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1부 6장 (16)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게 아녜요! 제발 믿어줘요!"
히카리는 승형의 다리에 매달려 울부짖었다.
"이 남자, 장기에-괴수가 내뿜는 마기에 영향을 받아서 미쳐버렸다고요! 어쩔 수 없었어요!"
히카리는 제가 그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너무 우스웠다. 죽이고 싶어 죽인 게 아니다. 그건 히카리의 오빠인 질풍객이 입에 달고 사는 변명이었다. 그에 대해 얼마나 많이 타박하고 꾸짖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말을 지금 자신이 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하고 슬펐다.
"믿어줘요.... 제발...."
히카리는 승형의 바지를 움켜쥐며 고개를 떨구었다. 승형은 한쪽 무릎을 꿇어 히카리와 눈을 마주했다.
"이름이 히카리지?"
"...히메지 히카리."
"그래, 히카리 양. ...잘했어."
승형은 히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히카리는 승형의 그 기행에 울음도 멈추고 멍하니 승형을 바라보기만 했다. 승형이 히카리의 등을 토닥였다.
"정상참작이야. 절대로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그렇지?"
히카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승형이 방긋 웃었다.
"CCTV 볼 필요도 없고, 조사 들어갈 필요도 없어. 나는 네 말을 믿어. 널 죽이려 해서 넌 어쩔 수 없이 칼을 들었고, 그게 운 나쁘게 남자를 찔러버린 거야. 그렇지?"
"네, 네! ...."
히카리는 강하게 긍정했다가 곧 불안한 눈빛으로 몸을 떨었다. 도대체 이 남자는 무슨 근거로 생면부지의 소녀를, 그것도 사람 죽이는 게 취미라고 알려진 질풍객의 혈육을 이리도 강하게 믿어주는 걸까.
승형은 히카리의 머리를 솥뚜껑 같은 손으로 헝클이며 일어섰다.
"육감으로 알 수 있어. 이건 거짓말을 안 하거든."
승형이 제 심장을 가리켰다. 히카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육감(六感). 식스 센스라고도 불리며 촉이라고도 불리는 비과학적인 감각. 히카리는 S급 이능력자들이 육감을 이용해 상대방의 감정이나 생각을 읽어낸다는 것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제 오빠인 하야테가 지금까지 히카리에게 그따위로 행동할 리 없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 불확실성이 가득한 '감'만을 근거로 저를 믿어주고 지지해줬다.
"그리고...."
승형이 몸을 일으켜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남자의 검붉은 피에서는 메케한 보라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넌 사람을 죽인 게 아니야."
"네? 그게 무슨-"
히카리가 무언가 말할 틈도 없이, 승형의 주먹이 남자의 시체를 내리쳤다. 화륵! 승형의 백염 속에서 푸른색이 감도는 불꽃이 피어올라 남자의 시체를 태웠다.
"오염된 마력을 태우는 정화의 불꽃."
"네...?"
"내 불꽃은 저 마기(魔氣)를 정화하는 데 특화되어 있나 봐."
뜬금없는 승형의 말에 히카리가 흠칫하던 찰나, 남자의 시체가 벌떡 일어나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키에에엑! 쿠웨에엑!
남자의 온몸이 비틀린다. 피부는 갑각류처럼 단단해지고, 팔은 날카로운 집게처럼 변했다. 흡사 특수촬영물에나 나올법한 괴물로 변모해가는 모습에 히카리가 숨을 참았다.
"그러니까 내 힘이라면, 이 남자를 원래대로 돌릴 수 있어!!"
승형이 조용히 남자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괴인으로 변하던 남자는 승형의 주먹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승형의 눈동자 속에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캬아아악!
죽어있던, 아니 죽은 척 하고 있던 괴인의 얼굴에 주먹이 꽂혔다. 괴인은 안면의 충격에 몸을 부르르 떨다가 바닥에 축 늘어졌다.
"끄르륵."
남자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쓰러졌다. 입에서 튀어나온 진보랏빛 진액이 승형의 불꽃에 타들어 갔다. 이윽고 남자의 귀기 어린 얼굴에 붉은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아, 아?"
"이해하려고 하지 마. 나도 원리 같은 건 모르니까."
그저 심장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승형은 남자가 점차 안색이 돌아오고 안정된 호흡을 하는 것에 숨을 돌렸다. 그러고는 슈트 안에 고이 모셔둔 포션을 꺼내 뚜껑을 열어 남자의 상처에 부었다.
"자. 이걸로 넌 아무도 죽이지 않은 거야. 됐지?"
"하, 하지만 사람을 다치게 했잖아요?!"
"이 남자가 괴인이 되어 너를 죽이려 한 거잖아? 나는 알 수 있어."
"어떻게?!"
승형은 볼을 긁적이며 웃었다. 곧 바닥에 주저앉은 히카리에게 손을 건넸다.
"감으로. 자, 일어날 수 있겠어?"
"......."
히카리는 제 앞머리가 길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랬으면 제 눈보다 붉어진 얼굴에 더욱 열이 올랐을 테니.
"일어설 수, 있어요."
히카리가 승형의 손을 잡으려던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죽음의 위험 속에서 살아났다는 안도감에 전신에 탈력감이 들었다. 승형이 난처하게 웃으며 손목을 입 가까이 대었다.
"......여기는 화권. 화물칸에 있던 승객 1명과 선원 1명을 구조했습니다."
[그래? 혹시-]
"네. 질풍객의 여동생, 히메지 히카리. 본인확인도 거쳤습니다."
[잘됐다! 그럼 너 동생분 다른 히어로에게 인계하고 당장 이쪽으로 튀어와! 너 아니면 저것들 못 죽인대!]
집정관이 해운대 인근의 전황을 스크린에 띄웠다. 설화공주와 질풍객이 용을 쓰는 가운데, 막 도착한 히어로들이 열심히 얼음을 깨뜨리고 있었다.
"......?"
사람을 구하느라 정신이 없던 승형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순간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승현의 슈트를 짚고 일어선 히카리가 눈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영상을 주시했다.
[모비딕은 하랑이랑 질풍객님이 죽였어! 그런데 그 뒤에 내장에서 고래회충들이 튀어나와서 지금 난리야, 아주! 다행히 싹 다 얼려서 위험한 건 아닌데, 잡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하랑이 말로는 네가 필요하다니까 당장 튀어와!]
"......코어 있는 것 같은데?"
히카리가 눈을 찡그리며 승형의 품 안으로 쏙 머리를 내밀었다. 승형이 화들짝 놀라기도 전에 승형의 스마트워치를 누른 히카리가 화상 키보드를 꺼냈다.
"잠시, 7초만. 마력 패턴 좀 분석할게요."
"아니, 갑자기 무슨-"
[가만히 있어, 이승형!]
집정관의 추상같은 호령에 승형은 바짝 얼어붙었다.
"역시. 모비딕의 안에서 장기를 뜯어먹은 일반 괴수예요. 마기의 영향을 받기는 했는데, 코어가 없는 건 아녜요. 아주 작을 뿐이지. 그게 A급까지 성장했네요."
[하지만 질풍객 님이 벌써 20여 마리를 잡았는데, 아직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바보오빠.... 흠흠. 질풍객은 한 번 크게 베기만 해서 그래요. 방출하는 마력 상태로 봐서는, 코어 크기가 제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같아요. 아마 그 20마리 코어, 바다에 그대로 수장됐을 거예요."
[예? 자, 잠시!]
집정관이 놀라 신호를 돌린다. 중계 영상 속 질풍객이 막 회충 다섯 마리를 한 번에 베어 환호하다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히카리가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승형은 불편한 마음이 가라앉았다.
'사람 안 죽였다는 것에 마음을 놓아서 다행이야. 잘못했다가는 평생 짊어지고 갈 뻔 했어.'
"......."
히카리가 제 스마트워치로 마력분석에 한창 빠진 사이, 승형의 시선은 이제는 고르게 숨을 쉬는 남자에게 향했다.
'인간이 괴수처럼 차원문의 마기에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저 남자가 미쳤고 이 아이를 습격한 건가?'
'감'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성은 그걸 판단할 근거가 몹시 부족하다고 반박한다. 감정은 한창 회충의 마력 패턴 분석에 빠진 히카리를 동정하고 애도한다.
어른에게 습격당하고 사람을 찌른 충격에 얼마나 고통스러워했을까. 승형은 다른 손으로 히카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
"괜찮아. 너는 아무 잘못 없어."
"......아."
히카리의 동공이 다시 흔들렸다. 승형은 마력을 일으켜 히카리의 주변을 따스하게 데웠다.
"그러니까 마음 편히 있어도 돼. 네 잘못이 아니야."
똑. 히카리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승형이 당황해 손을 뻗기도 잠시, 히카리가 승형에게 와락 안기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흐아앙! 흐어, 흐ㅡㅇ으어ㅓ어ㅓㅓ"
"그, 그래. 착하지."
승형은 어정쩡한 자세로 히카리의 등을 두드렸다. 히카리의 눈물과 콧물이 승형의 슈트를 적시고, 곧 집정관이 연결을 재개했다.
[좋아! 여기는 준비 끝났다! 너만 오면.... 야, 이승형. 너 뭐하냐?]
"......히카리 양이 아무래도 몹시 놀란 것 같습니다. 지금 진정시키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래? ...크흠, 그럼 어쩔 수 없나.]
[어쩌긴 뭘 어째?! 당장 가라고 전하시게!]
스크린이 하나 더 나타났다. 승형의 손이 굳었다. 선의철이었다.
[A급 코어가 지금 수천 개야! 지금 대마도를 진정시킨 일본 히어로들이 부산으로 올라오려고 생난리를 치고 있지 않은가! 바다에 떠내려가면 어쩌려고! 코어만 팔아도 조 단위의 이익을 볼 수 있어!]
"대통령님."
승형이 선의철의 말을 끊었다. 히카리를 진정시키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는 제 앞에 도움이 필요한 분을 돕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화권! 환자의 이송에 차질이 없도록!]
[뭐?! 야! 이승형!]
선의철의 스크린이 사라졌다. 아마 집정관이 중간에 연결을 끊어버린 모양이었다. 어느덧 히카리가 울음을 뚝 멈추고 승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진정되지는 않은 듯 딸꾹질이 계속 일었다.
"그, 훌쩍! 아저씨 보고, 킁! 와달라는, 흑! 거죠?"
"......어."
번역기는 말을 듣지 않는다. 승형은 히카리가 이능력자인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마력을 통해 의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저도 갈래요. 데려가 줘요."
"뭐? 안 돼. 위험해."
히카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승형의 슈트를 꽉 움켜쥐었다.
"아저씨 옆이 제일 안전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를 저기에 데려다줘요. ...오빠가 있을 거예요."
"아."
승형은 단번에 이해했다. 동생을 구하기 위해 미국에서 한걸음에 달려왔다고 하니, 동생의 안전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능력자라도 어린아이를 전장에, 회충이 득실득실한 곳에 데려가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고민이 되었다. 승형이 교육적인 문제를 두고 사색이 빠진 그때, 집정관의 신호가 돌아왔다.
[그래? 히메지 양이 와준다면 천군만마지. 그런데 괜찮겠어?]
"괜찮아요. 다저스 때 저것보다 심한 것도 다 봤는걸요."
"아!"
승형은 그제야 히카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상기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마룡들의 약점을 파악해내어 다저스 게이트 공략에 일조한 천재 소녀. 사람을 찔렀다는 혼란에 빠져 여린 소녀라는 첫인상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미안. 금방 데려다줄게."
승형은 슬쩍 남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남자는 다행히 의식을 잃은 채 바닥에 쓰러져있었고, 마침 지하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화권!"
"풍백 어르신! 기절한 선원을 부탁드립니다!"
"......오냐!"
풍백이 선원의 옆에 앉아 그를 부축했다. 승형이 안도하며 막 떠나려던 찰나, 히카리가 승형의 옷깃을 잡았다.
"안아줘요."
"......안아달라고?"
히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승형은 숨을 고르며 히카리에게 등을 내밀었다.
"위험할지도 몰라. 괜찮겠어?"
"......."
히카리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승형의 등에 어부바 자세로 업혔지만, 승형은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승형이 고개를 돌려 재차 물었다.
"괜찮겠니?"
"...누구 동생인데요. 흥."
표정을 굳히며 말하는 히카리의 태도에 승형은 헛웃음을 지으며 전방에 마력을 둘렀다.
"그럼 꽉 잡아!"
승형이 화물칸을 크게 박차고 뛰어올랐다.
계단을 뛰어넘어, 갑판으로 올라, 바다를 가로지른다. 등에서 히카리가 놀라 몸을 밀착하는 게 느껴졌다.
두근두근.
해운대와의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심장 속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게 느껴진다. 마기를 머금은 괴수들이 넘쳐흐르는 것에 불꽃은 승형을 더욱 닦달하는 것만 같았다.
꿀꺽.
그래야만 했다. 전투를 앞둔 긴장감이 아니라면, 지금 이 두근거림은 등에 업고 있는 소녀와의 접촉에 따른 신체 현상이라는 말이 아닌가.
'아니야!'
무엇이 아니라는 건지 자문자답할 틈도 없이, 승형은 해운대 백사장에 도착했다. 얼어붙은 해운대 바닷가의 빙판 위를 오가는 히어로들이 모습이 조금은 우스꽝스러웠다.
거대한 얼음 구덩이 끝에 서 있는 하랑이 히어로들에게 소리쳤다.
"빨리빨리 담아요! 저 양아치가 훔쳐 가기 전에!"
"누가 양아치래! 지금 나도 돕고 있는 거 안 보여?!"
하야테가 회충이 얼어붙은 덩어리를 칼로 찔러 구덩이 안으로 던졌다. 다른 히어로들 또한 회충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얼음을 옮겨 구덩이 안으로 던졌다.
카앙! 얼음 덩어리가 안에 있는 얼음 덩어리와 부딪혔다. 얼음 안에는 회충들이 자리 잡고 있다. 손을 빙판에 대고 있던 하랑이 승형을 눈치채고 그를 반겼다.
"어, 아저씨! ...등에는 누구?"
"질풍객 동생, 히카리 양이야. 자."
승형이 자세를 낮추고, 히카리는 뚱한 승형의 등에서 내렸다. 히카리를 발견한 하야테가 한걸음에 구덩이를 뛰어넘어 히카리에게 달려왔다.
"히카리이이이이이이!!"
해운대 전체가 울릴 정도로 하야테는 히카리를 반기며 달려갔고, 그대로 주먹을 들어 히카리의 이마를 찍었다.
"아야?!"
"너 제정신이야?! 뭐?! 해킹으로 표를 구해?! 너 진짜 나 죽이려고 작정했냐! 내가 그렇게 한국 위험하다고 오지 말라고 몇 번을 얘기했는데 왜 네 멋대로 행동하는 거냐고! 내가 얘기했지! 너 아직 중학교 1학년이고 어른 아니라고!"
"......칫."
히카리가 아픈 이마를 부여잡으며 혀를 찼다. 몰아치는 허리케인 같은 잔소리는 여전했고, 히카리는 그걸 묵묵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
"미안?! 너 사람 죽이고 나서도 미안하다고 말하고 끝낼래?! 어?!"
"...!"
승형이 남매 사이에 끼어들었다. 하야테의 눈이 실처럼 가늘어지고 살기가 번뜩였다.
"비켜. 지금 가족끼리 얘기하고 있잖아."
"나중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만, 방금 그 말씀은 실수입니다."
담담한 승형의 말에 하야테의 노기가 누그러졌다. 승형이 눈짓으로 자신의 뒤를 가리켰고, 히카리는 몸을 벌벌 떨며 승형의 옷깃을 잡고는 하야테로부터 몸을 숨겼다.
"......허어."
하야테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 번 뱉어버린 말은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미안하다, 동생아."
하야테는 고글을 벗고 자세를 낮춰 히카리와 눈을 마주했다. 쌍둥이가 아닐까 봐 의심될 정도로 닮은 남매는 눈높이를 맞춰 서로를 바라봤다.
"내가 밖에 돌아다닌다고 네가 그렇게까지 여기 오고 싶어 하는 지 몰랐어. 배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몰랐고. ...너무 다그쳐서 미안해."
"......."
히카리는 그저 두 팔을 벌렸다. 하야테가 활짝 웃으며 다가가 히카리를 안아 들었다.
"집정관. 미안한데 얘 재울 곳 있어? 이제 여기도 소강상태인데, 히카리를 좀 재워야 할 것 같아."
[네? 으음.... 어, 정말요? 아, 알겠습니다. 크흠! 인근에 유성의 호텔이 있습니다. 차량을 보낼 테니-]
"위치만 알려줘. 걸어가는 게 더 빨라."
하야테는 아기를 안 듯 히카리의 등을 토닥이며 허공을 밟았다. 집정관은 황급히 좌표를 찍어 보냈고, 하야테는 하랑과 승형을 번갈아 봤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지. 특히 화권...너는."
말에서 살기가 느껴진 건 승형의 착각일까. 하야테는 허공을 밟으며 해운대에서 사라졌다.
"......큰일났네."
승형이 머리를 긁적였다. 잘못한 건 없지만 왠지 크게 잘못한 느낌이다. 하랑마저 눈초리가 애매했다.
"하랑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다."
"아저씨. 우리 스승님 장례식 이후로 얼마 만에 봤죠?"
뜬금없는 하랑의 질문에 승형은 기억을 되짚었다.
"...아마 처음일걸?"
"......아하. ...흐흐, 으흐흐! 아하하하하!!!!"
갑자기 하랑이 배를 잡으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손은 얼음 구덩이에 대놓고 경련하며 웃는 게 꼭 조증이라도 걸린 것 같았다.
"하, 하랑아?"
"뭘 안 반해! 크흐흫! 남의 심장에다가 대놓고 지 꺼라고 마킹하고 가놨네, 그 가스나! 아하하하!"
"저기요? 설화공주님?"
회충이 든 얼음 덩어리를 던지던 히어로들도 하랑의 광소(狂笑)에 순간 멈칫했다.
"아, 하하하, 하아. ...하하. 미안. 그냥 그럴 일이 있어서."
하랑이 숨을 헐떡이며 겨우 진정했다. 하지만 겨우 입술을 깨물며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저씨, 잠시만."
하랑이 머리핀에 손을 올렸다. 푸른 새와도 같은 모양. 승형은 왠지 기시감이 들어 눈을 찌푸렸다.
두근!
심장이 크게 두근거린다. 승형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조금 전의 두근거림은 전투를 앞둔 긴장감이었다.
하랑은 머리핀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퍽 짜증을 냈다.
"하 씨, 안 받네. ...뭐 됐어. 재미있는 걸 알았으니. 으흐흐. 아저씨! 일로 와봐요."
승형을 바라보는 하랑의 표정이 왠지 음흉하다. 승형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 얼음 구덩이를 가리켰다.
"이거 어떻게 하라는 거야?"
"자세한 건 집정관님께! ...어? 와, 대박. 가스나 힌트까지 주고 갔네. 소름."
자문자답하는 하랑을 뒤로한 승형이 집정관을 호출했다. 다크서클이 짙음에도 시원하게 웃고 있는 유영호가 작전의 개요가 담긴 시뮬레이션을 스크린에 띄웠다.
[쓰레기 소각할 시간이다, 승형아.]
* * *
<인근, D섬.>
"잘 타는군."
허윤환은 절벽의 끝에서 해운대에 치솟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랑이 만든 거대한 얼음의 벽 안에 승형의 백염이 얼음을 녹이며 회충을 태운다. 필사의 각오로 얼음 덩어리를 깨고 나온 회충들은 곧장 승형의 백염에 전신이 타들어 가며 재가 되었다.
땡그랑. 아주 작은 코어만이 얼음벽 안에 고이기 시작했다. 허윤환은 하나둘 쌓여가는 A급 코어의 마력 파장을 느끼며, 마스크 옆을 두드렸다.
"정말로 협회에 그대로 넘겨도 되겠나?"
[네. 협회도 자생할 여력이 있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이제 저는 코어 욕심 없어요. 공급책이 있으니까.]
은유하가 실실 웃는다. 허윤환은 그 공급책이 누구인지 퍼뜩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둘이 손을 잡은 이유가 거기서부터 시작이었군."
[아버님께는 죄송하게 됐네요. 뭔가 자꾸 사기 친 것 같은 상황이 되어서.]
"됐네. 죽었다가 살려주기도 했고, 그만큼 보상을 받고 있으니 내 이해하지. 그것보다-"
딸칵. 허윤환이 손에 든 막대기의 버튼을 눌렀다.
주왕. 손잡이에서 빛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허윤환은 제 손에 들린 광선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유성의 기술력은 대단하군. 이걸 재현해낼 줄이야."
[...아버님?]
"알겠네. 앞으로는 적당히 하지. 그래도 말이야."
허윤환이 광선검을 옆으로 그었다.
지잉. 금빛의 검이 바다를 긁고, 막 물 위로 튀어 오르려던 해양 괴수들이 그대로 반으로 갈라져 죽었다.
허윤환이 버튼을 다시 눌렀다. 검신을 이루던 마력이 흩어졌다. 절벽 아래 바다에는 괴수들의 시체가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술값은 충분히 해내지 않나."
[밥값이 아니고요?]
"...이제 사소한 건 넘어가세."
어느덧 수평선 너머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허윤환은 몸을 돌렸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겠지. 슬슬 복귀하겠다."
[네. ...아, 잠시만요. 호텔에 질풍객이 와 있어요. 지금 오시면 혹시 걸릴 수도-]
"싸움 도중에 내 딸한테 자꾸 수작걸던 그 한량 말인가?"
[아버님?]
허윤환은 마스크 속에서 헛기침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아닐세. 그럼 나는 여기서 기다리지."
[죄송해요. 금방 다른 장소 수배하도록 할게요.]
"아니. 괜찮네."
허윤환은 수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뒤에는 윗부분이 부서진 주인 없는 묘비가 있었다.
저 멀리 하랑이 얼음 구덩이를 들어 올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허윤환은 그대로 등을 묘비에 기대며 떠오르는 햇빛을 만끽했다.
"나중에 루살카 만나면 한 소리 듣겠어."
어디 한 소리만 듣겠니?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허윤환은 귀에 들리는 환청에 오한이 들었다.
* * *
6월 2일 아침 6시 30분.
설화공주 석하랑이 만든 얼음 무덤 안에 화권 이승형이 불을 질러 아니사키스들을 불태웠고, 히어로들은 얼음 무덤 속에 남은 약 3천여개의 코어를 수거하였다.
금전적 이득도 이득이거니와, 한국은 둘도 없는 소중한 자산을 다시금 확인했다.
설화공주, 석하랑.
이제는 공주라고 부르기도 힘든 소녀는 성숙한 여인이 되어, 스승의 빈 자리를 유감없이 채웠다.
세계 최초의 SS급 이능력자가 탄생한 날이었다.
<부산 사이드,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