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19화 (119/1,497)

〈 119화 〉1부 6장 (25)

<6월 2일 7시. 여의도 청화단 아지트.>

"이걸로 한숨 돌렸네요."

나는 딸기라떼를 쭉 들이켜며 시름을 놓았다. 중국 히어로들에게 살해당한 괴인들은 누구도 코어가 부서지지 않고 무사히 복귀해 부활했다.

"뭔가 흐지부지 끝난 것 같지만요."

김지화는 선글라스를 벗고 아이스티를 집어 들었다. 오라클과 1:1로 설전을 벌여 꽤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온 만큼, 비록 전투에는 나서지 않았어도 이번 원정의 초기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한 일등 공신이었다.

"뭐가 흐지부지야. 완전 난리가 났더구먼."

아침부터 맥주를 마시는 제임스는 지화가 정리한 전황 보고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뜬눈으로 기다리던 류천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운장은 일격에 기절, 적토도 마찬가지. 단장, 새삼 느끼지만 자네 정말 강한 사람이었군."

"후후, 존경심이 생기나요?"

"그러니 평소에도 괴인형처럼 무게감을 좀 잡으시게."

절로 콧잔등이 올라갔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다리를 가리켰다.

"운장이 SS로 올라가지 못하는 이유가 이거예요. 적토를 타고 있으면 제 몸의 일부를 적토에게 맡기니까, 중요한 순간에 다리가 굳어버리죠. 그게 약점이라 쉽게 공략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그 아나스타샤라고 하는 여자랑은 무슨 관계인데?"

가을이 새초롬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왜인지는 몰라도 가을은 딸기 에이드를 주문했다. 나는 음료로 목을 축이고 간단히 설명했다.

"광검의 아내이자 석하랑의 어머니, 루살카예요. 죽었던 정령이 러시아의 아가씨로 전생? 빙의? 뭐 그런 거죠."

"......92년생이면 천가을이랑 동갑 아니냐?"

조덕배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써 다 마시고는 얼음을 씹으며 말했다. 가을은 잠시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손뼉을 치며 반색했다.

"어머나! 누구는 그 나이에 벌써 21살 딸이 있네? 아하하! ...이럴 줄 알았냐? 야! 내가 나이 얘기하지 말랬지!"

"얘기 안 한다고 없던 나이가 줄어드나."

덕배의 빈정거림에 가을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옆에 있던 유이신이 스크린을 주시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블라디미르.R.아나스타샤. 올해로 28살이라고 하면 광검님과의 나이차이는...."

"광검 78일 거다. 아마도."

간부들은 말을 잃었다. 내가 음료를 쪼르르 빨아당기는 소리만이 라운지에 울렸다.

"뭐 어때요. 애초에 루살카는 인간도 아닌데. 그리고 지금 둘 다 성인이잖아요. 뭐가 문제예요?"

"블라디미르 가문은 현재 러시아 정부의 요직을 맡고 있습니다. 특히 아나스타샤 님의 작은 아버지는...."

"그만. 나 지금 홍차 마시고 있네."

류천성이 손을 벌벌 떨며 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선의철 상대로는 당당하게 나섰던 양반이 뭘 그리 겁먹어요? 괜찮아요. 루살카.... 아니죠, 운디네는 이제 무조건 우리 편이에요."

"네?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그분 입장에서 단장님은 남편을 죽이고 딸을 강제로 각성시킨 악당이 아닙니까. ...핫."

유이신이 말을 해놓고도 스스로 놀라 입을 가렸다. 딱히 틀린 말이 아니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상황이었다는 걸 본인도 이해했으니 그건 괜찮아요. 문제는 원탁 소속이라는 건데, 아주 좋은 '거래'를 해서 그 부분은 걱정 안 해도 돼요."

"거래?"

얼음을 씹어 삼킨 덕배가 내게 또 무슨 짓을 저질렀냐는 눈빛으로 쏘아봤다. 나는 빨대로 얼음을 휘휘 저으며 웃음을 애써 삼켰다.

"고객님이 가장 원하는 물건을 팔기로 했어요. 푸흐흐."

"...너 은유하 따라 한 거야, 지금?"

가을이 딸기에이드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다른 간부들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나는 마력을 슬쩍 흘려 간부들을 압박했다.

"앉아요. 아직 이야기 안 끝났으니."

엉거주춤 일어서있던 간부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가을은 무안함에 슬며시 앞머리를 정돈했고, 나는 가을의 에이드를 손으로 잡았다.

"목말라서 좀 마실게요."

"...어, 응. 그래."

입안에 남아있던 찝찝한 우유를 말끔히 에이드로 씻어내렸다. 나는 스크린을 띄워 이번 전투를 결산했다.

"여러분들도 느꼈다시피, 아직 여러분들의 전투력은 몹시 부족해요. 다들 한 두 번은 죽었고, 마지막에는 팬텀과 등대 빼고는 다 코어가 되었죠. 흑염룡이야 하늘에서 날뛰었으니 논외."

"저, 저희 그래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유이신이 목소리를 높였다. 간부들이 눈치를 줬지만, 유이신의 똑부러지는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비록 A급 히어로들은 제지하지 못했지만, 성공적으로 나머지 3500여 명의 발을 묶었습니다. 저희는 최선을-"

"알고 있어요. 안 보이는 곳에서 열심히 한 거.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죠. 사실상 이번 작전은 실패라고 봐도 무방해요. 차원문이 생기지 않고 원탁이 적으로 돌아섰으면 100퍼센트."

간부들의 표정이 불편해졌다. 자신들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했겠지만, 전과를 따져보면 그들의 공적은 극히 미미했다.

"저랑 등대는 논외. 어디 전공을 따져볼까요? 흑염룡 지분이 47%, 미니 피닉스들 전체가 31%, 팬텀이 9%로 여기서 가장 높네요.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고."

"...내가 고작 1% 따리라고?"

덕배가 신경질을 부렸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손가락을 다 펼쳤다.

"너무 많이 부활했어요. C급이라면 놀라운 전과지만, 덕배 씨는 A급 화염 거인으로 싸웠잖아요? 인정하세요."

"쳇."

덕배는 투덜거리면서고 제 아래에 있는 이름들을 보며 위안으로 삼는 듯했다. 류천성이 내가 정리한 결산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 와중에 이걸 다 정리했다는 말인가? 거 참."

"미니 피닉스들 도움이 컸죠. 아무튼 앞으로의 계획에 있어서 여러분들의 성장이 필요해요. 무척이나."

"......당장에 눈에 띄는 성장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꽤 큰 성과 같기도 한데."

제임스가 내 눈치를 보며 간부들을 슬쩍 두둔했다. 류천성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 동조하는 눈치였다.

"너무 조급해지지 마시게, 단장. 그 성주라는 자가 오기까지 아직 5년이 남았지 않은가. 나를 보시게. 나는 벌써 몇 년째 A급에 머물러있지만, 언젠가 S급에 오를 수 있을 거라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하아. 알겠어요."

나는 원작에서 하늘성이 A급 빌런으로 등장한다는 말을 애써 삼켰다. 류천성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너무나도 명확했기에, 나는 숨을 고르고 에이드를 전부 마셔버렸다.

"좋아요. 일단 오늘 오전은 휴식. 중국의 차원문이 어떻게 될지 예의주시하고, 점심 먹은 뒤에 코어를 수습하기로 하죠."

"너무 늦지 않아? 그 사이에 문제라도 생기면?"

가을의 걱정에 나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한강을 가리켰다.

"쟤가 저렇게 지키고 있는데, 뭐가 문제겠어요?"

마포대교. 그 다리 아래에 검은 드래곤이 물 위에 웅크린 채 코어를 잔뜩 품고 있었다.

* * *

다시 만나게 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루살카는 아나스타샤에 빙의한 순간부터 20년을 고민하고 고민했다. 허윤환이 한국에 살아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를 찾아가지 못했고, 제 딸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직접 마주하지 못했다.

'무서웠어.'

두려웠다. 루살카, 이제는 아나스타샤가 된 인간에게는 테라에서의 기억이, 세뇌된 간부의 기억이 모두 이어졌다.

'나는 루살카일까, 아니면 아나스타샤일까.'

때로는 자신이 루살카라는 정령의 기억을 이어받은 아나스탸사 본인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남들 앞에서는 착한 인간 딸아이를 연기했지만, 속으로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수도 없이 속을 썩였다.

'어느 쪽이든 관계없었어. 중요한 건 그이와 딸아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살카는 허윤환만을 바라보며 인간의 삶을 살았다. 하루하루 살아가며 저를 사랑해주는 아비와 언니·오빠들의 사랑 속에 정령은 인간애를 깨닫고 아나스타샤의 삶을 이어가기로 했다.

'감히 남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오려던 놈들은 다 얼려버렸지만.'

다만 그 누구도 아나스타샤의 마음에 이성으로서 들어오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극도의 절제로 광검에 대한 제 사랑을 숨겼고, 가족들도 결국 아나스타샤의 혼인을 포기했다.

- 5월 9일, 광검 허윤환 사망.

아나스타샤가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던 날이다. 그야말로 세상이 떠나라 울었고, 블라디미르 저택은 살얼음판이 내려앉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입에 대지 않던 술로 그나마 제 슬픔을 위로해왔다.

그런데 그로부터 3주 즈음이 지난 이 시점. 허윤환의 죽음에 그 망할 새대가리가 있다는 걸 알고 사생결단을 낼까 했지만, 새대가리는 제 나름의 논리적인 이유를 들어 허윤환을 죽여야 했던 당위성을 설파했다.

'그렇다고 남의 남편을 죽여? 썅년.'

이해는 했다. 아나스타샤도 남편과 딸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까.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일단 무조건 허윤환을 죽이고 보자는 새대가리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대화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죽이려던 걸까. 스스로는 세뇌를 풀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아직 세뇌가 덜 풀린 게 아닐까 아나스타샤는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새대가리 아냐?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나스타샤는 새대가리에 대한 고민을 포기하기로 했다. 애초에 테라에 있을 때부터, 간부로 세뇌되어 있을 때도 그 새대가리는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이상한 존재였다.

'힘만 더럽게 세 가지고.'

성주가 마지막에 새대가리를 제압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세뇌된 여섯 간부와 성주를 상대로 본신으로 끝까지 저항하고 발버둥 친 모습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근데 그런 애가 왜 이런 멍청이가 된 거지?'

성주가 세뇌하면서 뇌를 너무 세게 주무른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이 이리도 변할 리가 없다.

'...사람이 변한다라.'

아나스타샤는 애써 그를 이해하려고 했다. 자신이 변했듯, 그도 변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애써 이해하려고 했다. 어찌됐든 아나스타샤나 새대가리나 같은 세계의 존재고, 같은 신분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래. 변해가고 있는 걸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주변에 그렇게 사도를 늘어놓을 리가 없지.'

사도 하나 없이 홀로 싸우다 세뇌당한 것을 반성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나스타샤는 스스로 수도 없이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후우."

아나스타샤는 바닷냄새에 발걸음이 절로 멈췄다. 새대가리가 알려준 마력의 잔향을 따라 공간을 날아온 끝에는 검은 망토를 휘날리는 가면의 기사가 땅을 등지고 서 있었다.

"푸흣."

아나스타샤는 그 뒷모습을 보며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날, 그들이 강원도 바다에서 처음 만났던 날. 약하디약한 인간이 저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선 모습에 흥미를 느꼈던 게 어느덧 사랑으로 발전했다.

"듬직해졌네. 서방님."

한 나라의 최강이라는 타이틀은 허투루 얻은 게 아닌지, 멀리서 느껴지는 마력만으로 그의 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아나스타샤보다 어느덧 훨씬 높은 경지에 올라있었다.

부웅!

허윤환이 손을 가볍게 휘두르자 바다가 갈라졌다. 튀어 올라오던 괴수들은 일격에 절명했다. 아나스타샤는 손을 들어 올리려다 무안하게 다시 손을 내렸다.

"내가 지켜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강해져버렸어."

혼란스러웠다. 알고는 있었다. 이제 상대는 자신이 알던 그 지켜주어야 할 연약한 인간이 아니다.

"혹시 만약에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었으면 어쩌지...?"

제 마음을 들킬까 봐 제대로 조사도 못 했다. 물론 겉으로는 광검이 미혼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20년 동안 연애 한 번 하지 않았으리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남들 모르게 누구랑 사귈 수도 있고...."

불안했다. 나는 아직 사랑을 잊지 못했는데, 만약 저 사람의 마음속에 내가 없다면. 행여나 다른 사람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불안하고 두려웠다.

아나스타샤는 더는 다가가지 못했다. 약 10걸음. 고작 10걸음을 앞두고 아나스타샤는 선 채로 얼어버렸다.

허윤환은 수풀에 주저앉았다. 무언가 중얼중얼 거리는 게 은근히 신경 쓰였다. 아나스타샤는 귀에 온 정신을 집중했고, 아주 미세하게나마 듣고 말았다.

- 호텔...지금...걸릴 수도...

'젊은 여자 목소리.'

아나스타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흐름에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대신 마음이 아팠다. 그가 죽었다고 들은 날의 고통보다, 그에게 칼로 심장이 찔렸던 고통보다 지금이 더 아팠다.

'그래. 20년이나 지났는데.'

아나스타샤는 발걸음을 돌렸다. 눈치채지 못하게. 그래서 아나스타샤는 누군가의 묘비에 주저앉은 허윤환을 보지 못했다.

'행복해지렴.'

당장은 그저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눈을 감고 전이를 끝마친 순간.

"나중에 루살카 만나면 한 소리 듣겠어."

키득키득 웃는 목소리에 아나스타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바닷바람을 타고 흘러온 목소리에는 진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웃을 듯 울 듯한 얼굴로 확신했다.

아직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아나스타샤는 황급히 몸을 돌렸지만, 이미 다리부터 전이가 시작되었다. 한번 전이를 사용한 이상 되돌릴 수는 없었다.

'안 돼.'

새벽부터 전이를 너무 많이 사용했다. 모스크바에서 사할린, 사할린에서 비행기, 그리고 단둥에서 부산까지. 마지막으로 모스크바의 자택으로 돌아가는 마력만 남아 더는 전이할 마력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떠나야 한다고?'

당장이라도 전이를 멈추고 싶다. 그러나 이미 몸은 반 이상이 사라져버렸다. 망연히 손을 뻗었던 아나스타샤는 허탈한 얼굴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디 한 소리만 듣겠니?"

아니야.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닌데. 무언가 다시 말을 하려고 할 틈도 없이, 아나스타샤는 모스크바의 제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아, 하하하."

실소가 나왔다. 20년 만에 낸 용기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리다니. 이렇게 쉬운 발걸음을 20년 동안 하지 못하고 홀로 전전긍긍했던 자신이 한심스럽고 미웠다.

"흐, 흐으으."

이를 악물고 입술을 깨물지만 흘러나오는 설움은 멈출 수 없었다.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말을 듣지 않고, 자꾸만 속에서 무언가 복받쳐 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

쾅쾅쾅! 방문 너머에서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나스타샤?! 소식은 들었다! 왜 아무런 연락도 없이 전장에 가버린 거냐!"

엄한 부친의 꾸짖음이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나스타샤는 애써 코를 훌쩍이며 답을 하려고 했지만,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아쁘아...."

쾅! 문이 부서지며 성난 곰 한 마리가 들어왔다. 거구의 중년 남자는 씩씩거리며 화를 내려다 아나스타샤의 얼굴을 보고 놀라 한걸음에 침대로 달려왔다.

남자, 아나스타샤의 부친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수보르프는 묵묵히 아나스타샤를 안았다.

"그래.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어라. 사랑하는 내 딸아."

"흐아아아아앙!!"

아나스타샤는 부친의 품에서 부모 잃은 아이처럼 서럽게 울다 지쳐 기절했다. 놀란 수보르프가 의사를 불러 진단하니, 가벼운 마력 탈진이었다.

수보르프는 아나스타샤의 옆에서 붙어 앉아 극진히 간호하며 화를 삭였다.

"이 망할 원탁 놈들.... 감히 우리 딸을 울릴 정도로 힘들게 했겠다? 눈에서 피눈물을 나게 해주지."

수보르프는 분노를 머금고 누군가에게 연락을 걸었다.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곧 스크린에 나타난 머리가 벗겨진 남자는 찻물을 내리고 있었다.

[형님. 지금 긴급회의 중....]

"원탁 놈들이 내 딸을 울렸다."

[누굽니까?]

남자의 눈이 매처럼 번뜩였다. 홍차가 흐른 그의 명패에는 총리라는 직함이 걸려있었다.

* * *

"...진짜 오한이 드는데."

[고생하셨어요. 질풍객 들어갔으니까 이제 호텔로 오셔도 되겠네요.]

"하랑이 때문인가?"

[술 때문 아닐까요?]

허윤환은 몸을 으스스 떨며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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