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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09화 (109/1,497)

〈 109화 〉1부 6장 (15)

<5시 20분, 밀키웨이 크루즈 화물칸.>

쇠파이프가 자동차의 보닛을 때렸다. 히카리는 땅을 구르듯 몸을 움직여 쇠파이프를 피했다.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제발 정신 차려요!"

히카리가 크게 뒤로 물러서며 소리를 질렀다. 긴급재난문자 때문에 스마트워치를 꺼버려서 직접 스크린을 띄우지는 못했지만, 어떻게든 바깥의 진실을 알려 남자를 진정시켜야 했다.

"여객선은 이미 공원에 들어왔고, 괴수는 한국 히어로한테 죽었어요! 우리 이제 안전하다니까?!"

남자의 스마트워치가 자동으로 히카리의 말을 번역했다. 그러나 남자는 귀를 무언가로 막아놓은 것처럼 듣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그르르르. 크르르."

남자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남자의 눈에서 귀기와도 같은 보라색 장기가 흘러나오고, 히카리는 뒷걸음질 치다 화물 컨테이너에 등이 닿았다.

'차원문의 영향이 인간에게까지 미친다고? 그런 거 듣지도 보지도 못했어!'

"죽어어어어어!!"

생각을 할 겨를도 없다. 히카리는 그대로 몸을 숙여 쇠파이프를 피했다. 쇠파이프는 화물 트레이너를 강하게 내리쳤고, 남자의 손목이 크게 뒤틀렸다.

"크흑?!"

?

히카리가 황급히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남자는 뒤틀린 손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을 거세게 휘둘렀다.

퍼억!

남자의 다리가 히카리의 몸을 강하게 걷어찼다. 불의의 일격에 히카리는 그대로 날아가 컨테이너에 처박혔다.

"커흑?!"

히카리는 마른기침을 토해내며 컨테이너를 짚었다. 모비딕의 공격 때문인지 컨테이너 옆이 크게 구겨져 있었고, 히카리의 몸이 간신히 들어갈만한 작은 틈이 벌어져 있었다.

히카리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그 작은 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어딜?!"

남자가 쿵쿵대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히카리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팔의 근력이 강화되고, 곧장 틈 안으로 상체가 쏙 들어왔다.

부웅! 쇠파이프가 허공을 갈랐다. 간신히 하반신은 집어넣은 히카리는 그대로 컨테이너 안으로 굴렀다.

그러나 안심하기도 잠시, 남자는 틈 사이로 손을 뻗어 히카리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꺄악?!"

"흐흐, 잡았다!"

남자는 우악스러운 손길로 히카리의 긴 머리를 움켜쥐었다. 히카리는 눈물이 핑 돌면서도, 남자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재빨리 결단을 내렸다. 히카리의 오른손에 검은색으로 빛나는 단검이 생겼다.

사락! 히카리는 제 머리카락을 끊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던 긴 머리가 어깨에 닿을 정도로 잘려나가고, 히카리는 그 반동으로 컨테이너 안의 상자에 처박혔다.

콰직. 상자 안의 물체들이 으깨지며 시큼한 냄새를 풍겼다.

끼이이익! 그 물건의 정체에 의문을 느낄 틈도 없이, 남자는 쇠파이프를 구멍 사이로 집어넣어 틈을 억지로 벌렸다. 히카리가 좌우로 눈을 돌려 도망칠 곳을 찾았지만, 사방이 막혀있었다.

덜컹, 덜컹. 컨테이너 문은 열리지 않았다.

"캬아악!"

남자는 마치 저가 심해아귀라도 된 마냥 괴성을 지르며 구멍에 상체를 집어넣었다. 제 몸이 컨테이너에 긁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남자는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와 씨익 웃었다.

"오, 오지마!"

히카리가 옆에 있던 상자를 집어던졌다. 남자는 그걸 피하지도 않고 얼굴로 받으면서도 히카리를 향해 달려왔다. 남자는 그대로 히카리의 미간을 향해 쇠파이프를 찔렀고, 히카리는 피할 새도 없이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졌다.

푹! 쇠파이프가 상자를 찔렀다. 붉은 과육이 터져나갔고, 남자는 곧장 히카리의 배를 걷어찼다.

"아악!"

"크흐흐!"

남자는 쓰러진 히카리의 목을 조르며 일으켜 세웠다. 히카리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제 눈에 보이는 남자의 안광을 분석했다.

'장기의 영향...!'

차원문의 영향으로 미쳐버린 괴수들의 전형적인 행태였다. 남자는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였지만, 히카리는 반드시 죽이겠다는 그 말처럼 히카리의 목을 더욱 옥죄였다.

"커흑?!"

숨이 가쁘다. 작은 히카리의 몸이 남자에 의해 들어 올려졌다.

히카리는 저를 노려보는 남자의 눈을 보고, 곧 남자의 상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남자는 이지(理智)를 히카리를 죽이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삶의 전부라도 된 마냥.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남자가 으스러진 손목으로 쇠파이프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린 그 순간.

하얀빛이 번쩍였다.

* * *

"여긴가?!"

승형이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마력으로 탐지한 열원 반응도, 들릴 리 없는 사람의 목소리도, 바닥에 드문드문 떨어진 핏방울도 모두 지하 화물칸을 향했다.

우우웅-!

하얀빛이 지하에서 퍼진다. 승형은 다급한 마음에 계단을 통째로 뛰어내렸다.

저 멀리, 화물칸 컨테이너 방향에 사람의 열원이 느껴진다. 동시에 기이한 장기가 느껴졌다.

심장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저 장기를 내뿜는 존재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라는 듯, 엔진처럼 펌프질하며 승형의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

얼마 만에 느껴보는지 모른다. 두 달 전 화마룡을 쓰러뜨렸던 날의 그 충만감에 승형은 한걸음에 십 수 미터를 뛰어 화물칸 컨테이너를 열어젖혔다. 굳게 닫힌 철문이 손쉽게 뜯겨나갔다.

"괜찮습니까?!"

승형의 불꽃이 어두운 컨테이너 안을 밝힌다. 싱그러운 딸기 냄새 속에 역한 바닷물 냄새와 피 냄새가 섞여 승형의 코를 찔렀다.

"웁."

토할 것 같았다. 승형은 본능적으로 코를 막았다. 그리고 승형은 보고 말았다.

"아, 아아?"

바닥에 대자로 뻗어있는 남자, 그리고 붉은 안광은 반짝이며 혼란에 빠져있는 작은 소녀.

질풍객의 동생, 히메지 히카리라고 생각되는 그 소녀는 손에 흰빛으로 된 칼을 든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승형의 눈이 자연스레 남자를 향했다. 남자의 심장은 명백하게 칼에 찌른 흔적이 남아있었다.

히카리와 승형의 눈이 마주쳤다. 히카리의 동공은 말 그대로 범죄를 저질렀다 들킨 사람처럼 흔들렸다.

"아, 아니야!"

무엇이 아니라는 건지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히카리는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남자가 저를 죽이려고 했어요!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게 아니라고요!!"

승형은 제 스마트워치에 번역되는 문장을 보며 눈을 감았다.

칼을 든 소녀. 쓰러진 남자. 정황은 충분했다. 승형의 얼굴이 싸늘히 굳었다.

"네가 죽인 거야?"

히카리의 눈에 절망이 내려앉았다.

* * *

바다에 벌레들이 꿈틀거린다. 모비딕의 갈라진 내장 사이로 스멀스멀 튀어나온 회충들이 몸을 부들거리며 바다에 떨어진다.

퐁! 길이 30cm가량 될 회충은 모비딕의 시체를 물어뜯으며 숙주의 몸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모비딕은 이미 죽어 생명이 끊어졌다.

회충들은 재빨리 다음 숙주를 찾아 마력을 뿜었다. 보라색 장기를 주변에 흩뿌려 인기척을 파악했다.

죽여야 할 정령과 살아있는 인간들의 기운이 느껴진다. 회충들이 몸을 꿈틀거리며 빠르게 해안선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히이익!"

하랑이 질겁하며 바다를 얼렸다. 모비딕의 시체에서 쏟아진 회충들이 다른 곳으로 튀어 나가기 전에, 바다를 얼려 긴 원형의 울타리를 세웠다.

쾅! 쾅쾅!

회충들은 그 얼음벽을 사정없이 박치기하며 두드렸다. 저들이 모비딕이라도 되는 양 얼음벽을 깨려는 모습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았으나, 그 수가 문제였다.

[진정해! 우선 최대한 퍼지지 않게 막아줘!]

집정관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회충 하나가 수면을 튀어 올랐다. 파앙! 모래가 흩날리며 하야테가 수면을 달렸다.

서걱. 검이 회충을 베었다. 마력을 머금은 날에는 회충의 점액도 피도 묻지 않았지만, 그 회충 하나가 가진 생명력과 마력에 하야테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녀석들, 하나하나가 A급이다!"

"뭐?!"

하랑이 경악하면서도 얼음 울타리에 마력을 쏟아부었다. 모비딕보다는 훨씬 약하지만 그 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도대체 모비딕의 몸 안에 얼마나 많은 회충이 자리 잡고 있던 것일까.

"아!"

하랑은 입술을 깨물며 하야테를 노려봤다. 하야테가 수십 갈래로 썰어버린 모비딕의 사체는 바다 곳곳으로 둥둥 흩어졌다.

혹시나 다른 장기에도 회충이 있을까 싶어, 울타리를 강화하면서도 눈을 돌렸다.

꿈틀, 꿈틀. 역시나. 울타리 바깥에 떨어진 사체의 장기에서도 회충들이 하나둘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비록 그 수는 울타리 안의 회충들보다 적었지만, 그 작은 괴수가 A급이라는 게 너무나도 큰 문제였다.

"집정관! 사람들이 더 필요해요!"

[나도 알아! 지금 최소 인원 빼고 다 그쪽으로 보냈어!]

여객선을 구조하러 간 히어로들로부터 모비딕의 사체까지 거리는 약 4km. 다만 그 최단 거리는 바다를 가로질러 오는 길이고, 다리를 지나 도로를 거쳐 오면 족히 10km는 걸릴 거리였다.

"야! 여기 얘들 그냥 싹 다 얼려버려!"

하야테가 울타리 밖으로 튀어나오는 회충들을 썰며 소리쳤다. 하랑은 바다를 달리며 울타리 바깥의 회충들을 얼리면서 소리쳤다.

"왜?!"

"잔말 말고 하라면 해! 내가 너보다 마룡들 상대한 경험 많으니까!"

울컥했지만 상대는 저보다 훨씬 경험이 많은 원탁의 히어로였다. 하랑은 수면을 손으로 내리쳤고, 그대로 바다를 얼려버렸다.

"하아, 하아."

숨을 고른다. 여력을 남기지 않고 바다를 통째로 얼려버린 통에 마력이 한 움큼 빠져나갔다. 아무리 정령의 힘이 넘친다고 하더라도 마력을 회복할 시간은 필요했다.

부들, 부들. 회충들이 얼음 속에서 몸을 꿈틀거렸다. 숙주였던 모비딕과 마찬가지로 얼음 속에서 제 몸을 터뜨려서라도 얼음을 부수려 들었다. 하야테가 혀를 차며 마력을 갈무리했다.

"수마룡, 진짜는 이 녀석들이었어. 젠장."

"무슨 소리야? 모비딕은 그럼 가짜야?"

"연구 결과가 나오면 알겠지만, 이 녀석들 하나하나가 수마룡이다. 모비딕에게 자리 잡은 기생충에게 주도권이 넘어간 건지, 아니면 고래회충이 수마룡이고 모비딕으로 위장한 건지는 나도 모르지. 다만...."

하야테칼로 얼음을 두드렸다. 하랑의 호언장담처럼, 마력을 두르지 않은 검으로는 얼음을 쉽게 가르지는 못했다.

"네가 너무 강한 덕분에 이거 죽이지도 못해. 어떻게 얼려놓고 죽일 방법 없어?"

"얼음째로 깨드리면 되지 않을까? 너도 마력 조금만 쓰면 회충째로 베어낼 수 있잖아."

"지금 얘들 숫자만 천 마리가 넘는데 어느 세월에."

답답했다. 하랑은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머리핀에 손이 닿았다.

"아, 잠시만."

[들려? 물어볼 게 있어.]

[지금좀바쁜데.]

다행히 교신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 하랑은 짧게 상황을 설명했다. 저 멀리 피닉스가 한숨 쉬는 소리가 부산까지 다다랐다.

[아니사키스는고작A급마수다. 숫자만많지모비딕보다어려울건없다. 그냥다죽여버려라.]

[너 왜 이렇게 급해? 그러니까 그 죽이는 방법을 묻는 거잖아.]

[회충은 익히면 다 죽어. ...이런, 급하다. 끊는다.]

미니피닉스가 빛을 잃었다. 하랑은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스마트워치에 제가 들은 공략 방법을 적당히 각색해서 전달했다.

"집정관. 아무래도 저 혼자서는 어려울 것 같아요. 저 회충들, 제 마력 속성으로는 얼리는 게 한계인 것 같습니다. 화속성 이능력자, 화염술사가 필요해요.

[그 마력 속성론? ...아니, 네가 느낀 대로 말하는 거니 일단 수긍하지. 그럼 일일이 하나하나 다 죽여야하는데....]

"그래서 싹 다 구워버리래요."

[누가?]

하랑은 눈을 잠시 굴렸다가 슬쩍 하야테를 노려봤다. 하야테는 마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며 얼음 속 회충들을 칼로 찔러대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회 좋아하잖아요. 기생충 같은 건 잘 알고 있겠죠?"

[질풍객 회 안 좋아한다.]

"아니, 저거 일본인 아녜요?!"

[너도 김치 싫어하잖아. 아무튼 익힌다? 익힌다? 울타리...?]

집정관이 무언가가 떠오른듯 고민하다가 곧장 히어로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석하랑! 화권을 보낼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벌어! 질풍객님은 얼음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들을 죽여주십시오!]

"알겠어. 그보다 혹시 크루즈에 내-"

[동생분이라면 화권이 찾으러 갔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연락 들어오는 대로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발목을 물어뜯으려는 회충을 발로 밟아 터뜨린 하야테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일말의 불안감이 사라지고, 마력이 제대로 몸 안을 휘돌며 컨디션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좋았어! 이제 마음껏 죽일 수 있겠네!"

하야테의 눈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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