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1부 8장 5
신서울에서의 일을 빠르게 처리한 뒤, 나는 바로 신서울을 빠져나와 부산으로 향했다.
청화와의 인터뷰, 기자회견 등등을 준비한 방송사나 관련 이들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었고, 괜히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공항을 나가지 못하게 될 수 있다.
"찾는 사람이 많으니까, 괜히 날짜 예고하면 귀찮아진다. 그러니까 바로 떠나는 게 맞아."
"그리고 뒷감당은 내보고 알아서 해라 이거제?"
백발의 여인, 이제는 협회 공식 SS급 이능력자가 된 설화령 석하랑이 내게 따지고 들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일 처리하려고 원탁 들어간 거 아닌가?"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야, 밖에서 들어오는 놈들도 귀찮아 죽겠는데, 최고 문제아가 국외로 나가면 어떻게 될 지 생각은 해봤나?"
"별 일 없을 거다. 그리고 밍기적거리는 것 보다 빨리 움직이는 게 나아."
"그 환속성 정령인가 뭔가 하는 금마? 이름 뭔데?"
"혼돈환룡."
"갸는 드래곤이라도 되나?"
석하랑은 콧방귀를 뀌며 환속성 정령의 이름, <혼돈환룡>을 비웃었다. 화속성인 내가 '창염의 피닉스'나 석하랑의 어머니인 '설야의 루살카'와 달리, 환속성의 그의 이름은 다른 정령들과 조금 다르다.
"아니. 드래곤이나 용은 아니다."
"근데 왜 환룡인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원래 이름이 그런 것을. 그걸 따지고 싶으면 너한테 '설월화'라고 이름 붙인 협회 높으신 분들한테 따져라."
"금마들이 범인이가. ……?"
석하랑이 무언가 이상을 느낀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또 이상한데…?"
"뭐가."
"아, 아니. 아니다. 그보다 일단 니 이거부터 대충 정해놓고 가라."
석하랑은 스마트워치로 신문 기사 하나를 꺼냈다. 그 기사에는 검은 머리 외국인들, 예전에는 한국인이었으나 지금은 해외로 이민을 간 이들이 김해공항에 발을 묶여있는 장면이 있었다.
"걔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싶은데, 니 의견 함 말해봐라."
"...그전에 제목."
나는 석하랑이 일부러 가려놓은 기사의 제목을 찾아 확인했다.
설화령 "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외국인 여러분."
"진짜 이렇게 말 했나?"
"......아, 그게 있다 아이가. ...열채지! 다같이 남아서 쌩고생 해도 모자랄 판에 지들만 살자고 짐 다 싸고 외국으로 튄 놈들인데 뭐가 이쁘다고 봐주는데?"
"......."
미래, 원작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웃프기 그지 없는 상황이었다. 원작의 외국인 혐오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그 정점에는 석하랑이 있었다. 그리고 정작 나라를 구한 영웅인 원작 주인공은 금발의 미국인이었다.
"석하랑. 너무 그 사람들 미워하지는 마라."
"왜?"
"그 중에 한 명 금발 외국인, 네 남편일 수도 있다."
"개소리."
"나중에 두고 보시던가."
과연 원작 주인공이 한국으로 왔을 때, 석하랑은 무슨 반응을 보일까. 두려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기대가 되는 바 이다.
그렇게 외국인 싫다고 츤츤거리던 석하랑이 금발서양남에게 서서히 녹아들어가는 에피소드들이 새록새록 기억난다.
빈백에 누워 서로 몸을 겹쳐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행위로 들어가는 이벤트 씬이 특히….
"......석하랑."
"또 왜?"
"그러고보니."
나는 몸을 일으켜 석하랑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석하랑은 내가 접근하자 또 긴장하며 숨을 들이켰다. 검은색 탱크탑이라 조금 헷갈리기는 했지만, 눈으로 훑어보니 확연히 차이가 났다.
"뭐, 뭔데?"
"가슴 커진 것 같은데."
"?!?!"
이 무슨 이능력의 신비란 말인가. 광검과 루살카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령은 유전자의 힘을 이겨내고 AA에서 A를 하나 떼어내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만져봐도 되겠나?"
"......."
석하랑은 얼굴을 붉히면서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피닉스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빨래판이었으나, 이능력의 각성으로 작은 언덕이 생겼다.
"음. 과연."
나는 석하랑을 만졌다. 손목을.
".......?"
"과연. 마력이 늘어나면서 흉부장갑도 늘어난-"
"왜 안 만지는데?"
석하랑은 얼굴이 붉어진 채 내게 따지고 들었다. 나는 잠시 이 얼빠진 SS급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잠시 고민했으나, 마력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에 비웃음이 나왔다.
"발랑까진 것."
"뭐, 뭐 어떤데?! 같은 정령끼리 문제없다 아이가!"
"내가 왜 네 가슴을 만지는데?"
굳이 직접 만질 필요는 없다. 몸안에 흐르는 마력을 읽으면 체형 정도야 눈 깜짝할 순간에 읽는 게 가능하니까.
"음…."
나는 석하랑의 손목을 붙잡고 그의 몸을 흐르는 수속성 마력의 파장을 읽었다. 내 감은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원작보다 5년빨리 SS급에 이른 덕분에 가슴도 5년 일찍 자란 모양이다.
"음. 됐다. 역시 커지긴 커졌어."
"......야, 니 있다 아이가."
석하랑은 두손을 들어올리며 눈을 빛냈다.
"내 가슴 만졌으면, 내도 니 가슴 만져봐야 하지 않겠나?"
"......."
나는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애초에 가슴도 만지지 않았는데, 석하랑은 그걸 가지고 살짝 느낀 모양이었다.
"안 돼."
화륵.
석하랑이 이 육체에 마수를 뻗기 전, 나는 미리 밖에 대기시켜놓은 미니피닉스로 몸을 바꿨다. 그의 방에 있던 내 몸은 불꽃이 되어 사라졌고, 나는 석하랑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건물 옥상에서 가슴을 들어올렸다.
[압도적인 미드차이. 눈으로 봐도 확연한 걸 뭘 굳이.]
[너 죽을래?]
석하랑이 나비모양 머리핀에 손을 올려 마력으로 의사를 전해왔다. 정령들끼리 가능한 마력의사소통 덕분에 나는 석하랑과 멀리 떨어져 있어도 대화가 가능했다.
[죽고 싶지 않으니까 도망치지. 그리고 죽일 수나 있나?]
[야! 다시 붙어! 전세계 최초 SS급 이름값이 껌값으로 보여?!]
[글쎄. 여기서 하얀 껌딱지는 잘 보이는데.]
패---앵!
귓불에 날카로운 얼음창이 스쳤다. 나는 고개를 살짝 꺾어 공격을 피하기는 했으나,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강해진 얼음창의 위력에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걱정마라. 그래도 너 SSS되면 A 탈출이다.]
[뭐? 확실해?! 거짓말이면 죽여버릴 거야!!]
[내가 직접 확인했으니 틀릴 리가 없지. 그럼 난 간다.]
나는 석하랑이 달려들기 전, 미리 약속한 장소로 보내둔 미니피닉스로 다시 전이했다. 석하랑은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얼음길을 만들어 날아왔지만, 그보다 훨씬 빨리 내 몸은 다른 곳으로 순간이동했다.
"왔냐?"
"네. 짐은 다 챙겼죠?"
"...이게 사람을 깔창으로 쓰더니 이제는 짐꾼 다루듯 부리네?"
"이럴려고 부하 만든 거죠. 그리고 부하 2호."
나는 검은 정장에 푸른 넥타이를 입은 덕배로부터 짐가방을 챙겼다. 배낭여행을 하는 것 마냥, 내 작은 백팩에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중요한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시간은요?"
"빠듯하지. 이제 10분뒤면 들어가야 해."
"그럼 딱 맞췄네요. 들어가죠."
"잠깐만."
나는 공항 라운지에서 막 수속을 하려고 발을 떼었지만, 부하 2호가 내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뭐예요? 깔창으로라도 부산까지 데려와줬으면 그냥 조용히 따라올 것이지. 은유하 아가씨가 당신 자리까지 만들어 주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깔창 문제는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지금은 이것부터 따지고 들자."
덕배는 공항 대합실 방향에 걸린 대형 스크린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협회의 대표로 나온 집정관 유영호가 초췌한 몰골로 회견대에 올라서고 있었다.
-협회에서는 중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오늘 협회에 등록한 이능력자 <비스트 테이머>를 우선적으로 중국에 파견하기로 하였습니다. 시안 게이트 사건 이후 중국 각지에서 날뛰는 괴수들을 제압하기 위해 중 정부에서는 협회에 정식으로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오. 언제 발표했어요? 못 봤는데."
"20분 전에. 그래서 지금 상황이 아주 난리야, 난리."
덕배가 녹화된 회견 영상을 보는 이들을 가리켰다. 나는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곳에는 욕지기를 내뱉으며 광분하는 인파가 있었다.
"저게 무슨 개소리야! 우리나라 히어로를 다른 나라에 왜 보내는데?!"
"협회 미친 거 아냐?!"
"막읍시다! 우리가 드러누워서라도 가는 길을 막읍시다! 겸사겸사 외국인 놈들 공항으로 들어오는 것도 막자고요!"
수십명에 이르는 무리들이 우루루 몰려다니며 협회를 규탄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길막하기 전에 빨리 타요. 푯값 날리면 조덕배 씨가 물어 줄 거예요? 비즈니스 클래스인데?"
"......나는 모르겠다. 너 알아서 해라."
덕배는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먼저 수속하러 들어가버렸다.
"저건 보디가드 하라니까 멋대로...아오."
나는 덕배의 머리를 태워버릴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미 그의 머리는 다 타버린 민둥산이었다.
"어휴, 내가 봐준 거예요."
나는 쪼르르 달려가 덕배의 뒤에 딱 달라붙었다. 나와 덕배를 비교하던 공항 직원은 귀찮은 얼굴로 여권을 확인하다가 화들짝 놀랐다.
"......실례합니다?"
"왜 그러세요?"
직원은 자신의 스마트워치 스크린 속의 푸른 소녀와 나를 번갈아보며 혼란에 빠졌다. 나, 여권사진, 스크린. 셋 모두 괴수 조종자인 청화였다.
"어, 저기, 그…."
"탑승 수속 5분 남겨놓고 와서 죄송합니다. 들어가도 될 까요?"
"아, 네! 신원확인…. 어…."
나는 직원이 얼타는 사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슥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생하쇼."
덕배는 나와 자신의 여권을 챙겨 직원을 빗겨 들어왔다. 나는 톨게이트 한가운데에서 덕배를 기다리다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떡 벌리는 다른 직원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조심히 다녀오겠습니다."
"아, 예. ……어?"
나는 조용히 톨게이트를 빠져나갔다. 뒤에서 직원이 혼잣말을 하는 소리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쟤가 왜 지금 여기에…?"
그야 지금 출국하니까. 나는 덕배로부터 여권을 받아 비행기로 향했다.
***
-긴급 속보입니다. 비스트 테이머, 청화양이 방금 김해공항에서 중국행 비행기를 탑승했다는 소식입니다. 목격자 제보에 따르면 갑자기 공항에 나타나 바로 수속을 밟았다고 하며...
"쓰레기같은 놈 또 사고치고 떠났군."
중년의 금발 남자는 뉴스에서 한창 떠드는 푸른 소녀, 청화의 행방을 확인하며 혀를 찼다. 그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배고 있던 백금발의 여인은 보드카의 병에 빨대를 끼운 채 쪼르르 들이키며 답했다.
"뒷감당 안하고 저지르는 거 보면 예전이랑 하등 다를 게 없는데."
"여보, 무슨 말이야?"
남자는 자신의 나이보다 절반 가까이 어려보이는 여인에게 '여보'라고 불렀다. 이제 갓 성인이 되어보이는 여인은 남자의 호칭에 아무렇지도 않게 TV를 가리켰다.
"저거 저쪽 세상에 있을 때도 저런 면이 많았어. 단지…."
여인은 협회에서 히어로로 등록하며 사람들 앞에서는 겁먹은 카나리아마냥 벌벌 떠는 피닉스의 모습에 가증스럽다는 듯 치를 털었다.
"인간들 앞에서 저런 연기도 다 하고. 으으,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여보. 그럼 말이야. 쟤가 하랑이보고 자기가 임신시켰다고 했거든? 그건 어떻게 되는 거야?"
"새소리지. 그냥 서방님한테 장난치려고 한 걸 거야."
"......확실히 두 눈이 번쩍 뜨이기는 했지."
남자는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는 듯 몸을 부스스 떨었다. 여인은 자신이 마시던 보드카 병을 들어올렸다.
"한 잔 할래?"
"루살카."
남자는 여인, 아나스타샤이 이마를 손으로 쓸었다.
"나 하고 싶다."
"......서방님. 좀."
아나스타샤는 조금 질색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이제 정령아니야. 파릇파릇한 20대 러시아 소녀란다. 근데 서방님은 이제 S급 괴인-"
"하지만 당신도 S급 히어로잖아. 원탁의 힘을 보여주셔야지. 안 그래, <운디네>? 그도 아니면 이렇게 불러주리?"
남자, 광검 허윤환은 아나스타샤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주인님? 그거 하자."
"......정말, 정말 서방님은 어쩔 수 없네."
아나스타샤는 상체를 일으켜, 허윤환의 팔에 목을 걸었다.
"그럼 어디 이번에는 서방님 하고싶은대로 해보렴. 대신 아까처럼 빛처럼 빨리 싸면, 바로 아빠 만나러 가는 거란다?"
"......."
허윤환은 결국 빛이 되었다.
* * *
"그러고보니 그 부부는 지금 어디서 뭘하고 있을까요."
"아니, 그보다 지금 이 상황 어쩔 거야."
덕배는 넥타이가 영 불편한지 자꾸만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느슨하게 풀었다. 나는 유성항공의 기내식 카탈로그를 훑어 덕배에게 건넸다.
"주문해요. 가면서 입가심이라도 하시고."
"야. 지금 뒤에 사람들 난리났거든?"
덕배는 일반석 방향을 가리켰다. 괴수 조종사가 중국행 비행기를 탔다는 사실이 일반 승객에게도 퍼진 모양이었다.
"뭐 어때요. 떠들썩하고 좋은데."
"저 사람들이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야, 멍청아."
덕배는 내게 삿대질했다. 손가락을 분질러버리고 싶었지만, 일단 뚫린 입을 마음껏 지껄이게 내버려뒀다.
"보디가드 없이 중국으로 혼자 가는 걸 걱정하는 거라고."
"에이, 덕배 씨 걱정도 팔자다. 이거 유성항공이에요. 은유하 아가씨 아래에 있는 비행기에, 제가 오늘 여기 탄다는 걸 아는 사람은 20명도 안 된다고요."
"그 20명 중에 한 명이라도 위험한 놈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봤냐?"
"푸흐흐. 오늘따라 부하 2호가 걱정이 많으시네."
나는 몸의 긴장을 풀며 눈을 감았다.
"설마 비행기 타자마자 무슨 일 생기겠어요? 푸흐흐."
생기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