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28화 (128/1,497)

〈 128화 〉1부 7장 (8)

<2020년 6월 4일 오전 6시, 청화단 아지트.>

"왠일이래, 정말. 이거 진짜야?"

천가을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스크린을 잡고 흔들었다. 속속들이 속보가 전해지며 관련된 내용이 줄줄이 정리되었지만, 그 모든 내용은 결국 하나로 귀결되었다. 김지화가 혀를 차며 답했다.

"대변인 공식 브리핑이야. 진짜로 하야했어."

"...본인이 직접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유이신은 무책임한 그의 태도에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청송을 통해 추상같이 명령을 내리던 그 괴물은 어디로 가고, 꽁지를 내빼고 추하게 도망친 사갈만이 남게 되었다.

"아니, 이게 말이 돼? 고작 영상 하나로 순순히 물러난다고?"

제임스는 항상 달고다니던 맥주캔도 놓고 올 정도로 얼이 빠져있었다. 지화는 볼을 긁적이며 난감해했다.

"이래서야 2편, 3편 찍은 의미가 없어졌네요."

"한 번에 끝나서 기뻐해야 할 지, 아니면 기껏 찍어놓은 영상이 쓸모가 없어진 거에 울어야 할 지 모르겠네."

가을이 휘파람을 불며 어깨를 으쓱였다. 선의철이 혹시나 진실을 부정하면 그를 타격하기 위해 추가타를 준비했지만, 그가 하야한 이상 큰 효과를 발휘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그냥 풀어버리자. 이참에 아예 묻어버리게."

"동감입니다. 당장 풀어버리는 건 좀 그렇고,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풀도록 하죠. 괜찮겠습니까, 회장님?"

[문제없어요. 최소한의 절차라는 게 필요한 법이니까.]

스크린으로 참가하던 은유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옆에는 허윤환도 있었지만, 그는 선의철이 숨기고 있던 진실을 알게된 나머지 화를 삭이느라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가을은 제 촉수를 숨겼다.

"......."

류천성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조덕배가 은근슬쩍 류천성의 주변을 두드렸다.

"그 쪽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정적이 제 발로 사라졌는데."

"내가 아는 선의철은 이렇게 쉽게 무너질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게 좀 마음에 걸리는 군."

류천성의 말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솔직히 대변인을 통해 발표했다는 것부터 쉽게 믿을 수 없어. 혹시 모르지않나."

"어려운 정치 문제는 신서울에서 알아서 하라고 하죠."

피닉스가 말을 끊으며 나타났다. 가을은 평소처럼 입은 사제복이 왠지 낯설어보였다.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하면 됩니다. 그걸로 끝."

"그거야 그렇지만.... 이제 어떻게 되냐? 너 미래를 알고 있잖아. 다음 대통령 누가 될지 말해봐, 어서."

덕배의 재촉에 피닉스는 명백히 짜증을 부렸다.

"몰라."

"......?"

오히려 덕배가 당황했다. 덕배 뿐만 아니라 다른 간부들도 피닉스의 날카로운 대답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가을만이 조금 당황하면서도 침착하게 상황을 이끌었다.

"조덕배. 너 또 막 벨 안 누르고 문 두드려서 깨웠어?"

"아니, 급한데 그러면 어쩌냐. 벨 눌러도 대답은 없고 내용이 내용인데. 평소에 쟤 일어나있는 시간이었다고!"

"시끄럽고, 우린 우리 할 일부터정리하지."

냉정하기까지 한 피닉스의 말에 간부들의 이목이 순식간에 쏠렸다. 특히 은유하와 허윤환은 놀란 기색을 감출 생각도 없이 눈이 휘둥드레졌다. 유하가 가장 먼저 표정을 수습했다.

[과연, 그 쪽이 본성인가요? 지금까지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가식?]

"어느 쪽이든 나다. ...그냥 지금까지 최소한의 예의를 차렸다고 생각하시지. 아니면 이전처럼 하기를 원하나?"

고압적인 말에 간부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전처럼 웃지도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는 피닉스는 꼭 이전의 말투를 그들이 잊기를 바라기라도 하듯, 바뀐 지금의 화법을 강요하고 있었다. 지화가 두손을 무릎에 모아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좋습니다. 말투에서부터 단장님의 힘과 위엄이 느껴집니다."

"그 전에는 안 느껴졌다는 것 같은데."

"......."

지화가 굳었다. 가을이 황급히 손을 휘저으며 중재했다.

"아, 아하하! 사람이 갑자기 말하는 방법이 순식간에 달라졌는데 이해를 해야지, 안 그래? 무슨 바람이 분 거야 도대체?"

"그렇습니다. 꼭 신께서 반전의 형태에서 말씀하시는듯한...."

유이신은 좌중의 이목에 말꼬리를 흘렸다. 의미는 전달되었지만 그 표현 방법의 모호함에 간부들은 따뜻한 눈빛으로 그에 화답했다. 덕배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괴인형일 때 말투가 그대로 드러나는데? 이제는 그 깐족거리는 '~~요'하면서 존대 안 하냐?"

"이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왜? 듣고 싶나?"

"아니아니아니. 너 편한대로 하던가."

덕배는 손사레를 치며 강력히 거절했다. 저보다 훨씬 강한 괴물이 반존대로 저를 대하는 게 얼마나 부담스러운건지 저건 절대로 이해 못하리라. 덕배는 속마음을 삼켰고, 눈이 마주친 지화도 슬쩍 눈을 감았다 떴다.

류천성이 수염을 쓸다 물었다. 모두의 류천성에게 집중되었다.

"단장, 혹시 이제부터 전면에 나설 생각인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신서울이 큰 혼란이 생겼지. 따지고 보자면 청화단은 구국의 의적단이야. 학살을 도중에 막았고, 선의철의 비리를 모두 터뜨렸으니까."

"단장님께서 직접 죽이신 히어로들도 소나무 부대 히어로들이 대부분이죠. 심지어 그나마도 괴인으로 되살리셨습니다. 원탁과 밀약을 맺은 이 상황에서, 청화단이 대외 활동을 본격적으로 나서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은유하 회장님도 계시고요."

지화의 부연설명에 유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객님이 지난번에 부탁하신 여권처럼 청화단 여러분들의 가짜 신분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어요. 협회에서 집중적으로 타깃을 잡고 색출하면 걸리기야 하겠지만, 적어도 한국 안에서는 협회의 입김이 닿을 수 없겠죠.]

[협회는 하랑이를 구워삶으려고 들테지. 그 뒤에 누가 있는지 모르면서.]

허윤환은 제 딸을 언급하며 피닉스를 턱으로 가리켰다. 은유하에게 피닉스가 석하랑과만나고 다니며 어떤 훈련을 도와주는지 들은 만큼, 제 딸을 성장시켜주는 스승으로서는 상당히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하랑이가 진짜로 너를 죽이려든다면 어찌할 테냐. 협회에서는 세계 최초의 SS급을 제들의 수족으로 삼으려 온갖 선물공세를 할텐데.]

[이미 원탁에서도 나섰죠. 원탁과 협회가 노선이 조금 다르다고 해도 절반이 협회에 발을 담그고 있는 만큼, 그 분위기에 홀릴 수도 있어요.]

"그럴 리는 없다."

피닉스는 단언했다.

"석하랑은 절대로 엇나가지 않아. 옆에서 누가 붙어서 멘토링을 해줄테니."

"누구?"

"운디네. 블라디미르.R.아나스타샤. 원탁 소속의 히어로가 협조하기로 했다."

[네? 그 사람이 왜요? 한식 좀 좋아하는 거 말고는 고객님과 아무런 연관도 없잖아요.]

"루살카의 빙의체다. 허윤환 아내이자 석하랑의 친모인 정령이었지."

푸우우웁! 담담한 피닉스의 폭탄발언에 모두가 뿜었다. 물을 마시던 덕배는 기도로 물이 들어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기침했다. 그 중 가장 압권은 역시 광검, 허윤환이었다.

[뭐...라고....]

"당신 아내라고. 은유하, 네게는 미안하군. 아내가 남편 찾아간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

피닉스는 간략히 설명했다. 루살카가 허윤환에게 죽고-물론 이것도 모르던 간부들이 2차로 뿜었지만-영혼이 구천을 떠돌다가 러시아에서 요절한 영애에 빙의하게 되었고, 블라디미르.R.아나스타샤 라는 이름으로 이능력가로 활약하다 원탁이 되었다고.

그 과정에서 루살카가 왜 지금까지 정체를 숨기고 살았느냐, 왜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편과 딸을 만나러 오지 않았느냐, 왜 지금에서야 한국에 방문하려고 하느냐 하는 질문들이 이어졌으나, 피닉스는 아주 간결히 답하고 끝을 맺었다.

"상황이 변했으니까."

간부들은 피닉스가 하루 전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장황하게 늘어뜨리던 사람이, 이런 흥미진진하고 안타까우면서도 애틋한 비사는 배경 상황 설명없이 결론만 읊어대니 얼마나 울화통이 터지겠는가.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루살카가 살아있다고. 살아있어.]

허윤환이 스크린에서 얼굴을 가렸다. 간부들은 허윤환이 마흔이 넘어가는 세월동안 독신으로 살아온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피닉스는 고개를 숙인 허윤환을 가리키며 유하에게 말했다.

"둘 다 아직 부산이라고 했나? 내가 곧 내려가지. 중고거래라서 직거래 하기로 했거든."

[내 감동 돌려줘요!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하면 어쩌자는 거야!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세기의 러브스토리에 자꾸 이상한 말 할래요?!]

유하는 눈물을 닦으며 소리를 질렀다. 간부들도 격하게 공감했다. 피닉스는 담담히 베일을 만지작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한 두 번 이여야지."

[.......]

잠시, 유하와 가을의 시선이 맞닿았다.유하는 다급히 감정을 추스르며 답했다.

[좋아요. 그럼 언제 내려오실거예요?]

"운디네가 김해공항 도착하는 즉시. 경유없이 바로 김해공항으로 갔으니, 이미 호텔에 짐 풀었겠군.]

[뭐, 뭐?! 루살카가 한국에 있다고?! 어, 어딘가?!]

허윤환은 안절부절 못했다. 옆에 있던 유하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세상에, 맙소사.]

"......예상대로군."

피닉스는 허윤환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막 스크린에서 운디네를 검색하던 지화는 숨이 멎을 뻔 했다.

"운디네, 오라클, 부산 유성호텔 스위트룸에 숙박...."

"......같은 층이겠네?"

떨떠름한 가을의 혼잣말에 유하는 숨을 삼켰고, 허윤환은 그제서야 목소리를 새앙쥐처럼 낮추며 속삭였다.

[자, 자네! 루살카가 여기에 묵는다고 했으면 내게 진작에 말했어야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알고 그랬겠어요!]

유하는 원망섞인 눈초리로 피닉스를 노려봤다. 피닉스는 피식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또 원탁 온다고 하니까 옳타꾸나 하고 호텔로 모셨군. 난 네 그런 점이 정말 마음에 들어, 은유하 아가씨. 금전욕에 충실한 점이."

[......아, 진짜! 왜 미리 말 안해준거예요?! 판매자니 뭐니 하지 말고 진즉에 말해줬으면 마음에 준비라도 하지!]

"본인이 원치 않았으니까. 아 참, 둘이 지금 같이 있나?"

[당연하죠. 아버님 밖에 내놓았다가는 무슨...일...이....]

유하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피닉스는 몸을 일으켜 창문을 발로 깨뜨리고는 날개를 펼쳤다. 어느새 새벽을 밝힌 화창한 태양빛이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루살카한테 머리끄댕이 잡히기 전에 구해주러 가지. 청화단은 언제나처럼 행동한다. 이상."

피닉스는 그대로 건물 밖으로 뛰어올랐다. 몸의 형태도 괴인형으로 까지 바꾸며 전속력으로 부산을 향해 날개를 뻗었다.

"......우리 선의철 때문에 모인거였는데."

지화의 체념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청화단은 저마다 할 역할을 상기하며 임무에 전념했다.

2020년 6월 4일. 대통령 선의철 하야.

본인 스스로 대국민발표도 없이 대변인을 통해 발표한 행보에 지지자들은 실망했고, 곧 하야의 이유가 소나무 부대의 학살과 관계가 있지 않느냐는 사람들의 합리적 의심이 시작되었다.

소나무 부대의 학살이 진짜로 선의철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냐.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서울의 난민들을 굳이 죽일 필요가 있었느냐.

갑론을박의 상황에서 선의철은 침묵을 고수하며 자택에서 두문불출하였고, 예상대로 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그나마 혼란을 빠르게 불식시킬 수 있었던 계기는 협회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설화공주에 대한 내용 덕분이었다.

원탁의 13번째 자리에 등극. 그에 따른 오라클과 운디네, 그리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1명의 원탁 영웅의 방한.

집안에 폭탄이 떨어졌어도 사람들은 부랴부랴 손님을 맞을 준비를 마쳤다.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던 총리는 권한대행 채제에 들어가는 즉시 제 능력을 발휘하여 그들을 맞이하고자 했다.

내우외환의 혼란 속에서도 서울은 언제나처럼 평온했다.

* * *

"어, 어떡하죠?! 이러다 완전 불륜녀 취급 당하게 생겼다고요?!"

"루살카가, 지금 여기에 있다고? 바로 옆에?"

허윤환은 고장났다. 유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방안을 오다니다가 시각을 확인했다. 피닉스가 연락을 끊은지 어느덧 3분.

띵동. 벨이 울렸다. 유하는 가슴이 철렁거렸다.

띵동. 띵동. 벨소리만 들리고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유하는 본능적으로 누구냐 소리를 지를까하다가, 슬쩍 호텔의 CCTV 화면을 띄웠다.

"......신이시여."

문 앞에 백발의 마녀가 서있다. 유하는 정신이 아뜩해졌다. 벨소리는 유하의 심장 박동처럼 점점 빨라지더니 어느새 텀이 사라졌다.

딩동딩동딩동딩동딩동

"아, 시끄럽잖아! 망할 얼음땡이야!"

밖에서 문을 박차고 한 여자, 아니 남자가 뛰쳐나왔다. 질풍객의 등장에 유하는 숨을 골랐다.

와장창!

유리창이 깨졌다. 유하는 시급히 고개를 돌렸다가, 무언가가 제 허리를 와락 끌어안자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쉿.]

피닉스가 불꽃으로 된 검지손가락을 유하의 입술위에 올렸다. 유하는 처음보는, 그러나 익히 들어온 피닉스의 괴인형을 보고 마음이 철렁거렸다. 밖에서는 의미심장한 소리가 들렸다.

"...방금 무슨 소리 못들었어? 유리 깨지는 소리 같은 거."

유하는 질풍객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피닉스는 유하의 허리를 붙잡고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가려다, 테이블 위에 앉은 검은 히어로 슈트를 보고 발걸음이 멈칫거렸다.

[...좋은 만남 되시길.]

피닉스는 가면을 뒤집어 쓴 허윤환을 뒤로하고 곧장 유하를 데리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방문이 사선으로 잘렸다.

"야, 야?!"

"다시 자러나 가렴, 지금부터는 어른들 시간이란다."

허윤환은 고막을 간질이는 목소리에 숨을 삼켰다. 녹음조차하지 못해 기억속에만 담아두었던 목소리가 다시 귀에 울렸다.

쩌적. 방문을 자르고 들어온 여인은 곧장 얼음을 둘러 문을 막았다. 여인은 구둣발로 윤환을 향해 조금씩 다가왔다.

저벅. 여인, 아나스타샤는 윤환의 뒤에 멈춰섰다. 윤환은 등뒤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숨을 삼켰다. 역시 그 때 들은 목소리는 환청이 아니었다.

스윽. 아나스타샤가 하얀 손가락을 윤환의 어깨 너머로 뻗었다. 앉아있는 윤환의 뒤에서 팔을 뻗어 목을 껴안은 아나스타샤는 가면의 틈 사이에 대고 속삭였다.

"이렇게 용기만 조금 내면 만날 수 있는데, 지금까지 왜 그랬을까 싶었어."

윤환은 스스로 가면을 벗었다. 괴인이 되며 탈색된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나도 마찬가지다. 많이 변했군."

"당신도 마찬가지야."

허윤환과 루살카. D급 이능력자였던 청년은 SS급의 문턱을 넘어섰다가 괴인이 되었고, 세계를 멸망시키려 했던 간부는 사랑에 죽었다가 인간이 되었다.

아나스탸샤가 허그를 풀고 윤환의 앞으로 가 무릎 위에 올랐다. 부산의 그 허름한 집에서 항상 둘은 이렇게 시간을 보냈다. 윤환은 습관처럼 아나스타샤의 머리를 손으로 쓸었다.

"키, 많이 컸어."

"당신은 강해졌고. 나보다도."

아나스타샤는 그대로 몸을 윤환에게 기댔다. 윤환도 그에 화답하듯 아나스탸샤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붙어있었다. 피닉스가 깨고 간 유리창 너머 태양이 모습을 완전히 드러낼 때 까지, 둘은 묵묵히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무슨...."

윤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어. 평생 다시는 못 만날 거라고 생각했어. 이렇게 살아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나도 마찬가지란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너무나도 많은데, 뭐부터 해야할 지 모르겠어."

아나스타샤가 몸을 반대로 뒤집었다. 허윤환의 허벅지 위에 앉아 서로 얼굴을 맞대어, 두 손을 윤환의 목뒤로 감았다.

"그런데 뭐부터 해야할 지는 알겠단다."

"......응?"

아나스타샤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윤환은 그 웃음이 무언가 상당히 불만이 많다는 걸 애써 숨기려는 웃음이었다는 기억을 상기해냈다. 아나스타샤가 윤환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다른 암캐의 냄새가 난단다."

"................오해다."

윤환은 방 안을 슬쩍 곁눈질했다. 방안에는 방주인인 은유하의 물건들로 한가득이었다. 윤환은 눈을 질끈 감았고, 아나스타샤는 헛웃음을 지으며 윤환의 심장에 자리잡은 코어를 가리켰다.

"당신 몸 안에 그 망할 촉새의 냄새가 난다고. 안 되겠어. 하고 싶은 말부터 하기 전에...."

아나스탸사가 셔츠 단추를 위에서부터 하나씩 풀었다. 윤환은 제 운명을 직감하고 절로 침을 꿀꺽 삼켰다.

"하고 싶었던 것부터 하자, 서방님?"

아나스타샤가 잡아먹을 것처럼 입술을 훔쳤다.

그렇게 두 부부는 20년만에 만나, 서로의 몸을 포개며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