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1부 6장 (20)
오라클의 예언은 꿈을 통해 이루어진다. 세계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눈으로 보고, 그것을 깨어난 뒤에 빠짐없이 기록하여 미래의 큰 위험을 예지한다.
그리고 그 예언은 언제나 정확히 들어맞았다. 전대의 오라클에게서 이능력을 '전승'받은 이래로, 오라클의 예언은 100%의 신뢰도를 가지고 있었다.
두 달 전까지는.
"또 이 꿈이야?"
오라클을 폐허가 된 도시에서 무작정 걸었다.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그러나 주변 광경은 오로지 콘크리트의 무덤뿐,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까아악-
"으악! 깜짝이야."
건물 사이로 웬 새 한 마리가 날갯짓하며 하늘을 날아갔다. 오라클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침을 바닥에 뱉었다.
"저 새 새끼들은 허구한 날 튀어나오네."
푸른 불꽃을 흩날리는 괴조(怪鳥). 약 두 달여 일 전부터 오라클의 꿈속에 나와 오라클을 괴롭혀대는 악질 같은 유해조수였다.
서울에서 갑자기 나타난 차원문 사태부터 광검의 죽음까지 항상 '꿈에서 나오지 않는 일'이 생길 때마다 저 괴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또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
오라클은 전대의 오라클이 그리워졌다. 평범한 미국 소년에게 점성술이니, 해몽이니 하는 분야는 너무나도 어려웠다.
"세계 멸망 예언만 아니었어도 그냥 입 닥치고 사는데."
이미 고인이 된 전대 오라클-집시 여인은 제 목숨을 걸고 최후의 예언을 했고, 이능력을 소년에게 넘겨주었다.
2025년 12월 25일. 지금으로부터 약 5년 하고도 반년이 지난 뒤의 크리스마스.
"'별에서 온 자가 세계를 멸망시키리라.' ...오라클 아니었으면 진짜 망언이었는데."
오라클은 분홍빛으로 변한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이미 죽어버린 자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오라클은 스스로 지금의 '꿈'이 현실에 어떤 방식으로 드러날지 고민해야 했다.
까아악
푸득. 오라클은 머리 위에 떨어진 무언가에 넋을 잃었다. 이 감각, 분명 잘못 느낀 게 아니다. 오라클은 손을 그대로 옮겨 제 머리 위에 떨어진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새똥이라고?'
오라클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지금까지는 놀라게 하거나 하는 정도로 끝났지만, 이렇게 오라클을 엿먹인 적은 처음이었다. 오라클은 푸른색의 똥을 바닥에 집어 던지고 고개를 들었다.
"이 새끼가-"
까아아악 까아아악 까아아악 까아악
까아아악 까아아악 꺼어어억 까아악
어느새 하늘에는 수많은 새가 무리 지어 활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새들의 꽁지 부근에서 무언가가 비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걸 보고 예언을 하라고?"
오라클은 혀를 깨물었다. 도저히 비처럼 떨어지는 저 오염물들에 맞아 죽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오라클은 꿈속에서 사망하고, 관측이 끝났다.
* * *
<5시 13분, 오호츠크해 상공 오라클 전용기.>
"으아악?!"
오라클이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평소보다 더 과격한 기상에, 바로 옆 부기장석에 앉아있던 가웨인이 놀라 손을 뻗었다.
"괜찮습니까?"
"아, 어어. ...기분이 존나 더러운 것만 빼면."
오라클의 험한 발언에 가웨인이 엄한 표정을 지었다.
"말은 곱게 해야 합니다. 제가 오라클 아버님께 교육을 양도받은 이상-"
"아, 진짜! 꿈이 이상했다니까! 갑자기 하늘에 온통 새들이 나타나서...."
애애앵--! 훈육을 할 틈도 없이 괴수 경보가 울렸다. 한반도에서 오라클의 전용기에까지 신호가 들어올 정도로, 레이더에 포착된 괴수의 수는 수십, 수백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신호는 한반도의 남단과 북단 양측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뭐, 뭐야?!"
"부산, 단둥. 두 군데서 동시에?"
[단장! 여기는 이제 소강상태! 으아악?! 파, 팔에 회충이!]
부산에서 연락이 들어왔다. 질풍객, 히메지 하야테는 제 팔을 물어뜯으려는 회충을 칼질로 조각내며 비명을 질렀다.
[모, 모비딕 잡고 지금 안에서 회충들 튀어나왔어! 다 죽이려면 시간 좀 걸릴 것 같아!]
[뭐 해?! 빨리빨리 안 죽여?! 네가 싸질렀으면 네가 치우란 말이야!]
질풍객의 옆으로 백발의 여인이 스쳐 지나갔다. 질풍객은 울컥하면서도 달려드는 회충의 머리를 칼로 찍었다.
[야, 너도 같이 ㅆ.... 젠장! 아무튼 여기는 상황 끝! 모비딕은 죽었고 잔반만 처리하면 돼! 천천히 와!]
질풍객이 연락을 끊었다. 폭풍 같은 연락에 잠시 둘이 어안이 벙벙해 있다가 곧 제정신으로 중국 단둥의 신호를 확인했다.
"B급 괴수가 수십, 아니 수백?!"
"부산은 A급이 넘쳐나잖아! ...위성은 또 왜 이래?"
밤하늘을 찍던 위성 사진도 먹통이 되었다. 단순히 B급 괴수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압록강 인근의 마력 농도는 매우 짙었다. 가웨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서울에서 나온 S급 괴수일까요?"
"그건 또 뭐야?"
오라클이 신경질을 부렸다. 서울에 S급 괴수가 출현한다는 내용은 꿈에서나 현실에서나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오라클이 관측하는 사이에 나온 괴수입니다. 마치 전설 속 마룡 보티건과 같은-"
"그런 게 나왔으면 당장 깨웠어야지!"
"5분전에 나온 겁니다...."
"젠장!"
오라클이 다시 험한 말을 뱉고는 기록을 뒤졌다. 가웨인의 말대로 블랙 드래곤은 푸른 화염을 내뿜으며 북으로 날아올랐다. 오라클은 지도와 블랙 드래곤의 위치를 가리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저게 벌써 저기까지 날아갔다고? 말이 안 되잖아. 시간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별개의 사건 같습니다. 괴수는 이제 평양 상공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단둥의 괴수들은 갑자기 생성되었죠. 아마 '둥지'가 튀어나온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뭐? 장난해? 예언에도 없는 상황이 지금 뭐 이렇게 많이 터져 나와?"
오라클은 신경질을 부리며 단둥의 위성 영상을 연결했다. 차원문의 영향은 아닌 듯, 영상 신호는 말끔했다. 그래서 오라클은 더 열이 받았다.
치직. 막 다른 지역을 지나고 있던 위성의 영상이 단둥의 새벽하늘을 비췄다. 둥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괴수 반응에 오라클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 미친."
단둥 하늘에 푸른 새들이 날아다닌다. 새들은 하나하나가 B급 괴수의 신호를 뿜어대며 히어로들을 습격해댔다. 오라클의 시선이 시계로 돌아갔다.
"무슨 예지몽이 이렇게 금방 일어나느냐고?!"
오라클의 관측이 끝난 시각은 5시 13분. 그로부터 정확히 2분 뒤에, 단둥에는 둥지가 생기고 새들이 날개를 퍼덕였다.
* * *
<그 시각, 사할린섬 유즈노사할린스크 공항.>
여인은 팔짱을 낀 채 하염없이 왼손의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른손의 스마트워치와는 달리 구시대의 아날로그 감성이 느껴지는 손목시계는 어느덧 5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람 기다리게 하네, 정말."
여인은 옷을 단단히 여몄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10분 만에 채비를 마치고 모스크바에서 사할린까지 '전이'했지만, 정작 여인을 태우고 움직일 비행기는 아직 도착도 하지 않았다.
여인은 스마트워치를 눌러 가웨인을 호출했다. 다행히 가웨인은 금방 호출을 받았다.
"어떻게 된 거니, 단장. 지금 전용기 이쪽으로 오는 거 맞아?"
[미안합니다, <운디네>. 아무래도 저랑 오라클은 중국 쪽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갑자기? 아, 운장 때문에?"
[예. 아무래도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 같습니다. 오라클이 또 세계멸망을 관측한 것 같습니다. ...내용은 차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백발의 여인, 블라디미르.R.아나스타샤는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세계멸망? 지난번에도 그렇고, 너무 뜬금없지 않니?"
[이미 몇 차례 오라클이 세계가 멸망하는 예언을 했습니다. 다행히 아직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혹시 모르죠.]
"알았어. 합류할게. 나 먼저 부산 내려가 있을까?"
[아니, 중국으로 가줘.]
오라클이 머리칼을 잔뜩 헝클인 상태로 스크린에 나타났다.
[부산은 곧 정리될 거야. 지금 중국에 새 떼가 튀어나와서 아주 난리가 났어.]
"새 떼?"
오라클이 관련 데이터를 보냈다. 운디네는 푸른 불사조 떼를 보고는 막 마시던 보드카를 뿜었다.
"푸헉, 커흐으, 얘! 이거 뭐야?! 이것들이 왜 여기 있는 거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갑자기 튀어나왔다고. 예언에도 없는 것들이.]
"...네 예언에 없어?"
운디네는 입술 아래로 흐른 보드카를 쓱 닦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듯한 운디네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좋아. 나 그럼 우선 부산 좀 갔다가 합류할게."
[아니, 부산은 이미 정리가 되고 있다니까?]
"내가 부산에 갔다 온다는데 문제라도 있어? 우리 아빠 지금 나 궁 밖으로 나온 거 알면 너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니?"
[야! 사람한테 협박 그따위로 하지 마, 이 망할 주정꾼아! 이 Fu-]
[아아아아! 여왕 폐하 만세! 아아아아!]
오라클이 단단히 화가나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퍼부어댔다. 가웨인이 별 시답잖은 소리를 해대며 오라클의 입을 막는 사이, 여인은 스크린을 꺼버렸다.
"안 그래도 뒤숭숭해 죽을 것 같은데 말이야."
운디네의 몸이 공항에서 사라졌다.
* * *
<5시 16분, 압록강 괴수 둥지.>
"황천이사, 창천당립(黃天已死 蒼天當立)!"
나는 압록강을 넘어온 히어로를 다시 물속으로 걷어차며 크게 외쳤다. 과연 물속에서 내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일단 소리쳐보고 싶었다.
"쿠허억, 쿨럭!"
남자는 물 위로 떠올라 물을 토해냈다. 하지만 곧 정수리에 앉은 미니 피닉스의 부리가 남자의 정수리를 찍었고, 남자는 기절해버렸다. 미니 피닉스의 부리에서 흐른 창염에 남자의 몸에 있던 마력이 모두 불타버렸다.
"자! 괴수는 죽이고 인간은 겁ㅌ...아니 기절시키는 겁니다!"
- 코어는 잘 먹겠다는 거시야
"...아니. 코어는 둥지로 가져오세요."
전령으로 활용하거나 전이용 분령(分靈)으로 활용하던 서울 수복 작전 때와는 달리, 미니 피닉스는 이렇게 공격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특히 큐브를 통해 끊임없이 미니 피닉스를 생산한 덕분에, 그 수가 어느덧 백을 훌쩍 넘겼다. 중국의 사냥꾼들은 때아닌 매사냥에 하늘로 총구를 올리고, 미니 피닉스들은 유유히 공격을 피하며 사냥감을 노렸다.
그 중 간신히 강을 건너온 이들은 나와 덕배, 팬텀이 직접 요격하며 도하(渡河)를 막았다. 기절시킨 히어로들의 수가 벌써 250명에 이르렀다.
국경 인근의 히어로들이 모두 뛰쳐나왔을까에 대해 의심이 될 정도로 많은 수였다. 대부분이 C급이나 D급이었지만.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네요."
"야, 지금 죽이는 거 아니잖아. 사람 오해할 말은 하지 마."
팬텀이 촉수로 바닥을 구르던 코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코어 근처에는 으스러진 바윗덩어리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나는 팬텀에게서 코어를 건네받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흐어, 허, 허억!"
코어가 빛나고, 덕배가 부활했다. 기껏 정령석을 쥐여줬음에도 불구하고 덕배는 사냥꾼들을 요격하기 위해 직접 강을 건너다 그대로 사냥꾼과 히어로들의 표적이 되었다.
"슬슬 강을 건너려는 히어로들은 없는 것 같으니, 이쪽에서 강을 넘어갈까요?"
팬텀이 점프하려는 듯 촉수를 가지런히 모았다. 나는 그 꿈틀거리는 모습에서 모비딕의 제2형태가 떠올라 오한이 들었다.
"야! 놀지 말고 싸워!"
덕배를 강 너머로 집어 던진 나는 팬텀의 촉수와 아니사키스를 연관을 지어 질색하다가, 팬텀에게 오해를 사기전에 간단한 설명을 마쳤다.
아니사키스는 군체(群體) 괴수로 수천 마리가 각각 A급 괴수이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막대한 경험치와 코어 보상을 주는 보너스 스테이지다.
약간의 혐오스러움만 감수하면 엄청난 성장을 할 수 있는 좋은 매개체. 물론 이 세상은 게임이 아닌지라 코어만 죽어라 얻게될 것이다.
나는 팬텀과 아니사키스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강을 뛰어넘었다. 이미 집어던졌던 덕배를 수습해 부활시키고, 히어로들을 타격해 기절시켰다.
"팬텀! 적이 죽지 않게 잘 조절해요!"
"안 그래도 그러고 있거든?!"
죽여서야 곤란했다. 서울 수복 작전을 방해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전투도 덤벼드는 히어로들을 죽이지 않는다는 족쇄를 걸고 싸우게 됐다.
"비켜!"
팬텀의 촉수 하나가 크게 꿈틀거리고, 팬텀은 곧장 그 촉수로 땅을 크게 내리쳤다.
콰앙! 촉수가 때린 땅에서 검회색의 불길이 치솟았다. 막 히어로 하나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다가 옆으로 치솟은 그 불길에 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흑염룡은 또 언제 복사했어요?"
"네가 괴수로 만들기 직전에. 지금 A급만 모으는 중이야."
"그래요? 잘했어요. ...흐음."
팬텀이 어떤 능력을 복사해 촉수에 저장해뒀는지는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어느새 이 일대의 중국 히어로들은 모두 제압했고, 미니 피닉스들이 기절한 사람들의 옷깃을 잡아 가로로 늘어놓았다. 그게 꼭 집단으로 사망한 시체들을 늘어놓는 것 같아 썩 보기에는 좋지 않았다.
나는 스마트워치를 눌러 등대를 호출했다.
"아아, 등대 나오세요. 첫 웨이브는 무사히 종료. 지금 어디쯤입니까?"
[막 평양을 지났습니다. 흑염룡이 최고 속도로 날고 있습니다.]
내 마력의 지원을 받지 않는 흑염룡의 비행 속도는 아음속에 이르니, 대략 15분 정도면 거점인 '둥지'에 도달할 것이다.
"좋아요. 오는 대로 즉시 방어선을 펼치세요. 우리는 이대로 북쪽으로 밀고 올라갑니다."
[단장님, 절대 죽이시면 안 됩니다? 나중에 원탁과 협상에서-]
"당연하죠. 나중에 등대가 잘 얘기해줘요. 인질을 거하게 잡으면 원탁 대장이라도 당장에 영국에서 날아올 테니."
[하아, 알겠습니다.]
등대의 한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하늘성과 아키택트가 양지로 나아간 이상, 청화단의 조직을 대표할 얼굴로 내세운 등대를 요긴히 써먹어야 했다. 앞으로 대통령, 지부장, 거기에 히어로 협회 회장과도 얼굴을 맞대고 협상해야 할 터.
"걱정 마세요.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고 하잖아요? 제가 지금 원탁들은 속속들이 다 알고 있으니까 마음 놓아요. 한 명 빼고."
"누군데?"
팬텀이 슬쩍 다가와 귀를 쫑긋 세운다. 팬텀, 가을은 이능력자가 된 이후 내게서 듣는 세계의 비사(秘史)를 듣는 걸 제법 좋아했다. 그리 큰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니, 나는 그대로 언급해줬다.
"러시아 귀족가 출신의 히어로인데, 앞으로 2년 뒤에 죽을 사람이에요."
"...? 너 미래의 일은 다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아는 것만 알아요. 모르는 건 저도 모릅니다."
원작에서 있었던 일-특히 히로인들에 관한 설정이야 눈에 훤히 꿰고 있으나, 과거 시점-그것도 해외의 일까지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 하나는 알고 있다.
"펜릴이 깨어나면 잡아먹힐 원탁? 아무튼 중요한 사람은 아니에요."
이름도 모른다. 그냥 '과거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 정도로 나왔던 인물이고, 이미 원작 시점에는 고인이라 동료로 들일 수도 없었다.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존재였다.
"그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부터 신경 쓰자고요."
나는 괴인형으로 모습을 바꾼 뒤, 전방을 가리키며 끊어진 다리 끝에 섰다. 팬텀과 덕배도 무언가를 느낀 듯 내게서 물러섰다.
[둘 다 둥지를 보호해라.]
"응."
"알겠다."
저들도 눈치챘을 것이다. 북쪽에서 지축을 흔들며 달려오는 군신의 질주를. 비록 멀리서 다가오는 마력의 잔향은 석하랑처럼 방대하지는 않으나, 장인의 손에 연마된 칼날처럼 날카로워 피부를 찌를 듯 아파졌다.
"야, 이거 설마...."
"맞는 것 같은데."
[온다.]
우레같은 말발굽 소리와 함께 적록의 인마가 맞은편 다리 끝에 멈춰 섰다. 검은 철갑을 두른 적색의 유니콘,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탄 녹색 전포의 히어로.
운장(雲將), 샤오린(小林).
이 세계에 떨어지고 처음으로 만났던 인간과 무려 두 달 만에 이렇게 서로 마주하게 되었다.
"......."
운장은 아무 말이 없다. 하지만 가면 아래 늘어뜨린 수염-긴 머리칼은 아주 미약하게 떨리고 있다.
[왜 그렇게 떨지?]
괴인으로서의 나를 만나서 두려워하는 걸까, 아니면 내 본체와 괴인형의 나를 동일 인물로 알아차린 걸까.
어느 쪽이든 관계없다. 나는 주먹을 꽉 쥐어 마력을 끌어올렸다.
[청화단의 괴인. 피닉스.]
"......!"
운장이 고삐를 느슨하게 쥐었다. 다행히 내 의사가 전해진 모양인지, 미세하게 떠는 손에 안정이 돌아왔다.
"......원탁의 히어로, 운장."
더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적토가 투레질하며 자리를 박차고 뛰어오를 준비를 하고, 운장은 창대를 꽉 쥐어 마력으로 언월도를 강화한다.
곧 태양이 떠오를 새벽의 압록강. 그 한가운데에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모를 나뭇잎 하나가 설렁설렁 수면으로 떨어진다.
셋. 내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둘. 적토가 자세를 낮춘다.
하나. 운장의 언월도에 빛이 서렸다.
나뭇잎 하나가 수면에 닿은 그 순간.
괴인과 히어로가 동시에 다리에서 뛰어올랐다.
[들려? 물어볼 게 있어.]
돌아가면 석하랑의 식도에 커피를 트리플샷으로 쑤셔 넣겠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