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1부 7장 (9)
<그 시각, 신서울 유성일가 저택.>
"진짜로 제 방을 알고 있었네요?"
"알다마다."
은유하는 양상추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베어물고, 피닉스는 테이블 위에서 케이크를 포크로 떠먹었다.
부산에서 중고 거래를 성공적으로 마친 끝에 하늘로 도망친 그들은 중간에 유성의 프렌차이즈 카페에서 간단한 아침을 주문했고, 얼굴이 팔리기 전에 재빨리 은유하의 집으로 날아왔다.
은유하는 티슈로 제 입술을 닦으며 물었다.
"역시 고객님, 전생에 남자였죠?"
"좋을대로 생각해. 지금은 성별이 의미가 없으니까."
피닉스는 입에 넣었던 포크를 입술로 닦아 유하에게 겨눴다.
"고작 말투나 외형, 성별은 중요한 게 아냐. 나는 나다."
"네, 네. 그래서 플라나리아 고객님은 이제 진짜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무얼?"
"당신이 알고 있는 미래 지식, 거기서는 선의철이 종신 대통령이었다면서요? 2025년까지."
피닉스는 쇼트케이크 위에 올려진 딸기를 옆으로 굴려 떨어뜨렸다. 잠시 딸기를 포크 끝으로 만지작거리던 피닉스는 포크를 쿡 찔렀다.
"그래. 내가 알던 미래는 변했지. 네가 선의철을 끌어내리기로 마음먹은 시점부터."
"역시, 아셨네요?"
"선의철의 뒷배 금권력은 유성이 쥐고 있으니까."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선의철을 끌어내리는데에는 청화단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청송 강소연을 서울로 발령내어 그의 아군이 될 선의철과 유영호와의 물리적 거리를 떨어뜨리고, 학살을 목격한 히어로들이 정치적 금전적 부담없이 거리끼지않고 양심선언을 하게 만들고, 네트워크 상에 떠도는 영상들을 검열삭제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유포하고 확산시킨 원동력은 모두 유성의-은유하의 의지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피닉스가 딸기를 집어삼키며 우물거리며 물었다.
"무슨 생각으로 선의철을 끌어내린거지?"
"무슨 생각으로 제가 미래를 바꾼 걸 내버려 둔 거예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지 마라."
"미안해요. 하지만 궁금해서요."
유하는 잠시 커피로 목을 축였다.
"당신이 알고 있는 미래를 제가 완전히 망쳐버렸는데 화도 안 나요?"
"전혀. 그 정도로 화를 내기에는 이미 천가을 때부터 포기했다."
"......흠? 혹시 가을 씨는 원래 어떻게 될 예정이었어요?"
"본인에게 직접 물어봐라. 둘이 자주 통화하는 것 같던데."
흠칫. 유하가 잠시 표정이 굳었다. 오리발을 내밀까 잠깐 고민하는 사이, 피닉스가 붉은 색의 차를 휘휘 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난 괜찮다. 둘이 사이 좋으면 그거대로 좋은 거니까.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
"...정말 할 말은 많지만 참을게요. 지금 말했다가는 제가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해도 나는 괜찮다만."
"제가 안 괜찮아서 그래요."
나도 SS급이 된다면 눈앞의 이 얄미운 새를 한 대라도 때릴 수 있지 않을까. 유하는 에스프레소를 물처럼 벌컥 목에 들이부었다.
"왜 선의철을 끌어내리려고 하는지 물으셨죠?"
"그래. 넌-"
"정치에 소질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입 다물어요."
피닉스는 순순히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생크림으로 뒤덮인 카스테라 사이에 숨어있던 딸기에 피닉스는 잠시 눈을 감고 꿀떡 삼켰다. 유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지금 여섯 명 굴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정치까지 하라고 하면 저는 과로사할게 분명해요. 아무리 고객님이 있다고 해도."
"오히려 나 때문에 스트레스를 더 받겠지."
울컥. 유하가 다시 에스프레소를 한 번에 들이켰다. 옆에서 대기하던 유하의 기계 인형이 빈 잔에 곧장 커피를 채웠다.
"안 그래도 지금 스트레스 받고 있으니까, 괘씸해서 비밀로 할게요. 흥."
"그러시던지."
피닉스는 정말로 관심이 없다는 얼굴로 케이크를 전부 먹어치웠다. 그러고는 기계인형에게 익숙한 손길로 냉장고에 넣어둔 다른 디저트를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아까 냉장고에 넣었던 거. 지금 가져와."
[EX등급 코드를 인식했습니다. 명령에 따릅니다.]
아주 익숙하게 기계 인형의 코드를 조작하는 모습에 유하가 눈을 샐쭉하며 심통을 부렸다.
"......고객님, 기계 인형 명령 코드는 나밖에 모르거든요? 아무리 제가 고객님께 사랑한다고 장난식으로 말씀드려도 정도라는 게 있어요. 선을 지켜주세요. 특히 방금 코드는-"
"평생을 함께 할 반려에게만 알려줄 코드였지."
"......네?"
"뭘 그리 놀라. 너랑 나, 전생에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유하의 사고가 멈췄다. 피닉스는 눈썹을 으쓱이며 접시에 올려진 딸기 타르트를 마력으로 감쌌다.
"스무고개 같은 거 하니까 상대방 짜증나게 하는 거, 어떤 기분인지 알겠더라고. 그러니 그냥 알려줬다. 왜? 계속 궁금해 했잖아."
"아니, 그, 그러니까, 지금, 진짜로? 그 때 얘기했던게, 그냥 장난이 아니고 진심이었다고요? 제가 당신이랑? 진짜? 농담 아니고?"
유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피닉스는 무심히 유하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금전적 이익이 되는 자라면 마음에도 없는 사랑을 말하며 호의를 보여주는 게 은유하였지. 내가 알던 그 여자는 사랑에 눈이 멀었지만. 참고로 세 쌍둥이에 두 쌍둥이, 이어서 두 쌍둥이. 딱 일곱이었다."
유하는 제 기계 인형들에 마력을 보내야한다는 것조차 잊은 채 커피잔을 떨어뜨렸다. 피닉스는 카페트에 떨어진 잔과 커피를 불꽃으로 태우며 타르트를 들어올렸다.
"알고 싶어해서 알려줬는데 왜 그렇게 놀라는 지 모르겠어. 그러면 나는 이제 간다."
"자, 잠깐만요?!"
유하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피닉스가 발걸음을 돌렸다.
"혹시 천가을이랑 석하랑도?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응."
유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피닉스는 곧장 뛰어올라 난간위에 발을 디뎠다. 피닉스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 네 PMC 대장, 광검 대신할 사람 이번에 중국에 가서 한 명 구해오마. 정령으로."
"?!?!?"
"그럼."
피닉스는 손을 흔들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유하는 허망히 하늘로 날아오르는 피닉스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돈말고 사랑에 빠진다고? 그것도 저 사람이랑?"
기계 인형보다 더 기계처럼 걸어가던 유하는 그대로 침대에 퍼질러누웠다. 갑자기 볼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전생에 무슨 짓을 한거야...! 이 망나니같은 계집애가!"
화가 치밀었다. 평생을 돈만 바라보고 살겠다고 다짐했고, 이미 사랑은 인형들을 통해서 수도 없이 나누었는데, 이 몸으로 진짜 사랑을 했다고? 심지어 그 누구도 모르는 은유하만의 극비 코드를 가르쳐 줄 정도로?
"미쳤어, 미쳤어! 아아악?!?!"
카페인을 너무 많이 마셨나. 머릿속에 흐르는 온갖 망상에 유하는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 * *
"이런 재미로 놀려먹는군. 너는."
나는 상공에서 미니 피닉스를 꺼내 몰래 챙겨온 딸기 타르트를 먹였다. 미니 피닉스는 좋다고 한입 크게 베어물었지만, 곧 씹지도 못하고 그대로 몸을 통과해 땅으로 떨어졌다.
타르트는 그대로 낙하했다. 강 아래에 풍덩 떨어진 타르트를 바라보던 미니 피닉스는 고개를 들어올려 나를 쏘아봤다.
- 직접 쳐먹으라는 거시야
"오늘 분량은 아까 걸로 끝이다."
미니 피닉스, 이제는 창염이라고 불러야 할 그가 내 손목위에 앉아 날개를 퍼덕였다. 지난 번에 나오고 난 이후부터는 제 정체를 숨길 생각이 전혀 없는지, 틈만 나면 자기를 불러달라 호출했다.
"방금 전의 얘기 때문인가?"
- 남의 가족 멋대로 팔지 말라는 거시야
"파는게 아니야. 선물이지. 광검을 루살카에게 넘겨줬으니, 당연히 은유하에게도 그만한 보상을 해줘야 하지 않겠나. 너와 나를 설득해 루살카가 사랑하는 남편을 다시 만나게 해준 은인인데."
창염은 내 말에 딱히 반문을 찾지 못한듯 고개를 숙였다.
은유하가 아니었다면 광검은 나에 의해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불타 사라졌을 것이고, 루살카는 평생의 비밀은 간직한 채 아나스타샤로서 펜릴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다.
"괜찮아. 환룡은 은유하에게 좀 부려먹혀봐야 해. 그 아이를 교정하는 데는 은유하가 최고인 건 너도 알고 있잖나."
- 그걸 아니까 더 슬프다는 거시야
창염은 부리를 열어젖히며 꺼이꺼이 울었다. 그게 팔려나가는 정령의 처지에 대한 슬픔인지, 아니면 원작에서 있었던 환룡의 고행에 대한 애도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졸지에 역순으로 공략하게 됐군."
원작에서 다섯 번째로 공략하는 정령, 혼돈환룡. 그는 다행히 지독한 잠꾸러기에 게으름벵이라서 원작 시점에도 자신이 잠들었던 곳에서 틀어박혀 명령을 내릴 뿐, 별달리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스크린을 띄워 지도를 열었다.
장소는 중국, 차원문이 열렸던 시안-과거 장안이라고도 불리우던 중국의 옛 수도에 있는 유적지이자, 이 세계에서는 혼돈환룡에 의해 구축된 SS급 난이도의 던전.
"시황제의 묘."
고대 불로불사를 추구하던 황제의 묘역에 잠자고 있을 다섯번째 정령을 각성시키기 위해, 나는 창염과 함께 서울로 날개를 움직였다.
* * *
<중국 시안 시.>
"배가 고파졌다."
봉효는 야시장을 산책 하다가 공복에 굶주린 배를 문질렀다. 요 며칠 밤샘을 하며 사태를 수습하느라 제대로 먹고 자지도 못해서 그런지, 생체의 리듬이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봉효는 슬쩍 주변에 마력을 흘려 누군가 저를 감시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아무도 없겠다."
봉효는 시름을 놓았다. 동창의 제독이 군것질이나 하고 다닌다면 품위가 어쩌니 하며 떠들 자들이 수두룩하여, 어린 시절처럼 이렇게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들을 대놓고 사먹기는 힘들었다.
"고맙습니다."
봉효는 왼손에는 특별히 부탁한 종이봉투에 탕후루들을 뒤집어 넣고, 오른손으로 꼬치를 쥐어 시럽 가득한 과일을 베어 물었다. 혈관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강한 단맛과 알싸한 청포도의 향이 혀안을 가득 채웠다.
"어렸을 때 샤오린이랑 같이 자주 먹었지."
가난하기 짝이 없던 시절이지만 행복했었다. 봉효는 과거의 추억을 반추하며 콧노래를 부르다 발걸음을 멈췄다.
"......."
막다른 골목 끝, 야시장의 빛도 닿지 않는 쓰레기통 사이에서 희미한 마력이 느껴졌다. 봉효는 탕후루의 나무 꼬치 끝에 마력을 실어 아주 조심스럽게 골목길로 들어갔다.
킁킁.
무언가가 냄새를 맡는 소리가 들렸다. 봉효는 그게 차원문에서 살아남은 괴수가 아닐까 숨을 헛들이켰다.
카앙! 철제 쓰레기통이 옆으로 굴렀다. 봉효가 세검을 찌르듯 나무 꼬치를 휘두르려던 순간, 쓰레기통에서 몸을 일으켰던 인영이 그대로 다시 쓰러졌다.
"귀찮아...."
소녀였다. 잿빛 머리칼의 소녀는 마력을 갈무리하며 그대로 쓰레기통 사이에 주저앉았다. 옷은 어디서 굴러다니던 것을 훔쳐입은 건지, 사이즈도 맞지 않는 것을 그대로 몸에 둘렀다. 봉효는 긴장감이 풀렸다.
"뭐야, 거지인가."
"인간. 내가 의욕 생기기 전에 꺼져. 귀찮아서 못 일어나겠어."
"......그 꼬라지로 뭐가 귀찮다는 거지?"
봉효는 독특한 소녀의 행동에 호기심이 생겼다. 무엇보다 저와 호각, 또는 그 이상의 마력을 가진 소녀가 이런 거지꼴을 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꼬르륵. 소녀의 배에서 배꼽시계가 울렸다. 소녀의 시선이 슬쩍 봉효가 쥐고 있던 탕후루에 꽂혔다.
"......."
"먹고 싶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곧장 바로 대답했다.
"먹여줘."
"뭐?"
"일어서서 먹으러가기 귀찮으니까, 먹여줘. 그러면 살려줄게."
봉효는 직감했다. 배가 고파서 지금 눈에 뵈는게 없어보이는 구나. 봉효는 자신이 베어물었던 탕후루를 봉투안에 넣고, 새 것을 꺼내 소녀에게 내밀었다.
"자."
"암."
소녀는 눈도 감은 채 입만 벌리고 있었다. 봉효는 꼬치 끝에 걸린 과일을 소녀의 입에 쑤셔넣고 꼬치를 빼냈다.
"됐냐? 나 참, 살다 살다 별 일을 다-"
"퉷."
소녀는 봉효가 내민 꼬치에서 과일을 빼내 겉의 시럽을 핥았다가, 곧바로 땅에 뱉었다.
"딸기 싫어."
"......가릴 처지냐, 지금?"
"딸기는 싫어. 먹기도 싫고 보기도 싫으니까 다른 거."
소녀의 재촉에 봉효는 대놓고 한숨을 쉬며 다른 꼬치를 꺼내들었다. 다행히 종류는 여러개였지만, 불행히도 딸기가 함정처럼 중간중간에 섞여있었다.
"......어휴, 진짜."
봉효는 꼬치에서 손으로 끝에 있던 청포도를 빼냈다. 손에 끈적한 시럽이 잔뜩 묻었지만, 봉효는 아랑곳없이 소녀의 입에 청포도를 욱여넣었다.
"내가 여동생 생각나서 참는다."
"......."
소녀의 입술에 봉효의 손가락이 닿았다. 소녀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봉효를 올려다봤다. 소녀의 눈동자는 동공이 뱀의 그것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져있었다.
"인간, 제법 재능이 있네."
"뭐 수인계 이능력자거나 그런 것 같은데, 너 어디가서 그런 거 잘못하다가 큰일난다? 이상한 아이로 마녀사냥 당해서 병원 들어가. 요즘 너같은 아이가 한둘인 줄 아니?"
소녀가 생긋 웃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네가 내 수발을 좀 들어줘야겠어."
"허, 참. 좋으실 대로 하시던가."
소녀를 중심으로 회색빛의 마력이 터져나왔다. 봉효는 순식간에 벌어진 기습에 미처 대처하지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말았다.
털썩. 봉효가 소녀의 앞에 쓰러졌다. 소녀는 입을 쭉 벌려 하품을 하고는 주머니속의 코어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영창은 귀찮으니까 생략."
다음 날, 야시장은 동창 조직원들의 발걸음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동창 제독 봉효의 행방불명.
골목길에 떨어진 탕후루는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