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1부 8장 (4)
내게 있어 이 검사장은 게임을 하며 수도 없이 드나들었던 곳이다.
일종의 레벨 검사장.
친화율로 표현되는 이능력자들의 한계 성장치를 검사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덕분에, 나는 동료가 하나 하나 들어올 때마다 일일이 이 검사장을 찾아야 했다.
'나중에는 간이 검사기가 만들어지지만.'
당장은 불편함을 감내해야만 했다. 물론 정령인 피닉스로서는 상대와 접촉하는 것 만으로도 상대의 친화율을 파악할 수 있다. 나는 일부러 몸을 살짝 뒤로 눕혔다.
"아."
지금처럼. 이승형은 내 바로 뒤에서 내 어깨를 붙잡아 넘어지는 것을 막았고, 나는 그틈에 그가 어느 정도까지 성장이 가능한지 다시금 확인했다.
화속성, 98. 다른 속성의 마력은 죄다 고만고만했지만, 화속성 만큼은 유독 높았다.
"......."
"괜찮으세요?"
"아무것도 아녜요. 잠깐 빈혈이."
나는 손을 흔들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집정관이 상당히 걱정어린 눈치로 보고 있지만, 육체의 피로보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더 컸다.
'이 새끼 도대체 뭐지?'
화속성 98. 레벨로 치면 한계 레벨이 만렙보다 1 적은 수치까지 오를 수 있는 재능을 가진 남자였다.
'......이런 애가 원작에도 안 나오고 죽었다고?'
가능성은 하나. 천가을이 겪는 비극 속에서 S급이 되지 못하고 A급으로 빌런들에게 살해당했거나, 원작 진입 한참 전에 죽어버린 흔한 A급으로 남았다는 것.
하지만 그런 그는 내 불꽃에 의해 S급이 되었고, 조금만 더 성장하면 SS에도 자력으로 오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진짜 키워봐?'
천가을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이 정도 재목을 가진 존재라면 능히 키워볼 맛이 충분하다. 추후 뉴클리언을 제압하고 진짜 화권의 심득을 얻게 한다면, 이승형인 진짜 조커 카드가 될 것이다.
"......저기요."
"네."
"당신 그 병 있잖아요."
"......병이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저주같은 겁니다만."
이승형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툴툴거렸다. 서울만 가면 마력이 타버리는 화마룡의 저주, 그건 사실 내 꼬장이다.
"......잠깐만 손 좀."
나는 이승형에게 손을 건넸다. 이승형은 부끄러워하면서도 내 손을 맞잡았다.
"......이제 서울 가도 문제는 없을 거예요."
"네? ......? 딱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있어요. 당신은 못 느끼겠지만."
'내 마음이 바뀌었거든.'
더이상 히로인들에 휘둘리며 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내 마음속에는 오직 단 한 사람 뿐이니까.
'그러니까 너도 세계니 너니 저울질 하지 말고, 나 좀 도와줘라.'
나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검사기의 앞에 두 발을 딛고 올라섰다. 검사기에 패널처럼 튀어나온 렌즈에 내가 손을 올리자, 주변에 따라온 히어로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 쟤 예전에 검사 해본 것 같지 않아?
- 진짜 EX급이라는 건가.... 본래 이능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각성하는.
- 흑염룡 각성시킨 거 보면 화속성은 진짜 대단하지 않을까 싶은데.
삐빅.
검사 결과가 나왔다. 소식을 듣고 그 사이에 달려온 히어로들의 시선이 상단부 모니터 스크린에 닿았다.
화 00
수 00
지 00
풍 00
광 00
암 00
환 00
"......이런 비극이 있다는 말인가!"
유영호가 호들갑을 떨며 소리쳤다. 내가 일부러 유영호가 혼자 자승자박하게 내버려둔 결실이 드디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괴수를 조종하느라 자신의 친화율을 0까지 깎아내리다니, 이 무슨!"
'하여튼 저 착각계.'
내 처참한 마력 친화율에 사람들이 당황하고, 유영호의 착각에 따라 나를 동정하기 시작한다.
-어떡해 괴수 조종하느라 마력 다 날아갔나봐
-아니 사람이 어떻게 마력 하나 없을 수 있지?
사람들이 떠들건 말건. 나는 내 기억과 정확히 일치하는 정령들의 마력 패턴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자기 속성 빼고 다른 속성 마력이 있을 리가 없지.'
내 입장으로서는 게임 속 데이터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이라 별 감흥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 구식 검사기의 한계 덕분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세자리 수 까지 나오는 모델이었으면 어쩔 뻔 했겠어.'
화속성 100 나올텐데. 나는 뒷말을 삼키며 검사기에서 물러났다.
찰칵.
렌즈에서 빛이 흘러나와, 내 마력의 패턴을 정식으로 협회에 등록했다.
- <비스트 테이머>, '청 화'. 히어로 협회에 정식으로 등록되었습니다. 환영합니다.
나는 이날, 인간형의 피닉스를 히어로로 등록했다.
* * *
"그러면 이제 청화라고 불러야 하나요?"
"무슨 소리야. 피닉스라고 불러."
나는 유성 회장, 은유하에게 핀잔을 주며 호칭을 정정했다. 협회에 이능력자 등록을 한 뒤, 함께 식사라도 하지 않겠느냐는 협회 높으신 분들을 뿌리치고 진짜 높으신 분과 데이트를 하러 왔다.
"고객님. 이제 혼자서 1인 2역 해야하는데 안 힘드세요? 낮에는 히어로고 밤에는 빌런이 되는데."
"반대다. 괴수 조종사는 철저하게 야행성으로 활동할 거다."
"그럼 낮에는?"
"괴인 피닉스가 되는 거지."
야밤에만 활동하는 괴도라면 모를까, 피닉스는 태양이 지상을 비추는 낮에 더 강한 존재다. 밤이라고 약해지는 건 아니지만, 낮에는 여러모로 범용성이 넓어진다.
"상대적으로 밤에는 귀찮게 하는 놈들이 적으니까. 낮에는 이곳저곳 돌아다닐 일이 많아서."
주로 코어 서리라던가, 코어 수급이라던가, 괴수 제거 라던가. 한반도 전역을 커버할 수 있을만큼의 전력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그들이 성장할 때 까지 나 홀로 쏟아지는 괴수들을 감당해야 했다.
"저야 고객님이 열심히 일해주시면 그만큼 코어를 버니까 고맙습니다만…."
"그래. 잠깐 중국 다녀오게 생겼지."
모택평은 괴수 조종자를 중국으로 불렀다. 내가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은유하는 여러 방면에서 들어온 정보들을 취합해 그 의도를 훤히 꿰고 있을 것이다.
"납치 감금해서 약 먹이고 강제 귀화시키려고 하는 거 아닐까요?"
"정답. 거기에 이런 생각도 하고 있을테지."
나는 생각만으로도 불쾌해졌다.
"괴수 조종자에 자신의 씨앗을 뿌려 자식을 낳으면 또다른 영웅이 태어날 거라고."
"...고객님, 역시 안 가면 안 돼요?"
"왜? 내가 혹시 어떻게 될까봐 무섭나?"
"네."
은유하의 진지한 대답에 나는 왠지 모르게 쑥쓰러워졌다. 은유하도 조금 부끄러운지 눈을 감은 채 내가 무어라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걱정마라.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는 거니까. 나는 마력까지 담아 은유하에게 내 진심을 전한 뒤, 우울한 대화 주제를 꿈과 희망이 넘치는 주제로 돌렸다.
"그래서 이번에 중국에 가서 S급 괴수들을 다 조지고 올 생각인데."
"아! 그러면 그것들도 다 서리해오실 건가요?!"
"그래. 꼭 써야하는 것 빼고는 다 넘겨주마."
은유하는 금세 밝아졌다. 눈에 별이 반짝이는 건지 아니면 금이 반짝이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은유하는 S급 코어들을 유통할 생각에 기뻐했다.
"역시 고객님. 진짜 고객님 덕분에 요즘 세상 사는 맛이 난다니까요?"
"그만큼 일도 많아진 모양인데. 제대로 안 잤지? 한 두 시간 잔 것 같은데."
"......제 근처에 스파이 심어뒀어요?"
"아니. 마력 흐트러진 거 보고."
나는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은유하의 손등을 잡았다. 은유하의 맥박이 조금씩 빨리지기 시작했고, 나는 내 마력을 불어넣으며 은유하의 활력을 북돋았다.
"화속성 마력이라 별 효율은 낮겠지만, 그래도 피로는 조금 가실 거다."
"......크흠."
은유하는 헛기침을 하며 잔을 들었다. 역시 나이가 어려서 그런가, 이런 사소한 스킨십에도 부끄러워하는 게 원작과 달리 신선했다.
"아 참."
은유하가 내가 기억하는 25세 인형술사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 덕분에, 나는 내가 은유하에게 꺼낼 화제를 떠올렸다.
"부탁이 하나 있다. 돈이 좀 많이 들어가는 걸텐데…."
"뭐예요?"
역시 은유하. 돈 들어간다는 소리가 나오자마자 두근거리던 소녀는 사라져버리고, 투자를 통한 실익을 따지는 회장으로 바로 변해버렸다. 나는 내가 굳이 신서울로 데려온 청화단의 간부, 아키택트의 프로필을 은유하에게 건넸다.
"건축 이능력자?"
"B급 코어 하나면 10층짜리 빌딩 하나를 한 시간만에 세우지."
"...시간을 돈으로 사는 셈이긴 한데, B급 코어 하나는 조금 아깝지 않아요?"
"코어야 벌면 되지 않나. 그리고 내가 세우고 싶은 건 그냥 빌딩이 아니야."
나는 지도를 꺼내 동작 일대의 넓은 부지를 가리켰다. 은유하는 금방 그 부지의 정체를 깨닫고, 내 의도를 눈치챘다.
"인서울 대학 하나 복구하시려고요?"
"아냐. 지금 필요한 건 대학이 아니라 아카데미지."
"무슨 차이에요? ...아카데미? 설마 고객님…?"
"은유하 아가씨."
나는 은유하가 제법 혹할만한 사업을 하나 제안했다.
"혹시 이능력자 양성 아카데미 하나 만들어 볼 생각 있나?"
***
압록강에서 운장을 위시한 중국 히어로들과의 대전 이후.
나는 청화단 전력의 심각한 문제점을 깨달았다.
전력으로 활용 가능한 이능력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간부진들은 내가 깔창으로 신고 있는 조덕배를 제외하고 전부 A급 이상이지만, 전세계를 두고보면 S급도 A급도 차고 넘친다. 질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으나, 양적으로는 여러모로 부족했다.
한국의 히어로 수는 약 600여명. 빌런이나 미등록 이능력자까지 합하면 대략 천을 넘기게 되겠지만, 바로 옆의 중국의 백만 히어로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다.
'그래서 석하랑의 힘을 빌어 수속성 이능력자 5천명을 만들었지.'
그래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능력을 각성해도 고작 세수하는 정도로 밖에 사용할 수 없는 지금, 체계적인 히어로 양성을 위한 전문 육성 기관이 필요했다.
바로 서울에.
나는 그에 대한 생각을 은유하에게 간략히 설명했다.
***
"그리고 양성한 이능력자는 청화단으로 들이시게요?"
"일부는. 기껏 열심히 키운 유망주가 굳이 협회의 개노릇을 하게 내버려 둘 수 없지."
"동감해요. 이능력자는 곧 국력이니까. 나쁠 건 없죠. ...아하, 아키택트를 데려온 이유도 그거죠? 이곳 신서울에서 팀을 꾸려서, 그럴듯하게 디자인을 하는 거."
"그래. 아키택트에게 전부 맡겨버리면 서울이 아니라 한양이 다시 부활할 거다."
외모는 순수 미국인인 주제에 여느 종갓집 대감마님 이상으로 토속적인 것을 주장하는 존재가 아키택트, 제임스 리다. 내가 직접적으로 옆에서 관리를 못하니, 아키택트가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마시며 서울 전역을 기왓집으로 만들어버리는 사태는 막아야 했다.
"그러니까 유성에서 조금 도와줘. 그의 능력은 이미 알고 있을테니, 현대에 걸맞게 건물들을 만드는 거다."
"고객님도 디자인 좀 하시지 않나요?"
은유하는 자신의 뒷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온갖 종류의 의복을 착용한 기계인형-X로이드들이 전시되어있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은유하를 쏙 빼닮았다.
"기껏 선물했더니 인형에게 입히고 있어."
"아깝잖아요."
내가 마력으로 베를 짜 만든 여러 종류의 의복들을 선물받은 은유하는 그걸 인형놀이에 사용하고 있다. 인형들이 입고있는 모습은 은유하와 닮아있었지만, 생동감은 나지 않았다.
"저 옷들 디자인은…. 아니다, 나는 바빠."
어차피 게임사 DLC의 스킨들을 구현한 것에 불과하고, 실제 디자이너는 내가 아닌데 무슨 말이 필요할까. 나는 적당히 변명하며 화제를 다시 양성소로 돌렸다.
"나는 중국으로 가야하잖나. 중국 돌아왔을 때 아카데미가 적어도 건물은 올라갔으면 해서 이렇게 부탁하고 가는 거다. 내가 한국에 없으니."
"얼마나 오래 있으시려고요?"
"......3주?"
조금 여유롭게 잡기는 했으나, 실제로 그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당장의 계획이 제대로 맞물려 들어간다고 해도 빠듯하게 2주인데, 항상 계획이라는 게 제대로 돌아가는 꼴을 본 적이 없다.
"음. 그러면 고객님. 저도 같이 갈래요."
"뭐?"
"저 인형 같이 보낼게요. 본체는 아니더라도 인형이면 되죠?"
"안 돼. 같이 갈 사람 하나 여기있어."
나는 신발을 벗어, 발바닥에 깔아둔 깔창을 가리켰다. 은유하는 고무와는 다른 바위같은 질감에 살짝 질린 기색이었다.
"......고객님?"
"나중에 신서울 떠나면 원래대로 돌려놓을 거다. 신서울 한복판에 화염거인을 던져놓을 수는 없지 않나."
"하아. 정말…."
중국에서 있을 기나긴 행보에 대해, 절대로 히로인들에게 그 모든 걸 보여줄 수 없다. 그래도 입이 심심하니까 대화할 사람이 하나 필요한데, 신서울에 괴인을 데리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알겠어요. 그럼 예정대로 조덕배 씨 자리 준비해둘게요. ...자리? 고객님. 양성소에는 그럼 누구를 대표로 세울 거예요? 아무나 바지사장 세워 둘까요?"
"술과 여색에 빠져 사는 한량 하나 부산에 있잖나."
"......아."
은유하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전부를 걸고 손에 넣었는데, 전주인이라는 자가 나타나 소유권을 주장하며 가져가버렸다.
"러시아 안 가고 뭐한대요? 아내라는 사람 보니까 거의 러시아 공주던데."
"섹스."
"풉, 쿨럭! 커흐흡."
은유하는 마시던 차가 기도에 들어간 듯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나는 내 앞에 놓인 딸기라떼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20년 동안 밀린 거 해야한다고 본국으로 돌아가지도 않더군. 자기들 딸내미 근처에 날파리 꼬일까봐 걱정하는 것도 있고."
"고객님."
은유하가 손수건으로 입술에 묻은 커피를 닦으며 말했다.
"그 날파리 중에 대장이 고객님이잖아요. 하랑이 전 남편 분? 어디 한 번 입이 있으면 말해보세요."
"......."
"솔직히 중국 가는 거, 전부인 찾으러 가는 거죠?"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