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1부 7장 (6)
<새벽 1시, 부산 석하랑 자택.>
원탁과의 면접을 마친 하랑은 그대로 빈백에 누워 커뮤니티를 돌아다녔다. 제 SS급 등극 따위는 신경조차 쓰기 힘들 정도로, 하랑은 커뮤니티 속 영상들을 보며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와, 또라이들이네. 진짜."
어느 곳 하나 할 것 없이 모든 커뮤니티가 들끓었다.
선의철은 곧장 대국민담화를 통해 거짓이고 음해라며 주장했지만, 집정관 유영호가 서울에서 체포해 온 청송 강소연은 모든 진실을 실토했다.
'그래도 나름 노력은 하는 것 같던데'라는 생각이 들던 찰나, 하랑은 다음 영상을 보고 욕지기를 내뱉었다.
"이 미친?"
소나무 부대가 했던 온갖 악행들, 거기에 선의철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동원한 수단들, 그리고 선의철이 서울을 버리고 광검의 약점을 잡아 신서울에 족쇄를 채워둔 것까지.
청송의 증언이 하나둘 밝혀질 때마다 하랑은 욕지기를 내뱉으며 분노를 표출했다. 특히 제 스승이자 부모인광검에 대한 부분에 대해 나온 순간, 하랑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평양 사태의 진실은 광검의 폭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청송은 제가 아는 한도에서 모든 것을 증언했고, 최소한 청송이 내뱉는 말은 모두 진실이었다.
"평양의 괴수는 화권을 잡아먹었고, 광검은그걸 막기 위해 괴수를 쓰러뜨렸지만 폭주했어? 그걸 막다가 다른 히어로들이 죽어나갔다고? S급들인데?"
영상에는 당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히어로들이 나타났다.
<환몽>, <집행자>, <흉왕> 등 당시 S급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들이 모두 폭주하던 광검에 의해 명을 다했다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단 한 명, 당시 하랑보다 약간 많은 나이의 소년이 행방불명되었지만 그는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
"자, 잠깐. 왜 사람들이 광검 욕을 하는 건데."
하랑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 광검보다 더 강하다고 알려진 화권을 평양의 괴수가 잡아먹었다. 그걸 막기위해 광검은 모종의 방법으로 이능력을 폭주시켰을 뿐이고, 그 과정에서 사고가 터졌을 뿐이다.
"......이해할 수 없겠네. 유족들 입장에선."
굳이 힘을 쓰지 않고 다함께 막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가정은 의미가 없었다. 행방불명된 소년이 돌아오지 않는 이상, 당시 상황을 증언해줄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광검 허윤환은 이미 죽었으므로. 마치 죽었던 소년이 되살아나 복수를 한 것 처럼.
"......어?"
하랑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광검을 죽인 자는 피닉스다. 피닉스는 어린 소녀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그 본체로 추정되는 괴인은 청년과도 비슷한 행세를 했다.
"에이, 설마."
의심을 한번 시작하니까 그쪽으로 자꾸만 생각이 쏠린다. 왜 피닉스는 광검을죽여야만 했는가. 어떻게 피닉스는 광검이폭주하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죽이고자 했는가.
"...그, 그럴 리 없다. 금마 그 이상으로 더 많이 알고 있다 아이가."
어머니라 부르는 루살카, 그리고 정령이라는 존재. 외계의 생명체인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자>에 대한 정보. 그는 자신을 '창염의 피닉스'라 자칭했다.
"그래. 그러면 안 되지. 절대 같은 인물이 아닐 거다. 그래."
그런데 만약에, 단 1%라도.
피닉스가 그 실종된 히어로였다면, 저 자신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가장한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하랑은 침을 꿀꺽 삼키며 소년의 정보를 확인했다.
백청화. 00년생. S급 화염술사. 2012년 평양 사태에서 행방불명.
'만약에 그 남자애가 정령이 된 거라면?'
"끄, 꺄아ㅏ아아아아ㅏ아?!?!?"
하랑은 빈백에서 몸을 뒹굴며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 현실이 제 빈약한 상상력에서 시작된 근거 없는 망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래, 물어보자. 하랑은 곧장 머리핀을 불끈 쥐었다.
[얘, 너 남자니?]
[야밤에 갑자기 무슨 소리냐. 잠이나 자라.]
이거봐라. 목소리에 싸가지가 툭툭 흐르는 게 전혀 여성스럽지 못하다. 하랑은 제 심신의 안정을 위해 대화를 이어나갔다.
[갑자기 궁금해서. 너 왜 비스트 테이머로 이름을 청화라고 지었어? 그냥 청화단이라고 해서 이름도 청화로 지은 거야?]
[왜 남의 이명으로 시비냐. 내 본명은 따로 있는데. 그리고 창염단보다는 청화단이 더 발음하기 쉽지 않나? ...뭘 자꾸 시시콜콜 케묻는 거지? 지금 나를 취조하나?]
[그럼 그렇다 치고, 네 성별은 뭐야?]
[정령에게는 성별이 의미가 없다. 원하면 인간의 형태를 남성형으로도 바꿀 수 있어. 부분적으로도.]
"?!??!??!?"
하랑은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열려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듯한 심정에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러면 왜 인간형일 때는 여자애 모습으로 지내는 건데?]
[......일부러 남성형을 꺼내고 싶지는 않다. 심야에 뭐하는 짓인지, 정말. 바쁘다. 끊어.]
뚝. 머리핀에 불이 꺼졌다. 하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냥 남자애인척 하는 여자애인 줄 알았는데......."
하랑의 쓸데없는 고민은 더욱 깊어만 갔다.
* * *
<한국 시 기준 새벽 2시 22분 22초, 미국 LA 히어로 협회 본부.>
어둠만이 가득한 밀실. 컴퓨터 돌아가는 소리만이 가득한 빈 공간에 다섯 개의 스크린이 번쩍이며모습을 드러냈다.
스크린에는 저마다 제각각의 아이콘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스크린 하나들이 반짝거렸다.
[설화공주의 SS등급 발표 이후, 각계의 반응은 열광적이오. 오랫동안 비어있던 왕좌의 주인이 드디어 그 자리에 올랐으니.]
[그와 동시에 한국의 상황은 심상찮아 졌어요. 우리가 그동안 파헤쳐왔던 선의철의 비리가 여실 없이 커뮤니티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심지어 저희가 몰랐던 것들도.]
[광검의 비사는 우리 중 그 누구도 몰랐어. 난 오히려 그걸 알고 이용한 선의철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드는데?]
[좋은 일이 왔으니 나쁜 일도 생기는 법이겠지요. 중국은 어떻게 됐습니까? 가웨인을 보내셨다 들었습니다만.]
[적절히 잘 이야기가 된 듯 허이. 뒷사정은 다 접어두고, 뉴클리언의 위험성을 아는 원탁이 의협심으로 일어선 중국 히어로들을 설득하여 해산시킨 방향으로 이야기가 되었어.]
저마다 한 번씩 차례가 돌아갔다. 다시 최초의 스크린으로 차례가 넘어갔다.
[그렇다면 문제는 역시 오라클의 예언에 없는 '그 불사조'인가.]
[예언에는 있습니다. 전대 오라클이 남긴 예언에 따르면, 불사조는 최후를 장식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그 불사조가 먼저 활동을 시작했을 가능성은? 아무리 오라클의 예언이라고 하더라도, 한 번 즈음은 틀릴 수 있지 않아?]
[오라클의 예언은 절대적입니다. 지금의 오라클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예언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어요. 그렇기에 그 균사체도 적절히 대응할 수 있었잖아요?]
[어느쪽이든 현재가 중요하지 않겠나? 중요한 건 그 불사로로 추정되는 빌런이 광검은 죽였지만, 묘하게 한국을 지키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게지.]
다시 한 바퀴가 돌았다.
[......일단 멸망의 날을 막는데 신경씁시다. 아무리 빌런이라도 말은 통할테니.]
[여차하면 서울을 걸고 협박하는 방법도 있어요.]
[설화공주를 원탁으로 끌어들여서 억제력으로 삼기로 했잖아?]
[부족하죠. 한 번 패배했으니까. 죽었던 광검도 살아서 움직인다고 하잖아요? 예언 속 '괴인'일 가능성이 높아요. 사실상 부하가 되었다고 봐야하는 거죠.]
[......이보시게들. 그런 문제는 집어치우고, 슬슬 본제로 넘어가는 게 어떤가?]
마지막 인물의 말에 다른 이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잠시간의 침묵 후, 첫 스크린의 사람에게 차례가 넘어갔다.
[흠흠, 그러면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오늘의 회의 주제를 시작하도록 하죠. 오늘은 저희들의 역사상 가장 긴 회의가 시작될 것 같습니다.]
각자의 앞에 회의 주제가 던져졌다.
- 설화공주 석하랑의 SS급 이명을 무엇으로 정할 것인가.
스크린들이 하나같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차례를 지킨다는 것도 없이 저마다 목청을 높이며 제 의견을 펼쳤다.
[<설황>! 이제는 감히 황제의이명을 사용할 때가 되었도다! 아니면 <빙제>는 어떤가!]
[여자아이잖아요! 좀 더 가련하지만 어여쁜 느낌이 들어야 한다고요! 그래요, 바다를 얼려버렸던 그 빙판 위에서 고고한 여왕처럼 내려다보는 모습, 그야말로 <여제>의 기상을-]
[바닐○ 아이스, 라○라이.... 큭! 아니야! 생각해내야 해,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을 법한 이명을! 그래, 드디어 '신'을 사용할 때가 되었어! <아이스 갓>, 어때?! ...뭐? 한국어로 빙신이라고? 큿!]
[그냥 공주에서 여왕으로 올리지? <설화여왕>. 아니다, 간단하게 <눈의 여왕>이라고 하자.]
[이러나 날밤까겠군.]
회의는 끝을 보이지 않았다.
* * *
<새벽 4시 44분, 피닉스 펜트하우스.>
"끄으응!"
기지개를 켜서 스트레칭한다. 효과는 없지만 기분의 문제라, 정신적으로 피로감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감이 없잖아 있다.
"A급 50개는 유성에 납품, 나머지 자투리는 정령석으로 만들어서 간부들에게 지급, B급 이하는 동력으로 쓰거나 무기화.... 응, 됐네요. 완벽해요."
이곳저곳을 오다니느라 중국에서 얻은 코어들을 미처 정산하지 못했다. 은유하에게 약속한 만큼 일부는 유성에 판매를 해야 했고, 나머지 물량으로 서울을 먹여 살릴 필요가 있었다.
'유성에서 기계인형들 보내주기로 했으니까 전선도 깔릴 테고, 아키택트가 지하에 발전소 크게 지어주기로 했으니까.'
"한두 달 정도면 서울도 완전히 복구되겠네요."
물론 진짜 도시로서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곳은 여의도와 동작 정도가 끝이겠지만, 그래도 괴수와 빌런의 난동으로 반쯤 폐허가 된 도시가 고작 몇 달만에 완전히 복구되었다는 점은 충분히 기적이었다.
'이러다 원작 시작되면 신서울 뛰어 넘겠는데.'
"그러면 주인공 키울 전장은 어디로 해야하죠? 평양?"
그것도 꽤나 좋은 생각이기는 하지만 뉴클리언이 문제다.
'SS 정령 네 명 모아서 뉴클리언 제압한 다음에, 거기서 던전이라도 만들어버릴까?'
"......재밌겠는데요?"
그렇게 되면 악의 조직의 본거지는 평양이 되는 걸까. 나는 그 우스운 생각을 집어치우고 의자에 그대로 몸을 파묻었다.
'중간에 석하랑만 끼어들지 않았어도.'
한창 집중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이상한 말을 하더라. 덕분에 다시 집중하는데 제법 시간이 오래 걸려버렸다. 그리고 잠시 여유를 찾은 지금, 나는 조직의 이름을 굳이 청화로 지었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
"아. 맞다. 주인공도 본명도 청화였죠."
청 화(靑 火). '청'이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성씨를 사용한 나와는 달리, 주인공은 백청화라는 다소 여성적인 이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 이름 쓰려다보니까 그걸 써버렸네. 내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데, 젠장.'
기억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면, 곧장 그게 튀어나와서 시비를 건다.
"굳이 떠올릴 필요가 있을까요?"
'하긴, 이제는 피닉스니까.'
...또 홀렸다. 나는 슬쩍 시계를 확인했다. 인간이 모두 잠든 새벽 4시 44분. 아직 초여름이라 태양조차 일찍 떠오르지 않는 야심한 새벽이다.
잠을 잘 필요가 없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건 참 좋은데, 이렇게 불쑥불쑥 튀어나오면 여러모로 곤란했다.
'루살카를 만나서 더 그런가?'
석하랑을 정령으로 각성시키고, 존재를 모르던 루살카의 전생체를 만나서 그런지 그 빈도가 심해졌다.
'일단 석하랑 시끄럽게 하기 전에 먼저.'
나는 흰나비의 배지를 떼어 탁자에 올려두고는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화륵. 전신에 푸른 불꽃이 피어오른다. 시야가 푸르게 물들며, 육신이 괴인형으로 바뀐다. 나는 펜트하우스에 결계를 치고, 미니 피닉스 하나를 불러냈다.
미니피닉스는 책상 모서리에 날개를 접고 앉았다.
- 뜬금없다는 거시야
쫑알대는 부리에 큐브를 물렸다. 미니 피닉스는 순순히 큐브를 물었다.
[내가 루살카의 존재를 알게 된 게, 네게는 악재가 되었군. 덕분에 내가 '영체(靈體)'의 존재를 자각했으니 말이야.]
나는 큐브에 마력을 집어넣었다. 전신을 휘감고 있는 검은 갑주가 재가 되어 흩어지고, 그 아래에 있던 불꽃으로 된 인간만이 의자에 앉아있다.
[긴가민가 했지. 내 분령이든 네 분령이든 말투 부터가 달랐으니. 거기에 내 영혼의 조각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느낌이 어색했어. 설마설마 했다. 석하랑의 것을 보고 알았지.]
나는 흰나비 배지를 가리켰다. 석하랑이 만들어냈던 미니루살카. 그건 루살카의 말투를 그대로 빼다박았었다.
원래의 영혼에서 떨어져나온 분령(分靈)이므로, 최소한 '둘 중의 하나'의 말투는 비슷해야했다.
- 들켜버렸다는 거시야
미니 피닉스는 큐브를 꿀꺽 삼켰다. 이계신의 코어 파편은 미니 피닉스의 안에서 활활 타오르며 재가 되었고, 미니 피닉스는 점점 그 형체를 키워나갔다.
눈 깜짝할 새, 미니 피닉스는 소녀와 같은 형체를 갖추었다. 그 모습은 내가 인간형을 갖추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제복을 입은 푸른 머리칼의 소녀였다.
소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을 뗐다.
"언제 불러낼까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두 달? 생각보다 오래 걸리기는 했네요."
[괴인형일 때 루살카와 만난 게 기적이었지. 안 그러면 또 적당히 홀려서 유야무야 넘어갔을테니.]
소녀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책상 모서리에 걸터 앉았다.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푸른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는 흥미가 가득했다.
"그래요? 저는 그냥 당신이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랐는데."
[솔직히 의심만 했지 확증은 없었다. 큐브로 영혼을 불러낸다는 것도 요행이었을 뿐. ...아니지, 네가 스스로 나타났어. 그렇지 않나?]
처음으로, 소녀가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맞아요. 슬슬 나타날 때가 되었다 싶어서 이렇게 스스로 나왔죠. 처음으로 정령을 온전히 각성시킨 것에 대한 보답으로."
[석하랑을 그렇게 괴롭힌 게 보람이 있군. 이렇게 너를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
"실물로 보니 어때요? 사랑스럽죠?"
[그래.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소녀가 상체를 숙이며 양손으로 꽃받침을 했다. 콧김이 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졌다.
"너무하시네요. 저는 진짜로 오랜만에 당신을 뵙는 건데. 아, 일단 만난 김에 그거부터 할까요?"
소녀는 허리를 바로 세우고 제 오른손을 왼쪽 어깨 위에 살포시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태양의 화신. 테라를 수호하는 일곱 정령. 영원불변의 푸른 불꽃."
고개를 들어 올린 소녀는 싱긋 미소지었다.
"창염(蒼炎)이라 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