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67화 (167/1,497)

〈 167화 〉1부 9장 1

2020년 6월 13일

10:07. <비스트 테이머> 청화가 협회에 정식으로 이능력자 등록.

10:30. 협회, <비스트 테이머> 청화의 중국행을 발표. 신서울에서 김해까지의 이동에 대해 밝히지 않음. 기습 출국.

11:49. 청화, 신호 두절. 비행기 폭파.

11:58. 모택평, 테러의 배후로 빌런 집단 '환건적' 지명. 추가 테러 방지를 위한 일시적 국경 봉쇄 선포.

13:50. 중국 전역에 괴수 반응 발생. 영체형 괴수로 추정되나 민간 피해는 전무.

13:59. <굿모닝 테러> 발생. 모택평, 배후로 환건적 지명. 중국 내 이능력자들 분개.

14:22. 중국 각지에서 괴수들이 폭주 시작. 히어로들이 격퇴. 사상자 없음.

14:44. <굿모닝 테러>에 따라 미각성 이능력자들의 각성 여부 확인.

17:01. 주석, 이능력자 등록. 화, 환 더블 A로 판명.

17:04. 서울, 흑염룡 비상. 서울을 떠나 중국으로 비행. 의도 불명.

17:07. 괴수관리대책국, S급 괴수 반응에 미사일 발사. 흑염룡에 대한 대처로 전투기를 통한 요격 제시.

17:23. 흑염룡, 산둥 일대에서 급선회. 북경으로 북상.

17:33. 북경, 흑염룡에 응전. 히어로들 전 집결하여 흑염룡에 대처.

17:54. 주석, 원탁에 지원 요청.

17:56. 원탁, <설화령> 석하랑 급파.

18:14. 설화령, 북경 도착. 흑염룡 요격하여 퇴치.

18:16. 양쯔강 일대에서 SS급 괴수 발생. <혼돈>으로 명명. 설화령 퇴치를 위해 이동.

18:30. 설화령, <혼돈> 격퇴. 북경으로 이동.

18:59. 설화령, <비스트 테이머> 구출 선언. 구조자, <운장>.

19:00. <운장>. 30분 뒤 공식 기자회견 예고.

* * *

<2020년 6월 13일 오후 7시 12분, 신서울 유성 일가 저택.>

"아주 화려하게 날뛰셨네요."

은유하는 X로이드들을 통해 확보한 정보를 바탕으로 대외적인 흐름을 정리했다. 중간중간 피닉스가 저지른 사건들은 하나같이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겉으로 벌어진 모든 일은 피닉스가 만든 사건이었다.

"운장 샤오린…."

적토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S급 이능력자이자, 은유하의 판단으로 전생의 또다른 연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

천가을도 그렇고, 석하랑도 그렇고, 샤오린도 그렇고. 피닉스의 전생(?), 회귀 전(?) 연인으로 추정되는 이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재능을 자랑하는 이들이었다. 더군다나 한창 유성의 자체 연구소에서 들어와 예산을 마구잡이로 펑펑 써대며 날뛰고 있는 히메지 히카리 또한 의심이 들었다.

"......설마 S급들만 모아서 아내로 만든 건 아니겠죠?"

합리적 의심이 든다. 이능력자를 성장시킬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으니, 조금만 능력을 보태줘도 S급은 커녕 SS급으로도 만들 수 있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설화령 석하랑이 아니었던가.

...비록 그 상황은 특수한 상황이었고 과정은 험난했으나, 어찌저찌 둘의 관계는 잘 해결되었다. 이제 은유하는 아끼는 동생인 석하랑과도 연적이 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라이벌들이 너무 많은데.'

하나 둘 늘어나가는 게 상대하기가 버거울 것 같았다. 1:1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만, 그게 은유하가 다루는 인형의 총 숫자인 7명을 넘어간다면 상당히 머리가 아플 것만 같았다.

팬텀 천가을.

운장 샤오린.

설화령 석하랑.

히메지 히카리.

인형술사 은유하.

거기에 또 누가 있을까. 영웅은 삼처 사첩을 거느린다는 속설이 있기는 하지만, 정말 일곱 명으로 끝나는 걸까? 아니면 더 있는데 아직까지 비밀로 숨기고 있는 걸까.

'생각해보면 이것도 의심된단 말이야.'

은유하는 눈앞에 놓인 '이능력자 양성 아카데미 설립 계획안(가제)'를 한참 동안 노려봐야만 했다. 안정된 서울의 인구를 늘림과 동시에 최종 결전을 위한 이능력자를 육성한다는 좋은 취지의 양성소였으나, 은유하는 어째선지 아카데미를 만들려는 피닉스의 음험한 욕구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이미 피닉스의 연인들은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를 아우르기 시작했고, 어쩌면 동아시아를 넘어 전 지구로 뻗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직접 한국에 불러서 키워먹으려는 거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서울수복작전에서 천가을에게 보이던 집착과 광증은 지금 그나마 순해졌다고는 하지만, 그게 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러니 자신의 옆에 두고 직접 키우겠다는 게 아닐까.

은유하의 의심은 점점 점입가경으로, 그리고 진실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나도 키워주려나?"

은유하는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X로이드나 인형은 마음대로 몸을 성형하고 주무를 수 있지만, 차마 자신의 본체에는 칼을 대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피닉스는 말했다.

S급으로 올라가면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그럴 일은 없지만, 피닉스가 이번에 중국에서 잡아오는 정령이 환속성이 아닌 광속성이기를 순간적으로 바라기도 했다.

'일단 내 일부터 철저하게 해야지.'

은유하는 이능력을 이용해 인형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은재민을 더불어 각 분야의 중역으로 자리잡은 인형들은 오늘 있었던 혼란에 따라 바쁘게 움직여야 했고, 그 움직임을 통괄하는 사람은 은유하 한 명이었다.

"누구를 보내면 좋을까…."

그 중 하나의 자리를 빼야했다. 은유하의 눈앞에는 비행기값으로 받게 될 S급 코어가 아른거렸다.

* * *

<같은 날 오후 7시 15분. 베이징 히어로 협회 특별병동.>

나는 나를 위해 마련된 푹신한 매트리스에 누워 휴식을 만끽했다. 서울을 떠나 신서울에 들려, 김해에서 비행기를 타고 중국 전역을 누빈 내 움직임은 거리만으로 족히 3천 km를 넘었을 것이다.

"피곤하네요. 엄청."

"혼자 침대 누워놓고 팔자 좋다. 아주."

덕배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빈정거렸다. 팔짱까지 낀 모습이 아니꼬왔지만, B급으로 진화해서 그런지 상당히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너 얘가 혼돈이랑 싸울 때 어디까지 망가졌는지 못봤지?"

가을이 내 옆에 앉아 덕배를 쏘아붙였다. 덕배는 어깨를 으쓱이며 제 편을 찾았다.

"그거야 지가 마구잡이로 날뛰니까 그렇지. 안 그래?"

"말 시키지 마라. 나 지금 바쁘다."

흑전갈 괴인은 한창 스크린을 내리며 독서를 하는 중이었다. 그의 스크린에는 기원 후 중국의 역사를 담은 수백권 분량의 역사서가 담겨 있었다. 가을이 조심스레 내게 속삭였다.

"저거 진짜 본인이야?"

"사기 치는 거 아니면요."

"어이, 저 두 사람이 당신 황제였는지 의심하는데?"

덕배는 그걸 귀신같이 옆에서 듣고 어깨를 툭툭 쳤다. 아무리 위아래가 없는 놈이라지만 명색이 인류 최초의 황제인데 저러는 건 좀 아니다 싶기는 했지만, 정작 본인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황제님. 쟤 깝치면 죽여도 돼요. 부활시키면 되니까."

"기르는 개가 옆에서 짖으면 그건 개의 잘못인가, 아니면 견주의 잘못인가?"

"개새끼 잘못입니다."

나는 책임을 회피했다. 덕배는 얼척이 없는지 콧방귀를 뀌었고, 황제는 다시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해 역사를 탐독하고 있었다.

드르륵.

특별병실의 문이 열렸다. 정장을 차려입은 백발의 여인이 긴장한 얼굴로 들어왔다가, 문이 열리며 표정을 풀었다. 나는 석하랑에게 손을 흔들어 그를 반겼다.

"고생했어요."

"고생은 무슨. 어휴. 긴장돼서 혼났네."

석하랑은 내 괴인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디에 자리를 잡을지 난감해하다가, 벽에 얼음으로 된 의자 하나를 만들어 살포시 앉았다.

"준비는 끝났어. 이제 생중계만 보면 돼."

"직접 옆에 없어도 돼요?"

"본인이 알아서 다 하겠다는데? 애초에 따지고 보면 원탁으로서는 내가 후배잖아."

"그렇기는 하죠."

석하랑은 병실 한켠에 놓인 대형 TV 스크린을 가리켰다. 사람들로 웅성되는 협회의 회견장에는 아직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아, 도때기 시장마냥 소란스러웠다. 방송국의 기자가 아나운서와 이야기하는 것도 시끄러웠다.

[운장님이 공식 기자회견을 하시겠다고 한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선 영상을 다시 보시죠.]

아나운서의 말에 따라 화면이 변했다. 흑염룡을 막기 위해 모여든 히어로들이 좌우로 갈라지고, 그 사이를 저벅저벅 걸어가는 운장은 기절한 나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안겨서 좋았어?"

가을이 옆에서 내 옆구리를 찔렀다. 유구무언이었지만, 나는 변명을 해야만 했다.

"어쩔 수 없었잖아요. 납치당한 걸 구한 게 석하랑이면 그림이 이상한데."

"아니, 안겨서 좋았냐고."

"신경쓰는 게 그거예요?"

생각해보니 나는 가을을 안아준 적은 있어도, 가을에게 안긴 적은 없다. 가을은 지금 그걸 지적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솔직하게 얘기하기로 했다.

"좋지는 않았어요. 저는 안기는 것 보다는 안는 쪽을 더 좋아하니까."

"그 쪼끄만 몸뚱아리로?"

덕배가 또 끼어들어 이죽거렸다. 나는 손을 괴인형으로 바꾸어 잽을 날렸다.

쿵!

덕배의 머리가 벽에 박혔다. 마력의 파장을 이용한 공격에 덕배는 쓰러졌다.

"흥. 뭣하면 변신하면 그만이잖아요."

"그, 그렇긴 하지."

석하랑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쟤를 언제 안아준 적이 있던가 싶어 기억을 곰곰이 더듬어보니, 관악에서 처음 맞붙었을 때 굴러가는 걸 안아서 구해준 적이 있었다.

[행방이 묘연했던 운장이 갑자기 나타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원탁에서도 그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흑염룡이 나타났을 때도 나타나지 않았다가 지금에서야 나타난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떠드는 동안, TV속 전문가들도 떠들고 있었다. 국경 봉쇄가 해제된 덕분에 전파는 정상으로 돌아왔고, 우리는 굳이 중국 TV를 볼 필요없이 한국 방송국의 생방을 보고 있었다.

중국 방송국은 지금 거의 마비상태였다. 운장이 남긴 마지막 말-정확히는 목소리 때문에.

[십구시 삼십분. 협회의 기자회견장에서 뵙겠습니다.]

붉은 가면 아래에서는 사람을 홀리게 하는 고운 미성이 흘러나왔다. 평소의 목소리도 제법 미성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적토가 말을 대신했죠. 지금까지."

"운장이 여자였다는 것 보다 더 놀라웠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비밀이었지만 그 아는 사람이 중국 내에서 몇이나 됐을까? 숫자를 세아려봐도 오십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사람들 쟤 성별 같은 건 중요하지 않게 생각할 걸?"

다시 정신을 차린 덕배가 뒷통수를 긁적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걸 언급할텐데."

"더 충격적인 거?"

"샤오린이 모택평의 딸이라는 것, 그리고 샤오린이 SS로 올랐다는 것."

"......내 SS된지 얼마 됐다고. 씨이."

석하랑은 볼을 부풀리며 불만을 드러냈다. 인류 최초 SS등급이라는 주목도를 한참 끌고 있었는데, 두번째 SS급이 나오니 뭔가 아쉬운 듯한 눈치였다.

"거 여자들만 다 SS찍네. 야, 나도 SS만들어주라. 남자 최초 SS 찍어보게."

"당신은 아직 한참 멀었어요. 그렇게 열심히 경험치 몰아줬는데도 B급밖에 안 됐잖아요."

"야! B급도 대단한 거야! 어디 B급이 흔한…."

덕배는 실내의 면면을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병실에 모인 이들은 전부 S이상 밖에 없었고, 오직 덕배만이 B급이었다.

"젠장. 누구는 속성 잘 타가지고 바로 S급 찍고. 야, 다음은 지속성 정령으로 하자. 어?"

"걔 어디 있는지 몰라요. 2년 뒤가 되면 지 알아서 나오겠지만."

모든 간부들이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는 정해져있다.

2022년 2월 22일.

황신의 의지가 충만해지는 그 날, 잠들어있던 모든 간부들이 깨어나 활동을 시작한다. 나는 위치를 알고 있는 혼돈환룡을 정령체인 환룡으로 각성시켰고, 이제 나머지 넷 중 하나의 향방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덕배는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렸다.

"2년이나 기다려야 해?"

"...그 전에 찾으면 좋구요. 걱정마요. 한 명은 금방 찾으니까."

"그래? 지속성이냐?"

"아뇨. 유감이네요."

남은 속성은 풍, 지, 광, 암.

그리고 정령을 제외한 히로인들을 따지자면 남은 인간 히로인은 여섯. 석하랑은 정령으로 카운트 되었으니, 이제 3부 능선 정도를 간신히 넘은 셈이었다.

"아. 시작한다."

석하랑이 TV 모니터를 가리켰다. 카메라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지기 시작했고, 내가 입혀준 2P 컬러의 청색 전포를 입은 운장이 회견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맨날 적토만 타고 다니던 이유가 있었네."

"키가 큰 편은 아니니까요."

대춧빛같은 가면을 쓴 운장은 회견대의 마이크를 조정해야했다. 결국 협회의 관계자가 나서서 위치를 조정했다.

[크, 크흠. 그러면 지금부터 회견을-]

[진짜 운장은 어디있느냐! 협회는 가짜를 내세워 운장을 욕보이려 하지 마라!]

기자 중 하나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렸다. 협회의 직원들이 그를 제지하고 나섰으나, 기자는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발광했다.

[운장이 아녀자일 리가 없-]

달칵.

운장이 가면에 손을 올렸다. 회견장에 정적이 내려앉았고, 운장은 후드처럼 쓰고 있던 전포를 뒤로 잡아당겼다.

사락.

비단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운장-샤오린은 대중의 앞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가면 속에 가려졌던 샤오린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반갑습니다. 전 세계의 여러분. <운장>. 샤오린이라고 합니다.]

"와, 대박."

나는 내가 마력으로 짜준 전포 뒤로 머리칼을 넘기는 샤오린을 보며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쟤 속옷 안입고 나갔네."

[......훗.]

기자들을 내려다보는 샤오린의 얼굴에는 해방감이 가득했다.

만약 모택평이 샤오린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면, 무신 이래 세계 최초의 SS급 무인은 샤오린이 되었을 것이다.

그를 각성에 이르게 하는 키워드는 '해방'.

관운장의 코스프레, 부친의 구속, 중국 내 최강 히어로라는 중압감, 자유에 대한 갈망.

그 모든 것을 풀어헤침으로써, 샤오린은 SS의 경지에 올라설 수 있었다.

......나는 가면을 벗으라고 했지, 속옷을 벗으라고 한 적은 없다.

단언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