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1부 8장 18
퍽.
살이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내 갑주에 붉은 피가 튀었고, 덕배는 상대의 어깨를 으스러뜨리다 못해 짖이겨버렸다.
[......예상외로군.]
정말로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마지막 남아있던 혼돈환횽의 괴인 하나가 스스로 몸을 던져 주인을 구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제 주인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분이라고 하셨습니까."
미청년은 탈골된 어깨를 붙잡으며 눈을 희번득거렸다. 나는 덕배를 회수해 한 발자국 크게 물러섰다.
[이름은?]
"괴인이 되며 버렸습니다. 지금은 환룡단의 괴인, <봉효>입니다."
[...봉효? 샤오린 오빠?]
"예. 배다른 남매이기는 합니다만."
봉효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어깨는 덕배에 의해 너덜너덜해져, 아예 뜯어버리는 게 나을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봉효는 아픈 기색 없이 고통을 감내하며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제 주인님, 혼돈환룡님은 모든 것을 포기하신 게 아닙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하시기로, 결정하신 겁니다!"
[......?]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지. 나는 순간적으로 내 귀가 잘못됐나 착각이 들었다. 봉효는 내가 침묵하자 한쪽 팔을 펼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은 전력으로 잠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제 주인님은 인생의 모든 에너지를 잠을 자는데 사용하고 계십니다! 결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에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열심히 하고 계신 겁니다!"
[이게 무슨 또라이같은 궤변이야?]
"궤변이 아닙니다! 무릇 뛰어난 우두머리란!"
봉효가 피를 토하며-진짜 피를 토하며-소리쳤다. 나는 그의 기괴함에 한 발자국 물러서야 했다.
"유능한 부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겁니다! 당신도 하나의 조직 수장이라면 알고 있을 터!"
[그래. 그래서 지금 그게 쟤가 다 때려친 거랑 무슨 관계가-]
"주인님께서는 저를 괴인으로 만드시는 것으로 이미 모든 것을 다 하신겁니다! 그 이유는!"
봉효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혼돈환룡님에게 주어진 모든 역할, 제가 다 수행해낼 거기 때문입니다!"
[......모택평 자식들이라 그런지 하나같이 나사가 하나 빠졌군. 네가 제갈무후라도 될 참이냐?]
"주인님께서 그걸 바라신다면, 저는 얼마든지 그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저는 훨씬 좋지요."
봉효는 자신의 팔을 가리켰다. 툭. 너덜너덜거리던 근육이 찢어지면서, 팔이 바닥을 굴렀다.
"적어도 저는 오장원에서 늙어 죽지도 않잖습니까."
[그러니까 너는 지금 혼돈환룡 대신에, 다크 레기온의 간부로서 해야할 일을 대신 하겠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주인님께서는 이미 모든 일을 다 하셨습니다. 바로, 이 봉효를 괴인으로 만드시는 것으로!"
나는 직감했다. 이 자의식과잉의 미청년이 얼마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녀석을 이대로 두면 혼돈환룡의 정신머리는 영영 고칠 기미가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얘도 패죽일까.'
그러기에는 샤오린의 이복오빠라는게 마음에 걸린다. 원작 이전의 인물이라 별로 신경은 쓰지 않고 있었는데, 막상 그와 이렇게 마주하니 원작의 치명적인 설정 하나가 기억이 나버렸다.
'샤오린 영상.'
샤오린이 한창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마구잡이로 날뛰던 시절의 온갖 영상들. 그것을 인터넷 세상에서 모조리 지워버리고 샤오린이라는게 탄로나지 않게 지켜준 능력자가 바로 눈앞의 이 남자, 봉효였다.
'얘 그거 원본 가지고 있으려나?'
[......좋다. 그렇다면 물어보도록 하지.]
나는 주변에 결계를 쳤다. 혼돈환룡은 몰래 뒷걸음질치며 거리를 벌리려했지만, 나는 혼돈환룡까지 가두는 불꽃의 결계로 그를 도망치지 못하게 막았다.
"히, 히익?"
"어딜 도망가려고요?"
화륵.
나는 인간형으로 바꾸어 목을 가다듬었다. 봉효는 혼돈환룡과 비슷한 내 인간형의 상태에 눈에 이채를 띄었으나, 곧 내 이어진 말에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자칭 혼돈환룡 따가리 아저씨."
"......따까리도 아니고 아저씨도 아닙니다. 굳이 정정하자면 저는 어디까지나 저 분의 심복입니다."
"예, 심복이라면 어디 한 번 설명해보세요. 이 땅에서 어떻게 날뛰려고 계획하고 있었는지. 설마 그냥 혼돈환룡에게 조금 더 좋은 침실을 마련하겠다는 생각만 하고 계신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요."
봉효는 한손을 뒷짐지며 나긋나긋하게 웃었다. 혼돈환룡은 은근슬쩍 봉효의 옆으로 다가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저는 주인님이 조금 더 편안한 곳에서 주무실 수 있게, 이 땅을 아주 제대로 엎어버릴 생각입니다."
"어떻게요?"
"모택평을 제거하는 것으로요."
"오호."
제법 그럴듯한 목적이다. 자신의 친부라는 것을 신경쓰지 않은 채, 오직 혼돈환룡이라는 주인을 위해 자신의 친부를 제거하겠다는 생각은 부하로서 상당히 귀감이 될만한 자다.
"어떻게요?"
하지만 그 구체적인 계획은 들어봐야 아는 법. 꿈은 원대하나 그 꿈을 실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과 힘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냥 출사표만 내던지고 끝은 아니겠죠?"
"물론 아닙니다. 저는 평생을 모택평을 실각시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입니다."
"......?"
그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봉효는 기회를 잡았다는 양 말을 이었다.
"애초에 저는 모택평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그의 수하가 된 사람입니다. 아버지이기는 하나, 그는 제 어머니를 무참히 간살한 악적이지요. 저 뿐만 아니라 그의 자식들 모두가 사랑을 받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들입니다."
"예. 그건 잘 알고 있어요."
샤오린이 대표적이니까.
"그래서 저는 모택평의 심복으로 일하며, 그의 온갖 부정부패를 기록하였습니다. 뇌물, 성상납, 정적 제거 등. 그 온갖 일을 알고있지요."
"그 기록물이 어디있나요?"
톡톡. 봉효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나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능력으로 마인드 리딩을 해도 그게 증거로 채택될 것 같아요? 에휴."
"애초에 기록을 남기려했다면 심장이 터져 죽었을 겁니다. 그는 자식들의 심장에 고독을 박아넣었으니까요. 대신에 저는 그를 일격에 실각시킬 정보를 머릿속에 기억만 해두고 있었는데-"
"......? 잠깐만요. 고독?"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갑자기 고독은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내가 말을 끊으며 묻자, 혼돈환룡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심장에 벌레가 있었어."
"심장사상충?"
"...아니, 자살 명령을 내리면 언제든지 대상을 죽여버리는 벌레가. 나는 그걸 괴인으로 만들면서 떼어준 거야. 얘들 동정이 아니라."
"........"
오해가 풀렸다. 하지만 한 가지 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샤오린은요?"
"있었습니다. 지금은 없습니다."
샤오린은 단 한 번도 내게 심장의 고독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없다. 그저 아버지인 모택평에게 불합리한 명령을 받고 있다며 불평을 몇 번 내뱉었을 뿐, 그게 어떤 물리적인 수단이나 이능력적인 수단에 의해 강제된다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지금은 없다는게-"
"이미 터졌거든요. 쾅, 하고."
"?"
"자살당했습니다. 그...아마도 당신과 압록강에서 한 전투에서 패한 뒤, 모택평에게 불려와 자살당했습니다."
"???"
내 사고를 훨씬 뛰어넘는 아뜩한 비사였다. 샤오린이 메인 히로인인건 차치하고, 나는 모택평이 저지른 짓을 이해할 수 없었다.
"S급인데요?"
"예. 그래도 당신께 패배해서 더 가치는 없다고 하더군요."
"원탁 히어로인데요?"
"원탁에서 당신과 야합을 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내가 샤오린을 이겨서, 모택평이 샤오린에 대한 이용가치를 잃었다?"
"그런 셈입니다. 정체까지 탄로났으니 더했지요. 원래 그의 계획은 샤오린이 당신에게 당한 공격의 후유증으로 죽어, 대중을 분노케하여 반도를 향해 진격할 계획이었습니다."
"......."
새삼스럽지만 다시 한 번 더 놀랐다. 이 세상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내가 모르는 장소에서 온갖 사건 사고가 발생하는 곳이라는 걸.
'설마 샤오린까지 괴인이, 그것도 혼돈환룡의 괴인이 될 줄이야.'
그리고 그 사건 사고의 대부분이 내 영향으로 벌어진 나비효과라는 걸. 진짜 굿이라도 해야하는 걸까. 나는 절로 짜증이 일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둘에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 샤오린은?"
"내가 부활시켰어."
혼돈환룡이 쭈볏대며 봉효의 뒤로 더욱 숨었다.
"봉효가 샤오린 시체 빼돌리고, 내, 내가 걔를 부활시켜서 너한테 보냈단 말이야."
"언제요?"
"오늘 아침. 나, 너 한국에 있는게 나 잡으러 온 건줄 알았다고...."
"......."
엇갈렸구나. 내가 오해를 해도 단단히 오해를 했구나.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눌렀다. 두통이 절로 일었다.
"좋아요.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나는 결계를 해제한 뒤 덕배를 집어들었다.
"일단 당신부터 때려잡은 다음에, 싹다 움직이지 못하게 해둬야겠어요. 변수차단. 얼마나 좋은 방법이에요?"
"......그 변수 차단의 방법은?"
"문제가 되는 놈들, 싹다 묘지에 가두는 거죠."
나는 땅을 박차고 달렸다. 봉효의 옆을 스쳐, 혼돈환룡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혼돈환룡은 화들짝 놀라며 봉효의 안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그보다 그의 뒷통수를 잡는 내 손이 더 빨랐다.
"아악?!"
"주인님!"
"움직이지마요. 움직이면 다 태워버릴 거니까."
머리칼을 움켜쥔 내 손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혼돈환룡은 자신의 머리칼이 타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고, 봉효 또한 제자리에 멈춰 안절부절 못했다.
"그래, 샤오린 부활시킨 건 잘했어요. 그건 칭찬할만 하죠."
"그, 그럼 이거 놓으란 말이야...!"
"그래도 네 썩어빠진 정신상태를 고쳐야 하는 건 변함이 없다는 말이에요?"
나는 혼돈환룡의 몸 전체에 마력을 흩뿌렸다. 내 의도를 읽은 혼돈환룡이 발버둥을 치며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내 마력은 그의 코어를 움켜쥐듯 꽉 붙들어메고 있었다.
"소용없어요. 빙의해서 도망치는 것도 이제 끝입니다. 일단 저랑 둘이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휘익.
바람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혼돈환룡을 발로 차 내게서 떨어뜨렸다.
카가각---!!
칼바람이 일었다. 카마이타치라고 부르는, 검기에 마력을 실어 쏘아보내는 원거리 참격이 나를 덮쳤다. 나는 검격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마력을 둘러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서걱, 서걱!
".......!"
보호막이 잘려나갔다. 다행히 칼바람은 보호막을 자르는 것으로 그 힘을 다해 소멸했지만, 고작 원거리에서 날린 참격이 내 보호막을 잘랐다는 것이 문제였다.
바람, 칼날. 그리고 저 멀리서 느껴지는 흉흉한 살기.
"오늘 텃네, 진짜."
꼬여도 어찌 이렇게까지 꼬일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바람을 타고 달려오는 정장의 미녀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도모, 질풍객입니다."
원탁의 히어로이자 또다른 메인 히로인 '히메지 히카리'의 오빠, 질풍객 히메지 하야테. S급 이능력자이자 검객인 그는 나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한 판 붙어주시겠습니까?"
"......연약한 소녀에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이며 그의 살기를 흘려냈다. 하지만 질풍객은 활짝 웃으며 박수까치 쳤다.
"과연. 내 살기를 흘려보내다니. 보통 실력자가 아니구나. 역시 샤오린을 쓰러뜨린 무인이야."
"......풉, 멍청이."
혼돈환룡이 옆에서 나를 비웃었다. 나는 콧방귀를 뀌며 다시 그를 비웃었다.
"멍청이는 그쪽이예요. 제가 샤오린을 쓰러뜨린 거거든요? 그러면 그보다 하수인 질풍객이라고 다를 것 같아요?"
"이거 너무한데. 내가 운장 밑이라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어?"
"그야 당신은 S급 따리.... 아니, 신경쓰지마요. 어차피 모르고 살아가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샤오린은 메인 히로인이라 SSS급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질풍객은 평생은 S급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운의 미인이다. 나는 덕배의 무기화를 해제하여, 그의 코어를 주머니속에 집어넣었다.
"싸우지 않겠다는 말이야? 무기를 집어넣는 건?"
질풍객은 눈에 살기를 번뜩이며 나를 노려봤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아뇨. 그래도 그쪽 칼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알고 있으니까. 아끼는 거거든요."
"아하. 그래도 무기 드는게 나을텐데."
"걱정마요. 그쪽 아무리 날뛰어봐야 저한테 안 되니까."
질풍객은 검사이나 그 마력의 근간은 풍속성이다. 그의 동생이 한창 주장하는 마력의 속성론에 따르면, 화속성인 나는 그의 '하드 카운터'나 다름없는 존재다.
"제가 지금 정신도 없고 바쁘거든요? 그러니까 좀 꺼져주실래요? 다음에 상대해드릴테니까."
"이 정도로 도발해놓고 가면 안 되지. 안 그래? 그리고 지금 아니면 안 돼. 나 지금 새치기한 거란 말이야."
질풍객이 자세를 낮추며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나는 갑자기 난입한 도전자의 등장에 할 수 없이 마력을 일으켰다. 질풍객도 내가 전의를 일으키는 것에 기뻐하는 눈치였다.
"일격에 쓰러뜨려드리죠."
"저기, 잠시만요."
봉효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질풍객의 살기가 그를 향했지만, 봉효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씩 웃고 있었다.
"정말로 정신이 없으셨던 모양입니다?"
"네?"
봉효가 갑자기 내 앞으로 뛰어들었다. 마치 내 시야를 가로막듯 달려드는 통에 나는 다리를 뻗어 그를 걷어차버렸다.
"크헉?!"
봉효는 맥없이 허리가 꺾여 날아갔다.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그는 의아하게도 웃고 있었다.
"......!"
그의 뒤에 숨어있던 혼돈환룡이 없다.
"어, 아가씨. 저기 뒤에 숨어있, 흐억?!"
혼돈환룡이 질풍객에게 뛰어들었다. 질풍객의 마력이 뒤틀리기 시작했고, 나는 급히 몸을 날려 주먹을 뻗었다.
카앙-!
주먹과 검이 부딪혔다. 그의 칼날에는 회색의 환속성 마력이 깃들어있었다.
"도모, 피닉스 씨."
칼날 너머, 질풍객의 눈동자는 회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혼돈환룡입니다."
혼돈환룡은 질풍객의 몸을 탈취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