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1부 6장 (18)
<5시 2분, 청화단 아지트 옥상.>
간부들은 저마다 전투 준비를 위해 흩어졌다. 인간인 하늘성 류천성과 아키택트 제임스를 제외한 모든 괴인이 전투에 나서기로 한 가운데, 피닉스는 가장 먼저 옥상에 올라와 난간에 걸터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또 혼자서 청승 떠네."
어느새 옥상에 올라온 덕배가 피닉스의 옆에 섰다. 피닉스는 덕배에게 한소리를 하려다, 불만을 들숨과 함께 속으로 삭였다. 덕배는 새벽 한강을 내려다보며 능청을 떨었다.
"왜? 내가 어디 틀린 말 했냐?"
"지금 홀로 사색에 잠겨있던 거 안 보여요?"
"그래서 혼자 생각한 최선의 결과가 몰살이냐?"
"......."
피닉스는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 대화를 거부하려는 기색에 덕배가 입을 비틀며 비웃었다.
"일부러 그랬지?"
"...뭐가요."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민 피닉스는 왠지 심통이 나 있었다. 덕배는 그런 피닉스에게 위로를 건네거나 모른 척 배려할 생각 없이, 제 생각을 가감 없이 그대로 내뱉었다.
"일부러 네가 나쁜 사람 자처해서 선택지를 막아버렸잖아. 네가 그걸 마지노선으로 정하면 사람들이 그걸 따르자고 했겠냐? 지금처럼 어떻게든 나서서 수습하려 들겠지."
"...언제는 삽질하지 말라면서요."
"네가 지금 하는 짓이 삽질이다. 기껏 간부들 키워놓고 뭐 하는 거야?"
덕배의 말에 피닉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덕배를 올려다봤다.
"나는 그 정령석 없으면 쩌리나 다름없는 놈이니 그렇다 치고, 네가 만든 괴인들 하나같이 평범한 이능력자는 아니더구먼. A급만 돼도 다른 나라에서 모셔가거든? 쟤들이 무슨 어린애인 줄 알아?"
"...원래부터 이름난 사람들이긴 했죠. 하지만-"
"괴인들이 네 피규어냐? 왜 이렇게 아끼려 들어."
덕배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피닉스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덕배를 올려다봤다.
"코어만 살아있으면 부활한다며. 그럼 네가 괴인들 사지로 몰아가더라도, 코어만 수습해주면 되지 않겠냐. 어차피 다 똑같이 한 번 죽은 목숨인데 또 죽는다고 달라질 거 있겠냐? 네가 안 살려주면 모를까. 아끼다 똥 되는 거 몰라?"
"......."
"깃털 놈들이야 너랑 천가을한테 마킹 당해서 강제로 따른다고 쳐도, 다른 녀석들도 그 명령 때문에 따르는 것 같냐? 다 자기들 생각이 있으니까 너 믿고 밑에서 일하는 거지. 단장이라는 녀석이 자꾸 그렇게 궁상떨면-"
"어휴, 알겠어요."
피닉스가 두 손을 들었다.
"항복. 항복입니다. 다 큰 성인분들 두고 제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네요. 피규어라.... 그쵸. 인정합니다. 제가 또 제 생각만 했네요."
"...갑자기 그렇게 인정해버리면 내가 좀 무안해지는데? 무슨 바람이 든 거야?"
피닉스가 베일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상황과 현실에 순응하기로 한 거죠. 그냥 처음에는 어떻게든 혼자서 해보려고 발버둥 쳤는데, 여러분들 덕분에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피닉스는 제 손을 쥐었다 폈다.
"왜,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감사합니다, 조덕배 씨."
"웁. 기분 나쁘게 왜 그래? □I쳤냐?"
덕배가 질겁하며 피닉스에게서 물러서고, 피닉스는 살포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날 아무 생각 없이 당신 괴인으로 만들었는데, 참 여러모로 많이 도움이 되네요. 모르모트로서, 전력으로서. 전력은 좀 도움이 안 되지만. 푸흐흐!"
"야. 정령석 당장 내놔."
"죄송. 이거 님 거 아녜요."
피닉스와 덕배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옥상에 괴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등대 김지화, 팬텀 천가을. 그리고 궁성 유이신을 비롯한 푸른 깃털의 괴인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올라온 검은 정장의 남자는 왼팔에 흰 붕대를 두르고 있었다.
"......."
남자는 곧장 피닉스의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남자의 옷깃에는 듀라한이라 불리는 괴인들의 목에 박힌 푸른 깃털의 문신이 걸려있었다.
흑염룡 곽용우. 푸른 깃털의 대장이기도 한 그가 마포대교를 벗어나 아지트의 옥상에 발을 디뎠다.
"저를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네. 당신이 해줄 역할이 있어요."
"하명하시지요."
괴인이 되고 나서 많이 차분해지기는 했지만, 그 성정과 감수성이 어딘가로 사라진 것은 아니다. 괴인들이 하나둘 시선을 피하고, 피닉스가 남자의 정수리에 손을 뻗었다. 피닉스의 손에는 정령석이 들려있었다.
"당신이 이걸로 괴수가 되어줘야겠어요."
"알겠습니다."
"......?"
피닉스의 손이 멈칫했다. 다른 간부들도 표정도 흉하게 바뀌었다. 특히 덕배의 표정이 제일 가관이었다. 피닉스가 급하게 손을 내려 흑염룡과 시선을 맞췄다.
"아니. 그렇게 너무 쉽게 받으들이면 어떻게 해요? 당신이 '네?', '제가요?', '괴수요?'같이 반응해야 제가 '네! 괴수라는 건 말이죠....' 이러면서 부연 설명을 하지!"
"네? 제가요? 괴수요? 이러면 됩니까?"
"아아아악!!"
피닉스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흑염룡은 결코 피닉스을 엿먹이려고 하는 의도가 없었다. 정말 진심으로 그는 피닉스의 말을 이해하려 하고 따르고 있었고, 그게 피닉스를 더욱 미치게 했다. 팬텀이 헛기침하며 급하게 끼어들었다.
"그래, 괴수란 게 또 뭐야?"
"크흠. 간단해요. 괴인의 코어를 폭주시켜서 한 단계 위의 괴수로 만드는 겁니다. 정령석이 그 수단이죠."
"...그게 된다고?"
떨떨한 덕배의 얼굴에 피닉스는 또 다른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어, 그 안에 있던 큐브를 꺼내 흔들었다.
"이거 두 개로 안 될 게 뭐 있어요? 원래라면 제가 본체로 옮겨드리려 했는데-"
"기각. 너 운장이랑 본체로 한 번 붙었다며? 들킬 염려가 있어. 안그래도 중국 히어로들이랑 싸우는데 너 살아있는 거 알아봐. 원탁들 싹 다 몰려올 거야."
"-라는 가을 씨 말씀대로, 제가 본체를 꺼내기에는 조금 난감해졌네요. 그래서 두 번째 방법입니다."
피닉스가 한 손에 큐브를 들고, 정령석을 든 다른 손으로는 흑염룡의 정수리에 놓았다. 흑염룡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아마 당신의 이능력, 코어, 그리고 당신의 잠재력에 따라 어떤 괴수가 될지는 몰라요. 다만 제 의사와 마력이 들어갈 예정이니, '빠른 비행능력을 지닌 조류형 괴수'가 되겠죠."
"부작용은 있습니까?"
유이신이 제 활을 꾹 잡으며 물었다. 남들에게는 피닉스 광신도라 불릴지 몰라도, 유이신에게는 나름 푸른 깃털의 대장으로 전 소나무 부대의 히어로들을 '똑같이 신의 은총을 받은 이들'이라며 차별 없이 대해준 고마운 상사였다.
"부작용이라면.... 스스로 다음 경지로 넘어가기 전에는 인간형으로 못 돌아온다는 거? 흑염룡이 A급이고 괴수는 S급 정도 될 테니, 본인이 직접 각성하지 않으면 마음대로 바꾸질 못해요. 이렇게."
피닉스가 모습을 바꾸었다. 한순간이지만 괴인형으로 바꾼 모습에 소나무 부대-특히 철표 박성태가 흠칫 놀랐다.
[S급에 이르지 못한다면 너는 인간의 형태를 벗어나, 평생을 괴물로 살게 될지 모른다. 감당할 수 있겠나?]
"그리하여 강해진다면, 저는 신의 시련을 달게 받겠습니다."
담담한 흑염룡의 말에 피닉스는 다시 인간형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어딘가 미안하면서도 대견한 표정이었다.
"정말로 후회는 안 하시죠? 마지막 기회에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마지막 선택을-."
"후회는 없습니다. 신께서 제게 은혜를 베푸시었으니, 마땅히 그에 따를 뿐입니다. 그리고...."
남자, 생전에는 흑염룡이라 불리던 빌런이 고개를 들었다.
"저는 강해지고 싶습니다. 인간을 초월해서라도."
"...그럼 원하는 대로."
피닉스가 손에 불꽃을 휘감았다. 흑염룡의 몸이 곧 푸른 불꽃에 휩싸였다.
* * *
[5시 정각, 히어로 협회 신서울 지부.]
"빨리빨리 움직여! 부산의 히어로들은 지시에 따라 해안선에서 괴수들을 저지한다!"
유영호가 스크린 위의 점들을 움직여 해안선 곳곳에 배치했다. 석하랑이 만든 얼음벽 중에서도 괴수들이 상대적으로 민가를 향해 넘어오기 쉬운 곳 위주로 히어로들을 편성했다.
틈이 생기는 곳은 군과 협력해 저지하여 시간을 끈다. 그러면 서울에서 출발한 히어로들이 도착하여 마무리할 것이다.
"크루즈 위치는?!"
"34.9, 129.3! 현재 부산을 향해 북상 중!"
오사카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하필이면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대마도를 스쳤다. 대마도에 정박하기도 위험하고 부산으로 직행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선장은 부산행을 선택한 것으로 보였다.
"계속 연락 취해! 신호 잡힐 때까지 계속!"
"예!"
[여기는 설화공주!]
스크린 한쪽에서 석하랑의 스크린이 나타났다. 전력으로 마력을 사용하고 있는 듯 마력 반응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현 지점에서 궁극기를-]
"멈춰!"
유영호는 하랑의 말을 끊고 지도를 슬쩍 흘겼다. 크루즈의 위치와 속도, 모비딕의 이동 동선을 머릿속에서 계산한 유영호는 눈 깜짝할 새에 크루즈의 위험을 판단했다. 유영호는 하랑에게 여객선의 상황을 알리는 스크린을 띄우며 여객선의 구조를 지시했다.
"미안하다. 하지만 지금 너 말고 움직일 사람 없어!"
놀란 하랑이 유영호와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잠시. 하랑은 곧장 유영호의 지시에 따라 허공에 얼음길을 만들어 크루즈를 향해 날았다.
"휴우."
유영호는 한숨을 돌렸다. 일단 설화공주를 보냈으니 이제 후속 대처를 해야 할 때였다.
"화권, 삼사는 지금 당장-"
"서울에서 이상 반응!"
오퍼레이터의 비명에 유영호는 들고 있던 볼펜을 움켜쥐었다. 플라스틱 펜대가 부서지고, 유영호는 곧장 서울의 스크린을 띄웠다.
"여의도에서 괴수 반응! ...S급! S급입니다!"
"뭐?! 갑자기?!"
유영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화권은 신서울에 남겼어야 했나? 설마 아무런 전조도 없이 S급 괴수가, 그것도 서울 한복판-심지어 여의도에 모습을 드러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위성 영상 연결하겠습니다!"
스크린에 위성에서 찍는 화상이 떠올랐다. 어두운 서울의 한 가운데, 전신에서 푸른 불꽃을 뿜어내는 거대한 마룡이 있었다. 마치 서양의 전설속 드래곤이 현신(現身)한 듯, 고개를 들어 입에서 푸른 불꽃을 내뿜으며 제 위용을 과시했다.
유영호는 생각했다. 관악의 차원문에서 나타난 화마룡과는 달리, 저 검은 드래곤이야 말로 진정한 '마룡(魔龍)'이라고.
캬오오오오----!!
마룡이 하늘을 향해 포효하자 위성 영상에 노이즈가 끼기 시작했다. 마룡이 내뿜는 강력한 마력의 파장에 영상은 금방 먹통이 되었다.
그러나 영상이 사라지기 전에 마룡이 내뿜은 푸른 불꽃은 마룡의 정체를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했다.
"듀라한에 이어서 또 저 푸른 불꽃이...!"
차원문 발생 이후 마경이 되어버린 서울에서 나타나는 기현상 중의 하나. 헬하운드의 부활이 그러했고, 듀라한들이 그러했듯, 이번에는 S급 괴수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그 죽였다고 하는 시청사의 뱀이 부활한 것인가?'
유영호가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려치며 소리쳤다.
"경기도 쪽으로 카메라 돌려! 서울 주민들에게 당장 연락해! 대피를-"
"S급 괴수, 날아오릅니다!"
마룡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전장 40m에 가까운 마룡은 서울의 새벽하늘을 유유히 활공하며 기수를 정했다.
북으로.
"뭐?"
유영호가 놀랄 틈도 없이 마룡은 북쪽을 향해 곧게 날개를 뻗었다. 곧 날개에서 제트 엔진처럼 푸른 불꽃을 분사하며 마룡은 북쪽을 향해 빠르게 사라졌다.
"......."
[무, 무슨 일인가!]
괴수대책부의 장관, 장후정이 화들짝 놀라 유영호를 찾았다.
부산의 위험에 대비해 화권 이승형까지 부산에 파견했는데, 졸지에 서울에도 S급 괴수가 나타났다는 경보가 울렸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영호는 담담히 상황을 설명하고자 했다.
"서울에서 S급 괴수가 등장-"
[그러면 신서울에 올 가능성은?!]
말이 끊긴 유영호가 인상을 찡그렸다.
"서울 주민들에 대한 대피가 우선 아닙니까?"
[그, 그렇지만 혹시나 만약이라는게 있지 않은가! 서울은 6만이지만, 이쪽은 수백만이야!]
"...북쪽으로 갔습니다!"
유영호는 짜증을 내며 스크린을 돌렸다. S급 괴수는 그 짧은 시간에 어느덧 개성을 지나 평양을 향하고 있었다.
'설마 평양을 노리는 건가?'
라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괴수는 평양을 지나 더욱 북쪽으로 향했다. 상황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왜?"
도대체 북쪽에 무엇이 있길래 저렇게 급하게 달려가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잠시.
뿌우우우우---! 모비딕이 뱃고동 소리를 내며 수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긴급을 알리는 알람에 오퍼레이터가 다른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리니, 크루즈의 후미가 무언가에 크게 뜯겨나가 있었다.
"젠장! 일단 눈앞의 모비딕부터 처리한다! 너는 서울 S급의 위치를 주시해! 혹시 U턴하겠다 싶으면 보고하고!"
"네!"
유영호는 이를 갈며 부산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은 그저 부산의 상황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제발 이대로 더 올라가서 중국에 가서 깽판이라도 치기를.
유영호는 믿지도 않는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