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30화 (130/1,497)

〈 130화 〉IF Route, Normal Ending. 13-A

IF Route는 본편과는 관계없는, 본편에서 파생된 가상의 시나리오입니다.

보시는 분에 따라서 불쾌감이 들 수 있으니, 본편을 보실 분은 다음 장으로 바로 넘어가셔도 내용 이해에 문제가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캐릭터 붕괴도 있을 수 있으니, 유념하여 주십시오.

머릿속에서 자꾸 방해하는 창염을 불러내기 직전, 스마트워치가 빛을 내며 시끄럽게 울렸다. 뇌 속에서 조잘거리는 소리보다 더 시끄러워, 나는 짜증을 잔뜩 머금은 목소리로 응답했다.

"이 새벽에 무슨 짓이에요?"

[그야 니가 연락도 안 받으니까 그러지. 봐봐라. 내는 니가 준 머리핀 항상 하고 자는데, 니는 지금 내가 준 배지 안 차고 있다 아이가.]

쓸데없이 눈썰미도 좋다. 나는 혀를 차며 책상 위에 올려둔 배지를 손으로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옷 갈아입으려고 따로 빼둔 거예요."

[구라치지 마라. 내가 30분 전부터 계속 불렀는데 아무런 반응도 없더구만.]

30분 동안 꾸준히 연락한 것에 감탄을 해야 할 까, 아니면 바로 전화를 하면 됐을 것을 두고 시간을 허비한 것에 멍청하다고 딴지를 걸어야 할까. 어느 쪽이든 답은 하나였다.

"그래서, 왜 전화한 거예요?"

[보고 싶어서?]

"......."

[.......]

서로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네 시 오십 분. 밤을 새운 인간이 새벽녘에 가장 감수성에 젖기 쉬운 시간이었다. 나는 서서히 요동치기 시작하는 마력을 애써 진정시키며 따지고 들었다.

"잠이나 자세요."

[......아니, 그냥 해 본 소리기는 한데.]

석하랑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고는 곧장 빈백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일단 내려온나. 내도 지금 억수로 머릿속이 복잡하니까, 니나 내나 제일 쉬운 방법으로 해결하자.]

"쉬운 방법?"

석하랑이 두 주먹을 들어올리며 싱긋 웃었다.

[내 SS된 기념으로 스파링 함 뜨자, 이 빙구야.]

"......흐흐흐, 흐흐흐흐."

아무래도 조금 강해졌다고 눈에 뵈는게 없는 모양이다. 나는 광검에게서 인계받은 석하랑의 스승이라는 입장으로서, 이 아둔한 제자에게 사랑의 매를 또 들어야 될 때가 된 것 같았다.

"10분만 기다려요. 내가 당장 날아갈...."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굳이 지금 여기서 서울까지 날아갈 필요는 없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마력을 움직여 전이했다.

석하랑의 머리핀에 박아둔 미니 피닉스로.

"왜? 내가 두려운으갸아악?!"

나는 석하랑의 머리를 맨발로 밟고 석하랑의 방에 들어왔다. 분명 지난번에 정리하고 갔는데 제멋대로 벗어둔 옷가지와 쓰레기들이 바닥에 널브려져 있다. 석하랑은 정수리를 쓰다듬다가 나를 보고 놀라 삿대질했다.

"니, 니니니, 니 유령이가?!"

"정령인데요. 으...."

나는 발에 걸린 브레지어를 집어들었다. 천 모 덕분에 이제는 손대중 만으로도 사이즈를 가늠할 수 있었다.

"AA?"

"느아아아아아!!"

석하랑은 정체모를 괴성을 지르며 내 손에 들린 제속옷을 빼앗아 씩씩거렸다. 그러길래 누가 또 방 엉망으로 하고 살라나. 나는 손가락에 아주 작은 불꽃을 생성해 석하랑에게 튕겼다.

"제발 정리 좀 하고 살-"

카앙! 이마에 닿기 직전, 불꽃은 얼음의 벽에 막혀 소멸했다. 석하랑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흥! 세계 최강의 히어로가 이 정도쯤이야! 깔보지 말그라, 내 이제 원탁이다!"

"네네, 세계 최강의 히어로님. 그럼 어디 자웅을 겨뤄보기 전에."

나는 구석에 있던 옷 무덤을 발로 걷어찼다. 빨래는 해놓고 아직 개지 않은 티셔츠와 속옷들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이것들 불태워버리기 전에, 당장 정리부터 하시죠?"

"......지가 내 마누라도 아니면서."

입술을 부루퉁내밀며 툴툴거리는 석하랑의 입에 팬티를 내던졌다. 차마 제 것을 망가뜨릴 수는 없었는지 순순히 다가와 옷을 개기 시작했다. 아니, 갠다기 보다는 차곡차곡 쌓아 옷장에 대충 쑤셔넣으려 했다.

"......잠깐만. 속옷을 그 따위로 정리한다고요?"

결국에는 열받아서 내가 다 정리해줬다. 결국 석하랑이 화장실에서 샤워하고 외출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석하랑의 집에 늘어진 적들과 재전을 벌여야 했다.

약 한 시간 뒤, 우리는 아침 산책을 나섰다.

* * *

"야아아아아아아!"

석하랑은 괴성을 지르며 육탄공격을 감행했다. 온몸에 얼음을 두르고 막무가내처럼 돌진하는 공격에 피닉스는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미친!]

"이기면 장땡이지!"

피닉스가 재빨리 불길을 둘렀다. SS등급에 오르면서 마력의 농도가 짙어진 탓에, 쉽게 대처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힘이 부족하면-"

석하랑이 전면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마력을 분사시키며 날아오는 얼음창은 피닉스가 두른 불길의 벽을 간단히 뚫어냈다.

"더 힘을 주면 되지!"

[애가 단순무식해졌어.]

피닉스가 도발해보지만 석하랑은 아랑곳도 하지 않고 제가 계획한 대로 공격을 퍼부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얼음창은 이제 피닉스 주변에 위성처럼 도는 불꽃을 요격했고, 그 틈바구니로 얼음 나비들이 날아가 피닉스의 움직임을 늦췄다.

갑주에 달라붙는 얼음 나비들에 피닉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렇게 말해도 학습능력은 없었다.

[소용없-]

차락. 얼음 나비들이 갑주에 닿는 순간, 물로 변해 갑주에 들러붙었다. 물은 갑주에서 흘러내려 갑주 사이, 피닉스의 불꽃몸에 닿았다.

치이이익---!

[...과연. 이건 꽤 아프군.]

피닉스는 물이 닿은 왼쪽 손목을 깔끔하게 잘라냈다. 건틀릿이 떨어져나가고 불꽃의 손은 석하랑의 얼음 나비들에 의해 게걸스럽게 먹혔다.

화륵! 다시 몸을 재생시켰지만, 잘려나간 갑주는 돌아오지 않았다. 막 공격을 이어가려던 석하랑이 눈에 이채를 띄었다.

"와 그건 재생 안 하는데?"

[괴인형의 갑주는 이계, 테라의 오염된 마기를담은 흔적이다. 착용자의 정신을 타락시키는 마갑 정도로 생각해라.]

"뭐? 그라믄 니 지금-"

석하랑이 마력까지 거두며 걱정하는 눈치에, 나는 재생시킨 왼손 위에 마력을 일으켜 다시 갑주를 복구시켰다.

[다른 간부들의 이야기고, 나는 해당 사항이 없다. 이미 마갑의 오염된 마기는 정화했고 이제 더는 정신을 오염시키지 않아.]

"그러면 이전에는 정신이 오염됐다는 얘기가?"

[의미없는 대화는 여기까지. 모처럼 당했으니 게임을 하나 해볼까.]

피닉스는 일부러 왼손의 건틀릿을 해제하고 손을 들었다.

[네가 내 몸을 전부 꺼버리는 날, 네 소원을 하나 들어주도록 하지. 그 정도는 되어야 네 의욕도 솟아날 것 같으니.]

"하, 의욕?!"

석하랑이 머리칼을 흩날리며 하늘에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켰다. 일격에 갑주를 없애버리려 하는 의지가 엿보이자, 피닉스는 양손에 마력을 모아 합장하듯 하나로 합쳤다.

"의욕 같은 건 예전부터 만땅이었거든?!"

[여전히 다급해.]

상극의 두 마력이 부딪히며, 피닉스가 쳐둔 결계가 부서졌다.

* * *

2022년, 어느 여름날의 부산.

"자, 벌칙입니다. 오늘은 콜드브루에요."

"시럽, 하다못해 시럽이라도 넣어줘...."

하랑은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녹초가 되었다. 나는 카페의 사장, 후안에게 눈짓으로 조각 케이크를 가리켰다. 이미 수도 없이 이 가게에 드나들어 매상을 책임지는 우리 덕분에, 후안은 이제 눈빛만으로 어떤 메뉴를 원하는지 눈치채고 재깍재깍 직접 가져다주기까지 했다.

"고마워요. 아참, 혹시 신서울로 옮길 계획 어떻게 됐어요?"

"고객님들 덕분에 이 자리에서 계속 영업을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오늘 것도 장부에 달아둬요."

매번 와서 계산하는 것도 귀찮아서 아예 장부를 만들어뒀다. 후안은 콧노래를 부르며 검은 노트를 꺼내 오늘 마실 메뉴들을 정리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파르페를 스푼으로 크게 펐다. 단골이 된 이후부터 후안은 신메뉴의 감상을 우리들에게 부탁하고는 했다.

"아----"

내가 파르페를 입에 넣으려던 순간, 하랑이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나는 언제나처럼 초콜릿 시럽이 올라간 아이스크림을 하랑의 입에 살포시 넣었다.

"하움."

하랑은 베시시 웃으며 내 스푼을 입술로 쓸었다. 살짝 들어간 스푼에 남은 아이스크림 위로 하랑의 입술이 스친 자국이 남았다.

"......."

"와. 인자는 그런 거 신경 안 쓸 때 안 됐나?"

하랑은 새침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파르페를 퍼서 한 입 크게 떠먹었다.

"그냥 옛날 생각나서요. 그 때는 같이 침도 섞이기 싫다면서 따로먹었잖아요."

"벌써 2년도 전의 이야기를 왜 하는데. 그때랑 내가 얼마나 많이 변했다고."

하랑이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2년의 세월이 지나며 봉긋 솟아오른 가슴은 소심하게나마 제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 봐야 B잖아요."

"...누가 더 만져주면 더 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근거 없는 낭설이에요. 만진만큼 커졌으면 당신은 지금 천가을보다 더 커졌을걸요?"

"......아니, 그 언니야만큼 커지고 싶지는 않다. 내는 어느 정도가 좋냐면...."

석하랑이 음흉한 눈빛으로 내 가슴을 노려봤다. 나는 그 눈빛에 콧방귀를 뀌며 손가락을 튕겼다. 전신이 불꽃에 휩싸이며 시선이 높아졌다. 석하랑이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뿜었다.

"내가 공공장소에서는 마음대로 변하지 말라고 했다 아이가!"

"여기가 공공장소냐. 사장님이랑 우리 둘밖에 없는데."

나는 후안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후안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와 우리 앞에 두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눈치에 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군. 정조의 위협을 느껴서 말이야."

"아뇨. 편한 대로 계셔도 됩니다. 두 분 오시는 날은 전세니까요. 그보다...."

후안이 게슴츠레 한 얼굴로 내 왼손을 내려다봤다. 나는 그제야 후안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렇게 됐다."

"축하드립니다, 석하랑 님. 드디어 이기셨군요."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키던 하랑이 손으로 브이자를 만들며 웃었다. 하랑의 왼손에는 파랑새 모양의 반지가 왼손에 끼워져 있었다.

"히히. 몇 번이나 졌는지 모르겠는데, 드디어 이겼어요."

"...설마 그런 소원을 말할 줄은 몰랐지."

나는 왼손으로 턱을 괴었다. 유리잔에 비친 내 왼손 약지에는 흰나비 모양의 반지가 끼워져있었다. 후안이 빈 그릇을 치우며 물었다.

"그럼 두 분, 청첩장은 언제 주실 겁니까?"

"......."

하랑의 얼굴이 벌게졌다. 나는 고개숙이며 우물쭈물하는 하랑에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후안에게 땅을 가리키며 그의 질문에 답했다.

"스몰 웨딩을 하려고 하는데, 장소를 아직 정하지 못했어. 그래서 하나 부탁을 좀 하려고 하는데...."

* * *

"그래서 왜 공공장소에서는 변하지 말라고 한 거예요?"

나는 하랑의 위에 누워 천장의 프로젝터를 보다가 물었다. 빈백에 누워 나를 인형처럼 껴안고 있던 하랑은 잠시 우물거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너 못생겼으니까 얼굴 밖에 내놓고 다니지 말라고."

"그건 좀 상처받는 말이네요. 그런데 왜 그런 분이 남성형으로 할 때는 얼굴 못 처다보고 얼굴을 그렇게 붉히실까?"

"......입 다물어라."

하랑이 내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나는 하랑이 원하는 대로 손가락을 핥아주며 천장의 영상을 가리켰다.

"할짝. 가을 씨 대단하지 않아요? 다시 스크린 나오겠다고 결국에는 SS 돼서 촉수 다 떼는데 성공했잖아요."

"난 저 언니야 무서워 죽겠다. SS 되고 나서 자꾸 너 내놓으라고 싸우자 칸다 아이가."

"질 생각도 없으면서. 츕."

"내가 미쳤다고 지겠냐. 히어로, 빌런, 정령 통틀어 세계 최강 석하랑인데."

하랑은 내 입에서 손가락을 떼고 내 배를 감싸 안았다. 서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라, 하랑의 차가운 손가락이 내 배를 쓸면서 한기가 전해졌다.

"...좋으시겠어요. 저보다 먼저 싱크로 성공해서."

"흐흐흐, 닌 이제 내 평생 못 이긴다."

나는 배를 간질이는 하랑의 손길에 저항할 수 없었다. 이미 하랑은 스스로 신화의 경지에 이르러 신위(神位)에 도달했고, 그 친화율 100%의 단계는 아직 나도 도달하지 못한 곳이었다.

"흥. 아직 성주 오려면 3년 남았거든요?"

"지금 내 혼자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건 맞긴 한데, 누누이 말하지만 혼자 싸우는 건 위험하다고요. 당신은 경우가 다르잖아요. 만약에 성주한테 세뇌당하기라도 하면-"

"그때는 니가 나를 죽이는 거지. 반대의 경우면 내가 니를 죽이는 거고."

서로의 심장이 공명하듯 박동했다. 나는 하랑의 심장에 창염을 박아넣었고, 하랑은 내 코어에 제 빙정(氷精)을 집어넣었다. 서로가 손가락만 까딱거려도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위험천만한 행위임에도 하랑은 굳이 고집을 부렸다.

"네 안의 그 가스나가 언제 튀어나올 지 모르는 거 아이가. 금마는 아직도 삐져가지고 안 나올라 카나?"

"몰라요. 뭐때문에 삐진건지 이제는 말도 안 걸어 오더라고요."

정령인 창염이 도와주기만 한다면 나도 신화에 이르러 이계신과 싸울 수 있을텐데, 하랑이 먼저 신화에 도달한 이후로 창염은 아예 입을 닫아버린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랑은 무언가를 아는 눈치였지만 결코 이야기를 하려 들지 않았다.

"솔직히 얘기해요. 둘이서 뭔가 얘기했죠?"

"...니는 몰라도 되는 얘기다. 궁금하면 내랑 싸워서 이겨보던가. 그럼 답해줄게."

"와, 진짜 나쁘다. 이제는 자기가 무조건 이긴다고 망발을 하네."

"꼬우면 지속성으로 태어나지 그러셨어요?"

나는 몸을 뒤집어 하랑과 눈을 마주했다. 게슴츠레 한 내 시선에 하랑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닫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침대 위에서 싸우는 건 논외다! 그건 반칙!"

"칫."

나는 하랑의 가슴 사이어 얼굴을 묻고숨을 부르르 뱉었다. 하랑은 깔깔 웃으며 내 머리를 부여잡으며 흔들었다.

"그만, 그만해라. 그건 진짜로 알려줄 수 없는 거다. ...그래. 절대로. 내가 죽는 한이 일어도 알려줄 수 없어."

하랑의 눈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원래 이런 히로인이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고집 하나 만큼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괜히 심술이 나서, 나는 마력을 일으켜 성별을 바꾸었다.

"......저기여? 아직 가을 언니야 드라마 안 끝났는데?"

"괜찮아. 나중에 다시 보기로 나머지 보고 감상 알려주면 돼."

커질 대로 커진 하초가 하랑의 아랫입술 끝을 살짝 갈랐다. 하랑은 한숨을 푹 내쉬고 팔을 들어 내 목을 감싸 안았다.

"예전에는 죽어도 하기 싫다고 하더니만."

"먼저 하고 싶다고 한 건 너잖나."

나는 스크린을 가리켰다. 이미 하랑의 손에 프로젝터는 전원이 꺼져있었다. 하랑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럴 때는 그냥 모른 척해주는 기다, 등신아."

"지는 싸움에 도전하는 건 여전하군. 좋아. 예전 생각나니까, 이 싸움에서 이기면 소원을 하나 들어주도록 하지."

"흐흐, 니 그카다 나한테 코 꿰인 거 기억 안 나나? 이 싸움은 평생 가는 거 알제?"

"걱정 마라. 넌 침대 위에서만큼은...."

나는 하랑의 목을 끌어안아 입술을 맞췄다.

"나 절대 못이겨."

* * *

2026년 10월 13일. 부산 서면 후안의 카페.

우리는 성주를 쓰러뜨렸다.

성주와의 싸움으로부터 벌써 10개월이 지났다. 비록 이계신을 불러내 이기지는 못했지만, 나와 하랑을 주축으로 한 정령들은 성주를 간신히 이겨내고 세계의 평화를 되찾았다.

그리고 나는 이제 또다른 전투를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부담되면 말 해라. 내가 대신 입어줄게."

"됐어요. 당신 나 못생겼다고 밖에 내놓기 싫어하잖아. 흥."

"아니, 그 때 그건 농담이었고! 니 남자 모습으로 턱시도 입고 나타나면 언니야들 또 난리칠게 뻔한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냐?!"

"난 네 웨딩 드레스 입은 모습을 보고 싶은데."

내 말에 하랑이 얼굴을 붉히며 머리핀을 매만졌다. 그 날, 창염을 불러내려다 하랑에게 넘어간 이후로 새로 만들어준 머리핀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하랑의 머리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 그러면 있다 아이가...."

턱시도를 입은 하랑이 내 귀에 슬쩍 속삭였다.

"하와이 가서, 니는 턱시도 입어라. 내가 드레스 입어줄게."

"......콜."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나는 하랑의 넥타이를 잡아당겨 입술을 맞췄다. 하랑은 그대로 눈을감으며 혀를 집어넣으려다, 뒤에서 나타난 우악스러운 손길에 그대로 신부대기실에서 쫓겨났다.

"어, 엄마?! 내 좀만 더 있자!"

"신부 대기실에 신랑 들어오는 거 아니란다. 얘들아, 얘 좀 데려가렴."

아나스타샤에 의해 강제로 옮겨진 하랑은 유하와 가을에 의해 연행되었다. 나는 질질 끌려나가는 하랑에게 손을 흔들어주다가 옆에서 찌르는 듯한 시선에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미안?"

"내 딸을 어떤 놈팡이가 채가나 싶더니, 어휴. 정말. ...나도 이해는 하니까 뭐라고 말은 못 하겠는데...."

"똑같은 마음 아니겠어요? 당신도. ...그리고 나도."

"허윤환 피에 정령 후리는 유전자라도 있나? 진짜 어이가 없어서."

아버지는 물의 정령을 취하고, 그 딸은 불의 정령을 취했다. 아나스타샤는 질린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싸우다 정든다더니, 진짜 그럴 줄은 몰랐단다. 혹시 자식 낳으면 딸이길 바라렴. 아들 낳으면 이모라는 것들이 주야장천 노리고 있을지 모르잖니."

"부정은 못 해서 슬프네요."

아나스타샤와 나는 쿡쿡 웃으며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아주 극소수의 인원만 초대해 후안의 카페에서 하는 결혼식이라, 일부러 대기실에 찾아오는 이들은 없었다.

"그런데 진짜로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겠니?"

아나스타샤가 내 화장을 고쳐주며 물었다. 나는 눈을 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나스타샤는 내가 머리에 쓴 베일을 정돈해주며 재차 물었다.

"왜 네가 웨딩 드레스를 입고 하랑이라 턱시도를 입은거니? ...제법 어울리기는 한다만, 너 일부러 남성체도 연구해서 바꾸는데 성공했었잖니."

"......하랑이가 비밀로 하랬는데."

어머니니까 알려줘도 상관없겠지. 나는 아나스타샤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하고는 아주 작게 그의 귀에 속삭였다.

"사실...."

"......석하랑, 이 미친 가스나가?!"

내 말을 들은 아나스타샤가 곧장 석하랑을 찾아가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나는 그 촌극에 큭큭 웃으며 결혼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 * *

"그래서 나를 왜 신부측 아버지로 부른 거냐."

조덕배는 어울리지도 않는 정장에 어색해하며 툴툴거렸다. 나는 면사포 아래에서 씩 웃으며 대답했다.

"재밌잖아요. 그렇다고 신부가 혼자 걸어갈 수도 없고."

"아니, 신부인 건 떠나서.... 하, 진짜."

덕배는 머리도 없으면서 머리를 긁적거리며 난감해했다. 주례야 유경험자인 류천성이 서주기로 했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나는 굳이 조덕배가 나를 잡고 하랑에게 인도해주기를 선택했다. 덕배는 곁눈질로 신부측에서 질시의 눈초리를 보내는 여자 둘을 가리켰다.

"야. 저기 봐봐. 눈빛만으로 나 죽이려고 하는 거."

"죽으세요. 다시 살려줄테니까."

나는 슬쩍 천가을과 은유하에게 손을 흔들었다. 둘은 애써 웃고 있지만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나는 왼손을 덕배에게 건넸다.

"그날, 당신 괴인으로 안 만들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고마웠어요, 지금까지 여러모로."

"낯간지러운 소리 마라. ...뭐, 아무튼 축하한다."

그 말을 끝으로 우리 둘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류천성의 인도하에 나는 바닥에 깔린 카펫을 따라 걸어가 석하랑의 옆에 섰다.

둘 다 정신은 없었다. 그저 손을 꾹 잡고 있는 것만으로 행복할 뿐이었다.

"그럼 신랑 신부, 맹세의...키스를...."

류천성이 말을 흘렸다. 나와 하랑을 번갈아보며 난감해하는 게 상당히 눈에 띄었다. 살라딘은 아예 제 눈을 손가락으로 찔러 눈을 감아버렸다.

"......와 안 하는데요? 퍼뜩 합시다, 어디 한 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하랑이 류천성을 재촉하지만, 류천성은 초조한 듯 입술을 핥으며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카메라맨을 자처한 김지화도 어딘가 구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셔터 찍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

신랑 측 부모님 석에 앉아 숨을 씩씩거리고 있는 허윤환의 살기에 류천성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신랑 신부, 그러면-"

"아, 감질나서 못 기다리겠네."

하랑이 그대로 고개를 숙여 내 얼굴을 붙잡았다. 하객들이 손뼉을 치면서도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 느껴져, 나는 하랑을 살포시 밀어냈다. 하랑의 동공이 불안함에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싫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딱.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웨딩드레스가 불길에 휩싸이고, 시야가 높아진 나는 턱시도 차림으로 하랑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하려고."

나는 하랑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 마력에 반응한 하랑의 턱시도가 하얀 빛을 내뿜으며 순백의 웨딩 드레스로 변했다.

순식간에 신랑과 신부가 뒤바뀐 결혼식에 하객들이 경악을 금치 못한다. 특히 내 모습을 본 천가을과 은유하가 동요하는 기색이 너무 심했다. 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건 분명 술주정뱅이일게 분명했다.

"야...!"

하랑이 당황하면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하랑의 얼굴을 붙잡으며 활짝 웃어줬다.

"스몰 웨딩이라도 키스 사진은 전 세계에 알려야지. 네가 내 신부라고."

"...개소리. 네가 내 신부다. 이긴 사람이 신랑하기로 한 거 잊어버렸나?"

하랑이 내 넥타이를 잡아끌었다. 나는 그대로 허리를 숙였고, 하랑은 내 넥타이와 뒷목을 붙잡고 입술을 맞췄다.

나중에 녹화 영상을 보며 느낀 거지만, 아무리 결혼식이라도 혀를 넣으려고 한 건 좀 많이 그랬다.

* * *

하와이에서의 7박 8일 신혼여행이 끝난 뒤, 우리는 드디어 진짜 최종 전투를 눈앞에 두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부담되면 말해라. 내가 다 커버 쳐줄게."

"...아녜요. 제가 해야할 일이니까."

두 손이 떨린다. 초조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하랑의 손이 내 손을 붙잡았다.

"잘 될기다. 이해해 줄 거야."

"아니. 절대로. 이해 못한다."

입구에서 성큼성큼 걸어온 허윤환이 거친 숨을 내뿜으며 의자에 앉았다. 아나스타샤는 냉전 상태로 서로를 노려보는 남편과 딸 사이에서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

"나는 양쪽 다 이해하니까 따로 편 들지 않을게. 둘이 알아서 하렴."

"엄마?! 엄마는 그래도 내 편 들어줘야지!"

"루살카가 왜 네 편이야. 루살카는 내 거야. 야, 쓰레기. 입이 있으면 말해봐라."

"......죄송합니다, 아버님?"

광검은 사시나무 떨듯 부르르 떨고, 나는 입술을 오무렸다. 유구무언. 석하랑이 탁자를 내리치며 입을 열었다.

"그래. 아빠가 하고싶은 말이 뭔데?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제?! 어?!?!? 하기만 해봐라! 쥑이삘끼다!"

"하랑아, 실은."

"제가 말할게요."

내가 하랑을 제지하고 광검과 눈을 마주했다. 상대는 내가 만든 괴인이지만, 어느덧 성장하여 이제는 나와 같은 경지에 이른 초고수다.

"아. 덧붙여서 싸운다고 하면 나는 윤환이 편이니까 그리 알렴."

...루살카도 붙어있으니 상성상으로는 이쪽이 훨씬 불리하다. 하지만 질 생각은 없다.

나는 숨을 크게 골라쉬어 광검에게 소리쳤다.

"아버님,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그럴 줄 알고 이미 궁극기 켜뒀다!!"

자고로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이었다.

신의 경지에 오른 하랑은 격전끝에 부모를 상대로 승리를 따냈다.

나는 그저 뒤에서 응원만 했다.

왜냐고?

임산부는 싸우면 태교에 좋지 않다고, 하랑이랑 루살카가 마구 혼내더라.

...아니, 뭐.

하랑이가 임신하기 무섭다더라. 그러면서도 자식은 가지고 싶어 하더라고.

그래서 신혼여행지에서 몇번 시도했더니, 이게 또 되더라.

앞으로의 10개월이 몹시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 * *

이계의 신이 눈을 떴다.

저를 부르던 하수인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 사라진 마지막 흔적이 저 멀리 외계의 행성에서 느껴진다.

지구.

이계의 신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황색 폭풍이 성간을 누비며 우주를 떠돌았다.

* * *

달빛 아래. 눈이 소복히 쌓인 백사장 위를 두 남녀가 걷고 있었다.

여자는 먼저 물었다.

'달이 참 예쁘다'고.

남자는 그에 화답했다.

'달도 참 예쁘다'고.

여자는 두 팔을 벌리며 남자에게 물었다.

'내 소원이 뭔지 궁금하지 않아?'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소원이길래 이렇게까지 도전한 건지 모르겠군.'

여자는 손가락을 치켜들어 밤하늘을 가리켰다.

'앞으로 어떤 싸움이 있을지 나는 솔직히 몰라. 너는 이미 겪어봤으니까 얼마나 두려운지 알고 있겠지. 저 별 너머에서 오는 괴물이. 하지만 말이야.'

여자는 남자의 두 손을 붙잡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설원을 담은듯한 여인의 눈동자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를 믿어줘. 내가 네 옆에서 네가 엇나가지 않도록 도와줄 테니까, 내가 사랑하는 이 세계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도와줘.'

'그게 네 소원인가?'

'물론. 세계평화만큼 히어로가 원하는 소원이 어디 있겠니?'

그날, 눈 내리는 밤(雪夜).

남자는 여자에게 반해버린 자신을 자각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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