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23화 (123/1,497)

〈 123화 〉1부 7장 (3)

<오후 3시, 부산 유성호텔 펜트하우스.>

"이겼어?"

"무슨 소린가?"

은유하는 제 스마트워치에 도착한 석하랑의 메세지를 보며 피식 웃었다.

"뭔진 몰라도 피닉스 씨랑 한바탕 했나봐요. 이겼다고 합니다."

"당연히 이겨야지. 누구 딸인데."

허윤환은 보드카로 병나발을 불며 들이켰다. 유하는 왠지 모를 억울함에 테이블을 두드렸다.

"...아버님, 저 지금 일하는 중이라 죄송한데 다른 곳 가셔서 마시면 안 될까요?"

"일? 무슨 일?"

유하는 슬슬 이 하자품을 진짜로 원주인에게 넘겨버릴까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했다. 어째 지금까지 소비한 만큼의 술값을 제대로 한 적도 없었고, 부산의 소동에 지원을 나갔다가 되려 더 큰 사태를 일으키고 말았다.

유하는 저가 띄워놓은 스크린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한창 영상을 삭제 중인 유성의 X로이드 직원들이 있었다.

"아버님 나온 영상들 지금 계속 내리고 있잖아요."

"...새벽에 너무 눈에 띄게 운동했군."

윤환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손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보드카병 끝에서 주홍빛의 검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예 정체를 숨기려고 했는데, 오히려 들켜버린건가?"

"그런 셈이죠. 무인들에게는 저마다 무술의 형식이 있다고 하잖아요? 보니까 그걸 분석당한 것 같아요."

"난 따로 스승 없이 막싸움으로 살아왔는데."

"...실전무술로 거듭난 거죠."

유하가 관련된 영상을 보여줬다. 영상 속 수많은 전문가(자칭)들이 흑기사의 정체를 광검으로 추정하는 근거들을 화수분처럼 쏟아냈다.

그 중 가장 압권은 역시, '빛의 검을 쓰니까 광검일 것이다'라는 발언. 윤환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대통령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확신없이 내지르지는 않았을 거예요. 만약에 그런 거면 진짜 위기돌파능력은 대단한 사람인 거죠."

"그쪽으로는 타고 났지. 허허, 이 친구는 아예 나로 소설을 써놨군."

"네?"

윤환이 소설이라고 언급한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 유하에게 읊었다.

"광검은 사실 죽은 척 몸을 숨겼고, 그 사이에 일본과 중국에서 전쟁을 일으키게 뒤에서 움직였다. 일본은 비록 모비딕 때문에 실패했으나, 중국은 예상대로 히어로들이 궐기를 하였다. 이는 설화공주에게 시련을 내려 저와 같은 경지인 SS로 각성시키려는 광검의 큰 그림...."

"개소리네요."

"쓰레기가 직접 말한 건데?"

"제법 그럴듯한 가설이네요. 잠깐, 쓰레기?"

유하가 화들짝놀라 하던 작업도 멈추고 윤환에게 달려왔다. 윤환은 그 내용을 적은 SNS의 계정주인을 가리켰다.

"본인 아닌가?"

"......아버님, 이거 짝퉁입니다. 가짜예요."

유하가 속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나 진짜로 계정을 하나 팠을까봐 정말로 식겁했다.

"이 SNS, 그러니까 블루버드(Blue-Bird)는 누구나 가짜 계정을 만들 수 있어요."

"그럼 내 사칭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이죠. 제 것도 있는 걸요."

유하가 제 짝퉁 계정들을 쭉 보였다. 온갖 욕설과 입에 담지 못할 육두문자가 가득해, 윤환은 스리슬쩍 시선을 돌렸다.

"여기 보이시죠? 마킹된 거. 이게 진짜 그 당사자 공식 계정이라는 거죠. BB 본사에서 인증한 진짜."

"...어렵군."

"한 번 보세요. 무료한 시간 보내시기에는 적당할 거예요."

윤환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SNS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유하는 시끄러운 주정뱅이의 입을 틀어막은 것에 숨을 돌리고 커피로 목을 축였다.

알싸한 원두의 향이 입안을 가득 메운다. 유하는 느긋한 손길로 영상들의 삭제를 지시하다가, 손가락을 멈칫했다.

"그러고보니...."

유하가 급히 스크린을 손가락으로 당겨 크루즈의 CCTV 자료들을 당겨왔다. 시간은 크루즈가 출발하고 난 이후부터 끝까지.

"분명 자연적으로 망가진 건 아니란 말이지...."

광검의 자료, 그리고 청화단의 자료들을 삭제하고 없애느라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결국 딸기가 전부 폐기해야할 상태라는 것만 전해들은 유하는 늦게라도 범인을 찾고자 마음먹었다.

"...응?"

유하는 다시 CCTV의 자료들을 확인했다. 자료가 존재하지 않았다.

"왜?"

유하의 표정이 굳었다. CCTV 자료들은 모비딕의 등장 이후로 군데군데 노이즈가 끼거나 아예 암전되었다.

"...설마 하랑이 때문에?"

"응? 무슨 말인가?"

"아무것도 아녜요."

설화공주의 마력과 모비딕의 장기 때문에 전자장비인 CCTV까지 먹통이 된 걸까? 유하는 식은땀이 흘렀다.

'아냐, 이건 삭제된 거야. 잘려나갔어.'

유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유하의 명령을 받던 기계인형들도 오한이 들었는지 잠시 에러가 발생했다.

"...아아, 진짜!"

갑자기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정부와 협회는 아니사키스의 코어를 안면몰수하고 전부 챙겨버렸고, 부서진 크루즈의 수리비와 무너진 건물과 공원의 수리 비용을 전부 유성에서 내게 생겼다.

'최소한 100개 정도는 줘야지!'

정부는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협회마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강소연이 팀장으로 있을 때는 좋게 좋게 넘어갔는데, 새롭게 팀장으로 온 남자는 깐깐하기 그지 없었다.

'짜증나. 진짜.'

마음의 안식처가 필요하다. 유하는 조금이라도 빨리 사랑하는 제 고객과 계약서를 다시 쓰고 싶었다.

'광검 팔고 미니 피닉스 하나 달라고 할까.'

유하가 본격적으로 두 개체를 두고 비교를 시작했다.

"오, 만들어졌군. 이름은...빛나리...."

윤환은 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SNS에 푹 빠져들기 시작했다.

* * *

<그 시각, 같은 호텔 스위트룸.>

"흐흐흐흐."

히메지 히카리는 이불 속에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어둠 속에서 스크린의 불빛만이 반짝였다.

"우리 승형 오라버니 책잡힐 일은 놔둘 수 없지...."

히카리는 이미 저를 구해준 왕자님의 이름까지 파악했다.

이승형. 나이 26세. 한국의 S급 이능력자 '화권(火拳)'. A급 때는 배우로도 활동한 꽃미남. 천가을이라는 상대 여배우의 죽음을 애도하며 상주를 맡았을 정도로 책임감 넘치는 이 시대의 귀감. 현 대통령 선의철의 조카.

"대박. 뭐야, 이 동화속 왕자님은. 스펙 쩔어도 정도가 있지."

"뭘 이불 속에서 조잘조잘 대는 거야?!"

히메지 하야테가 이불을 쥐어 확 굴렸다. 히카리는 불의의 일격에 침대를 굴러 바닥에 떨어졌다.

"아프잖아?!"

"눈 나빠져! 너 뭐 나쁜 짓 해? 범죄 저질러? 뭘 숨어서 하는 거야?"

"......으흐흐."

히카리는 제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스크린에 뜬 이승형을 본 하야테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너 구해준 그 애송이잖아."

"애송이라니, 말 바로해. 오빠랑 같은 S급이야."

"난 S급 된지 벌써 몇 년은 지났고, 저 애송이는 고작 두 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 안 그래?"

울컥한 히카리가 곧장 영상을 띄웠다. 모든 히어로가 한 번은 꼭 봐야 한다는 그 전설의 영상, '일격에 마룡 죽이기.avi'였다.

"오빠는 마룡 한 방에 죽인 적 있어?! 없잖아! 괜히 나서서 회충만 냅다 바다에 뿌렸지!"

"...야, 그건 아무도 몰랐잖아. 알았으면 안 썰었어!"

"시끄러! 벌써 커뮤니티에서 오빠 욕하고 난리야! 남의 나라 바다 오염시키는 국제 망신이라고!"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하야테의 말에 히카리가 움찔했다. 하야테는 음흉한 얼굴로 제 스크린을 띄워 역공했다. 그곳에는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흑발의 소녀가 있었다. 하야테가 영상 속 소녀와 최대한 비슷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텐시TV의 힛카입니다! 뚜쉬 뚜쉬! 푸하하하하!"

"죽어! 죽어! 그냥 나가서 죽어!"

히카리가 배게로 하야테를 후려쳤다. 하야테는 세 방향으로 휘둘러지는 배게를 유유히 피하며 침대위로 뛰었다.

"근데 어떻게 광검이라는 걸 안 거야? 그 양반 그러면 살아있는 거야?"

"......모든 이능력자에겐 고유의 마력 패턴이 있잖아? 이게 스펙트럼처럼 7가지 패턴의 색을 띠고 있어요, 무식쟁이야."

"꼭 코어같네. 그래, 그래서?"

"...광검 허윤환과 이 가면의 기사, 하나 빼고 그 패턴이 전부 똑같아."

하야테가 의문스러운 눈초리로 히카리가 보여준 패턴을 가리켰다. 두 그래프는 겹처놓으면 똑같았지만, 히카리가 붉게 표시한 부분만 유독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허윤환보다 이쪽이 더 그래프가 긴데?"

"그렇지. 한 쪽은 거의 0에 수렴하고, 다른 쪽은 거의 100에 가까우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인데 말이야...."

히카리가 스크린을 조작해 누군가의 사진을 띄웠다. 하야테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아, 안그래도 원탁에서 얘 이야기나왔는데."

"그래. <비스트 테이머>. 이 여자애 말이야...."

히카리가 정말 조심스럽게 하야테의 귀에 속삭였다.

"괴수에다가 사람의 시체도 조종할 수 있는 사령술사 아닐까?"

* * *

<오후 4시. 여의도 청화단 아지트.>

"후, 후후! 이겼다! 나는 이겼어! 집정관 님, 저는 이겼습니다!"

강소연이 환호를 내질렀다. 류천성이 뻘쭘한 얼굴로 서있고, 옆에는 질린 얼굴의 천가을이 서있었다.

"고작 그 내기 때문에 나를 여기까지 부른 거야?"

"...아니, 고작이라니. 이게 얼마나 중요한 대결이었는데."

"시끄러. ...그나저나 당신도 대단하네. 자, 스타킹."

소연은 가을에게서 스타킹을 건네받고는 구두를 벗었다. 이미 소연에게 남들 보는 앞에서 스타킹을 갈아신는 정도는 수치스럽지도 않았다.

착. 소연은 바닥에 갈아신은 스타킹을 집어던졌다.

"관악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니까."

"...너 S대야?"

"......야, 너도?"

두 여인에게 몇 안 되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서로가 무안함에 머쓱해져 아무말도 못하는 사이, 둘을 바라보던 유이신에게 남자가 슬쩍 다가왔다. 남자는 들고있던 스케치북을 펼쳤다.

[잠깐 대화 좀 하지.]

"네."

이신은 순순히 대답하며 뒤를 따랐다. 성큼성큼 걷는 남자의 걸음걸이에는 미약한 짜증이 실려있었다.

호텔 바깥, 남자는 어수룩한 골목길에 이신을 끌고왔다. 그곳에는 남자 외에도 다른 이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 목에 깃털 모양의 문신이 박혀있었다.

[왔는가, 로빈.]

대표로 보이는 남자가 스케치북을 넘겼다. 이신은 웃음을 겨우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철표. 하지만 정정하시죠. 저는 지금 '궁성'입니다. 신께 이명을 받았죠."

남자, 철표 박성태는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는 아직 머리가 돋아나지 않았다. 결국 준비해둔 스케치북을 넘기는 방법밖에 없었다.

[너는 진심으로 우리를 죽인 괴물을 따를 생각이냐?]

이신은 아무런 고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신께서는 저희에게 죽어도 부활하는 권능을-"

[청송에게 반란을 일으키자던 그 대단하신 로빈은 어디로 갔지?]

이신의 입이 멈췄다.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왜? 말할 생각이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여기서 탈출을-]

"지랄하지 마. 이제 여기서 더 도망칠 곳은 없어."

이신은 제 목의 깃털 문장을 가리켰다.

"우리에게는 이제 이렇게 사는 게 운명인 거야. 더 선택지는 없어. 이용가치를 보여서 총애를 받거나, 이용가치없이 도태되어 소멸하거나. 둘 중 하나 뿐이야. 그나마 같은 처지였으니까 확실히 말해줄게."

이신은 숨을 골랐다.

"...난 이렇게 살 거야. 더이상 말 할 필요는 없어."

이신은 곧장 몸을 돌렸다. 애초에 목도 없는 자들이니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릴리가 없었다. 대신, 그들은 이신을 공격하려고 들었다. 이신이 속으로 한숨을 쉬고 품안에 있던 단검을 꺼내려했다.

크르르르.

드래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신은 반색하며 뒤를 돌았다.

"대장님."

골목 사이에 세로로 길게 찢어진 파충류의 눈이 나타났다. 깃털들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렸고, 이신은 그들을 무시하고 땅을 박차고 옥상으로 뛰어올랐다.

"신경쓰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해해주십시오. 저들은 아직 신앙을 가지지 못한...."

[굳이 내게 맞출 필요는 없다.]

이신은 살면서 지금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이신의 머릿속에 직접 전해진 마력에 담긴 목소리는 분명 마포대교의 그 남자였다.

"대장님, 말 하실 줄.... 아셨...."

[아무렴 사람이었는데 말도 못 할까.]

흑염룡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바닥에 내린 그의 피막에 어린 아이들이 미끄럼틀을 타고 놀고 있었다. 곁에는 청화단의 말단 조직원들이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아하하하!"

흑염룡은 날개를 살짝 흔들었다. 아이는 놀라면서도 즐겁게 뛰어놀다가 사라졌다. 흑염룡이 고개를 돌려 이신에게 의사를 전했다.

[언제 한 번 말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말하게 됐군. 아무튼 굳이 나를 따라서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그럼, 여태까지 신이라고 부르신 것도...."

[너와 비슷한 처지라는 거지.]

이신은 부끄러워졌다.

"그, 그러면 왜 그렇게까지 하신 겁니까?! 진짜로 오해했잖아요!"

[......신께서는 내가 신이라고 불러드리는 것을 은근히 부담스러워 하시지.]

이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는 마룡이 되기 전까지 간부들 사이에서 배척되고 마포대교를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내게 이런 힘을 주어주신 것은 평생의 은혜로 생각한다. 하지만....]

흑염룡이 씨익 웃었다, 고 이신은 확신했다.

[내가 그분을 태양신으로 추켜세울 때마다 곤란해하시는 게 너무 재밌어서 말이야.]

아, 이 인간(?)도 정상은 아니구나. 이신은 눈앞이 아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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