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1부 8장 21
상하이로 발걸음을 옮기기 전, 모택평은 먼저 주석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각하! 원탁을 들이시다뇨?!"
노크도 없었다. 모택평은 문을 열자마자 분을 삭이며 소리쳤고, 방 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오셨습니까?"
검은 머리칼의 청년은 다부진 체격으로 모택평을 맞이했다. 날카로운 눈과 자신감 넘치는 얼굴은 평소 그가 알던 유약한 청년이 아니었다.
"각...하?"
"예, 접니다."
청년은 2m가 넘는 장신으로 모택평을 내려다보았다. 저보다 훨씬 체구가 작던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모습에 모택평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무슨?"
"별 것 아니오."
청년은 자신의 귀를 두드리며 살포시 웃었다.
"내게도 들리더군. 새로운 아침을 알리는 새의 지저귐이."
"예?"
"저런. 그대는 듣지 못한 건가. 안타깝네."
청년의 눈은 안타까움과 동정심이 가득했다. 그리고 모택평은 눈치챘다.
"혹시...각성하셨습니까?"
"각성했지. 자각을 하지 못했을 뿐. 그래서 나는 참 이해가 되지 않아."
청년은 자신의 옆에 선 이능력자에게 물었다.
"자네는 이 맑고 청명한 소리가 그리도 듣기 싫다는 말인가?"
"......그걸 10번 넘게 듣게된다면 마음이 달라지실 겁니다. 각하."
백발의 여인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게 무슨...."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각하께서는 A급이십니다. 조금만 성장해도 S급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검사 결과가 있기도 하죠. 심지어 두 개 다."
"뭐라고?"
모택평은 여인이 내민 검사지를 빼앗아 살폈다. 세상 드물다는 환속성에 더불어, 화속성까지 한번에 각성한 이중 속성의 보유자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그게 지금 문제가 아니오, 국장."
청년은 모니터에 한창 날뛰고 있는 흑염룡을 가리켰다.
"저 해로운 용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나, 지금 우리에게는 힘이 없지요. 운장이 행방불명되었으니."
청년과 여인은 모택평을 질책하듯 노려봤다. 모택평은 태연함을 가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모르겠사오나, 운장의 행방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그래서 부득불 협회에 지원을 요청했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괴수관리대책국에 아무런 연락도 없었잖습니까!"
모택평이 언성을 높이며 따지고 들자, 청년은 살짝 겁에 질린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청년의 앞을 여인이 막아섰다.
"S급 괴수가 수도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와서 부탁을 드렸습니다."
여인의 머리 위로 튀어나온 토끼귀가 번쩍 솟아올랐다.
"원탁에 도움을 요청하자고. 마침 가까운 곳에 최강의 이능력자가 있지 않습니까?"
"이, 이런!"
모택평은 주먹을 불끈쥐며 이를 갈았다. 여유로운 여인의 태도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귀쟁이년이...! 나를 모욕하는 건가, 지금!"
"죄송합니다. 절차를 무시한 징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받겠습니다."
여인은 귀를 까딱거리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런 거 무시하고 사람들 지키는 게 히어로들 기본 아니겠어요?"
"그래."
청년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스마트폰을 들었다.
"내, 내가 직접 요청했네. 원탁에."
[안녕하십니까, 국장님.]
스마트폰 너머에서는 금발의 익숙한 얼굴이 눈에 비쳤다.
"영국 놈...!"
[지도자의 요청에 따라, 원탁에서는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급히 히어로를 파견하기로 했습니다. 파견 가능한 가장 가까운 히어로를 말이죠.]
"이, 이...!"
샤오린을 스스로 제거한 뒤, 아직까지 그는 원탁에 넣을만한 S급 인재를 찾지 못했다.
"아쉽네요. 운장이 있었다면 서울에서 온 괴수가 날뛸 일도 없었을텐데."
토끼귀의 여인은 입꼬리를 비틀며 비웃었다.
모택평은 스스로의 계획에 자멸했다.
* * *
중국에도 운장을 제외한 S급 이능력자가 두 명 있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운장만큼 강자는 아니었다.
더더욱 하늘을 자유자재로 나는 비행형 괴수, 흑염룡을 건드릴 만큼의 능력도 없었다.
언제나 S급의 괴수는 운장이 도맡아 처리를 해왔기에, 운장의 공백을 메울 수 있을만큼 둘은 강하지 못했다.
"으아악!"
"살려줘!"
검푸른 불꽃에 히어로들이 타들어간다. 황급히 수속성 이능력자가 마력으로 물을 끼얹어 불을 꺼뜨렸지만, 이미 마력은 절반 이상에 불에 타버렸다.
"불꽃에 가까이 가지 마! 마력이 탄다!"
"하지만 사방이 불꽃인데 어떡하라고?!"
히어로들 사이에서도 내분이 생기기 시작했다. 흑염룡은 유유히 하늘을 날며 그들의 혼란을 내려다봤다.
[슬슬 작전이 진행되어야 하는데.]
흑염룡은 초조함에 주변을 훑었다. 이미 시야는 어둑어둑해졌고, 그가 히어로들을 가지고 놀고 있던 것도 시간이 제법 많이 흘렀다.
[아무리 명령이라고는 하지만 지루하군.]
S급에 이른 것은 좋으나, 그 S급의 힘을 막상 다루기 시작하니 적수가 없었다. 단둥에서도 그렇고, 이곳 북경에서도 흑염룡을 쓰러뜨릴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몇몇 본보기로 죽여버릴까.]
흑염룡이 히어로들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는 건 히어로들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여기서 한 둘을 본보기로 죽여버린다면, 저들도 긴장의 끈을 놓치 않고 달려들 것이다.
[아니면 아예 민가를.... 후후.]
흑염룡은 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그의 주인이 자신에게 부여한 역할을 떠올렸다.
- 베이징에서 난동을 부리다가 히어로에게 장렬히 전사.
한 마디로 '시간을 벌다가 죽어라'는 말이나 다름없었지만, 흑염룡은 순순히 그 명령을 받아들였다.
[역시 그분은 우리들의 마음을 잘 아신단 말이야.]
힘을 갈구하는 자, 그 힘을 써보고 싶은 것은 당연지사. 그리고 그 힘을 마음껏 과시하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정말, 정말 평생을 믿고 따르고 싶게 만들어 주는군.]
흑염룡은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동남쪽. 해상에서 차가운 한기가 느껴진다. 흑염룡은 자신을 죽일 영웅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그래. 서울 빌런들이라면 모두 소원 하나를 품고 있지.]
자국내 S급 히어로를 쓰러뜨리는 소원. 그리고 이제 상대는 S급을 넘어 주인과 같은 단계에 오른 세계 최강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석하랑이라.]
서해를 넘어, 원탁의 영웅이 날아오고 있었다.
흑염룡은 기수를 돌렸다.
* * *
"오, 시작됐다."
나는 덕배로부터 빼앗아 내 손목에 채운 워치의 정보를 취합하며, 승리의 두근거림을 멈출 수 없었다.
흑염룡을 북경 상공에 투하한다는 제 3의 테러는 성공적으로 모택평의 시야를 끌었고, 다행히 원탁은 합법적인 명분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하여튼 어머니들 치맛바람이란."
아나스타샤는 원탁의 협조를 구해내는 대신, 그의 딸인 석하랑이 아주 화려하게 활약하는 것을 원했다.
겸사겸사 서울의 S급 괴수 또한 위협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나는 모택평의 시야를 혼란시키게 만들 괴수로 흑염룡을 택했다.
'본인도 몸이 근질근질 할테니.'
석하랑은 이름을 날려서 윈.
흑염룡은 강자와 싸워서 윈.
아나스타샤는 딸의 활약을 멀리서 흐뭇하게 지켜보면서 윈.
나는 모택평의 시야를 돌린 사이 혼돈환룡에 집중할 수 있어서 윈.
오직 모택평만 손해인 이 계획은 다행히 성공으로 들어맞았고, 나는 다시 혼돈환룡에게 집중해야 했다.
'북쪽으로 도망칠 줄 알았는데.'
그들은 남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황제는 금방 환건적의 위치를 찾아냈고, 환염령들은 하늘을 날며 추격을 개시했다. 나는 그들이 알려오는 정보를 바탕으로 그들이 도망치는 길목을 가로막았다.
"아아악!"
혼돈환룡이 나를 보자마자 질겁을 한다. 나는 환한 얼굴로 덕배를 크게 흔들었다.
"이제 다섯 남았네요?"
혼돈환룡, 샤오린, 그리고 기타 떨거지 셋. 혼돈환룡의 바로 옆에 서있는 미청년은 짱구를 굴리며 탈출할 기회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소용없어요. 당신들 찢어진 거, 금방 들켰으니까."
"도대체 무슨 수로?"
"궁금할 필요는 없죠. 안 그래요?"
하늘을 뒤덮은 미니피닉스들은 아직까지 내게 시야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제 저녁이 되어 그 시야 공유도 끝나게 되겠지만, 여기서 잡아버리면 될 일이다.
"그러니까 숨바꼭질은 여기서 끝입니다!"
나는 덕배를 집어던졌다. 푸른 불꽃이 타오르는 돌방망이가 혼돈환룡을 노리며 날아갔다.
"흡!"
샤오린은 뒤로 크게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혼돈환룡은 스스로 걷을 의지도 없이 샤오린에게 안겨있었기에, 샤오린은 무기를 휘두를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괴인들이 막아야 했다. 내가 한 번 씩 터뜨렸던 검괴인과 언월도괴인이 무기를 앞으로 뻗으며 덕배를 가로막았다.
카가강!
"크흑!"
"으아악!"
괴인들은 팔의 핏줄이 터질만큼 힘을 짜내며 덕배를 맞받아쳤다. 벌써 수 십 차례 이루어진 덕배 투척인 만큼, 괴인들도 이제는 덕배를 받아치는데 이골이 난 듯 했다.
"에이, 또 막히는, 응?"
검과 언월도 사이에 끼인 덕배에게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행여나 덕배가 또 죽는게 아닐까 싶어 미안하고 한심했지만, 이어지는 상황은 내 예상을 한없이 뛰어넘었다.
파사삭!!
울퉁불퉁한 돌방망이가 터졌다. 날카로운 돌조각들이 괴인들의 전신을 찔렀고, 나는 그 사이에 매끈하게 드러난 방망이에 감탄했다.
"이제 진짜 덕배트가 되어버렸네요?"
나는 마력으로 덕배를 잡아당겼다. 진짜 야구방망이마냥 아주 매끄럽게 연마된 돌방망이는 연타석 홈런이라도 날릴 것 마냥 단단했다.
"축하합니다. 이제 B급이네요."
내가 열심히 사용해준 덕분이지만. 나는 덕배(야구배트 사양)을 횡으로 두어번 휘두르며 자세를 잡았다.
"그러면 신무기 테스트 갑니다!"
탁.
나는 직접 땅을 박차고 달렸다. 두 괴인이 무기를 들며 앞을 가로막았다.
"가라---!!"
나는 또다시 덕배를 집어던졌다. 두 괴인은 원패턴의 내 공격에 질려하는 눈치였지만, 새롭게 진화한 덕배트에 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아아!"
둘은 기합을 내며 덕배를 막으려 했다. 나는 그들을 비웃으며 손뼉을 한 번 가볍게 쳤다.
"쾅!"
"뭐?!"
덕배가 뜨겁께 달아올랐다. 덕배는 방망이 모양의 폭탄이 되어 폭발했고, 괴인은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폭발에 휩싸였다.
쿠------웅!
엄청난 폭발소리와 함께 거대한 흙먼지가 일어났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는 먼지를 손으로 휘저어 바람을 일으켰다.
"역시 B급. 자폭도 엄청 강하네요."
나는 폭연을 뚫고 들어가 덕배의 코어를 집어들었다. 이전보다 확연히 색이 짙어진게, 확실히 B급으로 진화한 증거였다.
"도대체 당신은 부하를 뭘로 생각하는 겁니까?"
흙먼지 너머에서 미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이름이-
"봉효?"
"예. 혼돈환룡 님의 첫번째 괴인, 봉효입니다."
봉효는 굳은 얼굴로 내 손에 들린 코어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코어를 장난감처럼 하늘에 던졌다가 잡으며 그를 맞이했다.
"반가워요. 창염의 피닉스입니다."
"자기소개는 됐습니다. 설명해주십시오."
쫑긋. 내 귀가 절로 까딱거렸다.
"도대체 당신에게 부하는 뭡니까?"
"언제든지 내 마음대로 써먹을 수 있는 거?"
그런 의미에서 덕배는 아주 소중한 모르모트다. 지금도 그의 희생이 있었기에, 무기화된 괴인을 자주 사용하면 경험치가 오른다는 이론을 실증할 수 있었지 않은가.
"......당신과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군요."
봉효가 사납게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저라면 다르게 했을 겁니다. 부하의 능력을 전적으로 믿고, 그에게 모든 일을 맡겼을 겁니다!"
"에이, 제가 나서면 다 해결되는 걸요. 잘 생각해봐요."
나는 덕배로 바닥에 쓰러진 괴인들을 가리켰다.
"만약 얘가 나섰다면 이렇게 일격에 쓰러뜨릴 수 있었을까요?"
"......말이 통하지 않는군. 정말."
봉효는 존대를 놓았다. 내게는 예를 갖출 필요도 없다는 의미일까.
"저 당신 주인이랑 동급, 아니 그보다 윗사람인데요?"
"알게 뭐냐. 네가 내 주인도 아닌데."
"그건 맞는 말이지만."
주인이 다른 괴인끼리는 명령을 내릴 수 없다. 그랬다면 아까전에 싸울 때, 싸움에 미친 살인귀를 바로 땅에 묻어버리고 내가 샤오린을 혼돈환룡에게서 빼앗았을 것이다.
"흐흐. 꽤나 건방지네요, 당신.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나대는 거예요?"
"내가 이거는 엄청 좋거든."
봉효는 자신의 머리와 눈을 가리키며 나를 비웃었다. 나도 그를 비웃으며 덕배를 겨눴다.
"흥.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네요."
"맞춰 볼래?"
"내가 이야기하는 거 좋아하는 줄 알고, 그 사이에 샤오린을 몰래 도망치게 했죠?"
웃고있던 봉효의 표정에 금이갔다. 설마 이런 고전적인 수법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을 했다면 오산이다.
"이미 환염령들이 둘의 뒤를 쫓고 있어요. 설령 혼돈환룡이 샤오린에게 빙의를 한다고 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당했군."
봉효의 입꼬리가 가라앉았다. 나는 봉효에게 다가가 손톱을 날카롭게 세워 목젖에 겨눴다.
"유언 정도는 들어드릴게요."
"......창천이사, 환천당립이다. 이 망할 놈아."
"푸흐흐. 누가 환건적 아니랄까봐."
스스로 도적이기를 바란다면 숙청을 하는 수밖에. 나는 손을 횡으로 그어, 봉효의 목을 날렸다.
뎅겅.
피분수가 솟구치며 봉효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옆으로 몸을 비틀어 그의 몸을 슬쩍 피했다.
"쯧."
쓸데없이 시간만 버렸다. 무언가 홀로 남아서 비장하게 다가오길래 뭔가 있나 싶었더니, 그냥 시간을 벌려는 수작이었다.
"황제님. 둘은 어디있어요?"
[놓쳤다.]
"예?"
이게 무슨. 황제의 이어진 목소리는 나를 경악케 만들었다.
[장강에 몸을 던졌어. 혼돈환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