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외전3. 온천 여행 (9)
<여탕>
은유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타인에게 질투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유성이 망하기 전에는 제 오빠들에게 어화둥둥 예쁨과 사랑을 받는 막내 동생이었고, <인형술사>라는 엄청난 이능력을 각성하기도 했다.
그런 유하는 오늘 이곳에서 처음으로 질투를 느꼈다. 그것도 해외의 유력 경쟁사나 경쟁 기업이 아니라, 한 사람을 두고 벌이는 연적에게 진심으로 부러움과 질시를 느꼈다.
두둥실. 유하는 물위에 떠다니는 두 개의 수박 덩어리에 절로 물속에 입을 담갔다. 그러지 않으면 댓발 튀어나온 입이 저 연적에게 들킬것만 같았다.
부르르. 유하는 슬쩍 온천의 수증기 속에서 아닌척 주변을 훑었다.
석하랑, 천가을, 히메지 히카리, 유이신.
미성년자인 히카리는 논외. 미래의 성장 가능성은 어떻든간에 지금 당장은 의미가 없다. 피닉스도 히카리에 대해서는 그저 뛰어난 인재라고 소개했지, 무언가 특별히 잘 대해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은유하, 1승.
다음으로 석하랑. SS등급에 오르며 피부는 더 고와지고 남아있던 젖살이 전부 사라져 성숙한 여인의 체형에 다가섰지만, 그 흉부는 아버지 허윤환으로부터 내려온 한국인의 유전자를 그대로 답습했다. 표준 사이즈에 가깝다고는 해도, 유하는 최소한 하랑 보다는 훨씬 마음씨가 상냥했다.
은유하, 2승.
연승가도를 달리는 유하였지만, 압도적인 1위의 강력함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물위를 떠다니는 저 자연생성된 언덕은 부끄럽지도 않은지 유감없이 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유하가 가진 데이터베이스에도 딱히 인공적인 시술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고 확인되었으니, 유하는 피눈물을 삼키며 제 패배를 순순히 인정했다.
은유하, 2승 1패.
여기서부터는 슬슬 애매해진다. 유성의 PMC로 들이려고 눈여겨보고 있다가 피닉스의 괴인 군단에 들어간 여성 히어로, 유이신. 이제는 <궁성>이라는 청화단의 간부가 된 그는 유하에 지지않는 상당한 볼륨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만져보거나 직접 사이즈를 재어볼 수는 없으니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유이신은 단 한 번도 유성의 히어로 슈트 매장에서 신체 치수를 측정한 적이 없었다. 혹시나 싶어 유성의 의류 매장에서 산 속옷 치수가 남아있나 검색도 해보았지만, 기적같이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
유하는 확신했다. 저 여자는 유성 불매운동가구나. 제 기업의 물건을 단 하나도 쓰지 않는 독한 소비습관에 이신을 바라보는 유하의 시선은 자연스레 곱지 않아졌다. 자연히 이신의 사이즈에 대한 견적도 사견이 들어가게 되었다.
은유하, 아슬아슬하게 3승 1패. 유하는 만족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옆에있던 하랑이 유하의 얼굴에 물을 날렸다.
"꺄악?!"
"이 언니야 남의 가슴 멋대로 보고 뭘 그렇게 의기양양하는데?"
"...아닌데? 안 봤는데?"
"언니야 A급이라서 다 드러난다. 그렇게 안 봤는데 무서운 사람이네, 내가 보기엔 이신 언니가 더 크구만."
빠직. 유하가 이를 갈며 물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신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회장님?"
"......왜요, <궁성>."
"저는 유이신이라고 아까 소개를 드렸을텐데요."
"제가 궁성 님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하지는 않아서."
이신은 잠시 입꼬리를 비틀었다가 그 이유를 깨달았다.
"혹시 제가 유성 히어로 슈트 거지같다고 발언해서 그러시는 겁니까? 하지만 그건 인정하셔야 합니다. 1.7버젼 슈트는 안정성 면에서 최악이었어요."
"흥. 1.6다음에 바로 1.8 나왔거든요? 그런 거 유성 역사에 없어요."
"다행이군요. 그래도 자기들 흑역사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어서. 어차피 앞으로도 평생 안 살 겁니다."
"저기요? 서울 올라가는 물자들 다 제가 보내드리는 거거든요? 당신 아까 입고 있던 그 연보라색 레이스 속옷도 저희 제품인 거 몰라요?"
"......제 돈으로 산 건 아니니 됐습니다."
기업가와 불매 운동가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하랑은 은근슬쩍 가을의 곁으로 몸을 옮겼다. 한껏 온천의 따스함을 즐시던 가을의 시선이 돌아갔다.
"어머? 무슨 일이니?"
"저 한 번 만져봐도 돼요?"
"......뭘?"
가을은 흠칫 놀라 거리를 벌렸다. 이미 가을의 촉수 중 대다수는 바로 옆에 앉은 히카리에 의해 해부당하듯 관찰당하고 있었다. 하랑은 침을 꿀꺽 삼키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둘 다요."
"......맘대로 해."
가을은 두 손을 들어올리며 항복 선언을 했다. 하랑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거대한 봉오리에 첫 발을 올린 산악가처럼 아주 서서히 손을 올렸다.
"와, 쩐다, 대박."
"얘, 너, 잠깐."
가을이 촉수로 하랑의 손목을 붙잡았다.
"너 왜 이렇게 잘 해? 한 두번 해본 솜씨가 아닌데?"
"......."
하랑은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이미 유하에게 가을이 파랑새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있는 입장으로서, 감히 무엇으로 손장난을 친다는지 알면 가을은 그대로 경을 칠 것이다. 그래서 하랑은 곧장 화제를 돌렸다.
"언니 진짜 몸 관리 어떻게 해요? 따로 식단 같은 거 조절하세요? 연예인 식단 그런 거?"
"관리 안하는데. 유전이야. 나 살 안찌는 체질."
쯧. 하랑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동시에 옆에 있던 히카리가 촉수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력이 흉부에 집중되어 있는 체질 아니고요?"
"뭐?"
네 명의 시선이 히카리에게 모였다. 히카리는 제 스마트워치(방수가능)를 들어 스크린을 띄웠다.
"사람마다 고유 마력 패턴이 있는데, 그게 또 체내에서 작용하는 주요 포인트가 달라요. 마력 순환이 더 잘되는 곳으로 신체 기능도 향상되는 거죠."
"그, 혹시 그 낭설이 진짜란 말씀이십니까?"
이신의 물음에 히카리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손뼉을 쳤다.
"등급 상승에 따른 신체 보정 설? 그거 낭설 아닌데. 도 교수님 이론이죠? 저는 맞다고 생각해요. 표본이 남성 위주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학술지에 등록 되었을 걸요?"
히카리는 온갖 전문용어로 점철된 '마력 등급 향상에 따른 신체 보정의 역학관계에 관한 표본조사'를 설명했다.
"표본이 남성이라서 주로 남성에 대해 말할 수 밖에 없지만, 여성에게도 똑같이 적용돼요. 등급이 높아질수록 체내 마력을 더욱 많이 움직이게 되고, 그에 따라 자연히 신체 기능이 상승하는 거죠."
"........"
히카리는 어딘가 질린 기색이 강한 네 명의 모습에 즉각 설명을 멈추고 손가락을 세 개 들었다.
"1.일일 칼로리 소비량 증가. 2.자연적인 신체보정. 3.성기능 강화. 논문을 정리하면 크게 세 가지 효과가 있어요."
"정리 고마워."
가을은 진심으로 감사했다. 아직 앞날이 창창한 어린 소녀가 신이 나서 하는 말을 끊을만큼 가을은 모질지 못했다. 이신은 제 허벅지를 만지며 경탄했다.
"그럼 제 허벅지살이 줄어든 것도...?"
"각성하면서 보정된 거라고 생각해요. 언니가 원하는 방향으로."
히카리가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결국 이상적인 체형 보정이라는게 무슨 기준이겠어요? 마력의 주인인 본인 의사가 들어간 거지. 이게 도 교수님이랑 저랑 의견이 갈린 부분인데요. 도 교수님은 마력의 영향에 따른 신체 보정이 그저 괴수에게 대항하기 위한 실전적 육체로 바뀐다는 의견이고요, 저는 마력이 신체 주인의 뇌파를 읽어 원하는 방향으로 육체를 바꿔나간다는......."
점점 길어지는 설명에 이신은 울상을 지었지만 다른 이들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결국 세 여자는 이신을 총알받이로 세우고 몸을 가까이했다.
"언니 S급 되고 나서 좋아진 거 있어요?"
"...나잇살이 좀 줄어들기는 했어. 하랑이 너는?"
하랑은 국가 기밀을 얘기하는 것처럼 아주 조그맣게 속삭였다.
"......한 컵 올라갔어요."
"진짜인가?"
"아마 맞을 거예요. 고객님도 비슷한 뉘앙스로 얘기한 적 있으니까."
가을과 하랑의 시선이 동시에 유하에게 꽂혔다. 유하는 변명하듯 손을 휘저으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냥 말이 그랬다는 거고, 실제로는 어떨지 몰라요! 본인한테 지금 당장 물어볼 수도 없잖아요."
"......그, 그건 그렇지."
하랑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목욕을 하고 온천에 몸을 담그러 왔음에도 굳이 하랑은 파란 나비의 머리핀으로 머리를 묶어올린 채 온천에 들어왔다.
"저기 유하 언니야. 각성할 때 뭐 달라진 거 없드나?"
"...난 처음부터 A급으로 각성했는데."
교차검증을 할 수가 없었다. 세 여자는 결국 전문가의 의견을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이신에게 전문지식의 폭격을 속사포로 쏟아내던 히카리는 너무나 길어진 설명에 목이 말라왔다.
"......일단 저희 나가서 마저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어느덧 시간은 10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 * *
"그 말 맞아요."
피닉스의 공언 하에 모두가 진리를 깨달았다. 특히 히카리가 제 가설이 맞아들어갔음에 손뼉을 치며 반색했다. 피닉스는 삼각팩에 들어간 딸기우유를 빨대로 들이키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일차적으로 유전자의 영향이 크고, 이차적으로 마력의 영향이 발생하는 거지. 어찌됐든 등급이 각성하면 신체에 보정이 붙는다는 건 사실이죠."
"그러면 저, 혹시 거기도...?"
하야테의 물음에 피닉스는 잠시 입술을 끔뻑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2배, 3배 늘어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등급 하나 올라갈 때마다 1cm 정도씩 길어진다고 생각하세요."
"난 이미 S급인데? 가망 없는거야?"
"S급도 S급 나름이죠. 잠깐 이리와서 손좀 줘볼래요?"
하야테가 쭈뼛거리며 일어나 피닉스의 손을 잡았다. 피닉스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가을이 입술을 깨물었지만, 피닉스는 그저 눈을 감고 하야테의 마력을 훑었다.
"전부 다 얘기하기 귀찮으니까 제일 높은 것만 얘기해줄게요. 히메지 하야테, 풍속성 최대 96. 지금 한 94 정도 되겠네요."
"고, 고작 2만 올리면 SS 된다고?"
"그 2가 지금까지 노력한 양의 수 십배는 될 걸요? SS등급 올라가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다들 자기 수준이 어느정도인지라도 알면 모를까."
피닉스는 잠시 기억을 곱씹었다. 류천성도 그렇고 은유하도 그렇고, 자신의 경지에 대해서 정확히 가늠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불편해하고 조급해하는게 너무나도 잘 느껴졌다. 피닉스는 검지로 히카리를 가리켰다. 지목당한 히카리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피닉스의 말을 기다렸다.
"마력 패턴 검사기, 지금 계획으로만 잡혀있죠?"
"네, 네! 아직 구상만-"
"A급 코어까지는 원하는 대로 공급해 줄테니까, 한 번 만들어봐요. 은유하 회장님도 예산 지원해줄 거예요."
"히카리 박사님, 예산이 부족하면 얼마든지 말씀해주세요."
어느새 유하는 히카리를 저와 동급의 존재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큼 유하가 히카리를 통해 얻을 유무형적 미래 가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제가 돈은 좀 많은 사람인지라. 원하시면 세계에서 최고의 연구 시설과 장비들도 조달해 오겠습니다."
"가, 감사합, 흐끅."
히카리는 딸꾹질을 하며 숨을 헐떡였다. 눈가에는 눈물이 왈칵 고여있었고, 곧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고마워, 히끕! 요, 흐아아아앙!!"
하야테가 옆으로 달려가 히카리를 달랬다. 왜 우냐고 다츠지지 않고, 그저 묵묵히 안아 등을 토닥였다. 히카리의 울음은 기쁜 마음에 터뜨린 행복의 눈물이었다.
피닉스는 아무 말 없이 딸기우유를 마시며 어쩔 줄 몰라하는 좌중을 둘러보며 손을 두번 까딱거렸다.
"오늘 같이 기쁜 날에, 다들 한 잔?"
모두가 축배를 들었다. 히어로든, 빌런이든, 일반인이든 방에 모인 이들은 취기를 억누르던 마력조차 풀어헤치고 잔을 부딪히며 함께 밤을 지새웠다.
* * *
<6월 7일 새벽 4시, 황신당 혼탕.>
"이제서야 좀 조용해졌군."
나는 비가 떨어지는 온천에 몸을 담가 취기를 조금씩 토해냈다. 온천의 수증기와 함께 날아간 알코올 섞인 숨은 밤하늘로 올라가 사라졌다.
'지금 아니면 여기 다시는 못 올테니까 한 번 더 즐겨야지.'
다행히 창염도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 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온 세상에 나홀로 놓인듯한 고요함에 빗소리를 즐기며 이 고요함을 즐겼다.
끼이이익.
문이 열린다. 이 새벽에 누가 여기에 온 걸까. 나는 손가락을 튕겨 불빛을 비췄다.
그곳에는-
"손님 지금 이 시간에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사장 하선태였다. 나는 피닉스의 알몸이 남자에게 보였다는 것보다, 노란 우비를 입고 있는 하선태의 엄한 눈길에 침이 바싹 말랐다.
"다른 손님들 주무시는데 이렇게 물소리 내시면 곤란합니다."
"......죄송해요."
"만약에 저 말고 다른 분이 오셨다면, 손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려고 생각하셨습니까?"
"......."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하선태는 한숨을 쉬며 손목 시계를 확인했다.
"앞에 청소중 팻말 걸어둘테니, 30분까지 정리하고 나와주시길 바랍니다."
"......네."
유구무언.
나는 노란 우비의 하선태가 등을 돌려 온천탕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누구 하나는 올 줄 알았는데."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자.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욕탕을 빠져나왔다.
그 뒤, 나는 순순히 방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했던 므흣한 이벤트 따위는 없었고, 나는 독수공방하며 홀로 새벽을 맞이했다.
"......."
'그래, 이제 와서 그런 이벤트는 무슨.'
짝.
나는 두 손으로 뺨을 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내가 살아남는 것만 신경쓰자.'
겸사겸사 세계도 구하고.
"......해는 진짜 예쁘네요."
수평선 위로 태양이 떠올랐다.
휴식은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