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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16화 (116/1,497)

〈 116화 〉1부 6장 (22)

<5시 50분, 압록강.>

"히어로들은 당장 해산하라! 그렇지 않으면 히어로들을 이대로 땅에 파묻어버리겠다!"

팬텀이 목소리에 마력을 실어 강변에다가 소리쳤다. 배우 생활로 다져진 성량은 강너머로 울려 퍼져 히어로들의 전진을 막았다. 노란 머리띠의 히어로가 도끼를 휘두르며 삿대질했다.

"비겁한 놈! 네놈들에게는 의(義)와 협(俠)이 없단 말이더냐!"

"옳소! 같은 이능력자들끼리 괴수를 잡기는커녕, 괴수를 조종해 사익을 추구하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각성하라!"

"각성하라!"

"각성하라! 각성하라! 각성하라!"

히어로들이 일제히 주먹을 치켜들며 단합된 구호를 외친다. 사전에 준비한 것도 아닐 텐데, 수백 명의 히어로들은 미리 합이라도 맞춘 것처럼 일정한 행동으로 소리쳤다. 수백 명을 앞에 두고 소리치던 팬텀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나는 팬텀의 어깨에 오른손을 올려 그를 두둔했다. 왼손으로는 언제든 운장을 찌를 수 있도록 운장의 허리를 휘감았다.

[혼자서 무리라면 내가 하마.]

"그건 안 좋은 것 같은데. 네 모습 안 드러내려고 괴인형으로 있는 거잖아."

[하지만 이래서야 곧 넘어오지 않겠나.]

나는 턱으로 강 너머의 히어로들을 가리켰다. 선양에서 달려온 히어로들은 강 너머에서 금방이라도 강을 넘어올 듯 기세가 흉흉했다.

인질이 없었다면 아마 강을 사람으로 메워버렸을 것이다. 팬텀이 머리를 긁으며 짜증을 냈다.

"아, 진짜. 인질이 안 통하는 것 같은데?"

[어쩔 수 없군. 일단 원탁에는 연락이 갔을 것이다.]

샤오린의 왼손에 있는 스마트워치가 긴급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다.

원탁 히어로가 위험한 상황이 닥쳤을 경우 가장 가까운 원탁에게 구조를 요청하는 신호에 분명 인근의 다른 원탁 히어로가 그를 수락했다. 러시아의 그 원탁일까, 아니면 혹시나 일본에 들렀을 질풍객일까.

누구든 오면 제2의 인질이 될 뿐이다. 지금의 운장처럼.

"야. 너도 좀 인질인 척 해봐. 구슬프게 울어보라고."

팬텀이 촉수로 적토의 배를 찔렀다. 마갑이 해제되어 나체나 다름없는 적토가 두 다리가 촉수에 꽁꽁 묶인 채 구슬프게 울었다.

히히힝, 히잉.

"좀 더 거세게 울지 못해?"

촉수가 채찍처럼 적토의 등을 때렸다. 적토는 서러움에 눈물까지 흘리며 소리높여 울었다. 나는 팬텀이 듣지 못하게 적토에게만 슬쩍 마력을 보냈다.

[......너 즐기고 있나, 지금?]

"......히힝."

눈물을 흘리는 적토는 분명히 웃었다. 샤오린 루트에서는 샤오린을 어떻게든 탈출시키고 비장한 죽음을 맞이했던 적토의 이면을 알게 된 것에 조금 충격이었다.

저 빌어먹을 종마는 변태 새끼가 틀림없었다. 나는 팬텀에게 그걸 그대로 전달해줬고, 팬텀은 더욱 가열차게 적토를 때려댔다.

"뭐?! 그렇게 맞는 게 좋다고? 그럼 어디 더 크게 울어봐, 이 돼지 같은 말아!"

히히히잉---!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적토의 비명에, 일단 중국 히어로들은 발을 움찔거렸다. 과정이야 어떻든간에 히어로들은 강을 넘어오지 못하고 있다. 나는 쓱 강변을 좌우로 훑었다.

[여기에만 사백은 되겠어.]

둥지를 막 피웠던 첫 번째 적들이 어중이떠중이였다면, 지금 눈앞의 사백 결사대는 대부분이 A급이나 B급이었다.

[잘못 파악했다. 지부 주변의 히어로들을 급히 모은 게 아니야. 저들 대부분이 A급이다. 400명 대부분이.]

"뭐?!"

팬텀이 가면 아래 눈을 크게 떴다. 등대가 미리 파악한 전력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럼 처음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는 거야?"

[언제든 남하할 수 있도록 기회만 노리고 있었겠지.]

모비딕이 튀어나오지 않았더라도 그에 준하는 사건에 따라서 중국 히어로들은 남하했을 것이다. 모비딕은 중국의 히어로들-그리고 그 뒤에서 그들을 조종하는 모택평에게 좋은 구실을 마련해줬을 뿐이다.

"그럼 어떡하지? A급 저렇게 많으면 S급 전력은 내잖아."

[다행히 S급은 없다. ...어쩔 수 없군. 최후의 수단을 쓰는 수밖에.]

나는 팬텀에게 조용히 내 의사를 전달했다. 팬텀이 곧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깨물었다.

"너 앞으로 이런 비열한 전략, 나한테 쓰려고 하지 마."

[남한테 시키는 건 괜찮은가?]

팬텀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나는 양손으로 운장을 잡고 강가로 걸어갔고, 팬텀은 다리의 가로등 위에 올라서서 다시 소리쳤다.

"셋을 세도록 하겠다! 셋을 셀 동안 백 걸음 물러나지 않으면-"

히어로들의 시선이 팬텀에게 쏠렸다. 나는 운장의 복부의 전포를 슬쩍 찢었다.

찌직. 운장의 하얀 배가 드러났다. 근육 하나 없는 매끈한 복부에 강 너머 히어로들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팬텀은 그에 혀를 차며 다시 소리를 질렀다.

"운장의 정체뿐만 아니라, 그 나신을 전 세계에 생중계로 공개하겠다!"

하늘에 있는 마룡의 비늘 위, 등대가 열심히 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다.

* * *

<그 시각, 하바로브스키 상공 오라클 전용기.>

"아하하! 미친 놈들 아니야, 저것들!"

오라클이 손에 든 감자튀김을 입안에 가득 퍼넣었다. 가웨인은 안절부절못하며 전용기의 비행 속도를 주시하고 있었다.

"더 빨리 날지 못하나요? 이러다가 샤오린 양의 몸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게 생겼습니다!"

"...대장. 내가 대장한테만 하나 말할게."

오라클이 콜라캔의 뚜껑을 열었다. 탄산 빠지는 소리와 함께 오라클은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스크린을 응시했다.

"과연 나신으로만 끝날까?"

"네?!"

오라클이 감자튀김을 하나 집어 들고는 콜라캔 입구에 쑤셔 넣었다가 뺐다.

"아마 저놈들이라면 공개 레이ㅍ-"

"애새끼가 못하는 말이 없니?"

하얀 손길이 오라클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크게 흔들린 캔콜라가 흔들리며 오라클의 옷을 전부 적셨다. 가웨인은 여인의 등장에 반색했다.

"운디네?! 여긴 어떻게?"

"대충 날아오는 위치 계산해서 전이했어."

"그, 그런 위험한 짓을?! 그러다 전용기에 끼이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그러면 얘 예언보다 더 빨리 죽는 거지. 얘, 발랑 까진 꼬맹아."

운디네가 콜라를 쏟아 굳어버린 오라클의 어깨를 흔들었다. 오라클의 바지는 꼭 소변이라도 지린 것처럼 콜라가 바지를 적셨다. 몸을 부들부들 떨던 오라클이 고개를 돌려 쌍욕을 퍼부었다.

"What the Son of-"

"오라클."

운디네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오라클이 침을 꿀꺽 삼켰다.

"왜, 왜?"

"광검 허윤환의 죽음. 네 예언보다 훨씬 일찍 이루어졌다고 했지?"

"...어, 어. 한 5년 뒤에 죽었어야 했어. 멸망의 날이 있는 해? 그즈음."

"......."

운디네가 보드카를 홀짝이며 생각에 잠겼다. 너무나도 진지한 운디네의 태도에 가웨인마저 본색을 드러낼 정도였다.

"뭔가 짐작 가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하나 있기는 한데 너무 생각도 하기 싫은 끔찍한 경우라서 말이야."

운디네가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절대 표정을 바꾸지 않아 원탁 내에서 '얼음 마녀'라고 불리는 그가 표정을 드러낸 것에 가웨인마저 미간을 찌푸렸다.

"심각합니까?"

"심각해. 몹시. 당장 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어."

운디네가 운장의 옷을 찢은 불꽃의 괴인을 가리켰다. 가웨인 또한 표정을 굳혔다.

"광검을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예언에는 없던 이능력자."

오라클이 가웨인의 말을 이어받았다. 오라클은 제 꿈에 나오는 그 수많은 괴조들의 원흉이 저 괴인이 아닐까 봐 합리적인 의심을 수도 없이 해왔다. 운디네가 속도계를 가리켰다.

"오라클. 좀 더 빨리 날 수 없어?"

"...지금 최고 속도를 훌쩍 넘겼어. 여기서 더 올리면 엔진 과열이야."

"칫, 그러면 내가 먼저-"

"아뇨. 다 같이 가도록 하죠."

가웨인이 부기장석에서 일어섰다. 오라클의 표정이 핼쑥해졌다.

"대장, 설마 이상한 짓 하려는 거 아니지?"

"하하, 그럴 리가요. 엔진이 과열되지 않으면서, 빨리 가는 최고의 방법을 선택할 뿐입니다."

가웨인이 비행기의 문 앞에 섰다. 오라클은 재빨리 문을 열었고, 운디네는 기장석을 붙잡았다.

탕! 가웨인이 비행기의 옆으로 몸을 날렸다. 외부 카메라에 비친 가웨인은 거머리처럼 비행기를 기어가며 꼬리에 이르렀다. 운디네가 마시던 보드카까지 마개를 닫으며 오라클에게 물었다.

"설마 그걸 하려는 거니?"

"야, 얼음땡이. 빨리 여기 앉아서 안전벨트 메."

운디네가 재빨리 부기장석에 앉아 벨트를 매고, 오라클도 감자튀김을 재빨리 수납함에 대충 쑤셔 넣었다. 스크린에 가웨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갑니다!]

가웨인의 신호와 함께 비행기의 속력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엔진의 상태는 그대로였지만, 분명 나아가는 속도는 이전보다 훨씬 빨랐다.

"......세계 최강은 다 저런 걸까?"

"나한테 묻지 말렴."

오라클은 묵묵히 예상 도착 시각을 계산했다. 약 10분 후, 목적지인 압록강의 괴수 '둥지'에 도착. 오라클은 그 정보를 가웨인에게 전달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더 빨리 날아가도록 하죠!]

"아, 아니! 그러지 마! 천천히 가도 돼!"

[운장의 정조가 위험하지 않습니까!]

가웨인이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마력을 더욱 뿜어냈다. 비행기는 코어 엔진이 뿜어내는 마력과 적금색의 마력에 하늘을 쏜살같이 날았다.

가웨인은 비행기의 뒤에서 하늘을 날며 비행기를 밀고 있었다.

* * *

"둘! 야! 너희들 뭐 하는 거야! 당장 안 물러서?!"

팬텀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나는 전포의 옆을 그대로 손톱으로 그어 길게 찢었다. 전포 사이로 운장의 다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크흠."

히어로들이 저마다 불편한 눈치로 헛기침을 한다. 나는 '설마 아니겠지'하는 생각을 하다가 적토와 눈이 마주쳤다. 적토는 혓바닥을 꺼내 옆으로 계속 밀어댔다. 보기 더러웠다.

"그냥 해버려!"

팬텀이 짜증을 부렸다. 나는 샤오린의 전포를 슬쩍 들어 올렸다.

[이렇게?]

허벅지 가운뎃 부분까지 드러났다. 내 불꽃에 비친 샤오린의 흰 피부가 드러나자, 히어로들은 역으로 한 발짝 더 내디뎠다.

풍덩! 히어로 하나가 강에 빠졌다. 나는 전포를 움켜쥐어 전부 뜯어냈다. 그리고 나는 확신했다.

[이건 역효과군.]

"우, 우리는 그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일어선 민의의 대변인이다!"

"운장께서도 분명 말씀하실 거다! '제 몸은 상관치 말고 그 결의를 보여달라'고!!"

히어로들이 눈에 성을 내며 강을 뛰어들었다. 운장을 구하려는 의협심인지, 아니면 일부러 강에 뛰어들어서 운장의 나신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보려는 욕망의 산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강을 넘어온 이상 약속은 지켜야지.]

내가 손을 하늘로 높이 들어올려 손가락을 튕겼다. 강철 두 개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둥지의 미니 피닉스들이 강 위로 날아오르고, 흑염룡이 본격적으로 강 너머로 날아가 날뛰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바닥에 착지한 흑염룡이 입에서 브레스를 뿜었다. 히어로들은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도 손쉽게 브레스를 피해 흑염룡을 요격하기 시작했다. 흑염룡이 성질을 부리며 꼬리를 휘둘렀지만, 고작 두셋의 히어로를 날려버리는 것으로 끝났다.

[S급의 힘을 가졌지만, 본질은 A급. 적응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겠군.]

"야. 인질극도 실패했는데 언제까지 안고 있을 거야?"

팬텀이 내가 잡고 있는 운장을 가리킨다. 웃고 있는 그 표정이 어딘가 싸한 기분이 들어, 나는 운장의 몸에 마력을 둘렀다. 마력은 망토처럼 늘어져 운장의 나신을 가렸다.

[나는 운장을 계속 재워야 한다. 전장에 몸소 나서기에는 위험해.]

"그래서 후방에 있겠다는 뜻?"

흑염룡의 등에 타 있던 푸른 깃털들이 등에서 뛰어내려 본격적으로 히어로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숫자는 열세에 전투력도 불리했지만, 이쪽은 무한히 부활하는 목숨이 있다.

[미니 피닉스들이 코어를 수습해 내게 올 거다. 나는 그걸 곧장 부활시킬 계획이다.]

"그래서 본심은?"

[SS+가 B급들 잡아봐야 경험치 안 올라. 나는 이제 여기서 더 성장할 곳이 없으니, 너희가 전투 경험을 통해 각성을 하는 게 낫겠지.]

"말은 번지르르하네. 정말."

강변에 화염 거인이 나타나 히어로들을 발로 차대고, 불화살이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온다. 괴인들은 저마다 능력을 이용해 죽을 기세로 히어로들을 상대했다. 팬텀은 둥지 바로 지척에서 강을 넘어온 히어로를 촉수로 때려눕혔다.

"일단 얘네들 정리한다고 쳐. 그럼 또 싸울 거야?"

[당연하지. 다만 그것도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나는 잠시 짬이 난 사이 부산의 전황을 확인했다. 석하랑은 아주 수월하게 정신적 성장을 이루어 명실상부한 SS급이 되었고, 아니사키스에게서 수많은 A급 코어를 긁어모으고 있다.

'질풍객이 여기 온건 상당히 의외다.'

나중가면 동생도 신경 쓰지 않고 세상을 자유롭게 떠도는 한량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모비딕 퇴치에 따라나선 걸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 샤오린의 호출은 누가 받은 거야?'

분명 누군가는 운장의 스마트워치가 자동으로 보낸 신호를 수신했을 것이다. 질풍객은 부산에서 날뛰고 있으니 아닐 테고, 그럼 그 러시아의 히어로일까 싶어 기억을 더듬었다.

'수속성 이능력자라는 거 말고는 딱히 기억에 없는데.'

펜릴 루트에서 지나가다가 딱 한 번 언급되는 게 끝이었다. 북유럽에서 깨어난 펜릴은 일어나자마자 배가 고파서 난동을 부렸고, 모스크바에서 올라온 원탁 히어로를 잡아먹고 다시 잠들었다고 했다.

'걔든 질풍객이든 상관없어. 어차피 원탁은 온다.'

샤오린을 인형처럼 안고 둥지에 몸을 기댄 나는 손만 인간형으로 되돌려 샤오린의 머리카락을 가지런하게 정돈했다. 샤오린은 내 손이 제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이고 있는 것도 모르고 세상 모르게 자고 있다.

[너를 구하러 누가 올지 궁금하지 않나? 살라딘일지, 제로니모일지.]

누가 오든 딱히 상관없다. 가웨인만, 그 미각 테러범만 아니면 누가 와도 상관없었다. 나는 팬텀이 놓친 히어로에게 미니피닉스를 보내 기절시킨 뒤, 샤오린을 나무에 기대게 하고 몸을 일으켰다.

[오는 군.]

동북쪽에서 거대한 마력이 느껴졌다. 그 수만 무려 셋. 그중에서도 익숙한 마력의 기운에 나는 내가 잘못 느꼈나 다시 확인했다.

[......?]

확실히 잘못 느꼈다. 이성은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감각은 제가 느낀 감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원탁에 정령...?]

그럴 리가 없다. 설령 정령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고 해도 스스로 성주의 세뇌를 풀리는 만무하다. 그러므로 간부의 기운이 느껴진다면 그건 충분히 이해할만한 상황이지만, 저 정순한 마력의 기운은 분명 정령의 그것이었다.

[진짜 뭐지?]

혼란스럽다. 저 멀리 비행기를 밀며 날아오는 가웨인 따위가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사아아. 비행기에서 떨어진 여인이 얼음 가루를 흩날리며 내 앞에 살포시 착지했다. 백금발의 여인은 이제 갓 성인에 접어든 것처럼 피부가 매끄러웠다. 그리고 그 전형적인 서구 상의 미인형은 이상하리만큼 석하랑을 닮아있었다.

아니다. 석하랑이 이 여자를 닮은 거다. 나는 애써 동요를 감추며 눈앞에 나타난 여인에게 물었다.

[네가 왜 여기서 나오냐.]

여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콧방귀를 뀌었다. 여인의 옆에 하늘에서 떨어진 가웨인이 자세를 바로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운디네! 위험합니다!"

"괜찮단다. 지인이야."

[난 너 모르는데.]

여인이 나를 보며 으스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은 마치 강물 속 물귀신이 물에 빠진 이의 다리를 낚아채기 직전의 음흉함을 띄고 있었다.

"지금은 <운디네>. 원탁 소속의 히어로이자, 러시아 블라디미르 가문의 아나스타샤. 블라디미르.R.아나스타샤."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도 모르게 다급해졌다. 내가 모르는 것들이 언젠가 튀어나오리라 생각하기는 했는데,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튀어나올 것이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그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여인은 보드카 마개를 따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보기만 해도 속이 들끓는 알코올에도 여인의 안색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정령의 기운에 숨을 들이켰다.

[어떻게 네가 살아있는 거지?]

"......이쪽이야 말로 묻고 싶은데. 어떻게 깨어난 건지, 왜 제 잘난 맛으로 사는 분께서 고작 인간 따위랑 어울리시는지 모르겠지만."

여인은 내게 날카로운 얼음의 창을 들이밀며 차가운 눈으로 쏘아봤다.

"내 남편 죽인 쓰레기가 너지? 이 더러운 촉새야."

[...아무래도 긴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군.]

원작에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자를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일단 만나서 반갑다. 루살카.]

"이쪽이야말로."

여인, 블라디미르 '루살카' 아나스타샤가 마력의 결계가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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