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1부 6장 (23)
블라디미르.R.아나스타샤
히어로네임 : 운디네
소속 : 원탁의 기사(The Round Table) 2기
국적 : 러시아
생년월일 : 1992년 10월 13일
신장 : 159cm (본인피셜 160)
히어로 등급 : S
이능력 : 빙결계, 수류계, 순간이동
# 러시아의 설녀. // 한국에 설화공주가 있다면 러시아에는 운디네가 있다고 할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히어로다. 현재 원탁에 소속된 히어로로서 러시아 전체의 국방을 책임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병환. // 어린 시절 병을 크게 앓아서 심장마비로 사망 판정을 받았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기억에 상당한 혼란이 있었지만, 다행히 금방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유증 때문인지 몸이 약해 약을 달고 산다고 한다.
# 텔레포트. //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이동할 수 있는 <운디네>의 이능력. 이 덕분에 러시아는 넓은 영토 전체를 방어할 수 있게 되었다. 설화공주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떨어지는 마력량에도 불구하고 원탁에서 영입한 이유가 이 때문.
# 한식사랑? // 의외의 중증 한식 덕후. 모스크바에 생긴 퓨전 한식당을 들렸다가 식당을 엎어버렸다거나, 김해공항 돼지국밥 난동 사건의 흑막이 운디네였다는 것은 제법 유명한 사실이다.
히어로 위키 <운디네> 항목 중.
* * *
샤오린은 행복한 꿈을 꾸었다.
새장안에 갇혀있던 새가 자유를 되찾아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꿈. 그 속에서 지금과는 다르게 마음을 터놓고 티격태격하는 동료들도 있었고, 꿈에서만 그리던 이상적인 낭군님도 있었다.
"......아."
그러나 그 달콤한 꿈은 어디까지나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눈을 뜨고 나니 새삼 깨달았다. 배가 욱신거리고,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팔다리를 구속하는 이 정체불명의 물체가 신경 쓰였다.
몰캉. 사지를 묶은 회백색의 촉수에 샤오린은 질겁을 했지만, 그보다 제 얼굴을 가리던 가면이 사라졌다는 것에 더 놀랐다. 샤오린이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려 했지만, 손은 촉수에 구속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소용없어. 네 마력 실시간으로 타고 있으니까."
촉수로 샤오린을 구속한 팬텀이 옷을 가리켰다. 녹색 전포는 사라지고 푸른 불꽃의 망토가 샤오린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마력이 거의 사라지기는 했어도 최소한의 마력은 느낄 수 있다. 마력으로 된 망토가 해제되면 샤오린은 곧장 나체가 된다는 사실에 부끄러워 고개를 떨구었다.
"저, 이건, 어떻게 된...."
"너 졌어. 우리 쪽 이능력자한테."
팬텀이 둥지 근처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의 소년이 선글라스의 남자와 설전을 주고받고 있었다. 샤오린이 반색했다.
"오라클...!"
"그뿐만 아니야. 나 참, 당신 원탁에서 꽤 중요한 사람이었나 봐?"
팬텀이 강가에 선 남자를 가리켰다. 금발벽안에 흰 갑주를 입은 남자는 사자후를 터뜨리며 중국 히어로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 이상의 접근은 원탁에서 용서치 않겠습니다! 조속히 돌아가십시오!"
"인질이 잡혀있는데 그냥 돌아가라는 말이 가당찮은가! 원탁은 중국의 편인가, 아니면 저 악당들의 편인가!"
"원탁은 정의와 세계 평화를 위해 움직입니다! 만약 이 강을 넘어오게 된다면-"
가웨인이 다리에 갈라틴을 꽂아 넣었다.
"누구든, 태양 아래에서 저를 상대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덧 지평선 너머로 태양이 머리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다리에 꽂힌 갈라틴이 태양빛을 머금으며 적금색 마력을 흩뿌렸다.
"크윽! 그, 그러면 운장님이라도 구속을 풀어줘라! 같은 원탁이 저렇게 잡혀있는데, 지금 그 대장이라는 자가 무엇을 하는 게냐?!"
"야! 당장 영상장비 없애! 운장님의 존안이 세계에 드러나서는 안 된다!"
붉은 머리띠의 히어로들이 옆의 히어로들을 제지하지만, 순수하게 협회에 소속된 히어로들은 넋을 잃고 운장의 치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S급 괴수도 일격에 쓰러뜨리던 최강 무인의 정체가 가녀린 아녀자라는 것도 놀랄 지경인데, 반투명한 망토에 몸을 간신히 가린 채 촉수에 사지가 구속되어 있다는 것이 히어로들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동시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부정한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쌀풀같이 끈적끈적한 이 감정은 분명 배덕감이었다.
"......아니, 저 분이 운장이라는 증거가 있나?"
"다른 사람일 수도 있잖아! 대역일 수도 있지!"
"그래! 모택평 국장이라면 대역 한두 명 정도는 준비해 두셨을 거다! 운장께서는 결코 저리 쉽게 인질로 잡힐 만큼 약하지 않으시다!"
히어로들이 소란을 피우는 와중에, 동창 소속의 히어로 <사재> 린레이는 슬며시 제 스마트워치를 조종했다. 빠르게 현 상황을 정리한 그는 답신이 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삑. 곧 연락이 돌아왔다. 동창의 우두머리이자 모택평의 직속 부하, <봉효(奉孝)>였다.
[살(殺).]
"......!"
단 한 마디의 글자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봉효의 명령은 곧 모택평의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주군은 운장을 버려서라도, 원탁과 일전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평양을 공략하려고 하는 모양이다. 도대체 평양에 무엇이 있길래 이리도 평양에 집착하는 걸까.
'내가 알 필요는 없지.'
린레이는 히어로들 속에 은밀히 숨어든 동창 소속 히어로들에게 밀명을 전달했다. 그들도 순간 흠칫거렸지만, 곧 명령을 따르기 위해 빠르게 흩어져 히어로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국가 간 분쟁에나 간섭하는 원탁이 무슨 의도로 우리의 결의를 방해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괴수를 물리치러 가는 길이다! 그런데 어찌 같은 히어로가 그 앞길을 가로막는단 말인가! 원탁은 한국과 야합하여 옛 북한 땅을 한국의 것으로 인정한다고 봐도 무방한가!"
"저 여자는 운장이 아니다! 운장이라면 같은 원탁의 히어로, 그것도 대장이라는 자가 저렇게 구하지도 않고 내버려 둘 리가 없다! 그러므로 저 여자는 운장님을 참칭하는 가짜다!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히어로들의 기세가 흉흉해졌다. 멀리서 붉은 머리띠의 히어로들을 주시하던 팬텀이 혀를 차며 샤오린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너 버림받은 모양인데?"
"......."
샤오린은 머리를 뒤로 젖혀 둥지 나무에 대었다. 그의 표정에는 안타까움과 회한이 가득했다.
"......언젠가 버림패로 쓰일 거라고는 예상했습니다. 불패의 군신이 패배하는 순간, 제 효용은 끝난다고."
"...어, 야. 너 우니?"
샤오린은 감정 없는 인형처럼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으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팬텀은 난감한 듯 볼을 긁적이다 하나 남은 촉수로 샤오린의 눈물을 닦았다.
"울지 마. 너 원탁의 히어로잖아. 고작 한 번 진 것 가지고 그렇게 울면...."
"모택평 국장님은 제 친부입니다. 운장이 패배하고 인질로 잡힌 순간, 그는 운장을 죽임으로써 얻는 이득을 생각했을 겁니다."
"원탁인데? S급인데? 딸인데?"
"S급 이능력자야 언제든지 나올 테고, 저는 그저 조금 좋은 장기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친부의 사생아는 저 말고도 수도 없이 많죠. 그들 중 절반이 A급 이능력자니, 누구 하나쯤은 제 자리를 대체할 거라 생각할 겁니다."
차가운 목소리로 담담히 제 상황을 읊는 샤오린은 마치 아무 상관 없는 타인의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팬텀은, 가을은 촉수에서 전해지는 샤오린의 마력에서 진실한 감정을 읽어냈다.
"너. 예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네가 패배해서 가치를 잃게 되면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아주 오래전부터 예감하고 있었어."
"......새장 안의 새가 하는 생각이죠. 겉으로는 새장 밖의 세상을 동경하지만, 속으로는 언제 어떻게 버려질지 고민하고 고민하는 삶의 연속입니다."
샤오린이 턱으로 강을 가리켰다.
"보세요.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 명령을 따르던 이들이, 벌써 저를 죽이려고 안달이 나 있잖습니까."
샤오린의 목소리는 음울했다. 의식을 잃었을 때 꾼 그 행복한 꿈은 군신이 죽기 전에 저를 참칭한 이에게 내린 마지막 자비일지도 모른다.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뭔데."
"이왕 죽는다면......."
샤오린의 시선이 얼음으로 이루어진 결계에 닿았다.
"저를 이긴 승자의 손에 죽고 싶습니다."
샤오린은 담담히 제 죽음을 읊었다.
* * *
지금까지 약 두 달여 간 만났던 이능력자 중에 내가 모르는 이능력자는 거의 없었다. 한국은 원작에 들어가기까지 별다른 큰 위험은 없었고, 주요 이능력자들 대부분 살아남아 동료나 적으로 만났다.
그나마 동네 불량배인 조덕배 정도가 예외였지만, 해외의 빌런 조직 조무래기 A만도 못한 이능력자도 외우고 다닐 정도로 나는 모든 이능력자를 파악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당황했다. 신경도 안 쓰던 해외의 이능력자, 그것도 펜릴에게 잡아먹힐 예정인 히어로가 루살카라니. 침이 절로 목을 타로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왜? 죽은 줄 알았어?"
[너는 분명 광검에게 죽었을텐데.]
루살카는 코웃음을 쳤다. 석하랑 루트의 에피소드나 설정화를 통해 보았던 그 작은 체구의 소녀와는 달리, 지금의 루살카는 내 인간형보다 아주 조오오오금 키가 컸다.
"그래. 죽었지. 다크 레기온의 간부 루살카는 말이야."
[......?]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살카는 어깨를 으쓱이며 제 심장을 가리켰다.
"루살카는 허윤환의 칼에 심장이 찔렸지. 정령의 힘은 딸...아이에게 넘어가고, 간부의 코어는 허윤환에게 넘어갔어. 하지만 딱 하나가 남았지."
[혼백.]
루살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육체를 잃고 힘도 잃었지만, 영혼은 남아 구천을 떠돌게 되더라. 왜 그런지 아니? 죽기 직전에 그 망할 괴물의 세뇌가 풀렸거든."
루살카가 제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나는 그제야 머릿속에서 엉킨 실타래의 실마리를 잡았다.
[각성했군. 세뇌를 스스로 풀었어.]
"그래. 딸을 낳아서 힘을 잃고, 코어도 남편에게 넘겼으면서, 하필이면 그 순간에 내가 '누구'인지 자각하게 됐어.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네 영체로 세상을 떠돌게 됐지."
[과연. 지금 주인의 육체에 빙의한 건가?]
"정답이야. 마침 막 죽은 아이가 있더라."
나는 루살카와 대화를 하기 전에 빠르게 훑은 히어로 위키의 내용을 상기했다. 심장마비에 걸렸다가 기적적으로 부활해 이능력자가 된 소녀. 블라디미르 아나스타샤에 루살카의 영혼이 들어갔다.
"원래는 딸아이 몸이라도 들어가려고 했지만...."
[남편과 딸에 대한 사랑으로 세뇌를 깨뜨렸겠지. 대단하군, 루살카.]
"...흐흥. 칭찬해봐야 소용없단다. 그나저나 세뇌? 너도 그럼 자각한 거야?"
[당연하지.]
나는 괴인형의 육체에서 인간형으로 몸을 바꾸었다. 루살카의 표정이 잠시 찡그려졌다.
"멸망한 세계, 테라의 화속성 정령. 창염에서 태어난 불사조. 성주는 저를 '창염의 피닉스'로 만들었죠."
"그래. 우리는 정령이었지. '본명'마저 빼앗기고 뇌를 적출당해 간부로 개조되었어."
"본명?"
루살카의 표정이 흠칫거렸다. 나는 재빨리 표정을 바꾸었다.
"뭐야. 너 세뇌푼 거 아니었니?"
"...정신 차리니까 풀려있던데요?"
"무식하게 힘으로 풀어버린 걸까? 아냐. 세뇌를 푸는 조건은 단 하나뿐이야. 어떻게 풀어버린 거지? 너 설마-"
"아녜요."
나는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저는 당신처럼 누군가를 사랑해서 세뇌를 푼 게 아니에요. 저는 이 사람을 사랑해서 세뇌를 푼 거죠."
나는 내 손을 내 가슴에 올렸다. 루살카는 헛웃음을 지었다.
"미친년. 예전부터 또라이같은 건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테라 있을 때보다 더 심해진 것 같구나. 뭐라그러더라? 나로호시즘?"
"저 나르시스트 아닌데. 설명해봐야 못 알아들을 테니 그 부분은 넘어가기로 하고, 일단 사과부터 할게요."
나는 루살카에게 고개를 숙였다. 루살카가 뒷걸음질 치며 흠칫거리는 게 눈에 훤했다.
"너, 너 솔직히 얘기해. 미쳐서 세뇌 푼 거 맞지?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나한테 순순히 사과를-"
"허윤환."
루살카의 몸이 굳었다.
"광검 허윤환을 죽여서 미안해요. 근데 그러지 않으면 당신 딸, 석하랑이 테라의 영향으로 폭주할 가능성이 있었어요."
나는 짧게 내가 허윤환을 죽여야 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루살카는 손을 수차례 쥐었다 펴면서 화를 삭이는 듯 보였다.
"...그래서 내 딸이 정령이 되었다?"
"정령의 힘을 가진 인간이죠.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우리의 본체에 가까워지겠지만."
나는 내 옷깃에 달아둔 흰나비 배지를 가리켰다. 루살카가 침음성을 흘리며 고뇌에 빠졌다.
"딸아이가 올해로 21살이었지. 끄응.... 벌써 남자를 알고도 한창 지날 시기네."
"아직 순결을 지키고 있던데요?"
"뭐가 어쩌고 어째?"
"...옆에서 지도하면서 알게 됐어요. 정령의 힘에 먹히지 않도록."
나는 간략히 석하랑과의 현 상황을 말했다. 중간중간에 석하랑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캐묻는 루살카의 모습에 그래도 어머니는 어머니구나 싶어 아주 조금 썰을 풀어주기도 했다.
"그래, 하랑이 입맛이 그렇다는 말이지.... 근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니?"
"...히어로 위키만 뒤져도 개인 기호가 다 나오는걸요. 어디보다. 아나스타샤. 한식 좋아함. 불고기 덕후. 두유 노 돼지국밥? 뭐야, 여객기 기내에 돼지국밥 반입했다가 난동? 푸흐흐! 어느 누구랑 같이 살다 입맛이 이렇게 되셨을까?"
"주둥아리 닥치렴."
허윤환과 살면서 입맛이 부산에 가깝게 변해버린 걸까 싶었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나는 음흉한 얼굴로 루살카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왜 정체를 안 밝힌 거예요? 나도 그렇지만 광검도 당신 살아있는 거 모르는 눈치던데."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남편이랑 딸이랑 다 같이 잡아먹으려 했던 괴물 같은 년이 어떻게 다시 마주 서겠니?"
루살카는 씁쓸한 미소로 두 손을 깍지꼈다.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어. 내 육체의 주인, 아나스타샤의 삶도 살기에 무척 바빴으니까. 아빠...흠흠, 아버님에게 사랑을 받는 것도 무척 신기했고, 오라버니나 언니들과 함께 지내는 것도 또 다른 행복이야. 딸아이 자라는 거 영상으로나마 멀리서 봐도...."
"부부가 쌍으로 지랄이네요. ...크흠!"
"...너도 좀 많이 '사람'다워 진 것 같단다?"
"저는 지금 명실상부한 사람이에요. 사람으로 살기로 했으니까 사람. 이견은 받지 않습니다."
"그래. 마음껏 혼자서 사랑하고 혼자서 위로하렴.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니?"
루살카가 결계 바깥을 가리켰다. 밖에는 중국 히어로들이 집단 광기에 걸린 것처럼 강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가웨인이 무어라 소리치고 있지만 턱도 없었다.
"그쪽 대장 진짜 쓸모없네요."
"알게 뭐람. 네가 여기서 이상한 짓 하느라 쟤들이 저기서 저러고 있는 거잖니. 여긴 왜 나타나서 이러고 있는 거야?"
"설명하려면 꽤 긴데-"
흠칫. 나는 고개를 서쪽으로 돌렸다. 루살카가 의아해했다.
"왜 그러니?"
"아무래도 착각이 아닌 듯하네요."
나는 괴인형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모습을 가리던 결계가 사라지자, 루살카의 손목에 걸려있던 스마트워치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애애애앵------
루살카뿐만 아니라, 모든 스마트워치가 긴급 상황을 알리고 있다. 강을 건너던 히어로들도, 그에 대처하려던 청화단의 조직원들도, 가운데 껴서 이도 저도 못하던 원탁 히어로들도 모두 스크린에 뜬 자색 경보를 주시했다.
<차원문 발생. 차원문 발생.>
"......하늘이 도왔네요."
중국, 시안시 하늘에 거대한 차원문이 열렸다.
* * *
"...시끄럽잖아. 잠을 못 자겠네."
잠들어있던 소녀가 잠에서 깨어났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소녀의 눈은 회색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씨이. 마력 회복 덜 끝났는데. 알람 한 번 시끄럽게 하네, 정말. 아, 알았다고. 일어난 다고. 인간들 죽이러 간다고."
소녀는 관뚜껑을 박차고 일어서 좀비처럼 땅을 기었다. 하늘에서는 익숙한 죽음의 기운이 넘실거린다.
"......귀찮은데 그냥 잘까. 응, 그래. 5일만 더 자자. 어차피 알아서 다 죽이겠지 뭐."
소녀는 상체만 관에서 튀어나온 그대로 다시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