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1부 8장 9
그 시각. 동창 모 비밀기지.
"아무래도 국장에게 당한 모양입니다."
옛 동창의 조직원이자 <사재>라는 히어로명을 가지고 있던 남자, 린레이는 바닥에 부복하며 보고를 마쳤다.
"덤터기를 썼군."
의자에 앉아 고뇌에 빠져있던 미청년, <봉효>는 제 아버지이자 동창의 실질적 주인인 모택평에게 한 번 크게 얻어맞은 것에 이를 갈았다.
"그 청화인가 하는 여자에게 한 납치, 그걸 우리에게 뒤집어 씌운거야."
"비행기는 공중폭파 되었습니다. 아마 마력에 의한 자폭이거나, 그에 준하는 폭발일 겁니다."
"시신도 수습할 수 없으니 증거도 없지. 우리를 잡기 위해 괴수를 조종할 수 있는 외국의 인재까지 죽여버리는 건가. 미쳤군, 미쳤어."
봉효는 혀를 차며, 제 무릎에 앉은 회색 머리의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녀는 봉효의 쓰다듬을 받으며 콜콜 자고 있었다.
"일단 전부 활동을 멈추게 하시게. 행여나 전투를 벌이게 되면 여지없이 테러집단으로 몰릴테니."
"알겠습니다. '유령'이 되어 이곳으로 귀환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자네도 괜히 이제 선다고 아무렇게나 박고 다니지 마시게."
"...크흠. 제독."
사재는 봉효가 쓰다듬고 있는 소녀를 눈으로 가리켰다.
"제독은 여신님을 안으셔서 좋으시겠습니다?"
"떽. 이 사람아. 내가 어디 안고싶어서 안는 겐가. 이 분께서 여기서 주무시고 계신 것을."
봉효는 입꼬리가 비틀리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신께서 여기서 주무시는 걸 바라셔서, 나는 지금 한나절 넘게 화장실도 못가고 있는 상황일세."
"......부디 무운을."
"무운이랄 것 까지야. ...후우. 그래도 환건적이라니. 아버님도 참 알기 쉬운 분이란 말이야."
"저희는 그럼 이제 멸망당하는 겁니까?"
사재가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은 분명 이전에는 목을 내놓으라 하면 바로 죽는 시늉이 아니라 진짜로 죽었어야 할, 국장 모택평을 향한 비웃음이었다.
"아니지. 아니야. 우리는 멸망당할 수 없지."
봉효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신께서 우리에게 대업을 맡기셨는데, 어찌 쓰러질 수 있겠나. 자네도 신의 은총에 보답해야지?"
"물론입니다."
사재는 소녀에게 예를 갖추며 절을 했다.
"저를 동자공의 마수에서 풀어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겠나이다. 신이시여."
"......신 아니라니까."
소녀가 눈을 떴다. 사재는 사색이 되어 바닥에 조아렸다.
"제, 제가 감히 신의 단잠을 깨웠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시끄러워. 다시 잘 거니까 가."
"예!"
사재는 유령이 되어 사라졌다. 졸지에 방 안에 둘만 남게 된 봉효가 난감함에 눈을 깜빡이는 사이, 소녀는 눈을 뜬 채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
"뭔가 느껴지시는 거라도?"
"방금 위로 미친 년 지나간 것 같은데."
"......미친 년이요?"
봉효는 소름이 돋았다. 소녀가 이토록 적의를 보이는 이는 처음이었다.
"......됐어. 내버려두지 뭐. 만나러 가기 귀찮아."
소녀는 하품을 하며 봉효의 몸에서 일어섰다. 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누운 곳은 폭신한 매트리스가 깔린 침대였다.
"흐아암."
"저, 신이시여?"
"......유린기."
소녀는 입맛을 다시며 봉효에게 명령을 내렸다.
"닭요리가 먹고 싶어."
"......사오겠습니다."
봉효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유령이 되어 사라졌다.
"......흐음."
소녀는 마력이 느껴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 백 km는 떨어진 곳인데도 불구하고, 그 뜨거운 마력이 이곳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 찾으러 온 걸까."
불꽃이 향하는 방향은 자신이 잠들어 있던 지하 묘지였다. 아마 이대로 두면 헛걸음을 하게 될 터.
"......지가 알아서 오겠지."
일부러 마중나가기에는 몸을 단장하기조차 귀찮다. 소녀는 솜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흐아암."
소녀, 혼돈환룡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 *
진시황릉.
옛 진나라의 절대군주 시황제의 묘인 이 장소는 후에 혼돈환룡의 아지트이자, 중국 최악의 던전이 되고 만다.
"근데 그건 2년 후의 일이니까 지금은 그냥 유적지일 뿐이죠."
나는 돌로 된 몽둥이를 휘둘러, 달려드는 병마용의 허리를 분질렀다.
파드득!
흙도자기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병마용 하나가 무너졌다. 경보병으로 칼만 들고 있던 흙인형은 불꽃을 두른 돌배트에 파괴되어 흙으로 돌아갔다.
"차원문 때문인가? 벌써부터 유령이 깃드네요."
나는 내 이마를 향해 쏘아진 화살을 돌배트로 튕겨냈다. 화살은 맥없이 튕겨나가 바닥에 떨어졌고, 나는 곧장 배트를 빙빙 돌려 화살을 쏜 궁병에게 집어던졌다.
"덕배 부메랑!"
돌배트는 부메랑처럼 호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와장창!
마력까지 실어 던진 배트는 방패병의 대가리를 깨버린 뒤, 막 활 시위를 당기던 궁병의 팔을 박살냈다. 길이만 1m가 넘는 긴 돌방망이에서는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끼에에엑!!
흙인형들의 안에 깃들어있던 유령들이 고통을 호소하며 인형 밖으로 튀어나왔다. 주제에 나름 환속성에 영체라고 물리데미지는 입지 않았지만, 내 불꽃은 마력 자체를 태워버리는 성질이 있다.
끼에엑, 끄아아악!
유령 괴수, 밴시들이 흙인형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소멸한다. 나는 돌방망이를 회수해, 화염방사기마냥 허리춤에 꽉 붙였다.
"파이어!"
화르륵!
동굴 안이 푸른 불꽃으로 가득 찼다. 불꽃이 흙인형들을 집어삼켰고, 그 안의 밴시들은 괴성을 지를 틈도 없이 불꽃에 타들어갔다.
타닥. 타닥.
흙인형들의 몸 군데군데 구멍이 뚫리기 시작하고, 그 구멍으로 회색의 코어가 흘러나왔다. 나는 내 발치에 굴러들어온 회색 환속성 코어를 집어들었다.
"흐흐흐. 파밍 개꿀이네요."
화속성 다음으로 개체 수가 적은게 환속성이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 못 넘기듯, 나도 모처럼 지나가는 김에 코어를 전부 서리해가기로 했다.
"어차피 내버려둬봤자, 인신공양에 쓰일 코어들인 걸요!"
그러니까 이건 서리가 아니다. 세계 멸망에 쓰일 코어들을 미리 좋은 곳에 쓰고자 하는 사전 작업에 불과하다.
"흠. 다 죽었나?"
나는 주변을 훑어, 행여나 흙인형 속에 남아있을 밴시가 없을까 살폈다. 다행히 이 층에 남은 밴시는 없었다.
"그럼 부하 2호, 휴식 시간입니다."
나는 돌배트를 바닥에 꽂아, 마력을 해제했다. 돌배트에 불꽃이 휩싸였고, 무기가 되었던 바위괴인 조덕배는 인간의 육신으로 돌아왔다.
"야! 너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코어 수급이요?"
"저거 다 세계문화유산이라고오!!"
덕배는 바닥에 구르는 병마용들을 가리키며 성질을 부렸다. 나는 내 발치에 구르는 창병의 대가리를 마저 으깨며 답했다.
"그럼 괴수한테 그냥 당해요? 유령들이 막 흙인형에 빙의해서 저 찌르려고 드는데?"
"그럼 화력 조절이라도 하던가!"
"죄송합니다. 너무 쪼렙이라서 평타 한 방으로도 죽더라고요."
나는 병졸 인형의 부서진 조각을 들었다. 애초에 흙으로 빚어진 인형 자체가 내구도가 낮을 뿐더러, 그 속에 들어간 밴시들은 D급 괴수다.
"익숙해지세요. 앞으로 이런 일이 잦을테니까."
"......무슨 소리야?"
"문화지킴이 조덕배 씨가 걱정하시는 일이 앞으로 두어차례는 더 있다는 거죠."
나는 머릿속으로 무너질 문화재들, 정확히는 던전이 되어 각 간부들과 일전을 치르게 될 전장을 떠올렸다.
"어디보자. 파르테논 신전이랑, 타지마할 궁전이랑...."
"너 거기서 싸울 생각이냐?"
"아뇨? 하지만 적이 거기 있다면 싸워야죠. 어차피 괴수들 날뛰면 다 무너질텐데."
나는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흙인형들을 가리켰다. 눈에는 회색의 귀기를 뿌리는 것이, 전부 다 밴시가 깃든 인형들이었다.
"그러면 조덕배 학생. 잔말말고 등 돌려요. 코어 싹다 긁어모으고 아래층까지 파밍할 거니까."
"그냥 바로 끝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무슨 바보같은 소리를."
나는 덕배를 다시 돌배트로 바꿨다.
"던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매핑 100% 찍으면서 모든 몬스터 잡는 건 RPG의 기본이라고요."
그러니까 눈앞에 달려드는 건 문화재가 아니라 몬스터일 뿐이다. 나는 덕배를 야구배트마냥 붕붕 휘둘러 손맛을 확인한 뒤, 배트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어라."
저거 모택평 닮았는데.
우드득.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나는 선두에서 달려오는 전차병을 향해 뛰어올라, 방망이를 내리찍었다.
"체스토오오오--!"
조금, 쌓인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
...
...
약 30분 뒤.
입구부터 맨 아래층 까지. 수천 개체에 이르는 D급 밴시들을 모조리 처리하는 데 성공했고, 나는 개운한 마음에 마지막 밀실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 섰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자주 있었으면 좋겠네요."
나는 덕배를 원래대로 되돌려, 그에게 마력으로 짜맞춘 가방을 건넸다.
"이게 뭔데?"
"가방이죠."
"그래서 뭐 어쩌라고."
"에이. 덕배 씨. 알면서 왜 모른척해요?"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코어를 가리키며 입꼬리를 활짝 들어올렸다.
"사냥이 끝나면 당연히 템 주워햐하잖아요."
"나 혼자 주워오라는 거지, 지금?"
"아니죠. 어떻게 혼자서 작업하겠어요? 부하들 붙여줄게요."
나는 일부러 몇 개 챙겨놓은 밴시의 코어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다. 크기도 모양도 형태도 똑같은 D급 코어 다섯 개가 내 손바닥 위에 옹기종기 모였고, 나는 그 코어들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구천을 떠돌다 객사한 원귀들이여. 태양이 너희들을 보살펴 굽어 살피겠도다."
"우웩."
덕배가 구역질을 하며 기함을 토한다. 나는 한 귀로 흘리며, 밴시들을 괴인으로 만드는데 계속 집중했다.
"창염의 이름 하에, 새로운 육신으로 태어나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설지니. 현현하라."
우우웅.
코어들이 빛난다. 나는 파종하듯 코어를 덕배의 주변에 뿌렸고, 내 마력이 깃든 코어들은 덕배가 부활했던 것 처럼 마력으로 이루어진 육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화속성에 환속성이라.... 대충 환염령들이라고 하죠."
"네이밍 센스 엄청 구리네."
"시끄러워요. 그럼 일어나세요."
내 지시를 받은 환염령들은 바닥에서 일어나 자세를 바로했다. 밴시들이 다 그렇지만, 죄다 여자였다.
"덕배 씨. 이 환염령 부대는 당신이 맡아주세요."
"뭐?"
"부하 2호도 이제 슬슬 간부 노릇 해봐야죠? 자, 그럼 바위괴인 스쿼드에게 명령합니다."
나는 바닥에 흩어진 코어들과 천장을 가리켰다.
"주워오세요. 싹다."
"예."
환염령들은 하늘을 떠다니며 코어를 줍기 시작했다. 그게 마치 이삭을 줍는 아낙네들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터져나왔지만, 나는 몸을 돌려 지하실로 향하는 장치를 해제했다.
"나 같이 보러가면 안 되냐?"
"주워오세요."
덕배는 나와 함께 혼돈환룡을 보고 싶어했으나, 미안하지만 혼돈환룡은 나 혼자 만나야 했다. 괜히 덕배가 옆에 있어서 소란을 느끼게 하여 잠에서 깨우는 건 사양이었다.
"쳇. 뭐 닳는 것도 아닌데."
"걔가 당신 보면 정신력이 깎여나갈 거니까, 그냥 위에 올라가세요. 생각해봐요."
나는 나, 피닉스와 덕배를 번갈아 가리켰다.
"눈뜨자마자 보는게 초절정의 미소녀인게 낫겠어요, 아니면 험상궂은 대머리 아저씨인게 낫겠어요?"
"에이, 더러운 세상. 그래, 존나 예뻐서 좋겠다. 퉷."
덕배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보따리를 챙겨 윗층으로 올라갔다. 열심히 코어를 줍던 환염령들이 쫄래쫄래 날아가 덕배의 뒤를 따랐다.
"푸흐흐. 지도 피닉스 예쁜 건 알아가지고."
내가 칭찬을 받은 건 아니지만, 괜시리 기분은 좋아졌다. 나는 지하실, 관이 있는 진짜 방의 기믹을 해제하여, 숨겨진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던전 구조랑 똑같네요."
지금은 던전이 아니지만 추후 던전이 될 곳 중 하나. 혼돈환룡은 이곳에 구축된 던전의 보스몹을 쫓아내고, 자신이 그 던전의 주인이 되어 아늑한 잠자리를 얻어냈다.
"그러면 이제 슬슬...?"
왜 관뚜껑이 열려져있을까.
"......아니 진짜 이건 아니지."
신이 있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든 것에 저주하리라.
"자는 중에 덮쳐서 따먹어도 방해하기 귀찮아서 다시 자던 애가 스스로 일어나서 나갔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혼돈환룡과는 전혀 다른 존재란 말인가? 그도 아니면 5년 전에는 귀차니스트가 아닌 워커 홀릭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흔적은 분명 최근에 나갔는데."
먼지는 그리 많이 쌓여있지 않다. 하지만 소녀 한 명이 관뚜껑을 박차고 나간 흔적은 역력하다.
"하하, 하."
내가 들어온 입구가 아닌, 반대편의 통로로 빠져나간 흔적이 확연했다.
나는 아마도 혼돈환룡에 의해 질질 끌려다니다가, 비상통로로 빠져나가는 입구에 내팽겨쳐진 미라 한 구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아마 본인이겠죠?"
나는 미라를 집어들어 다시 관에 고히 눕혔다. 부디 노여워하지 않기를.
"......쓰읍."
나는 관뚜껑을 닫지 못한 채, 한참을 생각에 빠져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