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72화 (172/1,497)

〈 172화 〉1부 9장 6

날이 밝았다.

병실안에서 계속 있다가는 무언가 큰일이 일어날 것 같아, 나는 나이롱 환자임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섰다. 봉효가 마련한 임시거처로 몸을 숨긴 나는 청화단과 환룡단 전원을 호출했고, 다행히 그들은 그리 먼 시간이 지나지 않아 곧장 돌아왔다.

"......."

환룡단 단원들은 모두 초췌한 몰골로 돌아왔다. 그들 모두가 괴인에 영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귀신에게 홀려 정기를 빼앗긴 것 마냥 기가 죽어 있었다.

"도대체 밤 사이에 얼마나 놀았던 거예요?"

나는 그들을 데리고 논 것으로 추정되는 흑전갈 괴인을 추궁했다. 다른 괴인들과는 달리 진짜 특촬물에 나올 것 같은 괴인의 모습인 그는 차라리 '전갈인간'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정도의 외형이었다.

"좋은 경험을 시켜줬지."

흑전갈 괴인은 꼬리를 들어, 허공에다가 독침을 퓻퓻 찔렀다. 그게 꼭 남성기를 찌르는 모양새라, 방안에 모여있던 여성진들의 눈쌀이 살짝 찌푸려졌다.

"좋은 경험?"

"그래. 겸사겸사 네 부하들도 호강시켜주고. 스스로 일당백이라고 자부하길래 기회를 만들어줬지. 환룡단 한 명당 대략 서른세 명을 감당해야 했지."

봉효나 샤오린을 제외한 환룡단의 단원들이 전부 15명이니, 곱하면 대략 오백이었다.

"......아, 더 이상 말하지 마요. 알 것 같으니."

동자공을 해제당했으니 그 열기를 배출하고 싶었을 터. 누가 정기를 빼앗아갔는지는 불보듯 뻔했다. 환룡단의 단원들은 굶주린 표범들 사이에 던져진 토끼마냥 가차없이 유린당했을 것이다.

"그럼 샤오린. 오늘 일정은?"

"예. 오전 10시, 중앙당 당사에서 주석 각하와 협회의 주최하에 <비스트 테이머> 님에 대한 환영식과 국빈 만찬이 있습니다."

"덧붙여서 나도 같이 가."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석하랑이 손을 들었다.

"정식으로 초청받은 사람은 청화랑 석하랑, 두 명이지?"

"네. 샤오린은 호위로 붙기로 했으니, 사실상 세 명이죠."

샤오린의 폭탄 선언은 여러모로 논란의 불을 지폈지만, 그래도 대중들은 샤오린의 선택을 이해했다. 각국은 비스트 테이머가 자국에 방문해주기를 바라고 있었고, 이번 비행기 테러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국빈 만찬 이후에는?"

"잠깐 티타임을 가진 뒤, 중앙 당사를 쭉 둘러본 뒤, 북경 내를 시찰합니다."

"말이 시찰이지 그냥 관광이잖아요. 일하러 왔지 놀러왔어요? 일정 누가 짰는지 원. 협회죠?"

"네."

나는 샤오린과 석하랑을 번갈아 가리켰다.

"둘이서 알아서 커트해줘요. 청화는 그럴 용기가 없는 소심한 아이니까."

"웩."

덕배가 헛구역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덕배 뿐만 아니라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나는 청화의 여린 캐릭터를 끝까지 밀고 나가기로 했다.

"커트하면 뭐 하려고?"

"당연히 괴수 잡으러 다녀야죠. 노는 건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아요."

멸망의 날 까지 앞으로 5년 하고도 한참 남았지만, 그래도 빨리 처리할 수 있는 건 미리미리 해결하는 게 낫다. 나는 테이블 중앙에 펼쳐진 중국 전역의 지도에서 세 군데를 가리켰다.

"여기, 여기, 여기. 아마도 이 세군데에 S급 괴수들이 숨어있을 거예요."

"A급은?"

"그건 덕배랑 황제님 이하 환룡단 단원들이 고생해줘야죠. 저희가 S급 사냥하는 동안, 나머지 날뛰는 A급들을 몰래 다 쓸어먹는 거예요."

S급이 제거되면 괴수들이 미쳐 날뛸테고, 그러면 자연히 그 코어를 노릴 히어로들과 헌터들이 급히 달려올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선수를 빼앗기기 전에, 청화단에서 먼저 코어를 털어가야 한다.

"S급 괴수는 총 네 마리에요. 지파룡. 물지기. 흑사갈. 그리고 캘리페라."

"왜 마지막만 이름이 달라?"

"앞의 셋은 이미 알려진 괴수고, 걔는 아직 미발견 된 괴물이거든요. 아마...2년 뒤? 그 때 쯤 발견될 괴물입니다."

나는 각각 위치를 가리키며 경로를 그렸다. 북경을 기점으로 시작해 큰 원을 그리며 이동하는 거리만 족히 4천 km를 훌쩍 넘겼다.

"사실상 이틀에 한 마리? 거리나 괴수, 그리고 사람들 반응을 생각해봤을 때 그 정도가 적당한 것 같아요. 하루는 이동, 하루는 사냥."

"S급 괴수 잡는데 하루밖에 안 걸리는 것도 참."

"저 말고도 SS급이 둘이나 있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그것도 그렇네."

석하랑과 샤오린이 서로를 쳐다봤다.

"......."

"......."

정정. 노려봤다. 나이도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둘은 주어진 상황은 달랐지만, 어려서부터 상당히 많은 활약을 한 베테랑이었다. 아마도 서로 같은 경지에 있는 만큼 느끼는 것도 비슷할 터.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게."

"뭐요?"

석하랑의 기습적인 귀국 선언에 나는 전신의 털이 바짝 곤두섰다.

"왜요?"

"왜냐니. 나는 한국 히어로인 걸? 내가 뭐하러 중국 땅에 있는 괴수들 치우러 다니냐. 우리 땅에 있는 것도 치우기 바빠."

"아니 한국에 있는 게 얼마나 된다고...."

나는 헛웃음이 나왔지만, 석하랑은 자신의 생각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너스레를 떨며 샤오린을 가리켰다.

"SS급이 활약해야지. 각자 나라에 있는 괴수는 각자 나라에서 처리해야 하잖아."

"그 무슨 꽉 막힌 사고방식을-"

"인정합니다. 제가 살던 땅의 괴수인 만큼, 제가 처리해야죠."

샤오린은 담담히 석하랑의 도발을 받아들였다.

"고작 S급 괴수 네 마리 정도는 '껌'입니다. '껌'."

"......."

샤오린은 가슴을 활짝 열어젖히며 자신의 명치를 두드렸다. 석하랑의 표정이 조금 뒤틀렸고, 나는 갑자기 내려간 방안의 온도에 오한이 들었다.

"뭐...괴수들 중에는 끝판왕인 혼돈부터 잡았으니 큰 문제는 없겠네요."

"그렇지? 흐흐흐. 역시 SS급은 SS급이랑 붙어야 한다니까."

"......."

둘 사이에 심상찮은 기류가 흘렀다. 나는 피부가 따가워져서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쯤 해라.]

"?!?!"

"아아. 음."

나는 목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SS급 두 명의 기싸움을 마력으로 찍어누르려면 괴인형으로 말할 수 밖에 없었고, 다행히 둘은 들끓는 마력을 가라앉혔다.

"싸우고 싶으면 나중에 기회가 될 때 싸우세요. 괜히 애꿎은 피해자 만들지 말고."

나는 방안의 괴인들을 가리켰다. S급인 황제, 그리고 천가을 빼고 나머지 괴인들은 식은 땀을 흘리며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자기 힘이 어느정도인지 자각하란 말이에요. 네? 괜히 마력 풀풀 날리면서 어그로 끌다가 큰일 당하지 말고. 둘이 싸우고 싶으면 나중에 싸울 장소 마련해줄테니까."

"진짜?"

"정말입니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둘이 반색했다. 그리고 서로를 쳐다보며 씩 웃는다. 역시 한 판 붙어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새다. 원래 각성하면 그만큼 힘을 발휘하고 싶어하는 법이고, 이왕 발휘할 거 자신과 걸맞는 상대와 싸우고 싶어할 뿐이니까.

"그러면 중국 일 마치고 한국 돌아와서 나랑 대련 좀 하자. 벌써 며칠 밀린 거 알고 있지?"

"당신 원래 그렇게 열심히 하는 타입 아니었-"

"설화령과는 대련해주십니까?"

샤오린이 눈에 불을 키고 내게 달려들었다.

"얼마나요? 하루에 몇 번? 어디서? 어떻게?"

"저 시간 날 때 가끔, 한 번, 부산에서, 실전형 대련으로요."

"저도 부탁드립니다. 언제든지 도전해도 좋다고 하셨죠?"

"......예, 예. 상대해드리죠."

강자와의 대결은 나도 환영이다. 속성으로 카운터 맞는 석하랑이나 환속성이 되어 투명 무기를 다루는 샤오린이나 둘 다 난적인만큼, 내 전투 경험치도 그만큼 늘어나니까.

"얘. 시간 됐어."

가을이 퀭한 얼굴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갓 S급에 올라서 그런지 두 SS급이 본격적으로 벌인 기싸움에 살짝 질린 모습이었다.

"가을."

"왜?"

"이것 좀 맡기마."

나는 주머니속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꺼내 가을에게 건넸다. 푸른 마력의 막 안에 감춰진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 가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밀봉처리 해뒀으니, 네가 보관하고 있어라. 석하랑 돌아가는 길에 같이 가."

"나한테 이거 맡겨도 돼?"

"그래."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더 위험했다. 큐브를 몰래 숨겨둔 영향 때문인지, 자꾸만 안에서 튀어나와 어깃장을 놓는 게 영 불편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걸 나한테?"

"너니까 맡기는 거다."

나는 구슬을 가을의 코트 안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가을은 자신의 가슴을 스치고 들어오는 내 손길에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역시 어제 저질렀어야 했는데."

"......어허, 거 날씨 참 좋네!"

덕배가 딴청을 피우며 창문을 열었다. 하늘은 우중충해서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만 같았다.

"......그래! 실내행사 하기에 딱 좋은 날씨야! 안 그래?"

"괜히 비온다고 또 하루 발목 잡히는 건 아닐지. 하아. 그러면 이동하죠."

나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안의 모든 이들이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그럼 적당히 놀면서 남은 위협을 제거하러 다녀 봅시다. 여유 시간까지 앞으로 한참 남았으니까."

7월 1일.

아직까지 시간은 남아있다.

"그러면 각자 위치로."

* * *

청화단이 활동을 재개한 그 시각.

중국 중앙당의 주석, 천자는 전전긍긍하며 집무실을 방황하기 시작했다.

"황숙 공. 괜찮은가? 이상은 없는가?"

"예. 벌써 일곱번이나 물으셨습니다."

토끼 귀 여인, <쌍검 래빗> 유황숙은 천자의 방황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제까지의 천자가 유약하여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면, 지금의 천자는 그 나이대에 걸맞는 청년의 풋풋함을 가지고 있었다.

"크흠. 다시 한 번 더 하겠네. 크흠."

천자는 근엄한 얼굴로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반갑습니다. 중앙당 주석, 천자입니다."

"예. 잘하셨습니다. 청화 양 앞에서 말을 안 더듬으면 되겠군요. 인사만 한 번 하고 스쳐지나가겠지만요."

"황숙 공!"

천자는 바로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그는 어젯밤 문틈을 두고 만났던 푸른 소녀가 떠올라 몸에 열이 올랐다.

문틈 사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푸른 여인은 초췌한 몰골이었으나, 그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는 타오르는 불꽃처럼 반짝였다. 천자는 그 눈동자에 반했고, 급히 나오느라 흐트러진 웃옷 앞섶에 드러난 하얀 가슴골-

"으아아악!!"

천자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 장면을 뒤에서 바라본 유황숙은 그의 반응을 즐기며 미소를 지었다.

"뭣하면 바로 고백이라도 하시지요?"

"공! 만난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밤 늦은 시간에 병실에 찾아가는 무례를 저지렀으니 첫 인상도 최악일테지요."

"이미 국가 전체에 대한 이미지가 최악 아니겠습니까. 서울 지하에서 살다 나온 아가씨니, 처음 비행기를 타고 저희를 위해 날아왔다가 그 변을 당했으니까요."

"......그래서 사죄하고자 하는 것 아닙니까."

천자는 이를 갈았다. 그의 들끓는 분노는 청화를 다치게 한 테러리스트-의 배후를 향해있었다.

"역시 그 사람입니까?"

"예. '금의위'를 통해 얻은 정보이니 확실합니다. 배후는 동창-그리고 모택평입니다."

"후우. 그 자는 어쩌자고 그런…!"

천자가 주먹을 불끈 쥐며 울분에 차올랐다. 막무가내로 사람을 죽이려 한 모택평의 행동도 화가 났고, 그걸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했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납치하여 세뇌하려 들 생각이었나봅니다."

"예?! 뭐라고요? 어떻게 그런게 가능합니까?"

"......천자는 모르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모택평은 남자이고 청화 양은 여자가 아닙니까."

"그런?!"

쾅! 천자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테이블은 마력이 실린 주먹을 견디지 못하고 반으로 쪼개졌다.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누구나 첫 각성 때는 그렇습니다. 그러니 청화 양과 악수할 때는 조심하십시오. 그는 괴수를 부리는 이능을 얻은 대신, 마력을 전부 잃은 이능력자입니다."

"예. 후우. 알겠습니다."

천자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력을 갈무리했다.

"마지막 리허설을 하도록 합시다."

"예. 먼저 동선입니다만…."

둘은 곧 있을 행사의 리허설을 하며 최종 점검을 했고, 마무리가 다 될 즈음에 천자의 스마트 워치에서 소리가 울려퍼졌다.

[딩딩딩. 굿모닝. 딩딩딩. 라라라 라라 라라라라라~]

"......주석님?"

유황숙이 듣자마자 거리를 벌리며 귀를 막았다. 다행히 워치의 스피커를 통해 울리는 전자음이라 귀를 막는 것으로 소리를 차단할 수 있었다. 천자는 멋쩍은 듯 웃으며 알람을 종료했다.

"하하. 좋은 소리 아닌가요? 제게 새로운 아침을 알려준 노래 아닙니까."

"그건 또 언제 녹음하셨습니까?"

"팔더군요. 유성에서. 외국기업이지만 이런 건 참 빠릅니다. 하하."

천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카펠라를 부르기 시작했다.

똑똑똑.

"주석 님. 그…."

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안에서 반응을 할 새도 없이 문이 열렸다. 무례를 범하며 주석의 집무실로 들어온 이는 천자가 화를 내었던 대상-괴수관리대책국의 국장, 모택평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국장."

"실례합니다. 후후. 행사의 준비가 끝나, 감히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부...탁? 부탁이라 하셨습니까?"

"예."

모택평이 사납게 웃었다.

"국빈 환대와 원탁에 대한 감사 오찬, 주석께서 진행해보심이 어떠신지?"

모택평은 천자에게 자신이 맡은 역할을 맡겼다. 천자와 유황숙이 눈빛을 교환했다. 천자는 말없이 모택평을 노려봤고, 유황숙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이제와서 무슨 생각이시죠? 지금 행사 시작 30분 전인데-"

"별 생각 없습니다. 그저."

모택평은 포권까지 취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주석께서 나서시는 게 더 그림이 예쁠 것 같지 않습니까? 선남선녀들이 만나는 게 역시-"

"하겠습니다. 무조건."

"주석 님?!"

천자는 의지를 불태웠다. 유황숙은 갑작스레 천자를 전면으로 내세우는 모택평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당신은 무슨 생각을…?"

"후후."

모택평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그저 낮게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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