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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32화 (132/1,497)

〈 132화 〉외전2. 어느 곳의 이야기

야심한 시각. 정장 차림의 두 남자는 언제나처럼 포차에 들어와 술을 주문했다. 사장은 단골이자 가게 매출의 일등 공신인 둘에게 언제나처럼 그들이 선호하는 주류를 제공했고, 남자들은 술을 물처럼 들이켰다.

"일하고 나서 마시는 술은 언제나 좋군."

길게 수염을 늘어 뜰인 남자가 기쁜 숨을 내뱉었다. 물고기를 닮은 남자는 안주로 나온 강냉이를 씹으며 빈정거렸다.

"밑에 애들한테 시켜놓고 일하기는 무슨."

"사장이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지. 회사 이름부터 내 이름이잖나."

수염의 남자는 껄껄 웃으며 지갑 속 명함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어인(魚人)은 그 자랑이 같잖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잔을 채웠다.

"아주 신났네, 신났어. 언제까지 이 짓을 계속하게 될지도 모르면서."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더군. 어쩔 수 있나? 회장님 지침이 그러한 것을."

"분명 올 클리어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나오면...이었나?"

"그렇지. 벌써 1년도 넘었지만."

두 남자는 술을 마시며 잠시 침묵에 빠졌다. 개발 기간까지 포함하면 족히 몇 년을 이 회사에 묶여버린 지 모른다. 어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슬슬 의심하고 있어. 올 클리어가 사실 불가능한 거 아니냐고."

"우리는 모든 힌트를 줬다. 그 힌트를 받아먹지 못하는 건 인간들이야."

"그 힌트라는 거, 내가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어인이 관자놀이를 검지로 문지르며 말했다.

"평범한 인간의 사고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짓 아닐까?"

"그럴 리가 없다. 그 새...흠흠. N 이사님이 직접 선정한 조건이니 인간들이 그걸 하지 못하지는 않을 거다. 우리 중에는 인간들에 대해서 제일 잘 알고 있으니."

"하 씨.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아 참, 그 올클리어 했다는 사람은 아직도 안 나타났어?"

수염의 남자가 대놓고 인상을 찡그렸다.

"바로 계정이 삭제됐다. 망할.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누군지 찾으면 되잖아. 서버에 데이터는 남아있을 테니까 IP 해킹해서 어디 사는지라도 알아내면-"

"회장님이 싫어하세요~ 그러면. 이사회에서 넘어가기로 한 걸 왜 굳이 언급하실까?"

둘이 앉은 테이블에 깡마른 체구의 남자가 나타났다. 천장에 닿을 정도로 장신의 남자는 피부부터 옷까지 전부 검은색이었다. 수염의 남자와 어인은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지만, 차마 그에게 자리에서 비켜달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여긴 어쩐 일로?"

"우리 사장님이랑 부사장님을 위로하고자 들렸죠. 우흐흐. 자, 저도 한 잔."

"당신에게 줄 술은 없는데. 알아서 시켜먹던가."

어인이 비꼼에도 검은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병목을 손으로 잡고는 병나발을 불며 술을 들이켰다. 이미 한잔을 걸치고 오기라도 한 듯, 검은 남자는 제법 취기가 솟아있었다. 수염의 남자는 명치까지 내려오는 긴 수염을 쓸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외군. 네가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실 일이 있다니."

"저도 술 정도는 마신다고요~ 이번에 올 클리어한 사람 찾는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흑흑, 결국에는 나타나지도 않았어요."

다 큰 남자가 우는 척 하는 것에 수염과 어인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피곤함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시는 거지, 저 광인에게 휘말려 정신력이 깎여나가는 건 사양이다. 어인이 안주로 나온 오징어다리를 질겅이며 비꼬았다.

"네가 못 찾는다니, 웃기지도 않네. 안 찾는 거 아냐?"

"설마요!"

검은 남자는 손사래를 치며 화들짝 놀랐다.

"회장님이 얼~~마나 올 클리어 하신 분을 찾고 계신 데 제가 감히 근태를 하겠어요? 자그마치 현상금 2,000억을 거셨는데."

수염의 남자가 제 수염을 여러 갈래로 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부터 느낀 건데 말이지, 액수가 너무 작지 않나? 모처럼 우리가 '직접' 만든 건데 억 단위는 너무 적잖나. 조 단위로 했어야지."

"미쳤어요?"

검은 남자가 정색했다.

"안 그래도 회장님한테 사정사정해서 깎은 게 그거예요. 그나마도 회사에서 직접 건게 아니라 차명으로 지급한다고 해서 이사회 통과 된 거고."

"회장님 배포가 고작 이천억밖에 안 된다는 거네."

"......술을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취했군."

잔뜩 빈정거리는 어인을 수염의 남자가 황급히 제지했다. 눈앞의 검은 남자는 이사인 동시에 회장의 뜻을 그대로 전달하는 직속 비서. 고장 사장과 부사장 자리에 '임명'을 받은 그들은 언제든지 회장의 손가락질 한 번에 사라질 수도 있는 존재들이었다.

검은 남자는 베시시 웃으며 병나발을 불었다.

"역시 당신들도 아직 멀었네요. 인간의 사고로 생각하기에는 아직 하아아안참 멀었어요."

"멋대로 인간의 몸에다가 쑤셔박은게 누군데."

"이왕 온 김에 물어보자. 진짜 이거 언제 클리어되냐? 회장님이 싫증이 나셔야 우리도 이 짓을 이제 더 안할 거 아냐."

"글쎄요? 요즘 회장님 재밌는 거 보시느라 한창 정신없으시던데."

검은 남자는 입을 막으며 쿡쿡 웃었다. 수염과 어인은 직감했다.

"또 뭔가를 저질렀군."

"이번에는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에이, 사고라니요. 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검은 남자는 손날을 세워 좌우로 흔들었다.

"저는 언제나 회장님의 즐거움을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요."

"그래. 그래서 회장님은 아직 질리지도 않으셨나? 게임 회사 차리신 거에 질리시면 언제든지 다 때려치우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아직요? 회장님은 언제나 올 클리어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고 계세요. 다만...."

검은 남자는 대놓고 음흉하게 웃었다.

"언제 그 올 클리어한 플레이어가 나올지는 모르겠네요?"

'저질렀군.'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질렀어.'

수염과 어인은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물론 그것도 검은 남자는 금방 눈치채고 목놓아 울었다.

"술자리에서 자기들끼리만 눈빛을 주고받고오오!! 아이고, 사장이랑 부사장이라는 것들이 이사 괴롭히고 아주 말세야, 말세!"

"솔직히 얘기해라."

"너, 뭔가 하긴 한 거지?"

수염과 어인의 추궁에 검은 남자는 정색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점점 심각해지는 둘의 표정에 검은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부정하지는 않을게요. 하지만 말입니다."

검은 남자는 검지를 입술에 붙이며 낮게 웃었다.

"이 모든 것은 우둔하신 우리 회장님을 위해서라고요. 그러니 묻지도 말고 캐내려 하지도 마세요. ...알겠나?"

검은 남자가 제 존재감을 드러내자 수염과 어인은 이성이 순간적으로 마비되었다. 흠칫하는 둘을 본 검은 남자는 표정을 풀고 까르르 웃으며 술을 더 주문했다.

"아하하! 그렇게 겁 먹지 마요. 누가 잡아먹는다나? 우리 회장님 기쁘게 해준 1등 공신 둘을 제가 치하해도 모자랄 판에!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제가 삽니다!"

"...안 사면 크게 실망할 뻔 했어. 일단은 오늘 먹고 죽지."

"오랜만에 메뉴판 싹다 시킬까? 아, 이사님. 울 애기들 지금 야근하고 있는데 걔들도 지금 불러도 돼?"

"......잠깐 전화 좀."

검은 남자는 울상을 지으며 제 지갑을 테이블위에 올렸다. 검은 남자가 사라지자마자 곧장 수염과 어인은 그 누구도 듣지못하게 복화술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쩌냐, 이제. 회장님 전용 창구가 저러고 있는데.'

'대표 이사님한테 여쭤볼 게.'

어인이 흠칫했다.

'네 조부님?'

'......일단 모르지는 않으실테니.'

둘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당장은 밖에서 전화로 굽신거리는 검은 남자의 비위를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수염의 남자는 탁자 위 제 명함을 손으로 구겨버리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얼핏 튀어나온 명함의 직함에는 '(주) 크툴루'의 사장이라는 문구가 박혀있었다.

* * *

"거지같은 인어놈들. 이번 달 월급 다 털어갔네."

검은 남자는 제 스마트폰에 찍힌 카드값을 보며 가게에서 들고 나온 술을 병나발째 들이켰다. 야근으로 지친 좀비들은 걸신들린 괴물처럼 술과 안주를 먹어치웠고, 결국 메뉴판을 한 바퀴 돌리기는 커녕, 포차의 재료를 전부 거덜내며 가게를 강제로 폐점시켰다.

"뭐, 내 돈도 아니지만!"

애초에 그룹의 이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자신은 금전에서 가장 자유로운 입장이 아닌가. 이런 일이 있을까 싶어 법인 카드로 긁었다.

"내가 산다고는 했지, 내 돈으로 산다고는 한 적 업거든. 으히히."

아마 내일이면 사장 전화기에 직통으로 전화가 갈 것이다. 검은 남자는 검게 빛나는 제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비틀비틀 인도를 걸었다.

"......어?"

개인 카드였다.

검은 남자의 온 몸을 지배하고 있던 취기가 한 순간에 싹 가셔버렸다.

"......."

본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실수였다. 검은 남자는 자신이 인간의 육체에 너무 심취하여 '인간다운'실수를 하게 된 것에 미소를 지었다. 카드값으로 얼마나 긁었는지에 대해서는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으흐흐, 흐흐흐."

검은 남자는 실성한 사람마냥 광소를 흘리며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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