠."
"히잉…."
샤오린은 울상을 지었다. 나는 마력을 짜 만든 속옷을 샤오린에게 들이밀었다.
"징징대도 안 돼요."
"......."
"안 된다니까."
".......부우."
그 답지 않게 볼까지 부풀리며 불만을 드러냈다. 차라리 내 괴인이라면 명령을 내려 강제로 따르게 할 텐데, 샤오린은 내 명령이 통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주종계약은 환룡과 맺어져있지만 내 옆에서 나를 따르는 기이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나는 샤오린을 청화단 아래에 두는 대신, 환룡에게 그만큼의 값을 지불했다. 그러니 안에 옷 정도는 받쳐 입으라는 요구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그럼 인간적으로 아래만이라도."
"저는 괴인입니다만. 후후."
"야, 자꾸 까불래?"
자꾸 사람을 짜증나게 만들어서, 결국에는 힘으로 입혔다. 샤오린은 비명을 지르며 한사코 속옷을 입는 걸 거부했지만, 나는 석하랑의 도움을 받아 샤오린을 구속하는데 성공했다.
"야! 속옷 내놔라! 미친 놈이 지가 입히려고 하네!"
"뭔 상관이예요. 일단 입히고 보는 거지...!"
"미친나! 입혀도 내가 입힐끼다!"
"저는 절대로 입지 않을 겁니다!!"
결계를 쳤으니 다행히 밖에서는 아무도 듣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좁디 좁은 대기실에서 SS급끼리 삼파전을 벌여야 했다.
나는 결국 한 시간이라는 귀중한 휴식 시간을 샤오린에게 속옷을 입히는 데 써야했다.
* * *
피닉스가 샤오린의 속옷을 휘두르며 난리를 치던 그 시각. 중국 중앙당 측의 인사들 또한 회의실에 모여 긴급히 논의를 해야했다.
"주석 님. 속전속결로 괴수들을 잡아야합니다. 괜히 밍기적거렸다가는 타국에서 개입할 빌미를 줄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러면 청화 양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사사로운 감정은 잠시 접어두십시오. 지금은 이 나라의 S급 괴수들을 제압해, 저희의 아래에 두도록 협정을 맺어야 합니다."
탕. 유황숙은 서울에서 날아온 흑염룡의 비행 루트를 가리켰다.
"주인이 외국에 나가도 그 지역을 지키는 S급 괴수가 아닙니까. 청화 양에게 해만 없다면 이런 일 없이 서울을 지키고 있었을 테지요."
"그거야 그렇지만…."
"후후. 주석 님."
가만히 있던 모택평이 입을 열었다. 천자와 유황숙이 긴장해 침을 꿀껄 삼켰고, 모택평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청화의 프로필을 흔들었다.
"일단 이 땅의 S급 괴수들을 먼저 해치우는게 우선 아니겠습니까. 그 코어를 확보해 괴수로 부활시킨다거나, 우리 당의 것으로 부리는 건 나중의 문제이지요."
"......국장?"
천자는 믿을 수 없었다. 틈만 나면 괴수들이 날뛰는 틈을 타서 이능력자들을 상비군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괴수보다 더 날뛰던 전쟁무새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후후, 황숙 공.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요. 이러다가 이국의 무뢰배들이 우리의 자원을 강탈해가면 어쩌겠습니까?"
모택평은 괴수들을 자원이라 칭했다. 유황숙은 사색이 되어 그에게 따졌다.
"설마 괴수들을 전쟁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생각은-"
"무얼. 그저 이 땅의 자원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움직일 뿐입니다."
모택평은 처음으로 입꼬리를 비틀며 속내를 드러냈다.
"괴수를 조종하는 이능력. 매력적이지요. 그러나...후후."
모택평은 차를 홀짝이며 씩 웃었다.
"어디 그 하나 뿐이겠습니까?"
"당신...설마!"
유황숙이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일어섰다.
"청화 양을 납치한게 아니라, 청화 양을 죽이려고 한 겁니까?! 진심으로?"
"......좋을 대로 생각하시지요, 황숙 공. 허나 이건 똑똑히 기억하시고."
모택평이 회색으로 일렁거리는 눈을 빛내며 살기를 내뿜었다.
"S급 괴수들이 어찌 그의 손에 홀라당 넘어가도록 방관하겠습니까?"
* * *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군요. 저희의 주인님께서는."
봉효는 워치의 시계를 확인하며 쿡쿡 웃었다. 모택평-에 빙의한 환룡은 봉효의 계략에 따라 적절히 국빈 만찬을 망치며 시간을 끌었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웃는다거나, 이전의 모택평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언행으로 사람들을 당황시켰다.
당연히 그 혼란으로 인해 회의가 제대로 진행될 리는 만무. 환룡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열심히 트롤링을 하는 동안, 봉효는 목을 꺾으며 나설 준비를 마쳤다.
"결국에는 피닉스 님께서 대외적으로 나서셔야 하기 때문에, 곧장 움직이지는 못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흑전갈 괴인은 팔짱을 낀 채 꼬리를 날카롭게 세웠다. 샤오린이 피닉스의 아래로 넘어온 대신, 피닉스는 흑전갈 괴인과 환염령들을 환룡단에 넘겨주는 것으로 트레이드를 했다.
괴인에 대한 절대적인 명령권은 각 정령들에게 있으나, 괴인들은 각자의 이유로 임대처의 주인이 내리는 명령을 따랐다.
샤오린은 자신보다 강한 무인에 대한 연모와 존경을.
그리고 흑전갈 괴인-시황제는 중화의 번영을 위해.
"아무리 내게 불로불사의 육체를 준 은인이라고는 하나."
흑전갈 괴인이 마력을 일으켰다. 봉효의 뒤에 시립해있던 환룡단의 괴인들이 저마다 병장기를 들었다. 중국 전역에 흩어져있던 500여기의 환염령들이 장난기를 지우고 손톱을 날카롭게 세웠다.
"이 땅의 것을 약탈해가는 것은 눈뜨고 보지 못하지. 안 그런가."
"물론입니다. 폐하."
봉효는 부채를 높이 치켜들었다. 흑과 백이 어우러진 우선(羽扇)을 하늘을 향해 뻗은 봉효는 휘하의 부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시간은 없습니다. 주군, 환룡 님께서 피닉스 님을 북경에 묶어두시면서 시간을 버시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합니다."
봉효가 우선을 땅으로 겨눴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 잠들어 있는 S급 괴수-지파룡(地婆龍)을 가리키고 있었다.
"S급 괴수의 코어를 이국의 정령에게 바칠 수는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예...그런 겁니다."
봉효는 우선으로 입을 가리켜 낮게 웃었다.
"괴수는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죠."
환룡단이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그들의 무기는 동정호(洞庭湖) 아래에 잠들어있는 괴수를 향했다.
* * *
피닉스는 안심하고 있었다.
환룡을 깨웠고, 그 환룡이 모택평을 잠재웠으니, 이제 괴수들만 잡으면 되겠거니 하며 여유를 부렸다.
- S급 괴수들 코어로 괴인을 만들어서, 나를 위해 일하는 괴인으로 만들자! 그리고 그걸 봉효한테 맡겨서 나는 꿀빠는 거야.
환룡이 뒷통수를 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환룡에게 그 계책을 넌지시 알려준 이는 다름아닌.
"후후."
봉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