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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70화 (170/1,497)

〈 170화 〉1부 9장 4

모가놈에 대한 분노도 잠시.

나는 화를 가라앉히고 진짜 휴식을 취하기로 했고, 청화단의 모든 괴인들도 코어로 돌아가 대기상태로 돌아가기로 했다.

“왜? 북경까지 왔는데 구경 좀 하면 안 되냐?”

“나도 이런 곳이 어쩌다 수도가 되었는지 궁금하군.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만.”

두 명의 괴인이 심야의 북경 관광을 간절히 원했고, 나는 불안한 마음에 봉효에게 북경의 소개를 부탁했다. 다행히 봉효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흑전갈 괴인의 정체를 알고 나서 상당히 공손해졌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안 걸리게 조심해요.”

샤오린 또한 영체가 되어 그들의 뒤를 따랐다. 나는 남은 두 명의 히로인에게 창밖을 가리켰다.

“안 나가나?”

“가을이 나가면.”

“너 혼자 두고?”

환룡은 가을의 무릎위에 앉았다. 가을도 결국엔 포기했는지, 환룡을 인형마냥 끌어안고 있었다.

“모처럼 북경에 왔다. 현지 가이드들도 있으니 야경을 구경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누구랑 같이 가느냐가 중요하지. 안 그래?”

가을의 말은 노골적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그에 긍정했지만, 일부러 병실을 빠져나가 야경을 즐길 생각은 없었다.

“......혼자 있고 싶은데.”

“왜. 얘 각성시키고 나니까 뭐 감수성이 풍부해졌어?”

“가끔은 그런 날이 필요한 셈이지. 아, 그렇군.”

나는 술잔을 기울이는 제스쳐를 취했다.

“기념인데 한 잔 하겠나?”

“...너 술도 마셔?”

“자중하고 있던 참이지. 마침 환룡을 각성 시켰으니, 조촐하게 축배를 들어올리는 게 어떤가?”

“의도는 좋은데, 술을 어디서-”

“내가 구해올 수 있어!”

환룡이 눈을 반짝이며 손을 들었다.

“가을아, 나랑 같이 가자!”

“뭐? 돈은?”

“봉효한테 얘기하면 알아서 구해줄 거야!”

“......걔도 고생이다. 참.”

가을은 들뜬 환룡을 일으켰다. 환룡은 가을의 손을 잡고 희희덕거리다가, 내 눈치를 보며 혀를 내밀었다.

“나는 가을이랑 밤놀이 갈 거니까, 혹시 안 들어와도 찾지마!”

“그거 아쉽네. 모처럼 같이 대작하려고 했더니.”

“......그, 그러면 조금 생각해보지! 가을아, 가자!”

환룡은 갈팡질팡하다가 가을의 손을 끌고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영체가 되어 유리창을 빠져나간 환룡은 가을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그럼 다녀올게. 어디 몰래 다녀오지 말고.”

“옥상 정도는 괜찮나?”

“바람 쐬는 거라면.”

가을은 나를 위아래로 흘기며 머뭇거렸지만, 밖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환룡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병실을 빠져나갔다.

“.......”

갔나? 전부다 갔지? 나는 슬며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슬리퍼를 신었다. 병원의 환자복으로 강제로 갈아입혀진 만큼, 지나가다가 간호사나 협회의 직원에게 걸려 병실로 돌아오는 건 사양이다.

병실은 걸릴 수 있으니. 나는 내 몸속에 숨겨둔 큐브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나도 데이트를…?”

특별병실 너머, 협회건물 일반 구역이 상당히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귀에 박혔고, 관계자들의 당황한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

오늘 특별병실의 환자는 나밖에 없다. 협회의 특별병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만들어졌지만, 특히 청화같은 주요 요인의 격리를 위해 만들어진 의도가 가장 컸다.

저벅, 저벅.

나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와 방안으로 도망쳤다. 침대로 다이브하듯 뛰어 이불을 덮고, 등을 침대 헤드 뒤로 붙여 전신의 힘을 뺐다. 그리고 눈을 감아 병실 밖에서 들어오는 이들의 마력을 스캔했다.

이능력자 둘. 한쌍의 남녀로 둘 다 A급 이능력자인듯하다.

똑똑똑.

노크소리만 들어도 정중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누구세요…?”

“천자라고 합니다.”

“.......”

나는 당황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워치가 알아서 번역해주고 있고 마력의 힘을 통해 뇌내 자동번역이 이루어졌지만, 아무리 곱씹어도 방금 천자라는 지칭은 본인의 이름이었다.

"누구시라고요?"

"아, 죄송합니다. 이 나라의 주석입니다."

"......아, 예."

항상 그렇지만 원작에서 나오지 않는, 혹은 원작에서 엑스트라나 쩌리같은 존재들이 갑자기 변해서 다가오면 당황스럽다. 천자 또한 모택평에 의해 실각되기 직전의 존재였고, 이능력자로 각성한다는 얘기는 듣도보도 못했다.

세계의 보정이거나, 아니면 원래 이능력자였는데 죽을 때 까지 각성을 못했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그는 이능력자로 각성했다. 내 덕분에.

‘각성한 사람들에게는 <굿모닝 세례>라고 불리지만….’

“잠시 얼굴을 뵙고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괜찮으십니까?”

천자의 말은 몹시 정중했다. 이능력자 각성 덕분인지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고, 나는 그 목소리가 제법 듣기 좋다고 느꼈다. 화속성 A라서 그런걸까. 이승형도 그렇고, 역시 화속성들은 하나같이 잘난 존재들 밖에 없는 건가.

‘그 정점은 창염의 피닉스. 음, 그렇고 말고.’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문이 열리기 전에 재빨리 대답했다.

“제가 지금 환복중이라….”

“...크, 크흠! 죄송합니다.”

천자는 목소리를 떨며 사과했다. 나는 목소리를 깔고 마저 물었다.

“무슨 연유로 여기까지 오셨나요?”

“무례한….”

옆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목소리는 아는 목소리다. 모택평으로부터 천자를 보호하겠답시고 나섰던 암속성 A급 이능력자, <쌍검 래빗>.

“그러지 마세요, 유황숙 공. 무턱대고 찾아온 제가 실례를 한 겁니다.”

“......죄송합니다.”

천자는 외려 그를 나무랐다. 나는 새삼스레 변한 둘의 관계에 신기하기까지 했다. 천자는 유황숙-이름이다-의 사과를 받아낸 뒤, 문 너머에서 자신이 찾아온 본론을 밝혔다.

“흠흠. ...모 국장이 주도하여 초청한 것이라고는 하나, 청화 양 께서는 이 나라의 손님이십니다. 그리하여 오늘 저녁에라도 환대를 하고자 했으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몸이 약해서….”

“그래서 내일 오전, 사과의 의미로 조촐하게 환영회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참석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네?”

그걸 말하려고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감사합니다. 내일 오전에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어, 어어…?”

내가 당황해서 답한 걸 긍정으로 들었나? 나는 다급히 달려가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헙…!”

천자가 나를 보고 굳어버렸다. 옆에서 툴툴대는 것 같던 토끼귀의 여인, 유황숙이 나를 보고 눈을 번쩍였다. 나는 허리를 숙이며 천자에게 다시 인사했다.

“그…. 감사합니다. 오시기 힘드셨을텐데. 마중도 안 나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크, 크흠. 아닙니다. 아니에요.”

천자는 나를 흘깃 보며 얼굴을 붉혔다. 피닉스의 아름다움은 한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통용되는 미모였으니, 그도 얼굴을 붉힐 수 밖에.

“마음같아서는 차라도 한 잔 내어드리고 싶은데…. 제가 지금 이래서.”

“아닙니다! 아닙니다, 쉬십시오. 쉬세요. 이 시간에 찾아온 제 잘못입니다.”

천자는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나는 그에게 다시 한 번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러면 조심히 들어가시고, 평안한 밤 되세요.”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문을 조심히 닫았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침대에 쓰러졌다.

“......흐흐흐.”

아양을 떠는 것 같아서 속으로 천불은 났지만, 그래도 계획의 1단계가 잘 먹혀든 것 같아 천만다행이었다.

‘각성했다고는 해도 사람이 저리 달라질 수 있나?’

“어쨌든 사람들한테 인기는 잘 끌겠네요.”

가장 드물다는 화속성과 환속성의 더블 A, 반반한 마스크, 혈통, 그리고 애초부터 가지고 있던 나라의 1인자라는 직책.

-모택평을 실각시키기는 어려우니, 그 정치적 대항마를 성장시키도록 합시다.

봉효의 기책이 떠올랐다. 잘만 이루어진다면 아주 평화롭게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계획.

-주석, 천자가 스스로 모택평을 견제하게 하도록 만드는 겁니다. 1인자의 자리를 넘보는 2인자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1인자가 직접 나서야 한다. 나도 그에 격한 공감을 했고, 그걸 골자로 청화단은 작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설마 본인이 직접 올 줄이야.”

10분 정도만 일찍 왔어도 청화단 전체가 봤을텐데. 나는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폈다. 아직 아무도 없다.

"그러면 어디 슬슬…."

드르륵.

창문이 열렸다. 환룡을 촉수로 휘감은 가을은 캔맥주를 한가득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내 심장을 향해 집어넣으려던 손을 슬며시 빼냈다.

"......일찍 왔군."

"다행히 그리 멀지는 않더라고. ...너 표정이 왜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실망감이 밖으로 드러난 모양이었다. 둘이서 조용히 데이트를 즐길 생각에 가득차있던 나는 애써 속내를 삼키며, 가을이 건넨 캔맥주를 받아들였다.

"종류별로 최대한 여러 개 사왔는데 괜찮아?"

"그래. 그래서 쟤는 또 왜 촉수로 감아 온 거지?"

환룡은 가을의 촉수에 허리가 휘감겨 들려왔다. 얼굴이 붉게 취해 고개를 떨군게 꼭 과음으로 정신을 잃은 사람 같았다.

"한 모금 마시더니 이렇게 됐네. 원래 술이 약한가?"

"좋아하는 거랑 주량이랑은 또 다르지. 환룡을 내게 잠시."

"어쩌려고?"

가을은 순순히 환룡을 내 앞에 놓았다. 나는 벌써부터 술에 취해 정신을 못차리는 환룡을 끌어안아 등을 토닥였다.

"이래서야 각성의 축배도 들지 못하겠군."

"......딸꾹. 너 뭐야…?"

정신이 반쯤 돌아온 환룡이 나를 게슴츠레 올려다보며 짜증을 부렸다. 나는 계속 환룡의 등을 토닥였다.

"정신 차려라. 다른 인간의 몸에 빙의해서 마셔야지 그냥 무턱대고 마시면 안 되지."

"......그렇네. 히끅!"

환룡은 딸꾹질까지 해대며 정신을 못차렸다. 이대로 누가 업어가기라도 하면 금방 또 반해서 미치는-

"야."

환룡이 내 얼굴을 붙잡았다. 숨결에 알코올의 향이 담겨있었다.

"넌 진심으로 성주한테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해?"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몰라도, 환룡은 취중진담을 내뱉기 시작했다. 아마도 술에서 깨고 나면 내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자각하고 또 이불을 차겠지만, 그가 진심을 다해 내게 부딪히는 만큼 나도 진심으로 답해야했다.

"물론. 이길 수 없는 싸움이면 시작도 안했다."

나는 환룡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곱슬거리는 연한 회색의 머리칼이 어깨쯤에 닿아 흔들렸고, 환룡은 순순히 내 손길을 느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뒤에 누가 있는지 알고 그렇게 확신을 가지실까…?"

"■■■."

환룡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조차도 필터링이 걸리는 그의 본명을 들은 환룡 또한 술이 달아날 정도로 놀란 눈치였다.

"그, 그걸 알면서도 너는-"

"괜찮다. 본인 아냐. 그리고 지금의 우리는 이길 수 없어도."

나는 환룡의 등을 손으로 쓸었다. 그의 심장이, 그의 코어가 뛰고 있는 위를 눌렀다.

"신화에 이르면 이길 수 있어. 너, 나, 그리고 나머지 다섯. 모두가 신위에 오르면 말이지."

"......그렇네. 그러면 이길 수 있기야 하겠네. 그러면 방법은? 방법은 알고 있어?"

"사랑."

"...너 말야."

환룡이 질색한 얼굴로 성질을 부렸다.

"장난해? 뭔가를 사랑하는 걸로 그 신화라는 거에 오를 수 있으면, 나는 진작에 잠이랑 사랑에 빠져서 잠신이 되었을 거야."

"내가 말하는 신화는 그런 게 아니다."

나는 옆에서 쭈볏대는 가을의 손을 잡아당겼다.

"정령 개인이 아니라, 인간과 사랑을 하여 일심동체가 되는 거지. 싱크로라고 하지."

두근. 두근. 가을의 코어 뛰는 맥박이 손 너머로 느껴진다. 환룡 또한 그 감각을 느낀건지, 질투심 강한 얼굴로 나와 가을을 번갈아봤다.

"...뭐야, 그러면 네가 가을이랑 하면 되겠네."

"안 해 주더라고."

가을은 침대에 걸터앉아 나와 몸을 붙였다. 내 어깨에 머리를 이고 몸을 붙이는 육탄공격을 감행해도, 내 심장은 좀처럼 두근거리지 못했다.

"......."

효율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가을과 싱크로하여 SSS에 올라, 간부고 원탁이고 성주고 다 때려잡고 싶다.

하지만 내 진심은 가을이 아닌 다른 이에게 향해 있으며, 내 몸의 주인도 가을과의 싱크로를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 나는 이런 내 상태를 밝힐 수는 없었다.

"와. 너 완전 어장관리하네. 쓰레기같아."

"쓰레기같은 게 아니라 쓰레기 맞아.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치는 쓰레기."

환룡과 가을이 동시에 나를 욕했다. 맞는 말이라 나는 뭐라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가을아. 그냥 나랑 싱크로인가 뭔가 할래? 우리 제법 잘 어울리지 않아?"

"뭐, 네가 바란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기야 하겠지만…."

가을이 환룡을 끌어안으며 내게 물었다.

"어쩔까? 나 안 봐주는 나쁜 사람 버리고, 나 사랑해줄 사람 찾아가는 건. 어떻게 생각해?"

나를 바라보는 가을의 눈동자는 착 가라앉아있었다.

"......."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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