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1부 7장 (1)
2020년 6월 3일. 아침이 밝았다.
불과 하루 사이에 동아시아는 위아래로 큰 혼란을 겪었으나, 다행히 기적과도 같은 일이 우후죽순으로 벌어지며 혼란은 잦아들었다.
설화공주 석하랑의 SS등급 각성.
환마룡을 일격에 쓰러뜨린 운장 샤오린의 무위와 정체.
S급 괴수까지 다루는 '괴수 사육사'의 등장.
한반도는 폭풍의 핵이 되었다.
세계가 극동의 땅을 주시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저마다의 안식을 즐기고 있었다.
* * *
<6월 3일 오전 11시. 서울시청.>
"자. 이걸로 수복 끝. 나머지는 신서울에서 내부 집기만 들어오면 돼."
"고맙네, 제임스."
류천성은 깔끔하게 세워진 건물을 보며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시청사의 뱀을 공략하며 서울시청의 본래 건물은 완파되었고, 제임스는 아예 건물을 새로 지을 것을 주장했다.
현대의 디자인이 아닌 조선 시대 궁궐을 부활시킨듯한 외관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숭고함 마저 들게 했다. 비록 내부는 현대의 사무실 구조를 갖추고 있으나, 인테리어만 손보면 얼마든지 옛 양식을 복원할 법도 했다.
"자네에게 이런 감각이 있는 줄 몰랐군."
"내가 얘기 안 했나? 나 건축학박사야. 서울에 있던 것도 다 한옥 연구하다가 남았지."
류천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가 봐도 콘크리트 정글을 사랑할 것 같은 남자가 한옥 전문가라니. 생활 한복을 입고 다니던 그때부터 눈치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복원 전문가인 줄 알았더니."
"하다 보니까 늘더라고. 나 혼자 지금 서울 1/5 복구한 거 알지? 이게 경험이 쌓이니까, 이능력도 슬슬 발전하더라."
제임스가 부채를 펼치며 껄껄 웃었다.
"이러다 내가 먼저 S급 되겠네, 으하하!"
"끄응...."
류천성이 신음을 흘렸다. 전투계 이능력자라 전투로 경험을 쌓아야 하는 류천성과는 달리, 생산계 이능력자인 제임스는 건물을 복구할수록 한 계단씩 위로 올라갔다.
"...부럽군."
류천성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전이라면 금방 질시하고 주먹을 휘둘렀을 텐데, 시장의 자리에 오르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먼저 S급에 오르면 크게 한 끼 사시게."
"......미안. 내가 너무 나댔나?"
"미안할 것까지야. SS등급도 나오는 세상이니 조급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단장이 얘기하지 않았나."
류천성이 손가락을 펼쳤다.
"앞으로 남은 다섯 정령 중에 나를 S급으로 각성시켜 줄 정령이 하나쯤은 있겠지. 껄껄."
"......난 대놓고 지속성일 텐데. 보스 이번에 중국 간다고 했잖아. 그 정령 지속성 아니면 나 완전 나가리 아냐?"
"뭘 걱정하시는가. 서울을 싹 다 수복하면 S급 될지도 모르잖나."
아무리 양지로 발을 들였다고 해도, 그들은 역시 이능력자였다. 서로의 경지에 대한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던 류천성이 손가락을 튕기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 박사라고 했지? 어디 출신인가? Y대에서는 자네를 본 적이 없는데."
"나? 안암. G대-"
"퉷."
류천성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사라졌다. 그의 비서로 옆에 붙어있던 강소연이 한심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S 미만인데...."
"뭐라 했나?"
류천성이 주머니 속의 무언가를 눌렀다. 강소연의 다리가 휘청거리며 순간 자세가 무너졌다. 하지만 강소연은 아주 약간의 표정만 바꾸고 다리를 절며 류천성의 뒤를 따랐다.
"하읏, 밖에서는 하지 말아요! 이 늙다리 변태야! 성희롱으로 신고할 거야!"
"자. 말해보시게. Y가 명문인가, S가 명문인가?"
"지, 질 줄 알고?! 흐읏, 어디 끝까지 해봐요! 내 입에서 당신이 원하는 말이 나오나?!"
제임스는 머쓱한 듯 손으로 목덜미를 쓸었다.
"저게 저렇게 자존심 내세우며 싸울 일이야?"
정작 그는 본국, 미국의 아이비리그 출신이다.
* * *
<같은 시각, 청화단 아지트.>
"그러니까 말이 안 된다고. 어떻게 네가 나보다 지분이 높지?"
조덕배가 스크린에 뜬 결과에 대놓고 짜증을 부렸다. 유이신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겁니다. 저는 전투가 끝나기 직전에 죽었고, 조덕배 님은 십 수 번이나 죽었으니까요. 공적의 차이는 당연한 겁니다."
"야, 김지화. 너 유이신 몰래 도와줬지? 네가 몰래 알려줘서 막타만 기가 막히게 친 거야. 그치?"
"추하다, 덕배야."
김지화는 흘러내린 선글라스를 치켜올렸다. 은근슬쩍 안경테를 올리는 손가락이 중지인 것에 덕배가 오묘한 얼굴로 지화를 노려봤다.
"불만 있으면 단장님한테 가서 따져봐."
"얘들아. 시끄러워. 2% 이하들은 좀 조용히 해줄래?"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리던 천가을이 조곤조곤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우월감에 덕배는 울컥했다.
"S급 코어 달고 9% 나온 주제에...."
"네, 다음 1%. 바쁘니까 좀 조용히 해줄래?"
가을은 말을 하면서도 시선이 스크린을 향해 있었다. 항상 코트 아래 숨기어왔던 촉수조차 바닥에 그냥 늘어뜨릴 정도로 가을은 스크린에 집중하고 있었다. 유이신이 먼저 조심스레 물었다.
"가을 님. 아까부터 뭘 하시는...?"
"신상 털고 있어."
"...네?"
"우리 꼬맹이한테 욕하는 놈들, 하나하나 찾아서 아카이브 따는 중이야."
지화가 슬쩍 선글라스를 내려 가을의 스크린을 흘깃 살폈다. 이신은 그걸 눈치채고 슬쩍 몸을 붙여 물었다.
"뭔가요?"
"청화단 빌런 <비스트 테이머>, 청화 양을 두고 성희롱하는 자들의 계정을 추적하고 있네요."
"...그게 누구죠?"
"단장님 대외 이름이요."
"청화? ...아!"
지화의 말에 이신은 손뼉을 쳤다. 덕배가 그에 구시렁거렸다.
"말장난이잖아. 청화단의 청화. 누가 봐도 우두머리라도 생각하겠구먼."
"핵심전력으로 생각하게끔 하는 거죠. 서울 차원문의 영향으로 각성한 괴수 조련사. 적당하지 않습니까? 흑염룡을 조종해 서울을 지키는 빌런."
"솔직히 말해. 흑염룡이 인간으로 못 돌아와서 수습하려고 지금 꾸민 거잖아. 틀렸어?"
"......그것도 그렇지만 전략적으로 큰 도움이 됩니다. 6만 서울 사람들이야 잘 알죠. 흑염룡이 누구고, 청화 아가씨가 사실 누구인지. 진실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괴수를 조종하는 건 사실인데."
원탁에게도 들킨 만큼, 청화단이 어떻게 괴수를 조종하는지 그 명분이 필요했다. 다행히 피닉스의 인간형은 아직 대외적으로 비전투원으로 드러난 만큼, 간부들은 둘을 철저히 구분하기를 주문했다.
<비스트 테이머>인 인간 청화.
<블루 피닉스>인 괴인 피닉스.
"전자는 아직 등급 외 판정이지만, 후자는 비공식적으로 SS등급이죠. 그래서 지금 가을이가-"
"웃기지 말라 그래. 피닉스가 관악에서 설화공주 발랐으니까 당연히 최초 SS 타이틀은 피닉스 것 아냐?"
가을은 제 일도 아니면서 신경질을 부렸다. 그러나 다른 괴인들도 어느 정도 이해는 했다. 세계 최초의 SS등급 이능력자이자 현존 최강의 히어로, 그 타이틀은 석하랑의 것이었다. 덕배가 팔짱을 꼈다.
"석하랑이 졌으니까 일단 우리 쪽이 더 위 아닌가?"
"지고 나서 절치부심하고 SS 각성했으니, 다시 붙어봐야 한다는 설이 지배적이에요."
이신이 슬쩍 제가 검색한 자료들을 덕배에게 보였다. 주말 동안 전세계 히어로 커뮤니티의 화제는 동아시아에 나타난 두 이능력자의 대결 구도로 들끓었다.
광검을 죽이고 운장을 쓰러뜨린 괴인, 빌런 피닉스.
단신으로 S급 수마룡 모비딕과 바다를 얼려버린 영웅, 설화공주 석하랑.
불과 얼음이라는 운명적인 라이벌 구도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광검의 죽음으로 자연히 은원관계마저 생겼으니, 사람들이 둘의 대결을 부추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지사였다.
쾅! 가을이 탁자를 내리쳤다.
"아아악! 짜증 나! 어디 편들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잖아!"
"일단 단장님은 빌런이니까."
서울 수복 작전을 방해하고 평양 진격을 망친 빌런이 인기가 좋을 리가 없다. 나름 전문가들은 전력상의 우위를 비추어 볼 때 피닉스의 손을 들어주고 있지만, 심정적으로는 설화공주가 이겼으면 하는 본심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가을이 촉수를 쥐어뜯으며 으르렁거렸다.
"SNS 하나 팔까?"
"관리는 네가 하려고? 아서라."
".......SNS?"
지화가 손으로 턱을 쓸었다. 무언가 아이디어가 떠오른 듯한 모습에 이신은 슬쩍 의자를 지화 옆으로 당겼다.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가을아. 단장님 지금 어디 계시지?"
"지금?"
가을이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스크린을 띄웠다.
- 석하랑이랑 데이트하러 갑니다.
"라고 하네. 나 참."
가을은 분노를 담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세 괴인을 스리슬쩍 라운지를 떠나 자리를 옮겼다. 가을은 그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온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피닉스의 압승을 점쳤다.
"흐흐흐, 두고 봐. 누가 이기나. 뭐? 설화공주 압승? 반박 시 굴라그? 이거 누구야?"
제법 유명한 이의 SNS 메시지에 가을의 손이 굳었다. 하필 원탁이 설화공주를 두둔하고 나섰다.
* * *
<러시아. 모스크바 세레베미예보 국제 공항.>
"누군진 몰라도 악질이네. 새대가리가 이겨? 흥, 누구 딸인데."
아나스타샤는 SNS에 설화공주의 승리를 단언하고 보드카를 들이켰다. 바로 옆에 있던 오라클이 사색이 되어 검지를 입에 붙였다.
"제발 좀 입 닥쳐...! 말실수 하지 말라고!"
"얘. 너 '관측'으로 내 과거 다 봤잖니. 내가 어디 못할 말 했니?"
"네 구구절절한 슬픈 사연 아니까 제발 닥치라고, 이 외계에서 온 빨래판아!"
아나스타샤가 빛처럼 손가락을 튕겨 오라클의 이마를 때렸다.
"죽어버려. 이 관음증 꼬맹이."
"내가 틀린 말 했냐? 너네 원래 육체 주인인 아나스타샤한테 사과해, 당장. 네 영혼이 워낙 강해서 육체도 빨래판 아악?!"
이번에는 제법 강했다. 보드카가 든 유리병으로 오라클의 머리를 후린 아나스타샤는 한참 뒤에 떨어져 있던 경호원들과 기자들에게 방긋 미소지으며 보드카를 들어 올렸다.
찰칵. 기자가 급히 사진을 찍었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돌려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됐단다. 이걸로 기사에는 <플레이보이를 제압한 운디네>라고 헤드라인이 올라갈 거야."
"씨이. 허윤환이라는 남자 분명 머리가 어떻게 된 게 틀림없어. 어떻게 이런 폭력적인 외계인을 좋아하는 거지? 이상성욕자인가? ...아니지, 일단 맞네."
오라클이 아나스타샤를 아래위로 훑으며 비웃었다. 그 시선에 담긴 의미를 순식간에 눈치챈 아나스타샤는 유리병 속 보드카를 회전시켰다. 보드카는 날카로운 송곳처럼 유리병을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비행기는 나 혼자 타야겠구나. 잘 가렴."
"......솔직히 그건 너도 인정해라. 한 140? 네 원래 키 그 정도 잖아. 어떻게 그런 꼬마를 상대로 그런 흉포한 짓을 저지를 수 있지? 나도 그렇게는 못 한다. 참."
명백히 비꼬는 어조에도 아나스타샤는 제 가슴에 손을 올리며 뿌듯해했다. 가릴 골은 없었다.
"그러니까 내 남편이지. 사실상 인간 최초로 SS 아니니."
"...전귀 있거든요? 그리고 내가 오해할 말 하지 말랬-"
"오라클 경. 잠시 나 좀 보세."
등 뒤에 나타난 거구의 남자가 오라클을 불렀다.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수보르프. 군 장성 출신의 A급 이능력자이자 아나스타샤의 아버지였다.
"...네, 네."
오라클은 죽을상을 지으며 그 뒤를 따라갔다. 병나발을 물고 보드카를 마시며 킥킥 대는 아나스타샤를 확 때려주고 싶었지만, 눈앞의 곰 때문에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끼익. 수보르프가 비상구의 문을 열었다. 마력을 풍겨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수보르프가 상체를 숙여 오라클과 눈을 마주했다.
"오라클 경. 자네는 분명 딸아이가 누구에게 반했는지 알고 있겠지?"
"...예. 그렇습니다. <페룬> 님."
이자에게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오라클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럼 그 딸아이가 말하는 남편이라는 ㅅ...흐흠. 남편이라는 자는 누구인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오라클 경!!"
계단이 쩌렁쩌렁 울렸다. 기껏 쳐놓은 결계가 호통 한 번에 깨질 뻔했다. 그럼에도 오라클의 얼굴은 태연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운디네가 직접 밝히지 않는 이상, 제가 감히 천기를 누설할 수 없죠."
수보르프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이보시게. 갑자기 딸이 펑펑 울었어. 그러더니 남편 얘기를 하지 않나, 사랑을 논하지 않는가? 심장마비로 쓰러졌던 이후 20년 동안 남자라고는 한 명도 사귀지 않았던 아이야. 그런 아이가 갑자기 이렇게 되었으니 부모 입장에서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나도 당황스러워 미칠 지경이다. 오라클은 턱밑까지 차오른 말을 겨우 침과 함께 삼켰다.
'어떻게 말해? 당신 딸은 이미 죽었고, 외계인이 그 몸을 차지해서 20년 넘게 딸로 살아왔다고! 심지어 그 외계인은 지구를 정복하려는 성주의 첨병이었고, 광검 허윤환이랑 사랑에 빠지고 애를 낳았어! 그게 설화공주 석하랑이래! 와우, 놀라운 사실!'
"...언젠가 운디네가 직접 밝힐 때가 있을 겁니다. 본인도 상당히 혼란스러워하는 눈치이니, 당장은 원하는 대로 하게 두시죠. 제가 옆에서 잘 지켜보겠습니다."
"그래. ...영 못 미덥기는 하지만."
"제 또다른 이명이 무엇입니까? 오라클을 계승하기 전에는 <큐피트>였습니다. 할리우드 스타들을 이어주던 사랑의 중매쟁이. 저는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면 지지하지 않습니다."
"...거기까지 말한다면 알겠네. 오늘은 순순히 물러가도록 하지. 하지만 말이야."
수보르프는 오라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이를 드러냈다. 그의 손등에는 노란빛의 전기가 번쩍거렸다.
"우리 딸 눈을 멀게 한 놈이 어떤 인간이든, 내 쉬이 넘어가지는 않을 걸세."
"......그 자를 만날 기회가 되면 꼭 전해두겠습니다."
인간도 아니고 당신보다 훨씬 강하더라. 오라클은 뒷말을 삼키고 겨우 결계에서 빠져나왔다. 진이 다 빠져 걸어간 의자에는 아나스타샤가 푼수처럼 석하랑의 활약상이 담긴 영상을 시청하며 입술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오라클은 두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해 항복했다.
"트루 루브 만만세, 썩을."
오라클의 전용기가 두 명의 원탁을 태우고 모스크바를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