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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20화 (120/1,497)

〈 120화 〉1부 6장 (26)

<6월 2일 아침 7시. 중국 시안시.>

새벽하늘에 흐릿한 무언가가 날아다닌다. 새벽에 아낙네들이 밥 짓는 연기라고 하기에는 그 형체가 어느 정도 명확했다.

사람의 형상을 한 안개는 시안 하늘에 열린 차원문 주변을 중심으로 빙빙 돌고 있었다. 단순히 매연이나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은 것이라면 좋으련만, 유감스럽게도 하늘을 뒤덮은 안개는 '영체(靈體)'의 환속성 괴수들이었다.

꺄하하하! 꺄아아하하하!

"피하십시오! 당장 대피소로 대피하십시오!"

히어로들이 급히 뛰쳐나와 사람들을 대피소로 안내했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유령들을 요격 가능한 히어로들이 영체 괴수들을 공격하는 사이, 도검을 든 히어로들은 어떻게든 괴수의 방어선을 뚫어 차원문을 닫으려 했다.

캬아아악!

"벌써 위험종이?! 산개!"

보라색 안광을 흘리는 괴수는 제 손에 든 곤봉을 휘둘러 땅을 내리쳤다. 도로가 흔들려 싱크홀이 생기고, 담벼락이 무너져 길을 막았다.

"차원문이 생긴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괴수들이...?"

"생각은 나중에! 일단 뚫는다!"

히어로들은 어떻게든 괴수들을 차근차근 죽여가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괴수를 하나 죽이면 그보다 강한 괴수 둘이 차원문에서 슬쩍 기어 나왔다.

"차륜전이라도 하자는 건가! 이 망할 괴수들이!"

"A급! A급은 어디로 갔나!"

"없어! 우리끼리 막아야 해!"

히어로는 끌어 오르는 분노를 담아 곡도를 휘둘렀다. 마력을 실은 검격이 목을 할퀴려는 영체를 사선으로 베었다.

푸스스. 영체 괴수는 그대로 재가 되어 인도에 떨어졌다. 도로에는 화산이라도 터진 것처럼 회색의 재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환마룡이 나오기 전에 어떻게든 처리해!"

"아, 안 돼! 그 말을 하면!"

치직, 치직. 스마트워치를 오가던 신호에 조금씩 잡음이 끼기 시작했다. 차원문이 크게 요동치며, 그 안에서 거대한 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

몸길이만 30m 가까이 되어 보이는 사족보행의 괴수가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사나운 사냥개를 닮은듯한 외형대로 환마룡은 혀를 날름거리며 제 먹잇감을 찾아 코를 킁킁댔다.

■■?

저 멀리 동쪽에서 이질적인 냄새가 느껴졌다. 모래바람을 타고 흘러오는 바람 사이에 섞인 그 냄새는 마치 장작이 불타는 듯한 탄 내였다.

이윽고 환마룡은 그 냄새의 정체를 깨달았다. 지평선 너머, 공중을 질주하는 붉은 말의 위에 올라탄 여인의 손에 들린 푸른 언월도. 그곳에 죽여 마땅한 정령의 마력이 깃들어있다.

■■■■■?!

환마룡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 세계의 인간 따위가 정령의 분령을 들고 있다는 말인가? 그 고민을 하기도 잠시, 환마룡은 이빨을 날카롭게 세우며 그르렁거렸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상대는 자신을 죽이려 하듯, 자신도 상대를 뼈째 씹어 삼키면 끝날 일이었으므로.

■■■■!!

환마룡이 주변 영체 괴수들을 입에 머물고 우물거렸다. 금방 차원문을 넘어오면서 고갈된 마력을 채우기 위해 주변 영체들을 씹어 삼켰고, 그 오염된 마력은 환마룡의 입에서 브레스의 핵이 되었다.

"피, 피해!"

환마룡이 브레스를 쏘려 한다. 다른 마룡과는 달리 환마룡의 브레스는 파괴력이 거의 없지만, 사선에 닿은 이들에게 죽음의 저주를 끼얹는 정신계열의 공격이었다.

환마룡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막 사람들을 대피시키던 히어로는 하늘을 가리키며 굳어버린 어린아이를 다급히 안아 들었다.

"위험해!"

"아저씨, 저기 적토!"

히어로는 아이의 손끝으로 눈을 돌렸다. 환마룡의 브레스가 뿜어질 사선을 꿰뚫듯, 붉은 유니콘이 적색 기류를 흘리며 환마룡에게 질주하고 있었다.

"적토라고?!"

"그럴 리가! 저게 적토면 적토 위에 타고 있는 저 사람은-"

히어로들이 눈앞의 현실을 부정했다. 적토의 위에 올라타 칼날에 푸른 불꽃을 두른 언월도를 손에 쥔 자는 아무리 봐도 '여인'이었다. 히어로는 아이를 안은 그대로 제자리에 멈춰 섰다.

"운장님이...여자?"

"머리카락 예뻐!"

아이는 까르르 웃으며 여인의 비단결 같은 머리칼을 가리켰다. 허공을 질주하는 말에 타고 있음에도 여인의 머리는 끝이 가지런히 묶여있었다.

"누, 누가 적토를 훔쳐서 타고 오는 거다!"

"군신께서 여아일 리가 없잖아!"

히어로들이 무어라 지껄이든 환마룡은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건 저 맛있어 보이는 인간이 손에 든 물건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였다. 환마룡의 고개가 살짝 뒤로 젖혀졌고,

■■■■■!

회색빛 브레스를 허공에 토해냈다. 비명 같은 마력의 광선은 직선으로 쏘아져 적토와 여인을 덮쳤다. 그야말로 빛처럼 쏘아진 브레스는 금방 적토와 여인을 덮쳤다.

히히힝-!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적토는 브레스가 닿기 직전에 허공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말발굽에서 마력이 분사하며 브레스 위를 스쳤고, 적토는 그대로 환마룡의 브레스를 '타고' 달렸다.

■■■■■?!

재빨리 입을 닫은 환마룡이 주변 영체 괴수들을 움직였다. 유령들은 손톱을 세우며 적토에게 달려들었지만, 적토는 질주의 풍압만으로 유령들을 튕겨냈다.

환마룡은 당황하면서도 입을 쩍 벌렸다. 너무나도 빠른 속도에 무언가 수를 내기에는 어려워서, 그대로 제 몸의 공격수단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적토가 그를 비웃고, 여인은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안장에서 살짝 몸을 띄웠다. 푸른 망토 아래 드러난 여인은 맨발로 적토의 안장 위에 쭈그려 앉았다. 여인이 손에 들린 언월도가 푸른 빛을 내며 번쩍였다.

"일격(一擊)."

여인, 샤오린은 자신에게 되뇌었다. 상대를 쓰러뜨리는 데 필요한 것은 오로지 일 합. 일격에 죽일 수 있다면 일격에 죽인다.

■■■■! 환마룡이 자세를 낮추었다가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 깨물어 부수려는 기세에도 적토는 앞으로 질주했다.

"히힝!"

적토의 신호와 함께 샤오린은 안장에서 뛰어올랐다. 적토는 재빨리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환마룡은 허공을 씹었다.

샤오린의 몸이 환마룡의 위에서 반 바퀴 돌았다. 망토 사이로 드러난 다리가 지평선 위로 드러난 햇빛에 반짝였다. 샤오린은 회전하는 그대로 언월도를 휘둘렀다.

"필살(必殺)!"

언월도의 참격이 반월을 그리며 낙하했다. 마치 단두대처럼 땅으로 떨어지는 샤오린의 참격에 환마룡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둘로 갈라졌다.

■■■■■...?

환마룡의 몸이 좌우로 벌어졌다. 몸 가운데에 있던 환마룡의 핵은 이미 참격에 반으로 쪼개졌고, 참격이 담고 있던 희미한 정화의 불꽃에 재조차 남기지 않고 사그라들었다.

탓. 샤오린은 건물 옥상에 살포시 착지했다. 태양을 등지고 선 샤오린의 모습은 선계에서 내려온 선녀를 보는듯했다.

"푸르르."

적토가 샤오린의 옆에 섰다. 환마룡의 사체는 그대로 재가되어 스러졌다.

샤오린이 몸을 일으켜 창끝으로 난간을 찍었다. 바람에 푸른 망토의 앞이 살짝 들리며 맨다리가 훤히 드러나고, 끝을 살짝 묶었던 끈이 풀리며 긴 머리가 흩날렸다.

붉은 가면과 녹색 전포는 온데간데없고, 수염 대신 긴 머리칼을 흩날리는 여인이 중국의 S급 히어로이자 원탁의 히어로인 운장이었다? 히어로들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무용(武勇)은 명실상부한 운장, 아니 그 이상이었다.

샤오린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고층 건물의 난간에서 사자후를 터뜨렸다.

"무얼 꾸물거리나! 당장 괴수들을 죽이지 않고!!"

추상같은 호통에 히어로들이 퍼뜩 정신이 들었다. 명령을 내리는 중성적인 목소리는 이전처럼 여상스러웠으나, 그 목소리에 실린 마력은 이전보다 더 농후하고 깊었다.

히어로들은 깨달았다. 운장이 스스로의 가면을 벗고 제 본모습을 보인 이유를.

운장은 지금까지 막혀있던 다음 경지로 나아가는 상승의 단계에 이르렀다.

히어로들은 언제나처럼, 그러나 예와 존경을 담아 샤오린에게 포권을 취하며 명령에 응답했다.

"존명(尊命)!"

운장 이하 히어로들의 빠른 대처 끝에, 시안의 차원문은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고 소멸했다.

* * *

<그 시각. 북경, 중앙당사 괴수관리대책국 국장실.>

"봉효야."

"예, 아버님."

"아무래도 샤오린을 원탁에 넣자는 네 기책은 실패가 된 모양이구나. 감히 제 얼굴을 드러내다니."

모택평은 의자에 앉아 작은 구슬을 손에서 계속 돌렸다. 동창의 제독이자 모택평의 사생아 중 한 명인 봉효는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송구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 평양 진격은 무위로 돌아갔고, 샤오린은 나와 네게 일언반구도 없이 제 정체를 드러냈다. 그리고...."

모택평은 스크린에 사진을 띄웠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인질로 잡힌 샤오린과 검은 갑주의 괴인이 사진에 담겨있었다.

"운장이 패배했다는 굴욕까지 당했지. 자, 어찌 수습할 테냐?"

"......평양으로 간 샤오린은 대역이었음을 알리겠습니다. 진짜는 북경에서 이 땅 어디든 수호할 수 있도록 대기 중이었으며, 차원문 발생에 따라 적토가 단둥에서 시안까지 달렸다 선전하겠습니다."

"그걸 믿을까, 과연? 사람들이 그리 우민이더냐?"

봉효는 뜸을 들이며 단언했다.

"그리 믿도록 만들겠습니다. 믿지 않는 자는 더는 말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결코 아버님께 해가 되는 일이 없도록, 행여나 오물을 뒤집어써도 제가 쓰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가장 우수한 내 아들이지. 어서 가보거라."

모택평은 손을 흔들어 축객령을 내렸다. 봉효는 미소를 머금은 채 뒷걸음질로 국장실을 빠져나왔다.

"......."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긴 봉효는 그대로 제 집무실 문을 열고 간이침대에 몸을 던졌다. 온몸의 긴장이 가라앉고 참아왔던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후우, 후으. 버려질 뻔했군."

까딱이라도 잘못했다가는 형장의 이슬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부친은 평소보다 판단이 흐려져 있었고, 그 덕분에 봉효는 버림받지 않고 살아남았다.

"샤오린 이 녀석,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봉효는 얼굴을 두 손으로 덮었다. 지금까지 꼭두각시처럼 잘 말을 듣던 아이가 왜 갑자기 가면을 벗고 전면에 나섰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압록에서 그대로 죽거나 인질로 잡혀갔어야지, 다시 돌아오면 어쩌자는 말이냐."

이래서야 기껏 원탁으로 빼내 준 의미가 없지 않은가. 봉효는 손으로 얼굴을 쓸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샤오린에게 직접 물어봐야겠어."

스크린을 띄운 봉효의 손가락이 바빠졌다.

* * *

<시안 시.>

히어로들은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유령 괴수의 사체를 치우며 코어를 수습하고, 위험종의 사체는 따로 모아 화염술사를 동원해 불태웠다.

그 모든 과정은 중앙에서 똑 부러진 지시를 내린 샤오린 덕분에 일사천리였다. 중앙당과 협회에서 사람이 파견되기 전까지, 샤오린이 현장에서 가장 히어로 등급이 높은 총책임자였다.

"저, 운장 님...."

"왜 그러나?"

옷도 가볍게 입더니 말투도 가벼워졌다. 뒷머리를 슬쩍 손으로 모아 말총처럼 묶는 행동에 히어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연유로 가면을 벗으신 겁니까? 분명 국장님께서는-"

"답답해서."

샤오린은 제가 말해놓고도 제 답변에 감탄했다. 답답해서. 답답해서라.

"답답해서 싹 다 벗었어."

샤오린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망토를 감싸 안았다.

* * *

<오전 8시, 피닉스 펜트하우스.>

"푸엣취!"

피닉스가 막 마시려던 물을 뱉었다. 입술 아래로 흐르는 물을 닦을 생각도 못 한 채, 피닉스는 흰나비 배지를 잡고 되물었다.

[히메지 히카리가 배에 타고 있었다고?]

흰나비가 반짝였다.

[응. 뭐라더라, 서울에 생긴 이상 현상을 보고 제 연구의 실마리를 잡았다나? 티켓은 해킹해서 넘어온 거래.]

석하랑이 간단히 부산의 상황을 설명했다. 은유하의 호의로 히메지 남매는 호텔에 머물게 됐지만, 왜 히메지 히카리가 중학생의 몸으로 한국행 배에 올랐는지는 그 누구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어려서부터 싹수가 있었지. 잘했다.]

[갑자기 왠 칭찬?]

[잘했으니까 잘했다고 하는 거다. 무사히 모비딕을 쓰러뜨려 줘서 고맙기도 하고.]

[너 뭐 잘못 먹었니?]

피닉스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나중에 만나면 설명해주마. 중국 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도 오늘은 쉬어야겠다. 고생했다, 석하랑.]

[...흐, 흐흥. ...너도 고생했어. 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피곤한 게 여기까지 느껴지네.]

피닉스는 피식 웃으며 교신을 종료했다. 피닉스가 뱉은 물을 촉수로 닦아내던 가을이 슬쩍 몸을 밀착하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응?"

"별일 아녜요. 그냥 생각할 게 좀 많아서.... 어? 가을 씨 지금 은유하랑 메신저 하는 거예요?"

피닉스가 가을의 스크린을 가리켰다. 가을이 화들짝 놀라 손목을 숨기려 했지만, 이미 피닉스는 스크린의 내용을 곁눈질로 다 파악했다.

"딸기는 폭사? 이게 무슨 소리예요?"

"......아가씨들 사이의 비밀 대화야. 알려고 하지 마."

가을이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피닉스는 어물쩍 넘어가려는 가을의 태도에 모른 척 제 스마트워치를 조작했다.

[호갱님! 어쩐일로 저한테 전화를- ...천가을이 옆에 있네요?]

"연락할 게 있어서 전화했어요. 통화돼요?"

[우리 사.랑.하.는. 호갱님께서 직접 전화해 주셨는데 당연히 가능하죠~. 후후.]

분명 연락은 피닉스가 걸었는데 은유하와 천가을이 눈싸움을 벌인다. 피닉스는 멀뚱멀뚱 둘을 번갈아 보다가 스크린을 두드렸다.

"은유하 아가씨? 용건이 두 가지 있어요."

[...흠흠. 네. 말씀하세요.]

"하나는 아니사키스의 코어 문제입니다. 협회랑 정부에서 다 가져갔죠?"

[......네.]

은유하는 최대한 감정을 죽였지만, 목소리에는 약간의 짜증이 서려 있었다. 피닉스는 스크린을 조작해 사진 하나를 전송했다.

"중국 쪽에 둥지를 하나 박아뒀어요. 이제 남쪽뿐만 아니라 북쪽에서도 주기적으로 코어 수급이 이루어질 것 같으니, 계약을 갱신해야 할 것 같아요."

[진짜요?! 와, 사랑해요! 저 당장 여의도로 올라가도 돼요? 올라가는 길에 계약서 새로 써서 들고 갈게요.]

"네. 대신 계약 두 번째 조건이 있어요."

피닉스가 머쓱한 얼굴로 볼을 긁적거렸다.

"광검, 원래 주인한테 팔아버렸어요."

[......지금 저한테 거래 사기 치셨던 거예요?]

[사람을 두고 멋대로 사고 팔지 말거라, 유하야. 저 쓰레기가 또 쓰레기같은 말을 하는 걸 테니.]

울컥한 피닉스는 그대로 입을 닫았다.

* * *

아나스타샤는 눈을 떴다. 불과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지만, 아비의 품에서 펑펑 울다가 쓰러졌다는 것에 살짝 부끄러웠다. 아나스타샤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고, 저를 보는 여섯 쌍의 눈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나랏일 두고 여기서 뭐 하시는 거죠?"

"누가 널 울렸니. 말하렴. 당장 모가지 뽑아버리게."

"아버지. 작전 당시에 근처에 가웨인, 오라클, 운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좋아. 미국이군. 당장 비행기 띄워."

팔불출이 심하다. 아나스타샤는 호들갑을 떠는 제 아비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원탁의 머저리들 때문에 운 게 아니에요. ...기뻐서 울었던 거예요."

"......뭐?"

두 손을 제 가슴 위에 올리며 얼굴을 발그레 붉힌 아나스타샤는 제 가족들의 표정이 오묘하게 심각해지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게...."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부끄러워하는 아나스타샤의 행동에 일가족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미 모두가 가정을 꾸린 이들은 아나스타샤의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나스탸샤는 손으로 제 뺨을 감싸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사랑하는 서방님을 다시 만나서 너무 기뻤...아빠?!"

수보르프는 쓰러졌다.

* * *

차원문은 사라졌다.

소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알람이 울릴 때는 잠이 더 잘 왔지만, 알람이 정작 꺼지니까 불안함에 잠이 절로 달아났다.

평소같았으면 더 자고 싶었다.

그러나 지상에 있는 이질적인 마력에 소녀는 본능적으로 이 자리를 떠나야 한다고 확신했다.

"으으으. 다른 애들이 다 알아서 할텐데 내가 왜 귀찮게 나서야 하는 거야...."

소녀는 부스스 몸을 일으켜 석실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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