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1부 7장 (4)
<오후 5시, 히어로 협회 한국 지부.>
"형님 신나셨습니다?"
이승형은 날아다닐 듯 기뻐하는 유영호를 보며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매일 대충 입고 다니던 그가 어느덧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쫙 빼입은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지금 서울 출장 잡혔거든."
"...아."
승형은 그제야 영호가 왜 이리도 좋아하는지 깨달았다. 서울에 있는 강소연을 만나러 간다는 게 저리도 좋을까 싶었다. 영호는 곧장 승형의 표정을 읽고 변명했다.
"아니, 그것도 있는데 일단 다른 용무가 먼저야. <비스트 테이머>. 청화라는 빌런에 대해서 정상 참작이 내려진 것 같거든."
"정상참작이요?"
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는 볼펜 자국으로 너덜너덜해진 서류가 들려있었다.
"서울 수복 작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협회도 알게 됐어. 아는 사람만 아는 거지만, 아마 곧 큰 혼란이 올 거야. 소나무 부대는 강제로 해체되겠지."
"그렇습니까."
승형은 담담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저도 조사를 받으러 갈 수 있는 상황에도 거리낌 없는 승형의 태도에 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주눅들 필요는 없지. 잘못이라면 삼촌 잘못 둔 죄밖에 없잖아."
"하하, 하...."
"너도 여러모로 마음고생을 하게 될 거야. 지금까지 억눌려있던 이들이 대놓고 물어뜯을 테고, 네게도 그 여파가 오겠지. ...일단 그 전에 바람이나 한번 쐬러 가자. 나도 혼자 가기는 무서우니까 마룡 때려잡은 사람 곁에 두고 가야 할 것 같거든."
"하랑이랑 가는 건 어떻습니까?"
영호가 몸을 으스스 떨었다.
"두문불출이야. 지금 기자들 석하랑 집 앞에 쫙 깔린 거 알지? 아까 점심때 좀 늦게 배달음식 하나 들어가고 끝이라더라. 아직 안 나왔어."
"역시 충격이 큰 걸까요?"
광검 생존설. 승형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했다. 정체불명의 적에게 패배했다고 믿기 힘들기도 하거니와, 그의 경지가 어느 수준인지 승형도 자각할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영호는 혀를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광검 님도 참 잔인하시지. 나야 그렇다고 해도, 최소한 제자한테는 언질이라도 주고 그런 깜짝 쇼를 벌이시던가."
"...덕분에 하랑이도 SS급 올랐잖습니까. 원탁에서 대표를 파견했다고 지금 전 세계가 난리입니다."
"야. 너 지금 아쉬워할 때야. 하랑이 아니었으면 네가 원탁 빈자리 채울 수 있었어."
승형은 어깨를 으쓱였다.
"관심 없습니다. 저 이번에 사건 터지고 조사 끝나면, 서울 올라가서 방위 부대에나 들어가려고 합니다."
"......뭐?"
영호는 쌍욕을 뿜으려던 걸 겨우 참았다. 둘만 있는 장소였다면 분명 뒤통수를 후려쳤어야 했지만, 그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제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절대로 곱지 않았다.
"야, 다시 한번 말해봐. 내가 잘못 들었냐? 출장 따라오겠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었던 것 같은데?"
"네. 완전히 서울에 올라가려고 합니다. 어차피 히어로 직도 박탈당할 테니, 사냥꾼으로 서울 위로 올라가서 괴수들을 잡으려고요. 이미 어지간한 네임드 괴수들은 다 처리했고, 하랑이 능력이면 부산에서 신서울까지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라도 속죄하시겠다?"
"이렇게라도 해야겠죠. 할 수 있는 최대한이라도."
승형의 말을 끝으로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승형은 담담히 눈을 감고 명상을 했고, 영호는 안주머니에서 지포 라이터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영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서울 올라가면 너 이제 지켜줄 사람 없을 거다. 진짜 괜찮겠냐?"
"형님, 제가 누구한테 보살핌받을 나이는 지났지 않습니까?"
"시끄러워. 내가 보기에는 너 아직도 햇병아리야. 덩치만 큰 S급. 어휴, 내가 어쩌다 그날 이런 애를 뽑아서."
영호는 구시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문 밖에는 그를 마중 나온 차량이 멈춰 섰다.
"난 간다. 마음 단단히 먹어라."
"조심하십시오, 형님도. ...그간 감사했습니다."
둘은 손을 맞잡았다. 이 인사가 끝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영호는 저를 데리러 온 이들을 따라 차에 몸을 실었다.
'힘내라.'
승형은 제 옆으로 다가온 검은 양복 사내들이 다가오기 전까지 영호에게 손을 흔들었다. 영호는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 *
<오후 6시, 신서울 정부청사.>
"앉지."
승형은 순순히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선의철은 그에게 자신이 마시던 것과 같은 향이 나는 허브티를 건넸다.
"그래. 자연인이 되어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네."
승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의철도 딱히 그에 대해 무어라 말하지 않았다. 선의철은 왼쪽 눈의 상처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지금까지 네게 지원한 모든 물질적, 금전적 지원을 깡그리 무시하고 서울로 올라가겠다 그거냐? 죽은 네 아비를 대신해 네게 모든 생활비를 마련해주고, 히어로의 이능을 보여 온갖 스승을 붙여 A급까지 오르게 한 나를?"
"......그건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은아버지 덕분에 아주 빠르게 A급이 될 수 있었죠."
"그런데 왜!!"
선의철이 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잔이 깨지지는 않았지만 차는 살짝 넘쳐흘렀다.
"왜 네 멋대로 한다는 거냐! 네가 천가을에게 홀려 배우를 한다고 멋대로 나섰을 때, 무슨 말을 했는지 잊었느냐?!"
"천가을의 상대역을 만들어주는 대신, 무슨 말이든 따른다고 했죠."
"그걸 기억하는 놈이 왜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는 게야. 설화공주 때문이냐? 고작 너보다 몇 살은 어린 계집애가 SS급에 올라서 그런 거냐?!"
"......그런 질투심 따위가 아닙니다. 작은아버지."
승형은 스마트워치를 조작해 몇 가지 데이터를 선의철에게 전송했다. 선의철은 콧김을 뿜으며 데이터를 받았다.
"이게 뭐냐."
"...곧 전 세계에 공개될 내용입니다. 이건 백업 본으로, 이미 원본은 협회에서 확보하고 있습니다."
선의철은 숨을 헛들이켰다. 영상은 그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서울 수복 작전의 이면. ...소나무 부대로 서울 주민들을 학살시키고자 하셨죠."
"......."
선의철은 묵묵부답이었다. 승형은 차를 한 모금 마셔 바싹 마르는 입술을 적셨다.
"왜 서울 주민들이 신서울의 지원을 한사코 거부하는지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게 서울에서 신서울의 이능력자들을 두려워하는지 궁금했습니다. 단순히 빌런들의 도움으로 살아남아서? 아니더군요."
"조작된 영상이다. 허위사실이야. 이 히어로, 분명 서울 수복 작전 때 괴수에게 납치당한 히어로 아닌가? 아직 기억한다. 분명 납치당하고 어딘가 머리가 회까닥 했을 거야."
"끝까지 부인하실 생각입니까?"
"무엇을? 나는 모르는 일이야. 기억에 없어. 이것 참 아쉽군. 범죄자를 계도하기 위해 직접 나서서 프로그램을 마련했는데, 아쉽게도 그게 큰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야. 소나무 부대는 해체해야겠어. 당장 지금이라도 다시 감옥에 집어넣어야겠군."
선의철은 말에 거리낌이 없었다. 승형은 선의철의 귀에 쏙 들어가게끔 한숨을 내쉬었다.
"......'청송'의 제보입니다."
막 찻잔을 든 선의철의 손이 굳어버렸다.
"협회에 자진 신고하였습니다. 작은아버지께서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높으신 분께 곧바로 연락이 들어갔죠."
"그럴 리가 없다. 지부장도 나와 함께 손을 담근-"
선의철은 말을 잇지 못했다. 승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부장 선에서 처리가 될 수 없죠. 원탁에서 직접 움직이게 됐습니다. 오라클, 운디네. 두 사람이 한국으로 오는 이유가 정녕 설화공주에게 영입을 제안하는 것으로 끝나리라 생각하셨습니까?"
"어, 어떻게? ...그렇군! 청송은 협회가 아니라 원탁의 끄나풀이었어!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거야!"
외통수에 걸렸음을 직감이라도 한 것일까. 선의철은 냉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승형은 담담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게도 조사가 들어올 겁니다.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조사에 성실히 응할 겁니다."
"......청송도 무사하지 못할 게다. 내가 혼자 죽을 성싶으냐? 나도 미리 말하마. 나 혼자서는 절대 가지 않아. 최소한 이백은 끌고 들어갈 거다."
선의철은 안경을 벗었다. 그나마 날카로운 인상을 부드럽게 해주는 안경을 벗으니, 선의철은 눈빛만으로도 벌써 사람 여럿은 담갔을 법했다.
"...마지막으로 물어보마. 누가 이걸 네게 알려준 게냐?"
집무실을 나서려던 승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유령입니다."
* * *
<그 시각, 청화단 아지트.>
"폭탄 터뜨릴 준비는 마쳤어. 그쪽은 준비되셨나?"
[물론이죠. 당신이야말로 제대로 하세요. 괜히 중간에 말실수하지 말고.]
"뭐라니. 딸기도 제대로 못 구해 온 주제에."
[그게 여기서 왜 나와요!]
은유하가 빽 소리를 질렀다. 천가을은 가면 아래 입꼬리를 비틀며 유하를 비웃었다.
"부족한 물량은 일본에서 직수입해 올 거라며 큰소리를 치더니 범인도 못 잡았잖아. 유성의 주인도 참 무능하네. 딸기 하나 못 구해오고."
[나 참. 자꾸 사람 열 받게 하시네? 당신 가슴에 박혀있는 그 코어, 원래 내가 받기로 한 거 몰라요? 고객님만 아니었으면 평범한 A급이었을 사람이. 그거 완전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인 거 알죠?]
"그래서 시청사의 뱀 코어가 그쪽한테 넘어갔잖아. 야, 그거 내가 잡았다?"
[장물이 됐잖아요! 당신도 알고 있었죠?!]
가을은 역정을 내는 유하의 태도에 슬쩍 질렸다.
"그러길래 왜 광검을 되살리는데 S급 코어를 써. 그 아저씨 S급 코어 아니더라도 강할 텐데."
[당연히 S급 코어를 써야죠. 아버님 같은 분이 어디 흔한 줄 알아요? 세계 멸망을 막고 딸을 위해 제 목숨까지 희생하는 사람이?]
"'아버님'? ...후후, 어머나. 우리 은유하 아가씨, 진짜로 설화공주님을 신부라 맞이하실 생각이신가? 어떡하지? 이러다 진짜로 혼인신고 하시게 되겠는걸?"
[......대외적으로는 그럴 거예요. 하지만 명심해요.]
유하는 가을을 비웃었다.
[내가 돈을 바다에 뿌리는 한이 있더라도, 중혼(重婚) 합법화시킬 테니까.]
"...이러다 동성혼도 합법화시키겠다?"
[그럴까요? 의원들 계좌에 열 장씩만 박으면-]
"진정해. 피닉스 여자 아닌 것 알잖아."
유하가 쿡쿡 웃었다.
[역시 당신 말고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니까요. 어때요, 또 단서가 생겼어요?]
"응. 샤오린, 운장은 빼박이야. 또 자기도 모르게 후리더라. 괘씸하게."
[그럼 나, 당신, 하랑이에다가 샤오린 추가. 그리고 지난번에 지나가다가 말했다는 그....]
"이...유나? 아무튼 막 보고 싶다고 말했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아가씨도 추가하면 5명. 우와, 벌써 개쓰레긴데요?]
유하는 손가락을 들어 하나씩 세었다.
[은유하, 석하랑, 샤오린, 이유나, 천가을. 고객님 성격상 한 번에 여러 명을 사랑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내 말이 맞다니까. 걔 회귀자라고. 벌써 몇 번은 회귀했을 거야."
[그렇다고 보기에는 행동이 너무 막 나가지 않아요? 암만 고객님이 조금 멍ㅊ...흐흠, 순진해도 그 정도로 머리가 나쁘진 않을 텐데.]
"......어휴."
가을과 유하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광검을 부활시킨 금단의 주술이 있었던 날, 둘은 피닉스 모르게 비밀리에 동맹을 체결했다.
"앞으로 더 늘어나지는 않겠지?"
[그걸 막기 위해 우리가 손을 잡았잖아요. 잊지 마요, 페어플레이. 나 지금 서울에 살려는 거 최대한 참고있으니까.]
"알았어. 넌 '그거' 준비나 잘해. 선의철한테 한 방 먹여주라고."
[알겠어요. 그럼 잘 부탁해요. S급 빌런 <팬텀> 아주머니.]
삑. 유하가 스크린을 내렸다. 가을은 탁자 아래에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에 잡힌 촉수는 금방이라도 터질것 같았다.
"......푸흣."
가을은 겨우 참고 참았던 승리의 미소를 토해냈다. 스크린이 비추지 않는 가을의 무릎 위에는 미니 피닉스 한 마리가 곤히 자고 있었다.
"......후후, 안 들켰겠지?"
가을은 손으로 조심스레 미니 피닉스의 불길을 쓸었다. 피닉스를 따라 중국 출장을 가면서 받아온 전리품 중 하나였다. 언제 어디서나 피닉스가 제게 올 수 있도록 가을에게 전속으로 붙여준 수호령.
"아차. 내 정신 좀 봐."
가을은 거울로 마스크를 다시 고쳐 썼다. 마스크 아래 칠한 화장은 가을의 피부에 조금이나마 생기를 돋구었다.
"흠흠. 그럼 시작해야지. 아아, 여기는 팬텀."
[......화장만 잠깐 고친다고 하지 않았어?]
연결된 스크린에 지친 얼굴의 등대, 김지화가 나타났다. 가을은 찔리는 본심을 숨기며 오히려 역정을 냈다.
"여자랑 데이트 안 해봤지? 화장 고치는데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몰라?"
[그래, 오래 걸려서 화장하시니 예쁘시네요. 됐냐?]
"나 예쁜 건 당연한 거고. 녹화나 준비해."
[벌써 40분 전부터 준비 끝나있었어. ...너는 준비 됐어? 진짜 해도 괜찮아?]
지화는 핀잔을 주면서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가을의 상태를 확인했다. 가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었다.
"당연하지. 기껏해야 우리 부모님 좀 놀라시는 정도 아니겠어?"
[......은유하 회장님이 네 부모님 댁 근처에 히어로 대기시켜 놓기는 하셨지. 그러면 촬영 시작하자, Y튜브의 유령님.]
"네네, 감독님. 컷 신호 주세요."
가을은 눈을 살포시 감고 마음을 비웠다. 지화는 가을의 앞에 놓아둔 카메라를 원격으로 조종하며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셋, 둘, 하나. 촬영 시작.
팬텀이 살색 입술을 벌렸다.
"안녕하세요,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서울 수복 작전의 진실을 밝히고자 이 자리에....아, 컷. NG. 너무 목소리 깔았다. 다시."
[......오늘 내로 업로드 가능할까?]
지화는 불안함에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시간은 7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을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나 천가을이야. 내가 허투루 연기한 줄 알아?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다시 찍을 거야. 완벽한 필름을 위해. 아아, 안녕하세요. ...조명 너무 약하지 않아?"
[오늘 안에 올리기는 글렀군.]
지화는 운명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