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15화 (115/1,497)

〈 115화 〉1부 6장 (21)

중국의 히어로, 린레이(林類)는 괴수관리대책국의 국장 모택평으로부터 밀명을 받았다.

운장을 옆에서 보좌하고 절대 그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게 지켜야했다. 협회에서 밉보였던 C급 히어로인 그를 A급 히어로까지 올라가게 한 원동력은 모택평의 지원이었고, 린레이는 모택평에게 충성을 다했다.

동자공(童子功).

전귀가 남기고 간 유산은 모택평에게 전해져 수많은 남성 히어로들의 성장을 이끌어냈고, 린레이와 같은 이들은 강해지는 대가로 정말 '많은 것'을 포기했다.

때문에 운장은 동창 소속의 히어로들에게 있어서 질시의 대상임과 동시에 무인으로서 존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런 운장을 옆에서 지키고 보좌해야하는 임무는 어불성설처럼 보였지만, 어쨌든 임무인 이상 따라야 했다.

만약 실패하면 동자공으로 쌓아올린 마력을 모두 상실하고 약했던 과거로 돌아가리라.

그래서 죽어라 운장을 뒤쫓았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까봐.

"하하하! 가소로운 녀석들! 이제서야 도착하다니, 느리구나!"

그런데 무슨 일이 생겨버렸다. 린레이는 입술을 깨물며 다리 너머에 있는 저 악적들에게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인질을 잡다니 이 더러운 놈들! 네놈들이 그러고도 영웅이라 할 수 있더냐?!"

단둥 근처에 있던 히어로와 사냥꾼들이 푸른 나무 근처에 목만 내놓은채로 땅에 묻혀있다. 목만 밖으로 빠져나와 죽은게 아닐까 흠칫했지만, 다행히 죽지는 않고 마력만 뽑혀나가고 있었다.

♩♪♬. 둥지는 히어로들을 자양분 삼아 히어로들에게서 강탈한 마력으로 괴수를 뿜어내고 있었다. 서울에서 나타났다는 헬하운드, 그리고 매의 형상을 한 불사조. 그 모든 괴수들이 푸른 불꽃을 몸에 두르고 있다.

그리고 그 둥지의 바로 아래. 가면의 여인이 회백색의 아홉 꼬리를 번들거리며 히어로들을 비웃었다.

"아하하! 어리석은 히어로들아! 우리가 의협으로 이곳에 온 줄 아느냐! 이 땅은 우리의 땅이다. 우리 청화단의 땅에 멋대로 발을 들였으니 그 대가를 치루는 것 뿐이다!"

"옛 북한의 땅이 누가 주인이란 말인가! 평양의 괴수가 지금 눈에 불을 켜고 살아있는데!"

"우리, 청화단이 주인이지! 보라!"

여인이 손을 위로 뻗었다. 저멀리 남쪽에서 거대한 날개를 힘차게 뻗으며 날아오는 마룡이 눈에 띄었다.

"S급 히어로들을 격퇴한 저 흑염룡의 위용을!"

흑염룡이 둥지의 옆에 내려앉았다. 푸른 화염을 내뿜는 것도 흠칫했지만, 무엇보다 등에서 사람들이 내린다는 것에 히어로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괴수를 조종한다고?!"

"어리석은 것들! 이미 평양은 우리 청화단이 접수했다!"

"큭, 바보같은 소리!"

린레이가 창대를 움켜쥐며 다리를 뛰어넘으려했다. 하지만 바로 옆에 있던 다른 A급 히어로가 곧장 그를 제지했다.

"안됩니다, 사재(士載) 장군!"

"놓으시게, 백약(伯約)! 내 목숨이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저들을 구해야겠네!"

서걱. 여인의 옆에있던 검은 갑주의 괴인이 손톱을 세웠다. 곧 그의 품에 안겨있는 녹색 전포의 여인의 목에 아주 얇은 상처가 생겼다. 린레이는 이를 악물고 다리 끝에서 비명을 질렀다.

"그만둬라, 이 비겁한 녀석들아!"

"거기서 한발자국만 더 움직여봐! 만약 강을 한 명이라도 건너오면-"

괴인이 기절한 여인의 허리를 와락 움켜쥐었다. 가면의 여인이 그걸 보고 잠시 표정이 찡그려졌지만, 곧 의기양양한 얼굴로 꼬리 하나로 여인의 목을 쓸며 소리쳤다.

"너희들의 S급 히어로, 운장은 죽은 목숨이 될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던 운장의 정체가 묘령의 여인이라는 것도 충격적이지만, 그 운장이 지금 도적떼의 '인질'로 잡혀있다는 것이 히어로들을 공황 상태로 빠뜨렸다.

"운장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거든, 당장 해산하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시간은 20분 전으로 돌아간다.

* * *

아무리 서울 수복 작전을 방해했던 플랜의 재탕이라고 하더라도, 이 주먹구구식의 계획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는 변하지 않는다.

중국의 히어로들을 어떻게 퇴각시킬 것인가?

한국의 경우 설화공주 석하랑과 화권 이승형을 전장에서 리타이어시키는 것으로 간단하게 해결했다. 선의철은 전력을 보존하고자 했고, 소나무 부대를 죽여 본보기로 삼았던 것이 주요했다.

그렇다면 이건 중국을 대상으로도 유효한 전략인가에 대해 간부들과 의논해봤다.

답은 아니올시다. 선의철이 일보후퇴를 통한 이보전진을 노리는 자라면, 모택평은 발이 잘려도 발목으로 반보전진하는 막가파다.

원작에서도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간부들이 하나 둘 한국으로 넘어오는 가운데, 불안해진 모택평은 운장을 위시한 S급 넷을 선봉으로 한국에 전쟁을 일으킨다. 주인공 일행은 졸지에 국가전을 치르게 되며, 육로로 내려온 샤오린을 요격한 것으로 승리의 실마리를 잡는다.

패배한 무인은 깔끔하게 승패에 승복하고 주인공을 따르게 된다. 주인공은 모택평에게 사기를 쳐서 모택평을 조급하게 만들고, 시간을 끌어 원탁이 개입할 명분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이번 작전을 짜는데도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비록 지금은 히어로 집단이 아니라 악의 조직이기는 하지만, 평양 괴수의 위험성에 대해서 원탁이 잘 알게 된다면 중국의 야욕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첫번째 조건. 운장을 제압한다. S급 히어로인 운장을 어떻게 쓰러뜨러야 하는가.

간부들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평양으로 날아가는 그 순간까지도 운장을 쓰러뜨릴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짧게 그 방법을 설명해줬다.

"지금 상태라면 일격에 쓰러뜨릴 수 있는데요?"

다들 믿지 않더라. 그래서 직접 행동으로 보여줬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일격. 그 한 번의 합에 운장을 쓰러뜨린다. 그리고 운장을 인질로 삼아 모택평을 협박하고, 원탁을 끌어들여 중국을 압박한다.

그 과정에서 청화단의 전력이 여실히 드러나게 되겠지만, 더이상 애써 숨어다닐 이유가 없었다. 한국 안의 문제는 생각보다 빠르게 정리되었으니 청화단이 마음껏 날뛸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래서 이왕 하는김에 청화단은 화려하게 역사의 전면에 데뷔하기로 했다.

운장을 쓰러뜨리고 인질을 잡는거로.

* * *

일 합.

단지 한 번이었다. 괴인이 주먹을 내지르고, 운장이 언월도를 휘둘러 서로의 공격을 주고받았던 횟수가.

'이길 수 있다.'

운장, 샤오린은 그 합에서 승리를 엿보았다. 상대는 불꽃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화염술사였으나, 무예를 다루는 결투라면 승기가 있었다. 괴인은 스스로 샤오린의 앞으로 파고들었다.

'이길 수 있어!'

샤오린은 자신의 승리를 점쳤다. 상대의 권격은 매섭기 그지 없으나, 이쪽은 적토와 함께 싸우는 인마일체의 묘리가 있다. 약 삼백합을 주고받고 난 뒤, 샤오린은 제 오의가 상대의 투구를 찌르는 미래를 엿보았다.

'다음 공격은-'

언월도를 회수해 이격을 내딛으려던 순간, 괴인의 몸에 푸른 불꽃이 휩싸였다.

'시야교란?'

가면 아래의 피부까지 후끈 달아오르게 만드는 열기에 샤오린은 잠시 주춤했다. 적토 또한 그 날의 공포 때문인지 허공에 발굽을 디뎠다.

그 아주 잠깐의 틈이 화근이었다. 샤오린이 횡으로 휘두른 언월도는 괴인의 목을 갈랐지만, 아무런 베는 맛이 없었다.

그리고 샤오린은 보았다. 푸른 불꽃이 사라지고 나타난 작은 체구의 소녀를.

"역시 아래가 비어있네요?"

소녀, 인간형으로 몸을 바꾼 피닉스는 적토의 대가리를 발로 찍으며 샤오린의 마스크를 우악스럽게 쥐었다. 흔들리는 제 머리에 샤오린은 본능적으로 언월도를 휘두르려고 했지만, 그보다 피닉스의 공격이 더 빨랐다.

"크흑?!"

피닉스의 주먹이 샤오린의 배를 찔렀다. 급히 두른 호신강기는 주먹에 그대로 흔들리고, 권격에서 전해진 충격이 샤오린의 안을 뒤흔들었다.

소위 발경(發勁)이라고 하는 무술. 샤오린은 고작 그 일격에 자신이 당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화륵. 푸른 불꽃이 시야를 덮고, 얼굴을 가린 가면이 사라졌다. 화끈한 열기가 샤오린의 피부를 데우고, 피닉스는 적토의 등에 발을 딛고 쪼그려 앉아 샤오린과 눈을 맞추었다.

"샤오린 양."

"?!?!"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걸까. 의문을 품기도 잠시.

"이걸로 792전 791패."

퍽!

배를 찔렀던 주먹이 그 자리에서 촌경을 내질렀다. 몸안의 마력이 순간적으로 막히는 듯한 그 충격에 샤오린은 눈앞이 희미해졌다.

"1승. 제 승리입니다."

앞으로 고꾸라지기 직전, 상대가 두 팔을 벌리며 저를 안으려했던 것은 분명 착각일 것이다.

"...린?!"

적토인지 아니면 상대방인지, 그것도 아니면 저멀리서 승전을 기다리고 있을 친부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샤오린은 제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가 생각보다 낯간지럽다고 느끼며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 *

퍼억!

"히히잉?!"

적토가 비명을 지른다. 갑주 사이를 찌른 내 발길질에 적토는 허공을 마구잡이로 뛰려다 그대로 강물에 처박혔다.

"읏차."

나는 샤오린을 그대로 안아 적토에게서 뛰어올랐다. 펑퍼짐한 녹색 전포가 거슬리기는 했지만, 완전히 기절한 덕분에 쉽게 안장에서 떼어놓을 수 있었다.

"여기 내려놔."

팬텀이 다져놓은 땅을 촉수로 가리켰다. 나는 샤오린이 행여나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땅에 눕혔다.

"이렇게 쉽게 쓰러뜨릴 수 있었으면서 광검은 왜 그렇게 조심스레 싸웠대?"

"그건 아녜요. 얘만 특별한 겁니다."

"......'특별'?"

팬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샤오린의 머리칼을 가지런히 쓸었다. 가면 사이로 비친 눈빛이 샤오린의 칼날보다 날카로운건 어째서일까.

"사람마다 '약점'같은게 있잖아요. 마력의 상성같은 것도 있지만, 이능력자마다 허를 찔리는 약점이 하나둘씩 있어요. 운장이 적토에서 내리지 않기에 가능한 공략 방법이죠."

나는 두 다리를 가리켰다. 곧 강에서 물이 솟구치며 붉은 빛의 폭풍이 이쪽으로 향해 질주했다.

히히힝---!

"이런...!"

팬텀이 놀라 촉수를 세웠다. 나는 잠재워두던 마력을 슬쩍 흘리며 달려오는 적토를 노려봤다.

탁. 적토가 그대로 내 앞에 멈춰섰다. 온몸은 냉동이라도 된 것 마냥 굳어있으면서도 동공은 지진이 난것처럼 흔들렸다.

"흥."

아무리 각성을 통해 인간에 준하는 사고를 하는 짐승이라고 하더라도, 그 본질은 코어를 심장으로 둔 괴수다. 먹이사슬의 중간 단계에 있는 짐승이 그 정점에 있는 정령을 상대로 겁에 질리는 것은 당연지사.

히힝, 히이잉.

"말할 줄 아는 거 알거든요?"

"......목숨만은 살려달라."

팬텀이 화들짝 놀랐다.

"마, 말이 말을 한다고?"

"각성한 괴수라서 그래요. 팬텀, 촉수로 다리를 묶어버려요."

"뭐, 뭐라?!"

적토가 화들짝 놀라지만, 그보다 빠르게 팬텀의 촉수가 다리를 휘감았다. 네 개의 다리가 제각각 적토의 다리를 휘감자, 적토는 투레질을 하며 콧김을 내뱉었다.

"아, 아무리 나를 죽이려해도 내 몸에 손을......."

흥분한 적토가 금방 편안해졌다. 가을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굳이 적토가 진정한 이유를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그저 적토가 원래 '유니콘' 괴수라는 것만을 상기할 뿐이다.

"뭐야. 얘 갑자기 왜 진정하는건데?"

"무서워서 그렇겠죠. 그쵸?"

적토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니콘은 본능적으로 상대의 나이까지 가늠하고는 입을 꾹 닫았다.

천가을. 올해로 28세. 할 말은 많지만 더이상 하지 않겠다. 나도 상상도 못했다. 원작에서는 아니었으니.

"아무튼 이것부터 망가뜨리죠."

나는 적토의 마갑에 손을 올렸다. 곧 내 마력이 마갑 전체를 휘감고, 안에 있던 장치들이 과부하를 일으켜 고장났다. 적토가 놀라 입을 벌렸다.

"어떻게...? 원탁에서도 풀지못한 족쇄를...?"

"이 정도 구속이야 껌이죠."

딱. 손가락을 튕겨 적토의 전신에 불꽃을 일으켰다. 살짝 따가울 정도로 불꽃이 피어올라 적토가 눈을 질끈 감았지만, 곧 마갑은 불꽃에 녹아내려 바닥에 흘러내렸다.

"아, 뜨겁잖아."

"...풀어도 돼요."

미안하기는 한데 고온으로 녹인 쇳물을 단순히 '뜨겁다'라고 끝난 저 촉수를 뭐라 설명해야할까. 나중에 히메지 히카리를 영입하게 된다면 촉수 샘플을 얻어 연구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푸르르. 촉수에서 풀린 적토가 어물쩍 마갑을 몸에서 털어냈다. 여전히 경계심은 가득했지만, 제 주인에게 허튼 수작을 부린다면 공포를 참아내고 금방이라도 발굽을 들 기세였다.

[단장님. 슬슬 둥지 근처입니다.]

"아. 잘왔어요. ...아니다, 잠깐 거기서 대기해볼래요?"

내 연락에 흑염룡이 속도를 늦춰 서행했다. 만약 운장의 뒤를 쫓아오는 히어로들이 그 동정놈들이라면, 이제 곧 도착할 것이다.

"팬텀, 우리 연기 좀 하죠?"

"대본 거지같이 하면 죽는다?"

"......장담은 못해요."

그렇게 중국과 원탁, 나아가 세계를 기만하는 인질극이 시작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