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68화 (168/1,497)

〈 168화 〉1부 9장 2

"제 이름은 샤오린입니다."

샤오린(小林).

평범한 이름의 여인은 그 배경이나 능력이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나이는 스물둘."

운장이라는 S급 히어로의 정체가 약관을 넘긴지 채 얼마 지나지 않은 젊은이라는 것에 대중은 놀랐고,

"열 셋에 이능력자로 각성하여, 적토와 함께 히어로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성년도 지나지 않은 나이에 붉은 가면을 쓰고 괴수를 잡으러 다녔다는 것에 경악했으며,

"현재는 원탁에 적을 두고 있는 히어로입니다."

그런 여인이 인류 최강이라고 불리우는 원탁 12영웅 중 한 명이라는 것에 대중은 기절초풍했다.

"질문있으십니까?"

샤오린은 담담히 사람들에게 물었고, 그나마 빨리 정신을 차린 기자 하나가 급히 손을 들었다.

"지, 진짜 운장이십니까?"

소속도 이름도 밝히지 않고 혀까지 씹었으나, 사람들은 기자의 당황을 이해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이렇게 질문을 할만큼 정신을 차린 것도 대단했다.

"예. 운장입니다. 협회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것이니, 이 시점을 기점으로 원탁의 프로필도 변경됐을 겁니다."

사람들은 황급히 원탁의 공식 사이트를 찾았다. 12명, 이제는 13이 된 원탁의 히어로들 프로필 사이에, 당당히 얼굴을 드러낸 회색 눈동자의 여인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샤오린.

1998년생. 22세.

"언제...?"

"찍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15분 전. 샤오린은 속으로 말을 숨겼다. 그리고 처음 샤오린을 향해 가짜라고 소리를 꽥꽥 지르던 기자가 프로필의 내용을 보고 식겁했다.

"S가...둘?"

"예."

샤오린은 헛기침을 하며 이목을 끌었다. 마력까지 실린 목소리에 기자들의 눈이 샤오린의 입술을 향했다. 그들은 직감했다. 이제 엄청난 특종이 터질 것이라고.

"잠시 행적을 감추어서 죄송합니다."

샤오린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전세계의 시민들에게 다시 한 번 더 인사했다.

"폐관수련을 마치고, SS급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샤오린은 전세계를 상대로한 거짓말을 했다.

* * *

<오후 7시 47분, 북경 히어로 협회 특별병실의 옥상.>

"예. 그럼 잘 부탁해요."

[이쪽은 걱정말렴. 귀찮은 일은 오라클이 알아서 다 처리할테니. 그리고 그....]

"석하랑 금방 한국으로 보낼테니까 안심해요.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인데 왜 그렇게 불안해해요?"

[그야 폭주하는 간부가 어떤지 내가 더 잘 알고 있잖아.]

"그건 그렇네요."

나는 아나스타샤-루살카의 최후를 상기했다. 그는 석하랑을 낳으며 정령 '설야'의 힘이 전이되었고, 괴수 '루살카'가 남아 폭주하여 부산을 쑥대밭으로 만들 뻔했다. 그리고 다행히 폭주하기 전에 남편인 광검 허윤환의 손에 제압되어 간신히 참극을 막았다.

"그래도 걱정마요. 폭주하는 간부라고 해봐야, 같은 SS급 선에서 처리가 가능하니까."

[남은 애는 셋. 그리고 지금 SS는 셋밖에 없는데 괜찮겠니?]

"네. 속성 카운터치면 되니까, 둘은 쉽게 잡을 수 있어요."

절풍의 펜릴.

지륜의 히드라.

풍속성인 펜릴은 내가 잡고, 지속성인 히드라는 석하랑이 잡으면 된다. 거기에 서포트할 환룡과 샤오린까지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 주의해야할 건 모택평이에요. 수족은 잘라냈지만 아직 완전히 실각한 건 아니니까요."

[중국은 히어로 협회나 원탁의 입김이 약한 곳이란다. 동창의 움직임을 제한한 것 만으로도 큰 성과인 걸 잊지 말렴.]

원작의 지식을 바탕으로 내가 판단을 내린다면, 루살카는 원탁의 한 명인 <운디네>로서 중국의 형세에 판단을 내렸다.

다만 나도, 루살카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하나 생겨버렸다.

"천자가 이능력자로 각성할 줄은 몰랐는데."

[주석 아니니?]

"이름이 천자(天子)예요."

[......사람 헷갈리게.]

아무리 생각해도 노린 네이밍이었지만, 어찌됐든 천자는 공교롭게도 화속성과 환속성이라는 두 개의 속성을 동시에 A등급으로 각성했다. 원작에서도 등장하지 않았던 이능력자라, 나는 괜시리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이거 이승형에 이어서 또."

[이승형? 화권?]

"네. 아, 아뇨. 신경쓰지 마요. 그냥 화속성 A급을 발견한 게 신기해서 그런 거니까."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지만 당분간은 무시하기로 했다. 어차피 조만간 또다른 표본을 찾으면 그 때는 그럴듯한 추측으로 확대되겠으나, 굳이 내 무덤을 내가 팔 이유는 없었다.

"일단 오늘 하루는 석하랑도 중국에서 보낼 거예요. 납치된 청화의 구출, 샤오린의 복귀와 SS급 등극, 괴수를 퇴치한 석하랑에 대한 감사. 그 모든 걸 뭉뚱그려서 조촐한 답례를 한다고 하더라고요."

[조촐한?]

"네. 조촐하게. 사건이 터진지 당일이기도 하고, 아직 원흉이 완전히 제거된 건 아니니까요."

우리의 입장에서야 사건의 모든 원흉은 모택평이지만, 대중들은 사건의 배후가 '환건적'이라는 테러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다.

"환룡단원들이 전 동창의 사람들이었으니까 걔들을 써먹으려 했는데, 칼같이 동창 전체를 잘라내는 걸로 대응하더라고요."

[도마뱀 꼬리 자르기 같구나. 꼬리 치고는 몸통까지 잘라낸 것 같지만.]

"네. 시간을 주면 한 두명을 본보기로 내세워서 희생양으로 삼을 거예요. 이 놈이 범인이다! 개인의 일탈이다! 동창 전체를 전수조사하였으나 문제는 없었고, 조직은 아무런 죄가 없다! 아마도 가장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사형대에 오를 거예요."

[저런. 막아야하지 않겠니?]

"푸흐흐."

나는 인간이 다 되어버린 아나스타샤의 관념에 웃펐다. 루살카의 이름만 달고 있어서 그런건지, 히어로로 활동하며 사람들의 정의감에 물든 건지, 그도 아니면 남편과의 해후를 통해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나스타샤는 동창의 희생양이 죽는 것을 상당히 꺼려하는 눈치였다.

"아뇨. 죽게 내버려둘 건데요?"

[......너.]

"진짜 비행기를 테러한 놈이 있어요. 동창 조직원이 저를 납치하려 들었죠. 아마 걔가 목이 뎅겅! 하고 날아갈 겁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비행기에서 승무원인 척 나를 인질로 잡으려던 고자놈이 사형대에 오를 확률이 가장 높았다. 실제로 김해공항에서 함께 비행기를 탄 증거를 들이밀며, 과격하고 삐뚤어진 애국심으로 인한 일탈이라 성명할 게 뻔했다.

"궁금하지 않아요? 모택평이 과연 어디까지 읽고 있는지."

[도박이란다. 위험하지 않겠니?]

"이참에 확실히 상대의 능력을 가늠하는 거죠. 내가 죽인 샤오린이 살아서 돌아왔네? 뭐지? 내 고독이 말을 듣지 않은 건가? 아니면 청화단의 경우처럼 모종의 방법으로 부활시킨 건가? 아마도 머리 장난아니게 아플 걸요? 본인의 머리가 비상하다고 해도, 옆에서 그걸 도와주는 보좌관이 지금 배신때렸으니까요."

[하여튼 너도 참 성격 더러워. 그래서 네가 움직일 거니?]

아나스타샤는 내 계획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혼자 짠 거 아니거든요? 그리고 제가 움직이는 건 아니잖아요? 게으름뱅이 놀려먹을 수는 없으니까."

[......아주 잘못 잡혀도 단단히 잘못 잡혔네. 넌 걔가 불쌍하지도 않니?]

"이제 지 땅인데 열심히 해야죠."

나는 옥상의 난간 너머, 넓게 펼쳐진 땅을 훑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엄청 바쁜 몸이니까, 아시아 정도는 혼자서 감당할 수 있겠죠?"

그걸 위해 부활시킨 시황제며, 그걸 위해 부하들을 전부 살려줬다. 중국은 청화단의 산하 조직-환룡단의 거점 지역이 될 것이며, 환룡은 뒷세계에서 아시아 전역을 아우르며 괴수들을 제압하고 힘을 길러야 했다.

"너무 걱정하지마세요. 저는 악덕 업주가 아니니까."

딱 5년 반만 부려먹을 셈이다.

나는 옥상으로 누군가 올라오는 기척에 전화를 급히 마무리했다.

"그럼 아나스타샤."

[응.]

"당신 밑에서 개처럼 헐떡이고 있을 광검한테도 안부 전해줘요."

[...언제부터 눈치챘니?]

"처음부터요."

딸칵. 아나스타샤는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나는 혹시나 그냥 던져본 말인데 진짜로 하고 있을 줄은 몰라서 잠시 어안이 벙벙했지만, 옥상으로 올라온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집중해야 했다.

"왔어요?"

"그래. 이제 화장해야지?"

천가을은 급히 공수해온 화장품들고 활짝 웃었다. 나는 옥상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이렇게 적극적이야?"

"모처럼 예쁘게 화장할 기회가 생겼는데 기쁘지 않아?"

"퍽이나. 내가 화장해봤자 누구 보여준다고."

"나?"

"......알았다. 알았어. 마음대로 해라."

나는 싱글벙글 신이 난 천가을의 뒤를 따라 병실로 내려갔다. 아나스타샤에게 언급한 조촐한 축하연, 그것은 납치당한 청화가 의식을 되찾고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내가 바람을 쐬며 전화통화를 하는 동안 병실에 있던 이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석하랑은 이미 협회로 돌아갔고, 조덕배와 흑전갈 괴인만 덩그러니 앉아 각자 인터넷을 뒤지고 있었다.

"전화 끝났냐? 이제 좀 있으면 8시인데."

덕배는 슬쩍 시계를 가리켰다. 시간은 빠듯했지만, 그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천가을의 손을 빌리기로 했다. 가을은 회백색이 된 머리칼을 손으로 쓸며 덕배에게 코웃음을 쳤다.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나 이래봬도 메이크업 셀프로 하고 다닌 여자라고."

"화장 잘해서 좋겠네. 하긴 원판이 그 꼬라지니 화장으로라도 커버를, 커헉!"

촉수 하나가 빛처럼 쏘아져 덕배의 명치를 찔렀다. 덕배는 B급으로 진화하며 방어력이 높아졌지만, 가을도 S급이 되면서 공격력도 그 배로 높아졌다.

"흥. 넌 아직 안 돼. 어디 그냥 처박혀 있어."

"이, 이...! 지속서어어엉! 지속서어어어어어엉!"

덕배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지속성 정령을 찾았다. 행방이 묘연한 지속성 정령을 당장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덕배가 가을의 촉수 끝자락이라도 잡으려면 아직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흐흥. 그러면 슬슬 시작해볼까?"

가을은 화장품 박스를 활짝 열어젖혔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온갖 종류의 화장품들이 박스안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잠깐만."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가을을 급히 멈춰세웠다. 가을은 색깔을 고르다가 멈췄다.

"왜?"

"그걸로 할 생각인가?"

"그러면?"

가을은 아홉 촉수를 꺼내 각각의 촉수로 화장품들을 들었다. 마스카라, 아이섀도 부터 시작해 이름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크림까지, 가을은 정말 본격적이었다.

"그, 손으로 해주면-"

"괜찮아. 촉수로 하는 게 더 빨라."

"......."

예정된 회견 시각은 8시 5분.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가을의 손길에 얼굴을 맡겼다.

휘릭. 휘릭.

검은 시야 너머로 무언가가 열심히 스치는게 소름돋았다. 나는 그것을 가을의 손이라고 세뇌하며, 화장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 * *

회견장.

샤오린은 약속된 시간이 되었음을 확인한 뒤, 마력을 흩뿌려 기자들을 진정시켰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워치를 조정하는 척 하며 협회의 관계자와 신호를 주고 받았다. 경호원처럼 선글라스를 낀 미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글라스 너머 그의 눈동자는 샤오린과 마찬가지로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렇군요. ...청화 양이 깨어났다고 합니다."

"사실입니까?!"

"배후는 누구입니까?!"

"환건적입니까, 아니면 진짜로 동창입니까?!"

기자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한 국가의 1인자나 다름없는 권력자를 물어뜯을 좋은 기회에 그들은 광분했고, 샤오린은 그저 난감하게 웃는 것으로 화살을 돌렸다.

"그것은 저도 모릅니다. 그저 '익명의 제보'를 받고 장원에 감금된 청화 양을 구출했을 뿐.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으나, 만약 이 방송을 보고계신다면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샤오린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비스트 테이머는 그 누구도 강제로 소유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괴수를 조종하는 리모컨도 아니고, 강제로 새장안에 가두는 애완조가 아닙니다. 그러니 명심하여 주십시오. 만약 그의 지원을 바라는 국가, 단체, 조직이 있거든, 협회를 통해 정식으로 지원을 요청하십시오."

고생하는 것은 협회가 되겠지만 샤오린은 알 바가 아니었다. 협회의 관계자로 분한 미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만 마치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샤오린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분명히 이번과 같은 참담한 짓을 저지르는 이가 어딘가에 있을 게 분명하기에, 저는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샤오린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공언했다.

"제가 그의 옆을 평생 지킬 것입니다. 원탁에서 물러나는 한이 있더라도."

세계를 향한 선전포고였다.

"아니 미친. 저것도 부인이었어?"

"...노코멘트. 그보다 가을, 지금 화장 번진 것 같은데."

"대답 안해? 저 년은 또 몇 번째야?"

"야, 그냥 죽빵탱이 한 번 날려. 그럼 진짜 멍들고 좋은, 크허억!!"

덕배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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