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34화 (134/1,497)

〈 134화 〉외전3. 온천 여행 (2)

<오후 12시, 부산 석하랑 자택.>

"......."

"하랑아, 괜찮니?"

"고개를 들어라. 추하다."

하랑은 빈백에 엎드려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의자에 걸터앉은 피닉스가 하랑의 옆구리를 발로 차며 흔들었고, 하랑은 그럴수록 더욱 빈백에 파고들었다. 유하는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 테이블 위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둘이 이런 관계였어요?"

"였다기보다는 이렇게 됐지. 일어나라. 반성할 차례다."

"아아아아악!!"

하랑은 빈백에 얼굴을 파묻고 괴성을 질렀다. 억울함 가득한 비명에 유하는 피닉스를 쏘아봤다.

"도대체 얼마나 괴롭혔으면 애가 이지경이 될 때까지...."

"오해다. 지가 억울해서 저러는 거다."

피닉스는 볼을 부풀리며 턱으로 하랑을 가리켰다. 하랑은 몸을 뒤집어 하늘을 향해 대자로 누웠다.

"하던가."

"......어휴. 여전히 너는 접근전이 서툴러."

피닉스가 불꽃을 실체화하였다. 테이블 위에 2등신으로 구성된 피닉스(괴인형)과 석하랑이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아예 원거리에서 싸우거나, 아니면 주무장을 정해서 수련을 해야돼. 넌 지금 이도저도 아닌 상태다."

유하는 결계안에서 펼쳐진 둘의 전투를 상기했다.

접근전. 피닉스는 인간형으로도 아주 간단하게 하랑을 제압했다.

원거리전. 서로의 분령을 탄막처럼 뿌려대며 싸웠을 때는 피닉스가 간신히 승리했다.

마지막으로 (석하랑만) 총력전. 피닉스는 괴인형인 상태에서 하랑의 전력을 받아냈고, 3전 모두 승리를 따냈다. 하랑은 그 3연패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괴감에 빠진 상태였다.

"아니! 언니야도 봤다 아이가! 종이 한 끗 차이로 진 거!"

"진 거는 진 거다. 한 끗 차이로 이길뻔하게 해줬다고는 생각도 안하는 군."

"그게 말이가, 방구가! 니나 내나 SS인데!"

"다르지. 넌 이제 막 95를 넘겼고, 난 99니까."

피닉스는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와 테이블에 앉았다. 블루베리밖에 없는 음료에 하랑이 냉장고를 가리켰다.

"캔커피 있다 아이가? 언니야 이런 거 안 마실텐데."

"캔커피는 죽어도 안 마시지."

"......고맙네요."

유하는 우유 팩을 만지작거리며 설전을 주고받은 피닉스와 하랑을 번갈아봤다. 주고받는 말은 간략하고 직설적이기 그지 없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둘만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봐봐래이. 내가 거기서 들어갈라 켔잖아? 그라믄 니 곧장 여서 불기둥 쏘아가 요격했다. 맞제?"

"아니. 그 때는 궁극기 준비 중이었다. 들어왔었어야 해."

"무슨 수로 들어가는데? 뭐 좋은 방법 있나?"

"전방에 얼음으로 보호막을 두르고 돌진하거나, 아니면 맞불작전을 놓던가."

"말이야 쉽지. 그게 가능했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나?"

이해가 갈듯 하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유하는 우유를 쪼르르 마시며 둘의 설전이 끝나기를 기다렸고, 전투에 대한 반성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피닉스가 손가락을 튕겨 불꽃을 제거했다.

"노선을 확실하게 정하라는 거다. 얼음을 메인으로 할 거면 물을 버려. 어줍잖게 주무장과 보조무장으로 나눠서 쓰려고 하지 말고. 아무튼 이 이야기는 그만하지."

피닉스가 의자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우유팩을 손에서 돌리던 피닉스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벌렸다. 유하가 우유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뭐 잊어버리신 거 있어요?"

"...아니.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싶어서."

다 큰 어른들이 사고를 치지는 않으리라. 피닉스는 음료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 * *

<그 시각, Padre Juan>

"그러니까 피닉스가 분명히 그런 얘기를 했다고 했지? 하랑이를 임신시키는 게 자기라고."

"그렇다니까. 나보고 막 장인어른이라고 얘기하고 그랬어."

변장한 두 부부, 허윤환과 아나스타샤는 차를 마시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부부의 삶에 대한 문제나 지구의 종말에 관한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당장 그들을 고민에 빠지게 만드는 문제는 그들의 딸-석하랑이었다.

"하랑이 눈치 못챘을까?"

"그럴 거야. 그랬으면 진즉에 당신 알아봤겠지."

같은 카페 안에 자리를 잡은 것도 상당한 모험이었다. 아나스타샤가 피닉스를 닥달한 끝에 그들은 피닉스와 하랑이 자주 오는 카페에 잠입을 했고, 피닉스는 사장인 후안에게 사정을 말하고 벽 너머의 자리에서 둘을 몰래 훔쳐봤다.

"언제 하랑이가 그렇게 따르게 됐을까?"

"나한테도 치지 않던 장난을 마구 치더군."

"그건 당신이 스승을 자처할 때 이야기야?"

"그래. 회장님에게 듣던거랑 너무 다르다. 분명 회장님은 하랑이가 그 쓰레기를 죽이려 들거라고 말 했는데."

허윤환은 왠지 섭섭해졌다. 따지고보면 피닉스는 스승이자 아버지를 죽인 원수인데, 정작 지금은 그 원수를 스승이자 친구로 삼아 폭발적인 성장을 보이고 있다.

자신의 교육 방침이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는 건 허윤환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막상 옆에서 딸이자 제자를 빼았긴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참 복잡한 문제구나. 아나스타샤는 커피를 마시다 스마트워치에서 온 호출에 행동이 굳었다.

"누구야?"

"......아빠."

허윤환은 볼을 붉혔다가 다시 창백해졌다. 아나스타샤의 입에서 '아빠'라는 말이 나올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제게 장인 어른이 생길 거라고는 아예 꿈에도 그리지 않았다.

윤환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의 흐름을 최대한 억제하고, 숨조차 멈추며 존재를 지웠다. 아나스타샤는 밖에 나가서 전화를 받으려다, 윤환의 그런 노력에 마음을 다잡으며 제자리에서 전화를 받았다.

"응, 아빠. 나 지금 부산에 있어."

[딸, 언제 돌아올거니? 네 언니랑 오빠들 지금 너 하나만 돌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단다.]

"원탁 출장이라고 했잖아? 일이 끝나야 돌아가지."

[설화공주 그 아가씨 SS등급 등록되었으니 이제 돌아와도 되지 않겠니? ...잠깐. 딸, 왜 카페에 있어?]

아나스타샤는 구두굽으로 땅을 짓눌렀다. 부친은 예상외로 감이 상당히 뛰어난 인간이었다.

[혹시 맞은편에 딸이 사랑에 빠졌다는 놈팡이가 있는 거 아니지?]

"......."

윤환은 한사코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하랑에 대한 입장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는데, 아나스타샤의 배경을 마주하기에는 심적 혼란이 컸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생각이 달랐다. 한 번 저지르기 시작하니, 아나스타샤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폭주기관차처럼 마음가는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맞아. 남ㅍ...남친이랑 같이 있어."

"루살카?!"

[방금 남자 목소리는 누구냐.]

수브로프의 표정은 서리가 내린듯 싸늘해졌다. 아버지로부터 받는 가운뎃 이름 조차도 아나스타샤가 '루살카'로 멋대로 개명을 해버린 만큼, 그는 그 미들네임을 부른 목소리에 화가 제대로 솟아올랐다.

그러나 곧장 수브로프는 기억을 곱씹었다. 어딘가 들어본 목소리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재빨리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끌었다.

"아빠 너무한 거 아니야? 언니 오빠들은 마음껏 자유연애하게 내버려두면서, 왜 나는 가만히 놔두질 못해서 안달인건데?"

[그, 그게 아니란다. 아나스타샤. 나는 네 선택을 존중해.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런 거란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잖니.]

"나도 이제 성인이야. 어른이라고. 아빠가 자꾸 나한테 이러면 나도 생각이 있어."

아나스타샤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초강수를 두었다.

"나 원탁 때려치고 한국에 눌러살 거야. 그러니까 나 찾지마."

뚝. 아나스타샤는 스크린을 내려버리고 태연한 얼굴로 잔을 들어올렸다. 윤환은 두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깊은 시름에 빠졌다.

"......그런 선택을 해줘서 고맙고 감사한데, 그 반대도 선택할 수 있었잖아. 루살카, 아무리 그래도-"

"착각하지마렴. 나한테 당신과 하랑이가 0순위기는 하지만, 지금의 내 가족도 그 다음으로 소중하단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에 뿌리를 내리려는 거야."

아나스타샤는 주변을 슬쩍 훑으며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라클의 예언, <멸망의 날>. 외계에서 온 괴물인 '성주'는 이 땅에 나타날 거란다."

* * *

"세상에. 그러면 달에 갈 수 있는 로켓을 만들어라고 한게 그런 이유였어요?"

유하가 입을 가리며 놀랐다. 나는 하랑의 등 위에 올라타 마사지를 하며 그에 대답했다.

"정확히는 '큐브'가 가장 많이 모인 곳으로 오는 거지. 그게 한국이었을 뿐이고."

"흐어어어어---"

하랑은 신음도 비명도 아닌 괴상한 소리를 내며 앓았다. 근육을 풀어주는게 아니라 마력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주는 마사지니, 이능력자라면 늘어지지 않고는 못 베길 마사지였다.

"왜? 너도 해 줄까?"

"......나중에요."

유하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인형이라면 몰라도 남이 제 몸을 만지는 건 꺼려하는 만큼, 알몸으로 마사지를 받는 다는 것에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언니야, 얘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진짜 잘하는,하앙?!"

"느끼지마라, 변태야."

"그, 그럼 거기는, 하으?!"

내 엄지가 하랑의 옆가슴을 꾹 눌렀다. 하랑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딱히 내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본인도 내 마사지에 얼마나 마력이 잘 움직이는지 알고있기에, 어떻게든 참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꿀꺽. 침삼키는 소리가 들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고객님. 진짜 외형이 여자라서 망정이지, 까딱 잘못하면 누가 엄한 짓 하는 줄 알겠어요."

"어차피 언젠가는 그 엄한짓보다 더한 것도 해야해. 정령의 힘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내는게 그거거든."

하랑이 놀라 몸을 돌렸다. 나는 그대로 하랑의 옆구리에 올라탄 형국에 인상을 찡그리며 하랑에게서 일어났다.

"그, 그거라면 내가 생각하는 '그거'?"

"당연히 [email protected]지."

하랑은 얼굴이 활화산처럼 들끓어올랐다. 나는 말려올라간 반바지를 잡아당기며 의자에 앉았다. 유하는 자세까지 바로잡으며 경청하는 기색이었다.

"싱크로는 결국 두 존재가 하나로 섞이는 거다. 자연히 마음따라 몸따라 움직이며 교합이 이루어지는 거지."

나는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붙인다음, 다른 손의 검지로 그 구멍을 푹푹 쑤셨다. 하랑은 아예 언어기능을 상실한 채 벗어둔 티셔츠로 제앞을 가리느라 정신이 없었고, 유하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내 설명을 듣고 있었다.

"꼭 지휘관의 재능을 가진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맞다. 그래서 정령을 가장 쉽게 SSS에 올릴 수 있는 자가 지휘관이지. 5년안에 전부 멸종되겠지만."

"네?"

유하가 사색이 되었다. 나는 곧바로 그 이유를 읊었다.

"간부들이 지휘관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죽이거나 폐인으로 만들었지. 근데 지휘관은 어디까지나 가장 빠른 길이고, 정령과의 싱크로는 결과적으로 이게 있어야 해."

나는 엄지와 검지를 비틀어 붙였다. 유하도 하랑도 모르는 눈치에, 나는 엄지로 심장을 가리켰다.

"사랑. 위대하고 진정한 사랑만이 세계를 구할 열쇠가 될 거다."

유하와 하랑은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나는 둘에게 사랑의 위대함에 대해 설파하며 그들을 설득하고자 했지만, 둘은 나를 잡상인 취급하며 집에서 쫓아냈다.

* * *

-말은 번지르르 하다는 거시야.

"틀린말은 아니지 않나."

창염은 난간에 놓인 케이크를 부리로 쪼았다. 먹지도 못하는 것을 자꾸 딱따구리처럼 찌르는 통에, 나는 짜증이 나서 케이크를 한입에 삼켰다.

우물우물. 딸기는 별로지만 후안의 케이크는 여전히 맛있었다. 창염은 만족한 얼굴로 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게 꼭 춤을 추는 것만 같아서 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딸기뷔페라도 가면 아주 난리가 나겠군."

- 뭐라고요?

"역시 너도 컨셉이었구나."

- 입 다물고 설명부터 하라는 거시야

"입 다물면 어떻게 설명하겠나."

창염은 내 기억을 읽어 게임 속 존재임을 자각했지만, 기억을 '읽었을 뿐' 직접 체험하지는 않았다. 나는 간단히 딸기뷔페가 어떤 곳인지 설명해주었고, 창염은 입에서 불꽃을 주륵 흘렸다.

"참 중증이군."

나는 난간에 걸터앉아 턱을 쓰다듬었다. 아직 이 세계에는 딸기를 메인으로 하는 뷔페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은유하에게 만들어달라고 부탁해볼까."

- 만약에 그러면 은유하라는 아가씨는 특별히 살려드릴게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창염의 부리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네 사랑이 그렇게 가벼운 거였나?"

- 제 삶의 1순위거든요? 이제 딸기 없이는 살 수 없는 영혼이 되어버렸다고요!

"0순위는 너고?"

내 말에 창염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무어라 연이어 물어보려던 순간, 창염은 불씨가 되어 모습을 감췄다. 무안해진 나는 난간에 그대로 누워 하늘을 올려다봤다. 태양이 뜬 위치로 보아 아직 1시도 지나지 않았다.

"5시까지 뭐하지."

청화단 애들이나 찾아볼까. 나는 그대로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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