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외전3. 온천 여행 (5)
괴수를 조종할 수 있는 이능력자.
SS급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도는 떨어지지만, 전세계적으로 관심을 끌 충분한 이슈 거리였다. 특히 이미 한국은 국외로 떠나간 인재가 많았기에, 각국은 자연스레 그들을 통해 <비스트테이머>를 포섭하려고 했다.
원탁만 아니면.
오라클, 운디네, 질풍객. 무려 세 명이나 되는 원탁이 한반도에 모였고, 그들은 제각기 다른 위치에서 활동하며 연막을 펼쳤다.
- 원탁이 비스트테이머를 보호하고 있을 것이다.
신서울의 오라클, 부산의 질풍객. 그리고 행방이 묘연한 운디네. 세간의 이목은 자연히 신서울로 쏠렸고, 신서울은 선의철의 하야와 맞물려 전대미문의 격랑을 겪고 있었다.
그 와중에 정작 비스트테이머 청화-를 자칭한 피닉스는 부산에 간부들과 놀러왔다. 사정을 알고 있는 다른 원탁은 운디네가 피닉스를 전담마크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질풍객-히메지 하야테는 마음놓고 제 동생과 한국 여행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쪽이 왜 여기서 나오실까, 응?"
"오해입니다."
피닉스는 앞길을 가로막은 하야테의 옆을 스쳐가며 그를 피했다. 그랬더니 그와 똑같은 외모의 소녀가 나타나 피닉스를 가로막았다.
"저기, 저기! 무슨 원리로 괴수를 조종하는 거야? 뇌파? 마력감응? 아니면 무슨 특별한 도구가 있어? 텔레파시?"
거친 숨까지 토해내며 앞을 가로막는 히메지 히카리에 피닉스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 마주칠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그리고 한국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여기서 마주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피닉스는 일차적으로 모르쇠를 시전했다.
"저 일본어 못해요. 아이 캔 낫 스피크 재패니즈."
"스마트워치가 다 번역해주고 있는데 무슨."
피닉스는 이차적으로 오리발을 내밀었다.
"저 비스트테이머 아니에요. 요즘 들어 닮았다는 말 자주 들어요."
"사진만 봐도 딱 알겠구만. 와, 증명사진 한 번 예쁘게 찍었네."
피닉스는 최후의 수단으로 둘을 무시한 채 목적지로 무작정 걸어갔다.
"어, 거기 온천 가는 길인데. 쟤도 온천 가나?"
"진짜? 잠깐만. 투숙객 해킹해서 확인해볼게. ...있다, 청화. 이 이름 맞지?"
남매가 쌍으로 괴롭힌다. 피닉스는 제 안의 창염과 빠르게 의견을 주고받았다.
1안. 괴수 능력자임을 밝힌다. 히카리에 의해 영혼 끝까지 털릴게 분명했다.
금전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면 적당히 손을 털어주는 은유하와는 달리, 제 지적 탐구심이 풀리지 않는다면 국적까지 바꿀 정도로 히메지는 독한 사람이다. 서울의 기현상을 탐구하기위해 크루즈 티켓을 해킹하고 부산으로 오는 배에 몸을 실었을 정도로.
2안. 진실을 밝히고 입을 틀어막는다.
그랬다가는 원탁과의 밀약은 금방 깨지고 전쟁이 날게 분명했다. 히카리는 내가 모르는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네트워크에 진실을 퍼뜨릴 것이다. 질풍객도 순순히 잡혀줄만한 사람은 아니다.
"저기~~ 혼자서 그렇게 다니면 위험한데? 우리 오빠가 이래뵈도 한가닥 하는 사람이야."
"야,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지? 우리가 가는 온천에 비스트테이머가 오다니. 야, 마침 잘됐다. 저기 청화 양. 혹시 원탁 예비 멤버로 들어올 생각 있어?"
"오빠, 벌써부터 모집하는 거야? 세상에. ...잠깐만. 비스트테이머가 왜 여기있어?! 서울의 마룡은 어떻게 하고?"
"그건 알아서 냅둬도 제 처신 잘 해요."
결국 피닉스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았다. 여기서 괜히 무시했다가는 더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이봐요, 질풍객. 운디네가 설명 안 해줬어요?"
"설명? 무슨 설명? 남들 다 모르는 남편이라는 사람이랑 지금 잠적해서 러시아도 난리난 거 몰라?"
"루살카 이 버러지가...!"
틀린말은 아니니 욕은 아니다. 피닉스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서울 하늘을 중계하는 위성 영상을 스크린에 띄웠다.
"봐요. 우리집 드래곤은 얌전해요."
마포대교 옆에 자리잡은 흑염룡은 한강위에 두둥실 떠올라 하류로 흘러가고 있었다. 갑자기 무언가를 느낀듯 고개를 든 흑염룡은 날개를 크게 펼쳤다. 태양을 향해 Y자로 선 모습에 지나가던 서울 주민들이 카메라로 찍어대기 시작했다.
"아무튼 안전해요. 봐요, 날뛰려고 했으면 진작에 서울은 불바다가 됐을걸요?"
"......그건 그렇네."
하야테는 어딘가 석연찮은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히카리는 여전히 비스트테이머가 괴수를 조종하는 원리가 궁금했다.
"서울의 헬하운드들을 비롯한 그 푸른 불꽃의 괴수들, 다 네가 조종하는 거 사실이야? 무슨 배짱으로 나라에서 하는 일을 막은 거야?"
"...그게 그렇게 궁금해요?"
피닉스는 헛기침을 하며 둘의 시선을 끌었다. 물론 그냥 멈춰서지는 않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기며 온천으로 향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차원문의 위험에서 죽을뻔했지만 기적적으로 이능력을 각성했고, 그 덕분에 괴수를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 서울 수복 작전을 막은 이유는 히어로들이 자신들을 죽이러 오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저도 그게 진짜인지는 몰랐어요. 소나무 부대의 실체가 그럴 줄은."
모든 과오를 소나무 부대와 선의철에게 떠넘긴 피닉스는 그 뒤의 상황을 적당히 풀어냈다. 조종가능한 괴수들을 적당히 이용해 서울 내의 괴수들을 청소했고, 시청사의 뱀을 죽이고 얻은 코어는 조종 가능한 괴수가 먹고 블랙드래곤이 되었다 하더라.
진실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코웃음을 칠 허섭스러운 배경이었지만, 다행히 그 진실을 아는 이들은 대부분 청화단에 소속되어 있거나 그에 준하는 이들이었다.
"아닌 것 같은데."
"거짓말이야. 분명 거짓말일거야. 내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감 좋아서 좋으시겠네요."
피닉스는 잠시 멈춰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기서 사라져버리기라도 하는 순간, 둘은 지옥끝까지 쫓아올 것이다.
한 명은 강자에 대한 도전 의식으로.
한 명은 정체불명의 존재에 대한 호기심으로.
둘을 떼어놓으려면 최후의 방법을 써야했다. 피닉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둘에게 선언했다.
"전 일본인 싫어해요. 저희 증조할아버지가 독립운동 하시다가 일본 순사에게 모진 고문을 받고 돌아가셨거든요. 그러니까 좀 떨어져서 가도록 하죠. 여관까지-"
"가족관계시스템 해킹해봐도 나오는 거 없는데? 고아래?"
하야테는 히카리의 뒷통수를 거세게 후려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애가 좀 이래요."
"...아뇨, 이해해요."
설마 즉석에서 해킹할 줄이야. 피닉스는 미간을 검지로 짓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포기. 좋아요. 알려주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오, 뭔데 뭔데?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는 다 들어줄게."
피닉스는 눈을 반짝이는 히카리에게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을 했다.
"귀화하고 청화단에 들어오면 알려줄게요."
"그래? 간단하네. 그러지 뭐. 어디서 신청하면 돼? 출입국 사무소?"
"......?"
피닉스는 저거 좀 말려보라는 눈빛을 하야테에게 보냈다. 하지만 하야테는 휘파람을 불며 어깨를 으쓱일 뿐, 갑자기 타국으로 국적을 옮기겠다는 동생에 대해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다.
"이번일로 깨달은 게 있거든. 얘 원하는 대로 어지간하면 다 시켜주자고."
"나라까지 바꾸려고 드는데요?"
"알게 뭐야. 당장 나부터 어디 나라에서 내놓은 놈인데."
피닉스는 잠시 기억을 곱씹었다.
원탁의 질풍객. 제 국적은 자기가 결혼할 여자의 나라가 될 것이라 공언하고 다니는 남자. 때문에 그가 전세계를 돌아다닐 때마다 허니트랩은 끊이질 않았고, 오죽하면 원탁에서도 그로인해 제명당할 뻔한 트러블 메이커.
피닉스는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계산을 끝내고 히카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 좋아요.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저기 가서 할까요?"
피닉스는 저멀리 시야에 들어온 숙소를 가리켰다.
* * *
<오후 3시 30분, 부산 온천호텔 [황신장]>
"손님,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온천호텔 황신장의 주인, 하선태는 눈앞의 성정체성을 잃은 투숙객의 말에 대놓고 면박을 주었다.
"온천을 지금 따로 이용하시겠다고요? 남탕이든 여탕이든 하나를 대절해서? 손님 혼자?"
"......제가 남탕도 여탕도 들어가기 애매한 상황이라."
피닉스는 손가락을 쭈볐대며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예약을 하고 들어온 입장이지만, 피닉스 한 명을 위해 온천을 장시간 대여해준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았다. 하선태는 단호한 목소리로 거부 의사를 표했다.
"절대로 안 됩니다. 미리 말씀을 하고 오셨다면 모를까, 다른 손님들도 벌써 체크인을 하셨...잠깐!!!"
하선태가 휘파람을 불며 남탕으로 들어가려던 하야테를 붙잡았다.
"왜 그러시죠?"
"여기는 남탕.... 아."
하야테의 눈이 반쯤 감기며 살기가 넘실거렸다. 하선태는 하야테의 몸을 위아래로 훑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여성분인줄 알았습니다."
"......."
하야테는 무언가 짜증이 일기라도 한듯 몸을 돌려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하선태는 인상을 찡그리며 제 실수에 자괴감에 빠졌다가 다시 표정을 풀고 피닉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무튼 안 됩니다. 정 어느곳을 고르기 힘드시다면, 이쪽으로 가시지요."
하선태는 피닉스에게 탕의 입구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리켰다. 피닉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으슥한 복도를 가리켰다.
"저기에 뭐가 있는데요?"
"......혼탕입니다."
피닉스가 반색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하선태는 뒷목을 긁적거리며 제 스마트워치를 두드렸다.
[새가 새장에 들어갔습니다. 입금 바랍니다.]
하선태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피닉스를 외면하며 먼산을 바라봤다.
* * *
<그 시각, 부산 석하랑 자택.>
"좋아, 이제 가자. 하랑아."
"간다니, 어딜? 이꼴로?"
피닉스가 변환시키고 간 옷들을 정리하던 하랑이 바닥을 가리키며 반문했다. 아직 바닥에는 정리하지 못한 옷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들의 옷은 아직 갈아입지 못한 한복이었다.
"이꼴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무슨 기회?"
유하는 음흉한 얼굴로 하랑의 귀에 속삭였다.
"방금 고객님이 혼자서 체크인하고 들어갔거든?"
"...그 온천? 치아라. 내는 안들어갈란다. 내가 더워 뒤질라고 작정한 것도 아닌데."
"그런데 먼저 목욕을 한다고 하는데...?"
하랑의 표정이 굳었다.
"그, 금마가 목욕을 다한다고?"
"솔직히 궁금하지 않니?"
"그거야 그런데...."
"그리고 뭣보다 중요한 게 있어."
유하는 굳은 각오를 다지며 하랑의 집 문을 열었다. 유하의 비장한 얼굴에 하랑은 절로 그 뒤를 따랐다.
"......언니야?"
"우리 고객님은 과연 어떻게 들어가실지...궁금하지 않니? 수영복? 수건? 아니면...."
하랑이 얼굴을 붉히며 머리핀을 만졌다. 이미 배지를 몸에서 떼어놓았는지,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그, 금마 여탕 들어가거나 하는 건 아니겠제?!"
하랑이 성큼성큼 걸어와 슬리퍼를 신었다. 유하는 하랑의 뒤에서 쿡쿡 웃으며 문을 닫고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 * *
<그 시각, US백화점 지하주차장.>
"어, 피닉스한테서 연락왔었네?"
가을이 피닉스가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가을의 주변에 막 짐을 정리하고 있던 간부진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먼저 숙소 들어갈테니 알아서 들어와라?"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으셨나봅니다."
이신은 걱정어린 목소리로 가을에게 답장을 재촉했다. 가을은 곧장 피닉스를 호출했지만 전화가 가는 소리만 들릴 뿐, 피닉스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진짜 무슨 일이 있나?"
"별 일 아닐거다. 뒤졌으면 벌써 너도 죽었겠지. 그냥 벗어놨을 거다."
덕배의 퉁명스런 말에 가을이 촉수로 덕배의 허리를 찔렀다. 덕배는 종이 가방으로 제 옆구리를 틀어막았지만, 촉수는 S라인을 그리며 종이 가방을 피해 덕배의 갈비뼈 아래를 때렸다.
"......."
"어딜 부정탈 소리. 피닉스 죽으면 너도 죽거든? 너 자꾸 피닉스한테 험한 말 할래?"
"......야,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그래, 내가 좀 말 험하게 했다 치자. 그건 내가 사과하마."
덕배는 씩씩거리며 가을에게 삿대질했다. 그는 차마 종이 가방은 집어던지지 못하고 살포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온천이라며! 그럼 스마트워치 벗고 몸만 들어갔을 수도 있지! 누가 목욕탕에 전자기기 손목에 채우고 들어가냐고!!! 암만 그래도 그렇지 촉수로 남의 갈비뼈 으깨려고 하냐?!"
"그건 나도 동감한다. 천가을, 이번에는 네가 잘못했다."
"......그러면 그렇게 말해주던가. 사람 무안하게."
가을은 툴툴거리면서도 촉수로 널브러진 종이 가방을 전부 집어들었다. 지화가 깜짝 놀라 주변을 훑었지만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가을은 순순히 덕배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 ...내가 손부터 나갔어."
"...손?"
이신의 딴지는 그 누구도 듣지 못했다. 가을의 사과에 덕배는 떨떠름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머리카락은 없지만.
"...아, 젠장! 나는 류천성 그 영감이랑 같이 갈테니까, 니들 먼저 가!"
"너 설마 쑥스러워하는 거냐? 이 상황에서?"
"시끄러워! 한 명은 남아서 노인네 데려가야 할 거 아냐!"
덕배는 씩씩대며 주차장을 떠났다. 지화는 성큼성큼 사라지는 뒷모습에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류천성이랑 대결하면 개발리는 놈이 누가 누굴 챙겨?"
"아, 김지화. 너 남은 가방 챙겨."
"...죄송합니다, 지화 님. 저도 지금 손이 부족해서."
지화는 선글라스 너머로 사라진 덕배의 자취를 눈으로나마 쫓았다.
"...배신자."
지화는 바닥에 널브러진 십 수개의 종이 가방을 보며 정신이 아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