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외전3. 온천 여행 (4)
<오후 3시, 부산 국밥골목>
"자네가 이런 것도 먹을 줄은 몰랐군."
"가리는 건 없어요. 좋아하는 걸 우선적으로 먹을 뿐."
류천성은 섞박지를 젓가락으로 집어 국물에 휘휘 젓는 피닉스를 보며 경탄했다. 외형은 전형적인 서구상의 소녀가 저보다 훨씬 기깔나게 국밥을 말아 먹는것에, 류천성 뿐만 아니라 막 수육을 내려놓던 사장도 기가 막힌 눈치였다.
피닉스는 그에 전혀 개의치않고 숟가락을 들었다.
"고맙네요. 당신 아니면 혼자서 도시락 사먹어야 할뻔 했어요."
"누구든 자네가 밥 같이 먹자고 하면 좋다고 나섰을텐데."
"이미 밥 먹었는데 뭐하러 굳이. 다행이네요, 당신은 아직 식사 안 해서."
"나야 뭐 사람 만나고 다니니 식사 제때 할 일이 있겠나...."
류천성은 슬쩍 사장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피닉스와 류천성은 서로의 국밥을 뜨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나저나 단장, 말투는 또 왜 그러신가? 지난번에는 그냥 말 편하게 하시더니."
"대외적인 이미지를 생각해서 하는 거예요. <비스트테이머> 청화는 당신보다 훨씬 어리니까요. 어르신한테 반말 찍찍 내뱉으면 당신이나 나나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어요?"
"덕배는 위아래도 없잖나."
"그건 그 인간이 인간으로서 덜 된 거고. 아무튼 옆에 듣는 귀가 없으면 저도 편하게 얘기하겠는데, 당분간은 이렇게 지내야 할 것 같네요. 딱히 불편하지도 않고."
피닉스는 티슈로 입가를 닦았다. 어느새 국밥은 벌써 반 가까이 사라져 있었다. 류천성은 제 국밥을 내려다봤다. 저도 얼추 비슷하게 먹고 있었다. 딱히 먹는 속도를 의식하고 먹은게 아니니, 아마 피닉스는 제 속도에 맞추어 식사를 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류천성은 쌈을 삼키고는 물로 입을 씻었다.
"......사람이 사소한 곳에서는 예의를 차리는 걸 보면 뿌리가 썩은 건 아닌데, 왜 자네는 악인이 되려 하는 건가?"
"뜬금없이 무슨 말이에요?"
"나야 서울에서 지킬게 있으니 자리잡다가 빌런이 되었다쳐도, 자네는 굳이 악당이 될 필요가 없었던 것 같은데."
"......영혼이 시켜서? 농담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요."
피닉스는 손을 들어 사장을 불렀다. 반찬을 리필해달라는 건지 테이블 위를 확인한 사장은 아직 한참 남은 찬거리에 의문스러워했다. 피닉스는 테이블 위에 미리 올려진 소주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한 병 주세요."
"......."
사장은 류천성과 피닉스를 번갈아봤고, 류천성은 침음성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은 의구심 가득한 얼굴로 소주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감사합니다."
피닉스는 소주의 병목을 쥐고 소용돌이치듯 돌렸다. 류천성은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딱히 제지를 하지는 않았다. 류천성도 술이 고프기는 했다.
"낮부터 술 마셔도 괜찮은가?"
"한 병 정도는. 여차하면 마력으로 해독하면 되니까요."
"그럼 무슨 맛으로 술을 마시나?"
"사람이랑 이야기하는 재미로 마시는 거죠. 그래서 안 마실거예요?"
"그럴리가 있나."
피닉스는 병 아래를 손바닥으로 치고 병뚜껑을 열었다. 서로의 잔을 채워준 피닉스가 류천성을 향해 잔을 들었다.
"시장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목표에 한 발자국 나아간 걸 축하하네."
짠. 유리잔이 부딪히며 둘은 알코올로 목을 씻었다. 피닉스는 잠시 눈을 찡그렸다가 다시 잔을 채웠다.
"앞으로 많이 힘들어지실 거예요. 선의철 다음에 누가 나올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서울을 상대로 그렇게 호의적이지는 않을테니."
"내 지지기반은 수도 이전 한 번에 다 날아갔지. 혹시 자네는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될 지 아는가? 그 사람한테 미리 기름칠 좀 해놔야겠는데."
"그걸 알면 제가 점집 차렸지 여기서 이러고 있겠어요?"
"미래 예지는 더이상 힘들다고해도, 자네는 대통령을 만들 수 있는 사람과 친하지 않나. 그래, 이 나라에 있는 큰 별의 주인 말이야."
피닉스가 양파를 씹다가 코를 찡그렸다.
"뭘 돌려 말해요. 은유하잖아. 그거 저한테는 의미가 좀 다르니까 확실하게 얘기해요. 어차피 듣는 분도 여기 사장님 말고는 없는데."
"...자네는 정치하지 마시게. 참 재미가 없군."
"할 생각도 없으니까 알아서 하세요. 그러라고 당신 서울 맡겠다고 했을 때 순순히 받아들인 거니까."
피닉스는 잠시 수저를 내려놓고 잔을 채웠다.
"저는 현상유지만 되어도 좋아요. 본격적으로 해외 돌아다니기 시작하면 집안일 신경쓸 시간도 없을테니까. 내정은 잘 하시는 분들한테 맡길게요. 당신이 은유하랑 직접 얘기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그럼 좋은 인재 좀 구해주시게나. 자네 우량주 정도는 알고 있을 거 아닌가."
"죄송하지만 제가 아는 주식은 전부 이능력자들 밖에 없네요. A급 히어로들 9급 공무원으로 돌릴 거 아니면 알아서 뽑으세요."
류천성이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소주를 입에 털어넣었다.
"자네는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희대의 암군이 되었을 거야. 정말 내 맘대로 사람을 뽑아도 괜찮다는 말이지?"
"좋으실대로 하세요. 수틀리면 다 엎어버리면 되니까. 물론 잘 하실거라 믿고 있어요."
피닉스는 마지막 잔을 들었다. 류천성은 장난섞인 협박에 어깨를 으쓱이며 잔을 맞부딪혔다.
"아무렴 내 전공인데 오죽할까. 자네는 서울이 멸망하지 않도록 잘 해주시게."
"물론이죠. 계산은 제가 하고 갈게요. ...말씀 잘 나누시고."
"알고있었나?"
"당연하죠. 고생하세요."
피닉스와 류천성은 늦은 점심을 마무리했다. 골목 어귀를 서성이던 두 남녀를 본 피닉스는 귀신같이 도망치듯 몸을 피했고, 류천성은 홀로 남아 물을 마셨다.
"그래서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알려진 거랑 다른데. 저 꼬맹이가 영감 상전이야? 괴수 조종하는 것 치고는 뭔가 너무 영감이 저자세인데."
사장은 떨떠름한 얼굴로 빈그릇을 정리했다. 류천성은 턱으로 피닉스가 사라진 문을 가리키며 빈 잔을 들었다.
"다 들어놓고 뭘 모른척 하는 겐가."
"......뭘 알아 들을 수 있어야지. 둘이 뭔가 야합한 건 알겠는데, 자세한 설명은 못 들었어."
사장은 투덜투덜대면서도 류천성과 마주앉았다. 어느새 테이블 위를 정리한 그의 손에는 간단한 안주거리와 새 소주병이 들려있었다. 류천성은 마력으로 술기운을 가라앉히며 숨을 골랐다.
"개과천선이라는 말이 있잖은가. 자네도 아직 귀를 열고 살고 있을테니, 작금의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는 뻔히 알테지."
"그래서 혼자 막무가내로 서울 남겠다고 한 양반이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요? 당신 하나에 목메고 살다가 밥줄 끊긴 내게."
"도 보조관, 아니 승지야."
류천성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겨우 말을 꺼냈다.
"나를 도와-"
딸랑딸랑-
"예~ 어서오세요~!"
사장, 도승지는 벌떡 일어나 들어온 부부에게 허리를 숙였다. 이능력자인지 머리색이 상당히 특이한 자들이었지만, 도승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들었다.
"어머, 여기는 처음 와보는데. 어서 주문하렴."
"...스타샤, 일단 자리에 먼저 앉자."
익숙한 목소리에 류천성은 반가운 척을 하려다, 옆에 있던 여자의 눈초리를 느끼고 손을 내렸다.
"여기서 기다리겠네."
"손님. 죄송하지만."
도승지는 문밖에서 들어오는 다른 손님들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계산 끝났으면 좀 나가주시겠습니까?"
"...소주 한 병 더 주시게."
"소주만요?"
"......그럼 한 끼 더 말아주시던가."
저 멀리 알콩달콩 사랑을 나누는 두 연인을 보며 홀로 자작하는 소주맛은 이상하리만큼 썼다.
* * *
<근처 도로.>
'흑염룡도 데려올 걸 그랬나.'
조금 부담스럽기는 해도 그만큼 리액션이 출중한 간부가 없다. 아직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두 시간 정도.
'미리가서 기다리고 있을까?'
체크인 시간은 훨씬 앞이지만 그전에 미리 가서 전경을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가을과 유하가 예약해둔 온천의 위치를 확인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용하군.'
석하랑 덕분인지 부산은 서울이나 신서울보다는 훨씬 평화로웠다. 모비딕의 습격이 불과 며칠 전이었고, 나와 광검이 투닥거린 것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부산은 특별한 소요없이 일상을 영위하고 있다.
'석하랑이 각성했으니 부산을 초토화시킬 일도 없고.'
광검과 설화공주. 사람들은 안전을 위해 두 S급 근처에 모여들었지만, 그들은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5년 후에야 S급들이 하나 둘 나타나겠지만, 그마저도 발굴해내지 않는 이상 의미는 없었다.
'전국민을 이능력자로 만들면.... 아니지, 감당 못할 짓이다. 분명 개고생이야.'
서울의 각성자들은 청화단과 한 배를 탔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다르다. 기껏 이능력자로 각성시켜줬더니, 배신을 하거나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거기에 조금만 잘못해도 괴인이 될 수 있으니까.'
간부가 괴인을 만들수도 있지만, 평범한 이능력자가 자연적으로 괴인이 되기도 한다. 장기에 영향을 받아 부의 감정에 휩쌓인 인간은 괴인이 되고, 가장 괴인이 되기 쉬운 자들이 빌런이었다.
'아직은 없어서 다행이다.'
각성한 정령의 제어를 받는 괴인과 달리, 세뇌된 간부의 명령을 따르는 괴인들은 특히 테라의 장기에 영향을 받아 폭주하여 흑염룡처럼 괴수가 될 수도 있다. 지금도 듀라한들이 그 오해를 받는 마당에, 폭주한 괴인까지 나오면 은근 신경쓸 게 많아진다.
'그러니까 5년째가 되기 전에 최대한 찾아야 해.'
만약 이대로 그들을 내버려둔 채 5년이 지난다면, 가장 걸림돌이 될만한 적은 누가 있을까. 나머지 다섯 정령 중에.
'펜릴은 일단 제외.'
펜릴은 적수로서 생각할 가치도 없다. 속성에 따른 상성도 상성이거니와, 오로지 '돌격'밖에 모르는 바보를 상대로는 내가 역상성이었다고 해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
'그럼 역시 혼돈이 제일 힘든가.'
"기본적으로 영체니까요."
...또 튀어나왔다. 나는 주변을 슬쩍 훑어 사람이 없는걸 확인하고 버스가 오는 시간을 확인했다. 10분. 이 짧은 시간 정도는 그나마 할애해줄 수 있었다. 어디 입을 빌려줄테니 좋으실대로 떠들어보던가.
'무상성인 동시에'
"전 속성에 대한 역상성. 환사기가 괜히 나오는 말이 아니죠."
'...신났군. 어디 한 번 떠들어봐라.'
"최초로 등장하는 보스인 천가을부터 시작해서 환속성의 보스들은 하나같이 비정상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죠. 청송 강소연도 기본적으로 암속성에 치우친 환속성을 기반으로 한 이능력자였고, 무엇보다 5번째 보스인 <혼돈환룡>이 제일 무섭잖아요. 당신 기억 보니까 그렇던데. 게임오버만 몇 번?"
'실눈캐라서 그래.
"원래 의욕없던 녀석들이 의욕을 가지는 순간이 제일 무섭죠. 숨쉬는 것 조차 귀찮아서 영체로 사는 녀석이 적이 되기를 작정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도 않고. 원작 간부들 중에서도 저 다음으로 가장 상대하기가 껄끄러운 적이라고요? 푸흐흐."
'그래서 제일 먼저 각성시키러 가는 거잖아.'
"괜히 전귀같은 놈 부활시켜서 괴인으로 삼으면 곤란하니까요."
샤오린 이전의 1기 원탁 중 최강의 무인. 초패왕의 환생체로서 인간 중 유일하게 홀로 SS의 끝자락에 오른 괴물같은 이능력자.
다행히 지금 시점에서는 고인이고, 모택평은 혼돈환룡과 손을 잡아 그 괴물을 부활시키기 위해 수 십만명을 제물로 바친다. 인간계 최강을 논하는 설정에서도 전귀와 화권은 항상 'vs' 떡밥의 좋은 단골 소재였다.
'전귀 아니었으면 이미 이 세상은 성주에게 지배당했겠지.'
나로서는 가장 고마운 사람이다. 성주가 원탁과 싸우며 상처를 입었던 이유도, 다른 원탁이 패배하여 쓰러진 와중에 오직 그만이 개처럼 성주를 물어 뜯어 상처를 입혔기 때문 아니었던가.
혼돈환룡이 모택평과 손을 잡아 전귀를 부활시키기 전에 빨리 중국으로 가야했다. 감은 어째서인지 중국행을 재촉하고 있다.
'오늘이 6월 6일이니까....'
"일주일만 있다가 가죠. 6월 13일."
왜. 어째서. 원래 계획은 당장 내일 워크샵이 끝나는대로 부산에서 홀로 떠나는게 아니었었나? 나는 잠시 버스를 기다리며 고뇌에 빠졌다.
중국에 넘어가는 즉시, 사실상 서울과의 모든 연락은 끊어질 것이다. 스마트워치를 통한 연락은 도중에 중계기를 거치다가 감청을 당하게 될 것이고, 그 모든 것을 중간에서 감시하는 모택평은 나와 청화단의 정체를 눈치챌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몰래 국경을 넘어가기라도 해야하는걸까? 하지만 그러면 또 운장에게 걸린다. 아무리 운장이 내게 패배했다고 하더라도, 분노하여 중국 전체에 그 사실을 알리며 달려들기라도 하면 곤란해지기는 마찬가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정말 정체를 숨기고 비행기로 시안에 내리는 방법이 최선일까.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만, 어째선지 자꾸만 마음이 조급해졌다.
'워크샵 오기를 잘했군.'
신서울이 어떤 혼란이 있든간에, 나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왕 쉬는 거 한달 더-"
짝. 나는 두 뺨을 쳤다. 더이상 입을 나불대지 못하게 내 스스로 입을 막았다.
'쓸데없이 또 제멋대로 하려고 하기는. 이제는 안 홀린다. 남의 생각 멋대로 정하게 하지 마.'
"쳇, 재미없게."
이래서 꼭 옆에 누군가 있기를 바라는 건데. 나는 끊임없이 내 속에서 나를 엿먹이려드는 창염이 몹시 고까워져 한 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내속에서 더 조잘조잘댈게 분명했기에 간신히 화를 참았다.
'혼돈환룡은 자고 있고, 샤오린은 적당히 구슬리면 돼. 모택평이 눈치채지 못하는 루트로 들어가면 된다.'
"그러니 이제 남의 입으로 떠들 생각은 마라."
끼이이익. 어느새 버스가 내 앞에 멈춰섰다. 나는 정류장 의자에서 일어나 문턱에 발을 디뎠다. 창염은 주변에 타인이 있다싶으면 귀신같이 입을 닫았다.
'일단 가면서 생각하기로 하자.'
버스에 올라 리더기에 손목을 올렸다. 버스 안에는 제법 사람들이 있었고, 나는 그들을 슬쩍 눈으로 확인하다가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런데 너희들이 왜 여기서 나와.'
버스의 맨 뒷자리에는 히메지 남매가 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