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1부 7장 (5)
<오후 8시, 부산 석하랑 자택.>
"새대가리 또 유리창 깨 먹고 가네."
석하랑은 배를 벅벅 긁으며 마력을 일으켰다. 공기 중 수분이 모여 깨진 유리창의 빈 곳을 메웠다. 하랑은 손가락으로 얼음을 통통 두드렸다.
'강화유리보다 더 단단한 것 같은데.'
SS등급이 되면서 이런 사소한 부분도 실력이 향상된 것에 뿌듯하다. 무엇보다 여름에 에어컨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에 행복했다.
'고아원 있을 때 뒤지게 맞았지. 여름만 되면 앓는다고.'
고장 나기 직전인 선풍기는 언제나 하랑의 것이었다. 그 때문에 다른 고아원 아이들과 시비가 붙기도 했고, 남들 알게 모르게 많이 괴롭힘을 당했다.
'다 옛날 일이지.'
힘들 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면 다 추억이 되더라. 하랑은 빈백에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하랑은 손을 배 위에 올리고 꼼지락댔다.
"혼자 있으니까 쓸쓸하네."
옆에서 끊임없이 조잘대는 새가 없으니까 어쩐지 허전하다. 하랑은 제 머리에 끼워둔 파랑새 머리핀을 만지려다가 손을 다시 원래대로 돌렸다.
"...사기꾼들."
하나같이 죄다 사기꾼들밖에 없다. 사람 감정을 가지고 노는 나쁜 사람들. 하랑은 울컥한 마음에 손위에 얼음 조각을 만들었다가 손가락으로 빠갰다.
'흔들린 내가 등신이지.'
SS의 경지에 오르니 알 것 같았다. 퍼즐 조각이 모두 맞춰져 진실을 깨닫게 되니,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광검 허윤환의 죽음 이후 하랑의 안에 잠재되어있던 정령력은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피닉스의 말마따나 남에게 쉽게 사랑을 느끼던 것도 정령의 힘이 몸에 정착되기까지 있었던 과도기적 단계였으며, 심신이 하나로 엮이게 된 순간 하랑은 더는 혼란스럽지가 않았다.
'...그건 또 아닌가?'
하랑은 냉장고에서 꺼내온 캔커피의 뚜껑을 땄다. 마력을 살짝 일으켜 냉장고 안에서 나온 것보다 더 차갑게 만든 캔커피는 금방이라도 얼 것만 같았다.
'나도 이 정도인데 걔는 얼마나 삽질한 거야?'
동정이 가는 순간이었다. 이미 전철을 밟아온 선배가 멘토가 되어 옆에서 길을 바로잡아주기라도 한 게 아닐까 싶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피닉스는 하랑을 위해 제 모가지를 기꺼이 내어놓을 각오로-
"......또 흔들리게 하네, 가스나."
차라리 아예 싹수없게 행동하거나 조롱을 하면 이렇게 마음이 싱숭생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피닉스는 계속 저를 챙겨주고 위로해줬다. 정작 그 혼란을 야기한 것은 피닉스 본인이라는 게 어불성설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싫지는 않네."
험한 말을 하고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면 자꾸만 괴롭혀지고 싶기도 했다. 하랑은 마음을 다잡고 스크린을 띄웠다.
"......세수했고, 상태 괜찮고."
이제 면접 시간이 다 되었다. 북극의 빙하처럼 단단하게 마음을 다잡고 매몰찬 거절을 해야 할 순간이었다. 그러나 긴장이 되는 건 당연했다.
"꿀꺽."
하랑은 스크린에 뜬 원형의 버튼을 눌렀다. 곧 스크린이 좌우로 흩어지며 12개의 스크린으로 늘어났다. 최초의 스크린은 그 자리가 비어있었다.
스크린으로만 봐왔던 낯선 얼굴이 태반이다. 그 와중에 여성스럽고 익숙한 얼굴도 보인다. 불과 10km 떨어진 거리에 있는 호텔에 있을 질풍객은 아는 체도 없이 담담한 얼굴이었다.
[반갑습니다, 설화공주 석하랑 양.]
스크린의 정중앙에 있는 금발 남자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하랑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반가워요. 가웨인 경. 몇 년 만에 뵙는지 모르겠네요."
[...시작부터 아픈 부분을 찌르는군요.]
[아니지.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때는 약했잖아.]
질풍객이 따지고 들었다. 하랑은 순간적으로 울컥했지만 인정하기로 했다. 그때의 자신은 어리고 약했으므로.
"네. 그때는 철부지 S급이었죠. 자, 그래서 이제 협회에서는 어떤 판정을 내렸죠?"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하랑은 자신감이 넘쳤다. 다른 게 있다면 예전에 탈락했을 때는 아무런 근거가 없었고, 지금은 근거가 충만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가웨인이 고개를 끄덕여 화답했다.
[축하합니다. 협회에서는 당신을 세계 최초의 SS급으로 공언하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네 시간 뒤, 자정이면 공표될 겁니다.]
하랑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도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동시에 질풍객이 사족을 달았다.
[어디까지나 세계 최초의 SS급 '히어로'란 말이지.]
[......질풍객, 훼방을 놓으려거든 입을 닥치거라.]
터번의 남자가 질풍객을 쏘아붙였다. 살라딘이라는 이명을 가진 히어로는 터번으로 온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하랑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히어로라는 사족을 단 것 봐서는, 역시 그 불사조도 공표하기로 했나 봐요?"
[그래. <블루 피닉스>. 너와 함께 세계에 공표될 SS급 빌런의 이름이야.]
하랑은 순간 따지고 싶었다. 본인은 풀네임에 집착하던데, 라고. 그러나 굳이 거기까지 도와줄 이유는 필요 없었다.
"어머. 한국에 SS급 세 명이 동시에 있다고 선포할 셈이에요?"
[......신원미상의 그 검사가 광검이라는 확증은 아직 없다. 분명한 건 그 괴인들이 정말로 한국인인지는 모른다는 거야.]
[그냥 범죄를 일으키기 쉬워서 한국에서 활동하는 걸 수도 있지. 안 그런가, 이웃분들은?]
살라딘의 말에 동아시아 특유의 흑발을 가진 두 여인, 아니 남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질풍객은 어깨를 으쓱이고, 얼굴을 드러낸 운장은 쓰게 웃었다.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는 강합니다.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당장은 그가 최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광검도 그 놈의 손에 죽었지.]
얼음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운디네가 처음으로 입술을 뗐다. 하랑은 왠지 울고 있는 듯한 운디네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라클이 다급히 말했다.
[아, 다들 알다시피 나랑 얘랑 같이 한국 가거든? 얘 지금 술 마셨으니까 이해해라. 지금 눈에 보이는 게 없다.]
[뭐라니.]
"......."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말투인데. 하랑은 눈을 껌뻑이다가 가웨인에게 물었다.
"그럼 저 두 분이 부산에 오시는 건가요?"
[아니. 오라클만. 운디네는 별개의 용무로 지금 방문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머지 한 명은 누구죠?"
전력 테스트로 두 명이 한국에 방문한다고 들었는데. 가웨인 경은 장난스러운 미소로 좌중을 훑었다.
[석하랑 님은 지난번에 1차 면접에서 탈락해서 모르시겠지만, 2차 면접이 있습니다. 사실상 1차 면접만 통과해도 합격이기는 하죠. 크흠.]
가웨인이 헛기침을 했다. 원탁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럼 지금부터 설화공주 석하랑의 원탁 영입에 대해 찬반 다수결 투표를 진행합니다. 원탁 여러분들은 셋을 셀 동안 고민하시어, 찬반의 의사 표시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기권은 반대입니다. 셋, 둘, 하나.]
원탁들의 스크린에 찬반 의사가 떠올랐다. 찬성 10, 반대1, 기권1이었다.
[...무, 무효란다. 예전처럼 맨날 일부러 무효를 누른 게 아니야. 술 마셔서 누르는 게 늦었단다. 다, 다시 하렴.]
[아. ...? 원탁 영입 반대하는 사람을 물었던 게 아닌가요? 전 설화공주의 영입에 긍적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운디네가 번복하고 운장이 당혹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가웨인은 머쓱한 얼굴로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 만장일치 안 되는 건 원탁 전통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10:2,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가결되었습니다.]
"원래 이렇게 쉽게 결정하는 거예요?"
[아뇨. 오늘 이 시간까지 저희끼리 수도 없이 논의했습니다. 오히려 빨리 끝난 편이죠. 운장 때는 반반으로 갈려서 거의 일주일이 걸렸었죠.]
[가족 문제가 걸리니까. 나나 운디네의 경우도 있지만, 원탁 히어로들의 친인척이 각자 나라의 요직에 있는 경우가 있거든. 특히 운장은 그렇지. 부친 문제가 있으니까.]
"부친?"
운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친아버지는 중국 괴수관리대책국의 국장을 맡고 있는 모택평입니다. 어머니와의 하룻밤 불장난에서 태어났죠.]
갑작스러운 가족사의 고백에 다른 원탁들이 당황했다. 이미 알기야 알고 있지만 그걸 운장이 제 입으로 직접, 그리고 저 스스로 이리 담담히 말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가웨인이 다급히 헛기침하며 이목을 끌었다.
[그런 의미에서 석하랑 님은 앞으로 그 부분에 대해서 준비를 하셔야 할 겁니다. 아마 한국 안에서 주로 나오겠지만, 고아인 석하랑 님의 친부모를 자처하는 이들이 우후죽순으로 나오겠죠.]
[그딴 놈들은 다 철창에 보내버려야 해.]
[......미안하다. 다음부터는 전용기에 주류 반입 금지시킬게.]
오라클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좌절했다. 하랑은 볼을 긁적이며 배시시 웃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제 가족 문제로 걸고넘어지는 사람이 있으면 제가 직접 진실을 밝힐 테니까."
[진실?]
하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광검 허윤환, 제 아빠거든요."
풉. 운디네가 마시던 보드카를 뿜었다.
* * *
"...대박, 대박. 대박 사건."
히카리는 화장실에서 한창 원탁 회의 중이던 하야테의 신호를 도청하며 숨을 죽였다. 설마 설마 하던 가설이 현실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빠 자는 사이에 업로드 할까?"
제목은 'SS 석하랑, 그 아버지는 XXX?'와 같은 자극적인 소재면 좋겠다. 속으로 키득거리던 히카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아냐. 이걸 너무 쉽게 풀면 안 돼. 묵혀뒀다가 영상 세 개는 뽑아야겠어.'
차근차근. 첫 영상으로 어그로를 끌고, 두 번째 영상에 힌트를 남긴 뒤, 마지막 영상에는 여러 후보를 띄워 그 중 적당히 강조해버린다. 히카리는 두근대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커뮤니티를 슬쩍 들락날락했다.
"......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커뮤니티의 인기 동영상 리스트에는 '선의철과 그 패거리의 충격적인 실체'라는 영상이 순위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승형 오빠가 선의철 조카잖아."
히카리는 저도 모르게 영상을 눌러버렸다. 히카리는 숨이 멎었다.
* * *
"장작 잘 타네요. 역시 바이럴로 조회 수 올리니까 난리가 났어요."
지화는 스크린 속 영상을 보며 커피를 들이켰다. 충격적인 장면은 적절히 모자이크되어 업로드되었지만, 그사이에 유출된 원본은 블랙마켓을 통해 뒷세계에서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
유이신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영상에는 나오지 않지만 반대편에서 그와 비슷한 짓을 저질렀던 장본인으로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가을은 촉수로 이신의 턱을 들어 올렸다.
"이걸로 선의철이 무너질까?"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신서울에서 그는 왕이었으니까요. 죽더라도 쉬이 죽지는 않을 겁니다."
"흥. 너희들 실수한 거야. 나라가 마비될 거라고. 알아?"
네발짐승처럼 엎드린 강소연이 다른 이들을 비꼬았다. 가을은 소연의 등 위에 양반다리로 앉아 팔짱을 꼈다.
"집정관은? 언제 올라온 데?"
"한 시간 뒤면 도착 예정. 직접 체포하러 올라오겠다고 할 정도였으니 배신감이 끓어 넘칠 테지."
지화의 말에 소연은 흠칫거렸다.
"야, 약속이 다르잖아?! 분명 익명으로 제보하는 대신 내 정체는 숨겨주기로 했으면서?!"
"그래. 우리는 네 정체를 숨겨주기로 했지."
지화가 제 손에 들린 카메라를 흔들었다. 과거 서울 수복 작전에서 납치한 히어로들을 촬영했던 바로 그 카메라였다.
"그런데 히어로 협회, 특히 원탁에 이걸 찌른 건 우리가 아니야. 협회를 탈출하고 유성에 몸을 투신한 자랑스러운 히어로분들이 밝힌 거지."
"뭐...? 이, 이 개자식들, 나를 속였어?!"
"속였다니. 우리가 뭐하러 너 이쁘다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했겠어? 후후, 수고했어. 하늘성. 아주 신나게 즐기던데?"
가을의 음흉한 얼굴에 류천성은 진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다음부터는 내게 이런 일 시키지 마시게. 품위가 몹시 손상되어버렸잖나. 제임스 시켜, 제임스."
"야. 협회에서 서울로 파견된 사람이 나랑 다니는 게 더 맞겠냐, 아니면 서울 대표이신 너랑 다니는 게 더 맞겠냐? 쟤 봐봐. 믿을 수 없다는 눈치로 너 노려보는 거."
제임스의 말에 류천성은 허리를 숙여 개처럼 엎드린 소연과 눈을 마주했다. 소연의 동공은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고 있었다.
"자네 덕분에 아주 더러운 경험을 했어. 여러모로. 앞으로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걸세."
류천성은 제 주머니 안에 꼬깃꼬깃 구겨져 있던 종이를 바닥에 내던졌다. 가을은 그 종이를 촉수로 집어 들어 손으로 펼쳤다.
"제법 재미 많이 봤으면서 무슨."
"성과에 따라서 대련을 해준다고 한 건 자네였을 텐데."
"아, 알겠어.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마. ...다음부터는 덕배한테 시킬게."
"그건 괜찮군."
류천성은 중절모를 쓰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신서울에서 열심히 차를 타고 올라올 집정관을 맞이하기 위해 그는 조금 일찍 자리를 떠났다. 가을이 몸을 일으켜 종이를 촉수로 먹어치웠다.
"자. 그러면 우리도 범죄자를 인도하도록 할까?"
"크아아, 하악?!"
소연은 배를 갉아 먹히는 고통에 그대로 자지러졌다. 이신은 차가운 눈초리로 소연을 노려보며 말했다.
"뭘 그리 아파하시는 겁니까. 당신이 그린 문장에 고통스러워 한 사람의 수만 수백이 넘는데."
"아파, 아파! 아아악!"
소연이 배를 부여잡고 몸부림을 쳤지만, 가을의 촉수에 의해 사지가 붙잡혀 제압되었다.
"집정관 올 때쯤이면 괜찮아지겠지. 자, 그러면 그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 보자고."
"살려줘요, 집정관님, 으으읍?!"
"시끄럽네, 진짜. 그런데 조덕배는? 어디 갔어?"
* * *
"활활 타네요. 아주. 제대로 타고 있어요."
"이렇게 만든 건 너잖아."
조덕배는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물었다. 피닉스는 손가락을 튕겨 장초끝을 살짝 태웠다.
"고마워."
"...덕배 씨한테 이런 걸로 고맙다는 소리를 들을 줄이야."
"라이터 없을 때 불붙여주는 사람한테 그럼 쓴소리하리?"
덕배는 담배 연기를 하늘로 후 불었다. 메케한 담배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피닉스는 난간에 누워 그 연기가 사라지는 걸 멍하니 올려다봤다.
"선의철도 저렇게 연기처럼 사라지겠죠?"
"왜? 걱정되냐? 네가 알고 있던 거랑 달라져서?"
"당연하죠. 원래 선의철 멸망의 날까지 종신으로 해 먹던 사람이라고요. 앞으로 많은 게 달라질 거예요."
"너야 알고 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해도 의미 없다."
피닉스가 짓궂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가르쳐 드릴까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원래 어떤 일이 벌어져야 했는지?"
"아니."
덕배는 장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운동화 뒷굽으로 불을 끈 덕배는 손가락으로 피닉스를 가리켰다.
"그냥 너 어떻게 하나 옆에서 지켜보는 게 나을 것 같다."
"덕배 씨는 제가 막 세계 구한답시고 발버둥 치는 게 재밌나 봐요?"
피닉스의 비꼼에도 덕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람쥐 쳇바퀴 굴러가던 무료한 일상에서 이런 재미라도 느껴봐야 하지 않겠냐. 야, 그래서 이제 어쩔거냐. 천가을이 너 중국 간다고 난리 치던데."
"...벌써 그걸 퍼뜨리고 다녀요? 나 참."
피닉스는 혀를 찼다. 덕배는 담배를 발로 짓이기다가 슬쩍 피닉스에게 다가가 소곤거렸다.
"야. 나 데려가라. 나 인천 차이나타운에서도 놀아서 중국어 좀 할 줄 알아."
"뭐 할 줄 아는데요?"
"你吃饭了吗??"
"밥 먹었냐고요? 지금 점심 때 탕수육 대 자로 부어먹고 왔거든요?"
피닉스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덕배는 어깨를 으쓱이며 제 스마트워치를 가리켰다.
"야, 요즘 세상에 이거면 다 번역 되잖아. 혹시 모르지. 너 혼자 낙오돼서 길 잃어버리면 어떡할래? 동행자 한 명은 있어야 되잖아."
"차라리 천가을 데리고 가고 말지."
빈정거리는 피닉스에 덕배는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나 같이 데려가 주면 네 말 안 끊을게. 네 설명 순순히 들어주마."
"...진짜로요?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 따라오려는 이유가 뭐예요?"
피닉스는 난간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심드렁한 얼굴이지만 하는 행동이나 몸짓은 덕배에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덕배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대답했다.
"너 중국 가서 무슨 삽질을 하는지 직관하고 싶어서?"
"......건방지기는 하지만 좋아요. 어차피 누구든 떡대 하나 데려가려고 했으니. 푸흐흐."
"...어, 나 지금 내 무덤 판 거냐? 그건 아니지?"
"낙장 불입! 은유하한테 조덕배 씨 여권도 만들어달라고 해야겠네요~"
피닉스는 난간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봤다. 옆에서 쫑알대는 덕배에 귀를 막아버린 피닉스는 집정관에게 인계되는 청송, 강소연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철컥. 집정관은 강소연을 보고도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이능력자용 수갑을 채웠다. 청송은 아무 말도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며 호송용 차에 실렸다.
그날 밤. 온 나라가 들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