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1부 8장 24
<6월 12일 밤 10시. 청화단 아지트, 피닉스 펜트하우스.>
서울을 출발하기 전날 밤.
피닉스는 본래 중국에 아무도 데려올 생각이 없었다. 이런 저런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혼자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활동을 시작한 피닉스라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제 청화단이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이들이 생겼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이들이 피닉스가 히로인들이라고 여기는 이들이었고, 그중 천가을은 단연 피닉스와 가까웠다.
그래서 피닉스는 천가을에게 중역을 맡겼다.
"네가 혼돈환룡을 설득해라."
"내가? 무슨 수로?"
천가을은 갑작스레 피닉스의 방에 불려오자마자 들은 피닉스의 부탁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혼돈환룡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제법 강해보이는 간부를 설득하라는 말은 그냥 듣기에는 자살하라는 명령같았다.
"상대에게 빙의하는 존재라며? 나한테 빙의하면 어쩌려고?"
"그러니까 네게 맡기는 거지."
피닉스는 혼돈환룡 공략의 포인트를 짚었다. 육신과 정신, 양쪽을 동시에 공략하는 것. 그게 다른 간부들과는 다른 혼돈환룡의 각성 방법이었다.
"환룡은 혼돈에 깃들어있는 상태다. 즉, 자신의 괴수 육체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거지. 그래서 일부러 혼돈으로 폭주시켜서, 환룡을 떼어내는 거다."
"그러니까 육체랑 정신이랑 분리시킨다는 거지?"
천가을은 금방 내 설명을 이해했다. 나는 원작 지식을 마음껏 활용해 환룡을 설득할 문구들을 정리해줬고, 천가을은 그걸 대본 외우듯 머릿속에 각인했다.
"그런데 이거 말이야."
"어."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한테 아니면 밝히지 못할 속마음인 것 같은데?"
"......."
"걔도 그거야?"
"......부정은 하지 않는다."
천가을은 삐졌다. 결국 나는 천가을을 가장 안전한 장소, 내 코어 바로 옆에 보관하는 것으로 서울에서 빠져나왔다.
환속성 최강의 재능을 가진 이능력자와 환속성 그 자체인 혼돈환룡.
천가을과 환룡 콤비는 전세계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인정받는 조합이었다. 어느정도냐면 이벤트 씬에 따라서 3P까지 하게 되는 원작 보증 조합.
그 둘의 시너지를 위해 나는 직접 천가을을 투입했다.
...결코 내가 3P를 노리고 천가을을 조커 카드로 뽑은 건 아니다.
***
"완전 카오스네."
천가을은 혼돈의 몸속을 천천히 오다녔다. 100m 거체의 괴물인 외형과는 달리, 그 속은 마치 별세계의 것 마냥 정적이고 기괴했다.
"미로도 아니고."
사방팔방이 문으로 가득하다. 온통 회색의 세상에서 색을 가지고 있는 이는 오로지 검은색이 살짝 섞인 천가을 뿐이었다.
"이 속에서 정령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지."
보이는 문만 수백 수천에 이른다. 천가을은 조심스레 문 하나를 열어젖혔다.
꺄아아악!!
하늘을 수놓는 유령 군세들이 비명을 지른다. 이형의 밴시들은 마력을 내뿜으며 완강히 저항하지만, 왠 검은 로브의 존재가 휘두른 지팡이에 맥없이 쓰러진다.
키긱. 키기긱.
검은 로브의 보랏빛 마력에 닿은 밴시들은 하나같이 미쳐버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동료였던 이들을 하나 둘 잡아뜯고, 서로 물어뜯으며 동족상잔을 일으키고 있다.
그만, 그마아아안!!
그 유령 군세를 지휘하던 회색 머리칼의 소녀는 무릎을 꿇은 채 절규했다. 산발이 된 채 피눈물을 흘리는 소녀는 분노와 증오가 가득한 눈으로 검은 로브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체 뭐야! 뭐냐고!
절규하는 소녀에게 검은 로브는 그저 지팡이를 겨눌 뿐이었다. 그의 지팡이에서 흘러나온 보랏빛의 마력은 회색의 소녀를 구속해 공중에 띄웠다.
이걸로 다섯 번째.
"...?!"
천가을은 입을 막았다. 듣는 것 만으로 머리가 어지럽고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다. 소녀는 검은 로브에 의해 잡혀 아둥바둥 거렸다.
■■■ 님의 노예가 되어라. □□여.
검은 로브는 손을 뻗어 소녀의 머리를 주물렀다. 날카로운 촉수 같은 것들이 소녀의 머리를 파고들어, 뇌를 주물렀다.
으, 아아아아악!!
소녀는 비명을 지르다 축 늘어졌다. 천가을은 남은 기력을 모두 짜내어 문을 닫았다.
"허어, 허억!"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동시에 피닉스의 경고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절대로 다른 문은 열지 마라. 너 또 내 말 안들으면 진짜 가만 안 놔둘 거다.
"......모르겠지?"
천가을은 식은땀을 닦으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순순히 피닉스가 알려준 문을 눈으로 훑었다.
"없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네모난 문 뿐이다. 천가을은 계속 살폈지만, 문제의 무늬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들어가자마자 보일 거라고 했는데."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 천가을은 행여나 자신이 놓친게 있나 싶어 전후좌우 사방으로 문을 하나하나 세어가며 흑백의 문장을 찾았다.
"장난하는 거야, 지금?"
설마 다 열어보면 나오는 건 아니겠지. 천가을은 자신이 처음 이곳에 들어온 곳에 서서 주변을 훑었다.
"........"
천가을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자신이 호기심에 문을 열었던 그 아래, 방금전까지 밟고있던 바닥에 조그만 태극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음양의 조화를 그리는 듯한 흑과 백의 무늬는 기이하게 뒤틀려있었다.
똑똑똑.
천가을은 쪼그려앉아 바닥을 향해 노크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천가을은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거 좀 제대로 알려주면…. 문 손잡이였네."
천가을은 무늬를 손가락으로 집어 비틀었다. 그와 동시에 천가을을 감싸고 있던 수 천개의 문이 와르르 무너지고, 천가을이 처음 문을 열었던 문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거 또 열어야 해?"
천가을은 침을 꿀꺽 삼켰다. 피닉스와 연락이 되지 않는 지금, 천가을은 피닉스가 준 정보를 바탕으로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했다.
"...에이, 열고 죽지 뭐! 그래! S급 되서 촉수 떼려면 이 정도 각오는 해야지!"
짝! 천가을은 뺨을 강하게 손바닥으로 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설마 문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는데 또 그런 장면이 나온다면 사양이다.
끼이익.
천가을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천가을은 회색의 소녀와 드디어 마주할 수 있었다.
"......창염의 하수인이구나. 결국 여기까지 왔어."
소녀, 환룡은 천가을의 마력을 읽고 한탄했다. 그리고 침대위에서 머리를 쥐어 뜯으며 이를 갈았다.
"그렇게 나를 괴롭히고 싶은 거야? 응? 그냥 나 내버려두면 안 돼? 내가 뭘 잘못했다고…!"
"잘못한 거 없어. 넌."
천가을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환룡은 멍청히 고개를 들었다.
"뭐?"
"넌 잘못한 거 없다고. 그도 그럴게."
천가을은 침대에 걸터앉아, 환룡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거의 대부분의 문제는 그 촉새가 잘못한 거니까. 너는 걔가 저지른 삽질에 휘말렸을 뿐이야. 나도 그 피해자 중 한 명이고."
"...당신 창염이 만든 괴인 아니야?"
"그래. 괴인이지. 내가 어쩌다 괴인이 됐는지 알아?"
천가을은 피닉스가 알려준 방법을 깡그리 무시한 채,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환룡은 천가을의 목소리에 조금씩 귀를 기울였다.
* * *
흑염룡 격퇴.
인류 최초(공식)의 SS급 히어로는 격전끝에 흑염룡을 제압했다. 지상에 쌓아올린 얼음의 방패들은 흑염룡이 쏘아내는 브레스를 정통으로 맞아도 깨지지 않았고, 석하랑은 북경 2천만 시민들을 지켜내는 단단한 벽이 되었다.
도저히 깨지지 않는 얼음벽에 흑염룡은 육탄 공격을 감행.어떻게든 베이징 시내로 돌입하려 했으나, 결국 설화령에게 얼음조각이 되어 소멸하게 되었다.
원탁의 도움으로 안전을 되찾은 시민들은 의문에 빠졌다.
-왜 서울에 있던 흑염룡이 베이징으로 달려오게 되었는가?
괴수 조종사가 행방불명 됨에 따라 죽었다면 흑염룡은 서울에서 날뛰었을 것이다. 그러나 흑염룡은 서해 상공을 날아 육지를 훑던 순간, 급격히 방향을 틀어 북경으로 북상했다.
그리고 외신들은 의미심장한 기사를 뿌리기 시작했다.
-행방불명이 된게 아니라 비스트 테이머가 납치되어서 베이징에 억류되어있는게 아닌가?
제법 그럴듯한 추측이었지만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흑염룡의 이상 행적을 설명하기에는 그 행적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삼류 찌라시, 연예지, 그리고 가십에 의해 추측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어느새 그 가설은 확신이 되고 말았다.
만약 장강 한가운데 규격 외의 괴수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한창 범인을 색출하는데 난리가 났을 것이다.
"어. 언니야. 여기는 문제 없을 것 같다."
[그래. 알겠어. 나도 계속 프로그램 돌리고 있을게.]
석하랑은 은유하와 통화를 마친 뒤, 물위로 빠져나오려는 혼돈의 위에 얼음덩어리를 떨어뜨렸다.
캐갱!
대가리에 정통으로 집채만한 얼음덩이를 얻어맞은 혼돈은 앓는 소리를 내며 물속에 가라앉았다. 석하랑은 혼돈을 물속에 가둔 채, 워치에 띄워둔 스크린들을 확인했다.
[속보] S급 괴수? 설화령 제압 중.
[협회] 특이 괴수의 등급을 SS로 설정. <혼돈>으로 명명.
[종합] 역시 원탁…가"시민의 안전에 국경은 의미없어."
"<혼돈>이라 이거제."
도대체 어디가 혼돈스럽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석하랑은 혼돈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틀어막았다.
부글부글.
"얼씨구."
물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혼돈은 물속에 가둬졌으면서도 발악하며 브레스를 쏘았다.
"약해."
석하랑은 브레스의 사로에 얼음길을 만들어냈다. 호선을 그리는 얼음길은 브레스를 휘게 만들었고, 석하랑의 고개를 스쳐 공중으로 쏘아졌다.
휘---잉!
비구름에 구멍이 뚫렸으나 석하랑은 개의치 않았다. 혼돈이 구속당한 일대에는 습기가 차고 넘쳤다.
"아주 제대로 판 깔아주고 가삤네."
석하랑은 손을 들어올렸다. 아직까지 비구름은 장대비같은 빗줄기를 떨어뜨리고 있었고, 그 빗방울은 피닉스가 증발시켰던 장강의 물줄기였다.
"구속 풀어지면 금마 볼 면목이 없지."
석하랑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고 날아간 피닉스를 떠올렸다. 온몸에 상처를 입어가면서까지 자신을 위한 전장을 구축해줬고, 석하랑은 그저 혼돈을 잡아두기만 하면 끝이었다.
"근데 언제까지 이케야 하는 건데…?"
석하랑은 머리핀을 만지며 피닉스를 호출했다. 하지만 또 무슨 일을 하러 갔는지 반응이 전혀 없었다.
"......일단 기다려보면 되겠지?"
정령. 환룡.
석하랑은 새로운 가족이 빨리 눈을 뜨기를 학수고대하며, 수면위로 고개를 빼꼼 내민 혼돈의 대가리를 물줄기로 때렸다.
"그러니까 닌 빨리 환룡 내놔라!"
케르륵!
석하랑은 다시 혼돈을 물먹였다.
* * *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어?"
환룡은 창염의 피닉스가 저지른 행보에 경악했다. 천가을을 구한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피닉스가 보인 막장 행보는 여러모로 환룡에게 충격이었다.
"걔가 그럴 년이 아닌데…."
"글쎄. 네가 아는 본인이 맞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냥 추측이야. 나말고도 걔 마수에 걸린 애가 몇 명 있거든."
천가을은 쓰게 웃었다. 고의든 무자각이든 피닉스에 의해 마음을 빼앗기는 이들만 자신을 포함해 벌써 셋이나 된다. 그게 연인에 대한 사랑이든, 동반자에 대한 사랑이든, 가족애든 그건 중요치 않았다.
"어이없지 않아? 자기는 온갖 사람들 공략하고 다니면서, 또 여자 후리고 다닌다? 너도 조심해. 쥐도 새도 모르게 홀릴 수 있어."
"......."
환룡은 천가을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너는 어째서 걔를 따르는 거야?"
"좋아하니까."
천가을의 담담한 고백에 외려 환룡이 더 부끄러워졌다.
"성별을 떠나서, 그냥 존재 자체가 좋아진 거야. 바보같고 멍청하고 답답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뭐라도 해보려고 열심히 노력하잖아."
"......."
환룡은 부러움을 느꼈다. 천가을은 환룡을 가슴으로 품으며 등을 토닥였다.
"그러다보니까 가만히 내버려두지를 못하겠더라고. 또 어디서 사고를 칠지 모르니까. 내가 옆에서 도와줘야지. 내가 옆에서 멘탈 잡아줘야 또 어디가서 이상한 짓을 안 하지. 겸사겸사 세계도 구하고."
"......바보같아."
환룡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랑받지 못할 걸 알면서도 계속 짝사랑을 한다고? 멍청해. 그러다 선택받지 못하면? 결국에는 다른 존재랑 사랑하게 되고, 헌신짝처럼 버려지면 어쩔 거야? 그 때 겪게될 아픔을 너는 견딜 수 있어?"
"......그건 그 때 가봐야 알겠지? 하지만 지금은 이러고 싶어."
천가을은 자신의 진심을 토해냈다.
"현재에 최선을 다하기로. 모든 걸 다 쏟아부어서 공략해보기로. 그래서 마지막에 승리하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정말 바보같아. 어차피 결말은 정해져있어. 다 같이 망하는 거로."
"그 때까지 발버둥 쳐보는 거지.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
환룡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하찮은 인간과 비교해, 정령인 자신이 초라해보이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럼 너희들끼리 발버둥 쳐. 나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거야."
"네 도움이 필요하니까 이렇게 찾아온 거야. 걔도 네가 필요하지 않았으면 신경도 안 썼을 걸?"
"......그럼 계속 신경쓰지 말지. 내가 있다고 달라지는 게 뭐가 있어?"
"있지."
천가을은 자신을 가리키며 고개를 쳐들었다.
"네가 나를 S급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하더라."
"...걔는 인간들한테 어디까지 씨부리고 다닌 거야. 미친 년이 진짜. …...하아."
환룡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천가을은 무슨 말을 하는지 잠깐 이해할 수 없었지만, 환룡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그래. 미친 년이지."
"쓸데없이 강하기만 하고 대가리는 딸리는 무능한 년이야. 무슨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고, 하는 말은 하나같이 이상하고 괴팍해서 또라이같아."
"그건 나도 인정해. 그래도 하는 짓 보면 재미있고 귀엽거든?"
"......그런 년을 너는…. 하아."
환룡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정했어."
"뭘?"
천가을은 제법 의욕을 내기 시작하는 환룡의 모습에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환룡의 썩은 동태같았던 눈이 조금씩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닭대가리한테 너는 너무 아까운 인간인 것 같아."
"......응?"
"내가 가져야겠어."
"뭐, 자, 잠깐?!"
쪽.
환룡이 천가을과 입술을 맞췄다. 회색의 세계가 무너졌다.
설화령 석하랑에 이어, 두번째 정령인 환룡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