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1부 8장 (2)
괴수 조종자. 비스트 테이머. 흑마룡의 주인.
서울을 지키기 위해 인류의 적인 괴수를 길들여야했다는 구구절절한 사연을 가진 소녀, 청화의 정체는 당연히 청화단의 진짜 단장-창염의 피닉스다.
원탁이 빠르게 중재에 나선 덕분에 각국은 입맛을 다셨지만, 그래도 괴수를 조종하는 이능력자에 대한 영입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돈, 명예, 권력, 남자.
세계 각국은 피닉스와 연줄을 만들기 위해 갖은 애를 썼으나, 한국으로 들어오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나라의 보배를 훔쳐가려는 도둑놈들! 당장 너희들 본국으로 돌아가라!"
"마! 으딜 머리 노란 양놈들이 와가지고 서울로 갈라 카는데?! 끄지라!"
김해공항.
이제는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외국으로 통하는 창구가 된 국제공항에는 한반도를 찾아온 외국인들로 들끓었고, 공항 밖에는 그들의 입국을 몸으로 가로막는 성난 군중으로 가득차있었다.
"우우우!!"
"우우우우우!!!"
평양 사태 이후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 나가는 이는 많아도 들어오는 이는 드물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해외로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그랬던 이들이 하나 둘 눈치를 보며 김해공항으로 돌아왔다.
"......난리네, 정말."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백발의 여인은 화난 시민들이 심하다 싶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느정도 이해가 갔다.
"하긴. 점마들 깽판치고 공항에서 튀었던 거 생각하면 내도 쥑이삐고 싶은데, 오죽하겠나."
특히 여인이 군중의 분노에 공감하는 부분은 전방에 한 무더기로 들어온 이능력자 무리였다.
"에이, 너무하신다. 같은 한국인끼리 이러기 있어요?"
선두에 선 남자가 사람 좋은 미소로 실실 웃었다. 그의 머리칼은 급하게 염색이라도 한 것 처럼 검게 물들어 있었지만, 정수리의 뿌리는 금색이었다.
"해외에서 죽어라 돈 벌어온 역꾼들에게 정말 너무하시네."
아예 한복까지 입고 나타난 여자 히어로는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군중을 훑었다. 그 눈빛은 아련했지만 미약한 짜증과 살기를 담고 있었다.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한국으로 들어오지도 못해요? 입국금지 당한 것도 아닌데?"
이능력자들을 마력을 살짝 해방하여 군중을 압박했다. 마력을 각성하지 못한 비능력자들이 대부분인 군중은 괴수의 눈앞에 선 것 마냥 겁에 질렸다.
"저 시방새들이."
그래서 여인은 굳이 공항까지 그들을 마중나왔다. 사실 저들이 아니라 다른 이를 배웅하려고 나온 것이었지만, 이왕 공항에서 기다리는 김에 한 건 해결하기로 했다.
"다들 비켜주세요. 저희는 협회에 볼 일이-"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오시니까 때깔이 다들 좋으시네요? 와, 마력에서 치즈 냄새 줄줄 흐르는 거 대박."
공항 전체에 깐족거리는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어조는 나긋나긋하지만 목소리에 담긴 마력은 살을 에는 듯한 한기를 머금고 있었다.
"......허어."
이능력자들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금방 깨달았다.
자신들이 망명하듯 도망친 이국의 S급 이능력자들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천외천의 경지에 이른 여자가, 공항 라운지 2층 난간에 팔을 걸친 채 손을 흔들며 웃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방인' 여러분들. 아니다. 영어로 해야하나?"
여인은 난간에서 뛰어내려 미끄러지듯 내려와, 히어로들과 군중의 가운데 살포시 착지했다.
"웰컴 투 코리아? 국적까지 포기하신 분들이 무슨 일로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돌아오셨을까?"
세계 최초의 SS급 히어로, 원탁의 13번째 히어로가 된 <설화령> 석하랑은 두 팔을 벌리며 한국을 찾은 이방인들을 환영했다.
* * *
[예. 그들이 남기고 간 재산은 전부 압류되었습니다. 법적으로 국유화 되었으며, 그들이 국적을 포기할 때 직접 서명했습니다. 3년 간의 유예기간이 지났을 때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국내에 남아있는 모든 재산이 나라에 귀속되는 걸로요. 이상이 총리실에서 보내온 답변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뒷말이 나오지 않게 넓은 아량을 베풀어주세요. 외국인 분들도 유성의 고객이니까."
집무실에 앉아 가상의 키보드를 두드리는 금발의 여인은 십수개의 모니터를 눈으로 훑으며 각 방면에 업무를 지시했다. 헤드기어 아래, 금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에는 일곱 개의 별이 북두칠성으로 빛나고 있었다.
"부산에 있는 모든 호텔들, 싹다 재정비하세요. 외국물 먹으신 분들이라 눈이 엄청 높아져있을테니까."
[예, 회장님.]
스크린 속 남자가 지시를 받고 자리를 떠났다. 회장이라고 불린 여인, <인형술사> 은유하는 헤드기어를 벗고 의자에 몸을 뉘였다.
"몸이 여덟 개라도 부족하네, 정말."
코어를 수 십개 갈아넣어 만든 연산 보조장치의 도움을 받아도 바쁘다.
이능력의 힘으로 정재계 주요 인사 7명을 움직여도 바쁘다.
원래부터 바쁘게 살아온 인생이었지만, 지금은 자신을 제외한 유성 일가가 전체가 괴수에 몰살당했던 시점 그 이상으로 바빴다.
"아. 정말. 진짜 괴인 되어버릴까?"
은유하는 남들이 들으면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뱉었다.
스스로 인간을 포기하겠다는 말을 내뱉는 이유가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이 많아서, 그걸 쉬지않고 처리하고 싶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분명 누구든 경을 칠 것이다.
"아니면 나도 그 정령인가 뭔가 하는 게 되고 싶은데."
그도 아니라면 정령과 하나가 되는 피닉스 피셜 SSS등급이라도. 그 경지에 이르면 먹지도, 싸지도, 자지도 않고 오직 커피만 마시며 일을 할 수 있지 않은가.
"24시간 일하면서 돈벌고 싶다아…."
왜 세상에 불의 정령과 물의 정령은 있는데 돈의 정령은 없는 걸까. 은유하는 삿된 망상을 하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일단 할 것만 마저 하고 쉬어야지."
그 해야할 게 은유하를 가장 바쁘게 만든 장본인이라 조금 울컥하기도 했지만, 사랑하는 것을 위해 은유하는 잠깐의 피로 정도는 무시할 수 있었다.
돈.
그리고 그 돈을 무한히 벌어다 주는 보배로운 사업 파트너.
"신서울에 어서오세요, 사랑하는 고객님. 저 기다리고 있으니까."
은유하는 이제 서울을 떠나려는 푸른 머리칼의 소녀를 향해 찻잔을 들어올렸다.
* * *
서울과 신서울.
고작 앞에 "신"이라는 단어가 하나 붙었음에도 두 도시는 인프라부터 인구까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두 도시의 차이를 극명하게 만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괴수가 날뛰는 세계로부터 도시를 지키는 S급 히어로 존재 유무가 두 도시의 차이를 만들었다.
광검 허윤환. 비공식 세계 최초의 SS급 이능력자.
- 그가 만약 평양 사태에서 평양 전선으로 나서지 않고 서울을 지키는 방파제가 되었다면, 서울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히어로들을 지휘하는 <집정관> 유영호는 고인이 된 광검을 평가했다.
그렇다.
고인.
광검은 불귀의 객이 되었고, 그 흉수는 서울의 난민 조직 청화단의 뒷배나 다름 없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셈이지만, 신서울의 이들은 서울을 인정해야만 했다.
- 광검 없이 S급 괴수인 흑염룡을 막을 수 있나? 10분이면 한강에서 신서울 상공으로 날아오는 괴물을?
비록 새로이 S급이 된 화권 이승형도 있었으나, 그의 삼촌이자 하야한 전직 대통령 선의철의 비리가 낱낱이 밝혀지면서 유명세는 속된 말로 "떡락"했다.
그가 아무리 히어로 협회의 일원으로 선의철의 실체를 밝히는 데에 일조했다고는 하나, 화마룡의 저주를 받아 "서울만 올라가면 각혈하며 쓰러지는 병"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 그럼 설화공주, 이제는 설화령을 신서울로 부르는 건 어떠냐?
- 신서울은 커녕 한반도를 떠나지 않는 것 만으로도 감사한 줄 아십시오, 휴먼.
석하랑은 부산 일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결국 신서울은 서울을 온전히 수용해야했다.
그 초석은 S급 괴수 흑염룡을 비롯해 서울에 자리잡은 푸른 불꽃의 괴수들을 이끄는 주인, <비스트 테이머>를 신서울로 초대해 협회에 정식 히어로로 등록하는 것으로 관계를 이어나가고자 했다.
이제는 서울과 신서울의 경계지가 되어버린 관악산 정상에서.
"......."
집정관, 유영호는 흙바닥을 툭툭 발로 차며 신경질을 부렸다. 약속된 시간이 지나도 한참 나타나지 않는 '요인'의 등장에 초조해졌다.
"국민 여러분. 저희는 지금 관악산 정상에 나와있습니다. 서울의 EX등급 이능력자이자 S급 괴수의 주인, '청화'양을 맞이하기 위해...."
"별 희안한 등급까지 다 만들어냈어. 그치?"
집정관은 기자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옆에 호위로 나선 히어로, 이승형의 옆구리를 툭툭 찔렀다.
"그냥 S 박으면 되지 뭘 또 EX라고 새로 만든 건지 모르겠다, 협회 늙은이들은."
"전투력을 중요시하시는 분들 아닙니까. ...아마 본인 자체는 전투력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화권(火拳). 불주먹이라고 불리는 청년은 흰 슈트에 묻은 먼지를 불꽃으로 털어냈다. 백부의 죄에 대해 이능으로 갚겠다며 백의종군하고 나선 그였으나, 여러 이유로 삼베옷은 기각되어 흰 슈트를 입게 되었다.
"누군 좋겠어, 아주. 한 여자만 사랑하고 정의를 추구하는 순정남이 되셨는데 말이야. 어이쿠, 내 인생. 썸녀가 알고보니 이중스파이였다니."
"........"
승형은 고개를 돌리며 툴툴거리는 영호의 불만을 한 귀로 흘렸다. 광검이 죽고 보좌관이었던 강소연의 실체를 알게 된 이후, 그는 입에 잘 대지 않던 술에 절어 살며 인생을 막 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집정관. 언젠가 집정관 좋아하는 여자가 분명 있을 겁니다."
"허이고, 자기는 아직도 많다 이거냐? 역시 얼굴빨이냐? 엉? S급 되더니 미모도 아주 폭발하시네?"
"......."
승형은 슬슬 추하기까지 한 영호의 질투에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사람이 변해도 이리 변할 수 있나 싶었지만, 업무 시간 중에는 일에 철저히 몰두해 능력은 더 향상되었다.
크르르.
관악산의 정상 너머에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비능력자들이 침을 꿀꺽 삼키고, 호위로 나선 이능력자들은 마력을 일으켜 혹시 모를 사태를 준비했다.
저벅, 저벅.
산등성이 아래에서 집채만한 늑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냥 늑대도 아니고 푸른 불꽃만으로 타오르는 늑대들은 실체 없는 유령처럼 보였다.
"......저건 무슨 괴수야?"
기자는 생중계라는 것도 잊고 홀로 중얼거렸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괴수의 등장에 신서울의 이들이 당황하는 사이, 늑대들의 등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흙길에 착지했다.
"반갑소. 며칠 안 지났는데 제법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
옛 <하늘성>이라 불리던 빌런이자, 현재 1년짜리 시한부 서울시장 직을 맡고 있는 전직 4선 국회의원. 류천성.
"많이도 몰려왔네. 칼 내려 놓지? 싸우러 온 것도 아니잖아."
건축과 재건이라는 이능을 발휘해 동작 지하에 거대 토굴을 만들어, 무려 6만이라는 시민들을 생존시킨 이능력자, <아키택트> 제임스 리.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리고 쑥쓰러운듯 쭈볏거리며 허리를 숙이는 푸른 머리칼의 소녀.
청화(靑火).
"만나서 반갑습니다. <비스트 테이머> 아가씨."
"......저도요."
청화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집정관이 내민 손끝을 마주잡았다. 류천성과 제임스 리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려 떨렸지만, 신서울의 이들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소녀의 가녀린 모습에 넋이 나가 있었다.
"어...."
이승형마저도. 청화는 신서울의 사람들을 향해 싱긋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먼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청화. 여러분이 말씀하시는 <비스트 테이머>이자 S급 괴수 <흑염룡>의 주인인 이능력자입니다."
물론, 그는 창염의 피닉스였다.
"나 아까 먹고 온 맥주 올라올 뻔 했어. 하늘성, 당신은 어때?"
"......삼켰다."
두 간부는 단장의 조신한 아가씨 코스프레에 역겨움을 금치 못했다. 피닉스는 남들 보이지 않게 등 뒤로 손을 뻗어 중지를 세운 뒤, 다시 사람들의 앞에 서며 긴장한 척 침을 삼켰다.
"그래서 제가...이제 뭘 하면 되는 거예요...?"
집정관이 가녀린 소녀에게 S급 히어로들조차 하기 힘든 미션을 읊어내리기 시작했다. 까랑까랑한 그의 목소리가 관악산 정상에 울려퍼졌고, 마력이 담긴 소리는 기자들의 마이크에 실려 한반도 전역으로 송출되었다.
"히어로 협회에 이능력자로서 등록하는 것이 첫 번째, 서울 뿐만 아니라 신서울, 부산 등 각지의 괴수들을 지배하여 한반도 전역을 괴수의 위협이 없는 평화지대로 만드는 것이 두 번째."
그리고 집정관은 이어지는 세번째 임무에 눈을 잠시 질끈 감았다가 떴다.
"......중국에 가서 S급 괴수들을 복속시키는 것이 세번째."
"알겠습니다."
피닉스는 순순히 집정관의 임무를 받아들였다. 앞의 둘은 이해한다고 쳐도 왜 중국으로 가야하는가.
'나 때문이지 뭐....'
청화단과 흑염룡이 날뛰면서 요동에 대기하던 히어로들을 전부 병원에 입원시켰으니, 그들이 회복되기 전까지 청화가 중국 일대의 괴수들을 정리해줬으면 좋겠다.
그게 원탁의 수장 '가웨인 경'과 중국 중앙당의 실질적인 지배자, 대괴수관리대책국의 국장 모택평이 거래를 한 표면적인 내용이었다.
그래서 청화는, 피닉스는 다음 행선지로 중국을 선택했다. 이왕 가는 김에 그 넓은 땅 한 곳에 잠들어있을 자신의 동포이자 정령을 깨우기 위해서.
남의 나라 자원이나 다름없는 코어의 합법적 약탈.
한참 자고 있을 정령 한 명의 각성.
그리고 중국 어딘가에 있을 큐브 회수.
그 세 가지 일이 피닉스가 중국에 가서 해야할 일들이었다.
"더럽게 바쁘네요."
"방금 뭐라고...?"
"아무것도 아녜요."
피닉스는 애처로운 미소를 지으며, 신서울의 인사들이 준비한 리무진에 탑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