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42화 (142/1,497)

〈 142화 〉1부 8장 (1)

세계가 무너진다.

푸른 불꽃은 지구 전역을 뒤덮어 모든 것을 불태우고 있었다. 건물을, 인간을, 자연을, 지구 전체를 소각시키려는 듯 불꽃은 꺼지지 않고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정말 아름다운 날이에요. 새들은 지저귀고, 꽃은 피어나죠."

하늘에는 푸른 불꽃을 흩뿌리는 작은 불사조들이 구름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지상에 떨어뜨린 불꽃에 타들어가는 인간들의 비명소리가 건물 옥상까지 울려퍼졌다. 푸른 소녀는 그 비명을 만끽이라도 하듯 콧노래를 부르며 양손을 들어올렸다.

♪♬♩♪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라도 된 것 마냥, 희고 고운 손은 사방에 펼쳐진 마력의 흐름을 연주하고 있었다.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로 박을 맞추고, 사람들이 소사하며 지르는 고통어린 비명을 모아 크레센도처럼 크게 퍼뜨렸다.

"자. 그러면 이제 선택하실 차례네요?"

소녀는 방긋 웃으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옥상 난간에 두 발을 딛고 선 채,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보는 그 모습은 분명 내 기억속에 남은 게임 속 이벤트 씬이었다.

저를 세뇌에서 풀어줘서 고마워요, ■■■.

기억 속 소녀는, 악의 조직 다크 레기온의 간부는 세뇌를 풀어준 것에 감사했다. 눈앞의 소녀는 기억 속 소녀와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게 진실을 알려줘서 고마워요, 피닉스."

소녀는 내게 "피닉스"라 지칭했다. 나는, 피닉스는 소녀를 눈앞에 두고 이지선다의 선택을 강요받았다.

"무슨 수를 써도 세계는 멸망당할 거예요. 당신이 지금까지 했던 발악은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었죠."

소녀는 손에 한가득 쥐고있던 유리구슬을 바닥에 뿌렸다. 익숙한 색의 코어들이 바닥을 굴러, 내 발치에 닿았다.

청화단. 그리고 내가 괴인으로 만들었던 수많은 이능력자들.

소녀는 그들 모두를 죽여 코어로 만든 뒤, 인질로 삼아 나를 협박했다.

"자. 이제 긴말 안 할게요. 앞으로 한 시간. 한 시간 뒤면 세계의 종말이 이 땅에 찾아와요."

소녀는 옥상 난간에서 내려와,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검은 건틀릿이 손톱은 닿기만 해도 베일 것 처럼 날카로웠고, 소녀는 자신의 가슴을 활짝 열어젖혔다.

"고민할 시간은 없을 걸요?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야 당신이 정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예요."

소녀는 내게 다가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소녀에게서 물러났지만, 소녀는 그보다 더 빠른 발걸음으로 내 손을 제 가슴위에 올렸다.

두근. 두근.

항상 만지고 싶어했던 그 말랑한 가슴의 감촉이 너무나도 소름끼쳤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가슴 너머, 소녀의 근원이자 근본인 "코어"가 빠르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가슴이 만져졌다거나, 나와 단 둘이서 옥상에 있다거나 해서 두근거리는 기색은 아니었다. 소녀는 내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기대하는, 유열의 두근거림이었다.

"이러는 사이에도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고요? 너무 늦으면 둘 다 못 살릴텐데~ 푸흐흐."

소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어영부영하는 한 시간. 그 한 시간 사이에 내가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지구는 멸망한다.

"왜 그렇게 뜸을 들여요? 다시 한 번 말해드려요?"

그만. 듣고싶지 않아. 나는 소녀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지만, 소녀는 까치발을 들고 내 목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저를 죽여서 세계를 구하겠어요, 아니면 저를 살리고 세계를 멸망시키겠어요? 아니죠, 당신한테는 이렇게 묻는 게 더 와닿겠네요."

소녀의 눈동자는 푸른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나야, 세계야?"

* * *

"......소름돋는 꿈이었어요."

나는 몸을 부스스 떨며 잠에서 깨어났다. 히로인들이 오마케에서 임신공격을 하던 그 어떤 순간보다 더 소름이 끼쳤다.

"으으으."

앞 좌석의 스크린에는 푸른 소녀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세계 어딜 내놓아도 미모로는 빠지지 않을 미인상의 여인, 그리고 그 몸을 움직이는 사람은 나였다.

"그으읏."

표정을 바꾼다. 조금 더 노려보는 표정이었나? 꿈속에서 나에게 무서운 이지선다를 강요하던 그 애매모호한 표정은 영 따라하기가 어려웠다.

약 1분여간 안면근육을 꿈틀거려 최대한 비슷한 표정을 만든 뒤, 나는 소녀가 내게 던진 소름돋는 멘트를 읊었다.

"나야, 세계야?"

"또 헛소리 시작하는 거 보니까 잠 덜 깼네. 야, 정신차려. 지금 한가하게 자고 있을 때냐?"

"...아, 진짜."

옆좌석에 앉아있는 대머리 노총각, 조덕배는 온몸이 들썩거리고 있었다. 전동 안마 의자에 앉은 것 마냥 흔들렸지만 흩날리는 머리칼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하품했다.

"흐아암. 이렇게 잔소리 할 거면 안 데려오는 거였는데."

"난 지금 괜히 너 따라가겠다고 한 거 존나게 후회하는 중이다. 스바."

"지금 욕한 거예요?"

"아니거든? 방금 러시아어 말한 줄여말한 거거든? 스파시바! 뉘치팔러마!"

하도 입이 걸어서 욕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놨더니 이 모양 이 꼴이다. 나는 온몸을 비틀어 자신의 천박한 언행을 보이는 이 건방진 부하 2호에게 오랜만에 잔소리를 하기 위해 입근육을 풀었다.

"하와와와."

"야 이."

"아으, 자다가 침이 말랐나. 덕배 씨, 아까 와인 받아둔 거 있어요? 한 잔 줘봐요."

"지금 여기 이 꼬라지 난 거 안 보이냐?"

덕배는 자신의 하반신을 가리켰다. 나는 축축히 젖은 그의 회색 바지를 훑고는 입꼬리를 비틀어 그를 비웃었다.

"고소공포증 심하시네요. 고작 비행기 탔다고 오줌을 지리다니. 괴인 실격입니다, 부하 2호."

".......백번, 아니 천번 양보해서 내가 지렸다고 치자."

"양보할 것 없이 지리셨는데요?"

"아니, 좀 들어!"

덕배는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나는 괴인도 홧병으로 죽을까 궁금해져, 살짝 고개를 꺾어 눈을 깜빡였다.

"때릴 거예요?"

"아오, 진짜…. 그날 인천에서 어떻게든 약 먹이고 패 죽였어야 했는데."

"그게 안 됐으니까 당신이 여기서 이러고 있죠."

새삼스럽게 옛날 일을 언급하다니. 불과 반 년은 커녕 두 달 조금 전의 일을 가지고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냥 그 변호사 아줌마 살릴 걸 그랬나요?"

"지가 다 태워죽였으면서 무슨. 그 아줌마는 뭐 다르냐?"

"네. 나름 네임드 빌런이었어요. 굳이 비교하자면…."

나는 나와 덕배를 향해 총을 겨누며 괴성을 지르는 복면의 남자들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런 강도들이랑은 비교할 수 없을만큼 쓰레기?"

"......야. 저걸 강도라고 부르는 게 맞냐?"

"비행기 훔친 거니까 강도나 다름없죠."

"쟤들 울겠다. 지금."

이미 비행기 안의 수많은 이들이 무언가를 흘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거나, 누군가는 피를 흘리거나, 누군가는 당황해 마력을 흘리거나, 누군가는 세번째 다리에서 오줌을 흘리거나.

"너 지금 또 나가지고 이상한 생각했지?"

"칫."

이럴 때는 참 귀신같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허리에 차고 있던 안전벨트를 풀어, 좌석에서 일어나 손을 털었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쏜다!"

"이미 움직이고 있는데 바로 쏴야죠. 아, 쏘면 혹시나 저 죽을까봐 걱정하는 거예요? 당신들 대가리가 나 산채로 잡아오라고 말이라도 했나? 푸흐흐."

나는 마력을 방사해 비행기 안을 훑었다. 따로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은 없으니, 김해공항에서 비행기가 뜰 때부터 일반 여행객으로 잠입했을 게 분명했다.

치직. 지지직.

스마트워치도 제대로 전파가 통하지 않는다. 강력한 방해 전파를 발생시키는 장치까지 동원했으니, 승객 뿐만 아니라 승무원 중에도 한패가 있을 가능성이 짙었다.

"돌아가면 피바람이 불겠네요. 은유하 아가씨한테 다 일러야지. 밑에 이사놈들이 뒷돈 먹어서 저 테러당했다고."

"나 유성항공 처음 타보는데 첫 비행기 부터 이 난리냐. 아이고."

덕배도 허리띠를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불꽃을 피워 바지에 쏟은 와인을 말려줄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냥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야. 그런데 애초에 네가 그냥 대놓고 비행기타서 이 사단이 난 거 아니냐?"

덕배가 불편한 진실을 찔렀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저도 설마 비행기 타자마자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이제 어쩔래? 우리 이러다 저기 이상한데 끌려가서 코로 마라탕 마시는 거 아니냐?"

타다다당.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너무 시끄러워서 전방에 대충 둘러뒀던 마력의 보호막이 슬슬 흔들릴 수준에 이르렀다.

"당장 투항해라! 그렇지 않으면 인질들의 목숨은 없다!"

테러리스트 중 제법 끗발이 높아보이는 남자가 승무원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며 소리쳤다. 남자는 마력을 각성하지 못한 비능력자였지만, 그가 손에든 총에는 마력이 깃들어있었다.

"코어웨폰까지? 나 참."

"어쩔래? 쟤들 저렇게 죽게 내버려둘 거냐?"

"큰 문제는 없죠. 안 그래요…?"

나는 승무원을 향해 싱긋 웃었다. 관자놀이에 총구가 들이밀어져 있는 승무원은 유일한 생명의 동앗줄인 내가 그를 전혀 도와줄 기미를 보이지 않자, 몹시 절망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비스트 테이머 님!!"

"살려줄 이유가 없네요. 그도 그럴게…."

나는 그의 얼굴, 인피면구 아래에 흐르는 마력의 잔향을 훑었다.

"동창의 고자가 자국 사람들 인질로 삼으면서까지 저를 납치하려 드는데, 저희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잖아요?"

"......공격해!!"

승무원이 고함을 지르기 무섭게 테러리스트들이 총구를 들어올렸다. 청화단의 것보다는 훨씬 못하지만, 나름 준수한 화력을 내는 코어웨폰의 탄환이 보호막을 서서히 깨드리기 시작했다.

"부하 2호. 혹시 스카이다이빙 좋아해요?"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걸 하려는 건 아니지?"

덕배는 완강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야! 여기 고도가 얼마인지 알아?! 넌 날수 있어도 난 못 난다고?!"

"에이, 걱정마요."

나는 손에 불꽃을 피워 비행기의 옆을 향해 뻗었다.

"설마 코어가 깨지기라도 하겠어요?"

"일단 죽는다는 말이잖아?!"

"B급이었으면 살았을텐데 C급이라서 죽는 거예요. 혹시 알아요?"

나는 덕배를 향해 엄지를 들어올리며 그를 응원했다.

"이번 위기를 통해 당신이 진짜 B급으로 성장할 지?!"

"그딴 거 필요 없-"

콰앙. 나는 스스로 보호막을 꺼트림과 동시에 화염구를 터뜨렸다. 최대한 화력을 죽여 사람 둘 정도 간신히 도망칠 구멍을 만든 나는 덕배의 후드를 잡아당기며 구멍을 향해 점프했다.

"그럼 언젠가 나중에 봐요!"

"으아악?!"

테러리스트들은 기내 좌석을 붙들고 늘어졌다. 비행기 전체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으나, 곧 동창의 이능력자가 마력을 쏘아 비행기의 구멍을 메우기 시작했다.

"저걸 저렇게 써먹네."

나는 상공에서 수직으로 낙하하며 비행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덕배의 스릴을 위해 일부러 날개도 펼치지 않았다.

"아. 아니다."

나는 등 뒤로 날개를 펼쳤다. 덕배는 내 등 뒤로 푸르게 타오르는 불꽃의 날개를 보며 안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 날아갑니다!"

"...뭐? 야! 잠ㄲ-"

새애액!!

나는 날았다.

바닥을 향해.

"흐아아아악?!"

"괜찮아요! 걱정마요!"

나는 신체의 일부를 괴인형으로 바꾸며 활짝 웃어줬다.

"저는 안 죽어요!"

"내가 죽어?!"

"죽으면 부활시켜드릴게요!"

"야아아아아아아아아!!!"

낙하산 없이 스카이다이빙을 체험시켜주는 상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혼절하려고 하는 덕배의 표정에 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덕배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악귀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역정을 냈다.

"너 나한테 대체 왜 이러냐아아!"

"그냥요!!"

이유야 있다. 모처럼 중국으로 오는 1:1데이트에 천가을도 은유라도 석하랑도 아닌, 왠 커다란 대머리 하나를 달고 오니까 기분이 영 그렇더라. 옆에 칙칙한 대머리 하나를 달고 왔기 때문에, 꿈이 아주 개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신 때문에 개꿈 꿨잖아요!!"

"지 혼자 잘 쳐자다가 왜 나한테 시비야?! 내가 그 꿈 꾸게 만들었어?!"

"아마도요!"

"으아아! 진짜, 으아아아!!"

덕배는 울분이 섞인 고함을 토해냈지만, 나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지상으로 더욱 빠르게 날개짓을 했다.

더, 더더 빠르게.

내가 속도를 높일 수록, 내가 낙하하려는 지점에 우거진 나무의 나뭇잎결까지 보일 정도로 지상에 가까워졌다.

"흐아악?!"

덕배가 바위피부를 활성화하는게 손에 느껴졌다. 아마도 바닥에 떨어지게 된다면 충격을 감쇄하려는 수단처럼 보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아끼는 모르모트를 중국 땅에 패대기 치려고 끌고올 만큼 악덕 상사는 아니다.

"......하아!"

지면에 떨어지기 직전, 나는 마력을 적당히 긁어모아 날개를 크게 펄럭였다. 마력으로 발현된 이능의 힘 덕분에 나는 관성의 법칙조차 무시하며, 지면에서 딱 5cm 떨어진 지점에서 멈춰섰다.

"아, 아깝네요."

'mm 단위 안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혹시나 덕배가 대륙의 흙에 키스할까봐 조금 일찍 날개를 펄럭였던 게 화근이었나보다. 나는 살포시 날개를 접어 바닥에 내려앉았다.

"에이, 괜히 부하 2호 신경쓰는 바람에 신기록 갱신 못했.... 어? 부하 2호? 조덕배 씨...?"

"......."

덕배는 아무 말이 없었다.

조덕배.

사망.

* * *

청화단의 단장, 창염의 피닉스.

그리고 그의 부하 바위괴인 조덕배.

2020년 6월 13일.

김해공항에서 출발해 중국 서안으로 향하는 유성항공의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중국 한복판에서 행방불명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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