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33화 (133/1,497)

〈 133화 〉외전3. 온천 여행 (1)

시작은 분명 그냥 간단한 인사치레였다.

"야, 내 SS된 기념으로 부산 놀러온나. 맘껏 사줄게."

원탁에서 방문한 오라클, 그리고 중국에서 차원문의 소강 상태를 정리하고 한국으로 온 가웨인의 공언하에 원탁에 새롭게 이름을 올린 한국 최강의 히어로, <설화령(雪花靈)> 석하랑은 우스갯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부산에 맛있는게 뭐가 있을까요?"

피닉스는 류천성이 주문한 민원을 처리하던 도중에 덕배에게 물었다. 간부들만 있을때를 제외하고 피닉스는 대외적으로 이전의 캐릭터를 유지하기를 고수했고, 덕배는 그에 역겨워하면서도 부산의 맛집을 찾아다녔다.

"야. 부산에 뭐 먹으러가려고 하는것 같던데, 니들 뭐 알고 있는 곳 있냐?"

덕배는 지화와 가을에게 의견을 구했다. 지화는 이신과 머리를 맞대고 청화단 간부들의 입맛에 맞는 맛집을 찾느라 밤을 세웠고, 가을은 이왕 부산에 가는 거 숙소까지 잡아 진탕 놀 계획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숙소 좋은 곳 있어?"

[바보에요? 부산에 유성이 가진 호텔이 몇 개인데.]

유하는 본격적으로 자신이 가진 호텔 중에서 가장 좋은 숙소를 수배했다. 호텔로 할까, 아니면 조용한 펜션으로 할까. 유하와 가을이 갑론을박하는 사이, 한창 회포를 풀며 한시도 떨어지지 않던 부부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예전에 기억나니? 남쪽 섬에서 방잡고 놀았던 거. 온천이란 거 진짜 좋았단다."

"6월 중순이었지. 아마 그 때 청소비 더 주고 나왔던 것 같은데."

부부의 의견을 참고한 유하는 제 숙소 이외에도 온천 여행을 염두에 두었다. 하지만 모비딕의 영향 때문인지 기존에 온천이 딸린 숙소는 모두 영업을 일시적으로 정지했고, 광검 부부와 유하는 호텔 조식을 먹으며 고민에 빠졌다.

"온천? 그거라면 내가 또 전문이지."

마침 조식을 먹으러 내려온 히메지 하야테는 자신들이 아는 온천을 추천했다. 유하가 선정한 온천들을 모두 반려한 하야테는 결국 저만 알고 있던 비밀스러운 장소를 공개하였다. 다행히 영업은 하고 있기는 했으나, 구체적인 날짜나 시간은 알지 못했다.

"응? 그게 무슨 문제있어? 해킹하면 되는 거 아냐? 전산 상에 예약받는 거면 내가 해줄게. 오빠 나 때문에 고생했는데 그 정도야."

히메지 히카리는 아주 간단히 해결책을 내어놓았고, 하야테는 이리 좋은 숙소를 내어준 보답으로 온천 예약을 맞겨만달라고 호언장담했다.

결국 이야기는 다시 거꾸로 흘러가, 청화단의 간부 회의에 정식 안건으로 올라가기까지 했다. 피닉스는 뜬금없는 바캉스 얘기에 고민을 하다가 아무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합대회 같은 거 하고 좋겠군."

의도치 않게, 청화단의 부산 워크샵이 잡혔다.

* * *

<2020년 6월 6일 오전 10시, 서면 Padre Juan.>

"내려오란다고 진짜 내려오네, 또라이가?"

"쉬러 온 거다. 멍청아."

피닉스는 딸기 스무디를 스푼으로 삼켰다. 제법 날씨는 더워져 벌써 주간 날씨가 28도에 육박하는 초여름이 되었고, 상대적으로 옷을 가볍게 입은 피닉스는 의자에 쓸린 반바지를 손으로 슬쩍 잡아당겼다. 석하랑은 각설탕을 잔뜩 녹인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물었다.

"그럼 니 어디서 자는데? 혹시 우리집에서 자고 갈 거가?"

하랑은 제법 기대하는 눈치였다. SS에 오른 이후, 하랑은 이제 피닉스를 악우처럼 살갑게 대했다. 물론 피닉스도 그 쪽이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더 낫다고 판단하여, 이전의 앙금을 다 털어놓았다.

"...그건 좀 그렇군."

하지만 차마 하랑의 집에서 자고 간다는 선택지를 입에 담을 수도 없었다. 하랑의 뒤, 구석 자리에 변장을 하고 마력까지 바닥으로 낮춘 저 푼수 부부를 두고 그 말을 하기에는 크나큰 용기가 필요했다.

부들부들. 남자가 케이크를 자르던 플라스틱 나이프에 금빛의 날이 서렸다. 맞은편 여자가 황급히 구둣발로 남자의 무릎을 찍었다. 잠시 스마트워치를 만지던 하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서 익숙한 마력이 느껴졌는데."

"나 혼자 온게 아니니까."

딸랑딸랑. 카페의 문이 열리며 익숙한 금발의 여인이 들어왔다. 더울텐데 정장 차림을 굳이 고수한 그는 피닉스의 옆에 앉아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었다.

"직접 만나는 건 오랜만이네, 하랑아."

"그러게. 유하 언니."

하랑의 말투는 살짝 차가웠다. 유하는 곁눈질로 피닉스를 노려봤고, 피닉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스무디를 마셨다.

"굳이 숨길 이유가 없어졌으니."

"그래도 마음의 준비는 하게 해줘서 고맙네요."

유하가 피닉스를 쏘아붙이려다 참고, 하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가능하다면 평생 숨기고 싶었어. 나도 너랑 척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냥-"

"사과했으면 됐다."

"......?"

오히려 유하가 당황했다. 태연하게 커피를 마시는 하랑의 태도에 피닉스가 혀를 차며 꾸짖었다.

"또 멋대로 남의 감정을 읽었군."

"대놓고 저렇게 풀풀 풍기는데 모르면 등신이지."

"......지금 무슨 얘기를?"

피닉스가 하랑과 저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SS등급 특권같은 거지. 저보다 낮은 경지의 이능력자의 본심을 읽는 '마음의 눈'같은 거다."

"그러니까 내는 언니야 들어올 때부터 속마음 다 꿰고 있다는 말씀. 뭘 그거 가지고 무릎까지 꿇을 생각을 하는데? 다 임마 잘못이지."

하랑이 얼음창을 만들어 쏘고, 피닉스가 불꽃을 피워 요격했다. 저 멀리있는 부부가 잠시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급작스런 상황에 유하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어.... 그러니까...."

"예전처럼 편하게 지내면 된다는 기다. 오해같은 거 다 풀렸으니까, 예전처럼 언니야는 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 상담하고 그러면 돼. 나 이제 나름 원탁 아이가."

하랑이 방긋 미소를 지었고, 유하는 울컥한 마음에 두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수십 수백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어떻게 하랑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전할까 고민했던 그 순간이 억울하면서도 다행으로 생각되었다.

유하가 제 감정을 추스리는 사이, 하랑은 제 몫의 케이크를 베어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곧장 단화의 끝으로 피닉스의 무릎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고보니 니 왜 구라치는데. 설월화는 개뿔. 더 지랄맞은 이명 붙었다 아이가."

"거짓말 아니다."

피닉스는 다른 다리를 펼쳐 하랑의 오금을 찔렀다. 하랑이 탁자 위에 주먹을 내려치며 고통을 감내했다. 피닉스는 저를 노려보는 부부에 따끔한 눈초리를 보낸 뒤, 스무디를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순서의 차이만 있을 뿐 둘 다 네 이명이다. 설화령이 먼저 나왔으니, 아마 네 신화 등급은 <설월화>가 될 거다."

"......내가 그 협회 높으신 분들한테 로비해서 바꾸면 안 되나?"

"운명이다. 받아들여라."

하랑은 머리를 두손으로 붙잡으며 침몰했다. 가까스로 제 마음을 다스린 유하는 평소와 같은 냉철함을 어떻게든 유지하려 애를 쓰며, 피닉스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그럼 저도 다른 이명 있어요?"

"......있다마다."

피닉스가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유하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경악했다.

"제가 진짜로...?"

"전 세계에 딱 11명있지. SSS급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피닉스가 하랑과 유하를 가리켰다. 하랑은 저를 이야기하는걸 금방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저멀리있던 부부도 숨을 죽인 채 귀를 쫑긋 세웠다.

'저 쓰레기가 하는 말이 진짜야?'

'아마도 그걸 말하는 거면....'

상-당히 신경쓰이는 말을 속닥거리고 있지만, 피닉스는 애써 화를 참으며 스무디를 입에 털어넣었다. 루살카, 아나스타샤는 창염과 마찬가지로 제게 그 어떤 정보도 줄 생각이 없었다.

"빨리 큐브를 하나 구해야겠군."

"큐브?"

"이계신의 코어 파편."

푸웃! 아나스타샤가 커피를 뿜었다. 후안에 의해 따로 만들어진 자리가 아니었다면 금방 하랑에게 들킬법 했다. 다행히 하랑은 속사포처럼 이어진 피닉스의 설명에 따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간단히 얘기해서 정령들 각성시키는 거랑 별개로, 따로 그걸 모아야 한다는 거?"

"지금 상황에서는. 원래라면 각자 여섯이 모든 큐브를 회수하고 여기서 모였겠지만...."

"그보다 더 일찍 활동하기에 따로 더 찾아야한다? 그러면 고객님, 혹시 소재지는 알고 계세요?"

피닉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랑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피닉스를 노려봤지만, 피닉스는 하랑의 무릎을 슬리퍼로 짓눌렀다.

"너 왜 눈을 그렇게 뜨냐."

"......칫, 그래. 알았다."

하랑은 두 손을 들며 항복 표시를 했다. 유하는 어딘가 석연찮은 눈치였지만, 더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딸랑딸랑. 다른 손님들이 들어오고, 피닉스는 황급히 목을 가다듬었다.

"일 얘기는 여기까지 하죠. 지금은 쉬러 온 거니까, 진짜 진하게 쉴 거예요."

"......너도 참 사서 고생한다."

"아무렴 사투리 안쓰려고 애쓰는 당신만 할까요."

"야, 나온나. 한 판 뜨자."

아메리카노를 한 번에 목구멍에 털어넣은 하랑은 벗어둔 카디건을 걸치며 목을 좌우로 꺾었다. 피닉스도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하가 초조한 얼굴로 주변을 훑었다. 카페는 평화롭기 그지 없었다.

"저, 여기서 싸우시면-"

"싸우기는 할 건데, 그거 아니에요."

"언냐도 참 잔걱정 많은 사람이네. 히히, 언니야도 같이 하자."

"...네?"

정령과 반인반령의 폭거에 유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 * *

<오전 11시, 유성백화점.>

"난 당췌 저것들을 이해할 수 없어. 어떻게 저렇게 하하호호 친하게 지내는 거지?"

덕배는 양손에 종이가방을 한가득 들고 짜증을 부렸다. 상대적으로 적은 가방을 들고있던 지화는 덕배의 투정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곧장 그를 부정했다.

"우리도 단장님한테 죽었는데, 지금은 그냥저냥 잘 지내잖아."

"그거야 너나 나나 목숨이 저당 잡혀있으니까 그런 거고. 저것들은 아니잖아."

약 30m 앞. 속옷 매장에서 어떤 속옷을 입을지 서로의 몸에 대어보며 깔깔 웃는 천가을과 유이신을 보며, 덕배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눈을 돌렸고 지화는 선글라스를 치켜 올렸다.

"천가을 심장에 화살 박은 거 이신 씨라고 했었지?"

"엉. 촉수꺼비 코어가 그 화살 구멍에 박혔잖아."

"그런데 어떻게 천가을은 싫은 내색도 안하고 이신 씨를 대하는 걸까?"

"낸들아냐. 우리가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덕배는 의자에 앉아 아무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봤다. 분명 이름만 워크샵이고 사실상 바캉스나 다름없는거라 들었는데, 이래서야 쇼핑용 카트가 되게 생겼다.

"류천성 그 노인네, 은근슬쩍 이럴 줄 알고 빠져버렸어. 쳇."

"...부산에 아는 사람있다고 만나러갔잖아. 우리랑은 다르지."

"그래봐야 옛날 국회의원 시절 지인 아니겠냐. 어휴. 제임스 이 놈은 또 어디갔대?"

"몰라. 젠장, 개소리하면서 사라질 때부터 눈치챘어야했는데."

여자들의 쇼핑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이야. 덕배는 시계를 확인하며 눈쌀을 찌푸렸다.

"5시에 모이기로 했는데, 그 전에는 끝나겠지?"

* * *

"이신아, 이거 피닉스한테 어울릴 것 같지 않아?"

가을은 연하늘색 레이스가 달린 속옷 세트를 집어들었다. 이미 사이즈는 눈대중으로 파악하고 있는지 오래였다. 이신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가을 님의 선택은 탁월합니다. 하지만 저는 거기에 이걸 추천드리고 싶군요."

이신이 옆에 걸려있던 란제리를 집어들었다. 회백색 반투명한 란제리가 속옷 위에 올라가자, 가을은 굵은 침을 꿀떡 삼키며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이건 너무 과감한 거 아닐까?"

"아닙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신께서 이 끝을 잡고 양손으로 살짝 들어올리며-"

이신은 입술로 무언가를 무는 포즈를 취했다.

"제 앞을 보라는듯,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말입니다."

불끈. 가을은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려 원피스 아래 겨우 묶어둔 촉수가 풀어헤쳐질 뻔 했다. 이신의 자극은 계속되었다.

"그러면서 이제 가을 님의 그 거대한 기둥에 살포시 올라타는 그 분의 자태를! 가을 님이 하는게 아닙니다. 신께서 '스스로' 다가오도록 만드는 겁니다."

이신의 열정적인 태도에 가을은 고개를 끄덕이며 둘 다 챙겼다. 딱 한 벌, 가장 고뇌하던 문제의 물건을 고르는데 성공한 가을은 시계를 확인하며 절로 초조해졌다.

"안 돼,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5시 전에 다 사야 한다고...!"

"큭, 돈은 넘쳐나는 데 시간이 이렇게 부족할 줄이야...!"

마음껏 긁으세요. 백화점 주인의 허락을 받은 두 여인은 거리낄 것 없이 미친듯이 옷들을 고르고 골라 쓸어담았다.

시간은 아직 11시 10분.

그들의 전투는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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