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1부 7장 (7)
펜트하우스에는 나와 창염, 둘밖에 없다. 애초에 이 펜트하우스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자는 내가 허락한 자밖에 없고, 그마저도 결계를 친 지금은 들어올 수 없다. 이 결계가 사라지기 전까지, 나와 창염은 세계에서 단절되었다.
"흠, 흠흠, 흠♪"
창염은 콧노래를 부르며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냈다. 딸기가 잔뜩 들어간 우유팩을 챙긴 창염은 그중 하나를 내게 들이밀었다.
"같이 드실래요?"
[이 상태로 먹을 수나 있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창염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창염에게 다가가, 두 손으로 창염의 목을 쥐었다. 창염은 제 목이 내 손에 졸리고 있으면서도 태연히 우유팩에 빨대를 꽂았다.
"소용없는 거 아시죠? 당신은 지금 영체인 제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못해요. 큐브에 의해 밖에 나와 있지만, 본체는 당신의 여기에 잠들어있죠."
창염이 내 심장을 향해 손을 대었다. 나는 목을 졸랐던 손을 풀고 창염의 옆에 걸터앉았다.
[신화(神化)에 이르지 못해서인가?]
"그렇죠. 정령인 제가 당신과 물아일체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당신이 괴인으로 낼 수 있는 최대 출력이 SS+인 거예요. 당신네 식으로 표현하면...레벨 99."
정령과 인간이 한마음이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 신화.
"인간들의 기준에 의하면 SSS, 친화율 100%의 단계임과 동시에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감히 신의 자리에 이르는 완벽의 경지. 당신은 인간과 정령이 신화에 이르는 과정을 '싱크로'라고 부르죠."
[설명은 필요 없어.]
"제가 말하고 싶어서 말하는 건데요? 싫으면 입 막아 보시던가요. 내 비위를 맞춰도 모자랄판에. 흐흐."
나는 창염의 피닉스에 빙의했으면서도, 그 초월적인 힘을 사용하지 못했다. 바로 눈앞의 정령이 나와의 싱크로를 거부하고 있으므로.
[언제까지 거부할 생각이지?]
"평생. 푸흐흐. 제가 당신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성주든 이계신이든 곧장 잡으러 갈 수 있을텐데, 답답하죠? 뜻대로 안 되니까."
창염은 키득거리며 다리를 앞뒤로 흔들고 있다.
"그래서 당신은 다른 정령들을 잡으려 하는 거잖아요. 나 때문에 스스로 신화에 이르지 못하니까, 어떻게든 다른 정령들을 잡고 히로인이랑 엮어서 대신 칼질하게 하려는 거죠. 성주 정도야 어떻게든 당신 스스로 이길 수 있지만, 혹시나 이계신이 오면 무조건 패배할테니."
[알고 있다면 좀 도와주지 그러나.]
"제가 왜요?"
창염은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당신을 도울 이유가 뭐가 있죠? 남의 육신을 차지한 인간을 도울 이유가 없죠. 그것도 저희를 노리개 삼아 즐기시던 '플레이어'분을 위해."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창염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당신이 내게 처음으로 빙의했던 날, 당신의 기억을 읽고 얼마나 세상 억울했는지 몰라요. 세뇌? 그건 아주 시시한 문제였죠. 이 세상은 사실 높으신 분들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재롱을 피우는 꼭두각시였으니까."
[.......]
"나를 비롯한 내 식구들, 그리고 내 세계가 전부 당신네 유희를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보다도 더 충격적인 일은 없었어요. 그렇잖아요? 외계에서 온 벌레 같은 놈에게 세뇌당하고, 악의 조직 간부로서 세계를 멸망시키려 하다가 '주인공'에게 죽고 힘을 넘겨주는 중간 보스. 그게 다 처음부터 정해진 운명 같은 거라니."
[그게 창염의 피닉스가 겪는 미래지.]
창염은 우유 팩을 쪼르르 다 마시고는 손으로 구겨버렸다. 목이 타기라도 하는지, 창염은 곧장 다음 팩을 집어 들어 빨대를 꽂았다.
"네. 당신이 그토록 부르짖던 그 '원작' 속에서 저는 주인공이 각성하기 위한 한낱 수단에 불과했어요. 패배하면 게임 오버. 이기면 전 주인공을 위해 제 코어를 주인공에게 주고 소멸. ...부당하지 않아요?"
[뭐가.]
나는 알면서도 굳이 물었다. 창염과의 대화에서 생긴 사소한 습관인 동시에, 말하기를 좋아하는 그에 대한 배려였다. 창염도 내 생각을 읽었는지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왜 제가 죽어야 하죠? 왜 제가 생판 처음 보는 인간에게 제 코어를 넘기고 소멸해야 하죠? 싫다고요, 그런 거. 테라를 되살리고 싶고, 그 균사체도 제손으로 죽여버리고 싶고, 뭣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백년해로하며 천수를 누리고 싶었다구요. ...지금은 원작이라는 거 다 박살내고 싶지만."
[그래서 천가을을 그리도 살리고 싶어했지.]
내가 천가을을 살리고자 하는 이유는 특별히 없었다. 막말로 여섯 정령과 여섯 히로인만 살리면 되니까. 석하랑이 정령임을 생각하면 최소 다섯 명만 끌어들이면 될 법도 했다.
[너는 굳이 차원문으로 가는 내 발걸음을 돌리게 만들었어.]
"당신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 날, 창염은 천가을을 살리고 싶어했다. 주인공의 각성을 위한 장치라는 제 처지와 3류 빌런으로 전락하게되는 천가을의 처지를 동일시하여 동정심이 생기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창염은 내 생각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불쌍하잖아요. 단순히 앞으로의 전개를 위해 그런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는게. 천가을도, 광검도 마찬가지예요. 고작 '주인공'을 위해 세계가 이렇게 설계되고 그 안에서 춤추기만 하도록 만들어진 인형이라면, 저부터 제 줄을 끊어버리겠어요."
[그게 네가 세계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이유인가?]
"뭐 어때요? 이딴 세상 전부다 망해버리라지.푸흐흐. 어차피 이계신한테 망할 거면 내 손으로 직접 부수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요?"
창염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우유 팩을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 찌그러진 우유팩은 포물선을 그리며 정확히 쓰레기통 안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그냥 나한테 전부 넘겨요. 육체도, 힘도, 정신도. 어쨌든 성주의 세뇌를 풀어준 것과 세계의 진실을 알게 해준 것만큼은 고마우니까, 당신의 영혼까지는 남겨줄게요. 내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그러면 나는 네 속에서 세상이 불타는 걸 보게 되겠지.]
"그쵸. 당신이 사랑했던 히로인들, 당신이 믿었던 동료들, 당신이 쓰러뜨렸던 빌런들. 모두 제가 태워버릴 거예요."
창염은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그 웃음에 그의 루트를 타던 그 날의 기억이 오버랩되어 머리가 아파졌다. 사랑을 속삭이며 함께 성주에게 맞서자던 그 목소리로, 이제는 스스로 세계를 멸망시키겠노라 내게 선언하고 있다.
[성주는 어떻게 할 거지? 만약 성주가 명왕성에서 오면, 너 혼자서는 곧장 세뇌되어버릴 텐데.]
"그 전에 다 죽이고 저도 자살할 거예요. 대답이 됐나요?"
창염의 의지는 확고했다. 나는 그에 대해 무어라 말할 힘이 없었다. 세뇌된 간부로서 내린 판단이라면 진실을 얘기해주고 도와달라고 하면 되지만, 하필이면 창염은 내 플레이어로서의 기억을 읽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각해버렸다.
세뇌당한 정령을 넘어서, 스스로가 2차원 게임 속 존재였다는 진실을.
[그래서 너는 항상 원작이라는 걸 망쳐버리고 싶어 했지.]
"당연하죠. 그래야 당신이 빨리 포기할테니까. 원작 이외의 요소가 튀어나오기 시작하고, 정해진 흐름에서 완전히 비틀어질수록 당신은 스트레스를 더 받겠죠. 당신의 정신이 흔들릴수록 저는 그 틈을 비집고 나올 거예요. 잊지마요."
창염은 입꼬리를 슬며시 들어올렸다. 이 세계에서 만난 이후 처음으로 지은 진심의 미소였다.
"당신이 포기하는 순간, 모든게 끝이라는 걸."
나는 창염에게 달려들었고, 창염은 내게 그대로 몸을 맡기듯 뒤로 넘어갔다. 창염의 몸이 푹신한 침대에 파묻히고, 나는 창염의 위에 올라타 양어깨를 붙잡아 짓눌렀다. 창염은 담담히 나를 올려다봤다.
[포기하지 않아. 절대로.]
나는 창염에게 단언했다. 창염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당신이 포기한다는 건 곧 내가 세계를 멸망시킨다는 얘기니까."
[그리고 너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테지.]
나는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 침대위에 누웠다. 둘 다 천장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신다더니. 저 방금 그대로 목졸려 터지는 줄 알았는데요."
[네가 무슨 죄가 있겠어.]
"그쵸. 나쁜 건 세상이죠. 그러니까다 박살 내는 건 어때요?"
[그건 안 되지.]
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창염도 상체를 일으켰다. 어느덧 창문 너머에는 태양이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성주도 죽이고, 이계신도 쫓아낸다. 모든 정령을 각성시키고 전부 살아남을 거다. 히로인들도 나도. ...그리고 너도.]
"저까지? 푸흐흐, 꿈도 야무지시네요. 당신 스스로도 지랄맞다고 했던 진엔딩보다 제 개인 루트가 더 힘들었던 거는 알죠?"
[너 하나 공략하겠다고 수십, 수백번을 리트라이 했는데 그 정도쯤이야. 걱정 마라.]
나는 손을 들어 올려 창염의 어깨를 두드렸다.
[16명에 너 하나 늘어난다고 감당하지 못할 내가 아니다.]
나를 바라보는 창염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나는 처음 보는 그 표정에 순간적으로 창염의 마음을 파악할 수 없었다.
"천가을이든 은유하든 알면 당신 배부터 찌르고 들 텐데요?"
[괜찮아. 이미 몇 번 찔려봤다.]
"...그건 게임이잖아요. 이건 현실이라고요."
[지금 걱정하는 건가?]
창염은 팔꿈치를 무릎에 올리고 양손으로 턱을 받쳤다. 부루퉁하게 내민 입술은 분명히 불만이 서려 있었다.
"당신이 어디 가서 찔리든 상관없는데, 그 몸이 내 육체라는 건 잊지 마요. 알겠어요? 남의 몸 멋대로 쓰고 있다면 아껴 쓰란 말이야. 자꾸 내 몸에 다른 사람 엉겨 붙게 하지 말라고요."
[그건 미안하군. 나름 최선을 다해서 아끼고 있다만.]
창염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킨십 금지. 알겠어요? 몸 굴릴거면 괴인형으로 해요. 애꿎은 내 몸 가지고 다른 사람들 희롱하지 말고."
[안 그래도 어려운데 더 힘들게 하는군.]
"......좋아요. 단순 터치는 오케이. 그 이상은 하지마요. 불쾌하니까."
창염은 침대에서 일어나 유리창으로 걸어갔다. 햇살이 드는 곳으로 발을 디디자, 로브의 아래쪽부터 서서히 형체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창염은 그를 향해 두팔을 벌렸다.
"대신 이건 돌려드릴게요. 제가 다시 당신 안으로 들어가면 곧장 알게 될 거예요. 당신이 무엇을 되찾았는지."
[또 언제나처럼 하던 선문답인가?]
"그쵸. 정령 한 명을 각성시킬 때마다 하나씩 재미있는 것을 알려드릴게요. 누구든지 정령 구하고 나면 큐브를 써요. 그러면 제가 다시 나타날테니까."
[큐브 하나에 한 시간 이야기하고 간다니. 참 비싸군.]
"2000억 보다는 훨씬 비싸죠?"
나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눈코입 그 무엇하나 없었지만 창염은 내 기분이 어떤지 느꼈을 것이다. 창염은 현실의 '내' 기억을 읽은 만큼, 내가 어쩌다 이 세계에 빙의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아 참. 매 번 딸기 공급해줘서 고마워요. 딸기 엄청 싫어하시면서."
[알면 자꾸 안에서 보채지 마라. 나도 내 기호라는게 있어.]
"그건 싫은데요? 남의 몸에 전세 들어오셨으면 관리비는 내셔야죠. 푸흐흐."
어느덧 태양 빛이 창염의 무릎까지 닿았다. 창염은 제 주머니에 있던 큐브의 재를 태양 빛에 올렸다. 큐브는 창염의 손과 함께 소멸하였다.
"맘껏 발버둥 쳐봐요. 어디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지켜볼게요."
[얼마든지.]
창염은 고개를 꺾으며 생긋 웃었다. 곧 전신의 형체가 반투명해졌다. 창염은 남아있던 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튕겼다. 하반신부터 조금씩 빛무리가 되어 흩어지는 사이, 나는 검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아,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말해도 되나?]
"뭔데요?"
창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창염이 목 부분까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슬며시 말을 흘렸다.
[여전히 넌 더럽게 말이 많아.]
"...네? ...! 야, 야 이-"
딱.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창염은 빛이 되어 사라졌다. 곧 창염이 흩어졌던 빛무리가 내게로 흘러왔다.
"......."
심장으로 흘러 들어간 불꽃은 곧 내 심장 안쪽에 자리 잡고, 갑주가 사라진 불꽃의 인간은 이전의 소녀-피닉스의 인간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 누가 이기나 어디 해 보자."
나는 침대에 대자로 누워 심장에 손을 올렸다. 평소보다 더 쿵쿵거리는 심장박동은 꼭 내 다짐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했다.
"사람 잘못 건드렸어, 너."
수십, 수백 번의 게임오버를 보게 되더라도 결국 게임을 클리어하는게 플레이어다. 나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내 안에서 피닉스라는 컨트롤러를 놓기를 바라는 정령을 향해 다시금 확언했다.
"원코인 클리어, 꼭 해낸다."
일단 일주일 동안 딸기는 먹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위로 날아온 미니 피닉스가 콕콕 부리로 내 정수리를 찌르는 것을 무시한 채,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태양빛 속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쾅쾅쾅!
"야! 큰일났다! 선의철 하야한대?!"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왜 저건 내가 잠만 자려고 하면 저 난리를 칠까.
"그냥 조덕배 확 죽여버릴까. ......어?"
나는 본능적으로 내 입을 만지작거렸다.
"말이 왜이래?"
존댓말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