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1부 6장 (14)
<5시 17분, 신서울 정부청사.>
"각하. 이건...."
얼어붙은 바다의 광경에 정부청사 상황실의 분위기도 얼어붙었다. 인간의 상식과 이성으로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불가사의한 현상에 경외감 마저 들 지경이었다.
선의철이 재빨리 탁자를 두드려 사람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장관. 협회에 연락하시게. 방금 저 공격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예, 예!"
선의철의 말에 장후정이 빠르게 협회와 연락을 취했다.
협회를 통한 중계 영상 속 설화공주는 손을 쥐었다 펴며 제 힘을 갈무리하는 듯 보였고, 그 사이 여객선은 공원 한 가운데 안착했다. 공원은 여객선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대통령님. 저래서는 복구 예산이...."
"총리.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나."
선의철이 눈을 부라리자 백세준은 움츠려들었다.
"돈 문제야 기업들 쥐어짜면 돼. 문제는 설화공주야. 내가 히어로 문외한이기는 허나 저게 보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네. 장관, 어떤가?"
협회와 연락을 마친 장후정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목소리는 벌벌 떨렸다.
"아직 확정은 할 수 없지만, 순간 화력은 S급의 한계치를 넘어섰다고 합니다. 어디까지나 확정은 아닙니다만...."
탕! 선의철이 탁자를 손으로 치며 이목을 끌었다.
"당장 방송국에 연락 넣고, 신호 차단을 풀게."
"예? 그래서야 기자들은 커녕, 그 귀찮은 방송쟁이들을 부르게 되지 않습니까?"
"쯧."
총리의 지적에 선의철은 혀를 찼다.
"자네가 그래서 이 시대의 대통령 되기 어렵다는 게야. 너무 시대에 뒤떨어져 있어."
"......."
백세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저보다 열댓은 어린 남자에게 공개석상에서 듣는 지적에 감정을 추스르기 어려웠다. 선의철은 신경도 쓰지 않고 안경을 치켜올렸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가서 카메라를 들고 중계하고 싶은 심정이야. 공중파든 지상파든, 지방방송이든 당장 가서 녹화하라고 해. 아니, 전부 생중계로 틀어버리는 게 낫겠군."
"대, 대통령님?"
"뭐하는 겐가? 당장 움직이지 않고. 부산시장한테 연락해서 당직 주무관들이라도 당장 보내서 스마트워치로 영상 찍으라고 하지 않고!"
그제서야 총리는 대통령의 의도를 깨달았다. 선의철은 두 팔을 쫙 벌리며 강론했다.
"대한민국 최초, 세계최초의 SS급 이능력자의 탄생! 당장 생중계로 전 세계에 틀어버리란 말이야!!"
관련 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선의철은 씩 미소를 지었다.
광검이 죽고 청송이 사라졌다. 일각에서는 조심스럽게 레임덕을 거론하기까지 했다. 선의철은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각하."
사람들이 제 역할에 빠져 혼란한 사이, 대통령의 뒤에 시립해있던 국정원장이 조심스럽게 스마트워치를 들이밀었다. 그 누구도 볼 수 없게 대통령의 안경에 작은 스크린이 나타나 문구가 흘러갔다.
- 40.1, 124.4 지점, 중국 히어로들이 괴수와 교전 중 일부 퇴각했다고 합니다.
"......정말로 미안하네만."
선의철이 안경을 벗고 국정원장을 노려봤다.
"다음부터는 그냥 말로 하시게. 여기가 내가 생각하는 그 지점이 맞나?"
"......예. 아무래도 그들이 움직인 것 같습니다."
선의철은 혀를 내둘렀다. 이미 서울의 '그 자들'도 중국의 히어로들이 평양을 안정시키겠다고 떠들며 내려오는 것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하늘이 도왔군."
선의철은 허브티를 마시며 벽에 걸린 스크린에 눈을 돌렸다.
어느덧 모비딕이 해안선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 * *
■■■■!!!
약이 오른 모비딕이 얼음섬을 머리로 들이받았다.
바다 자체가 얼어붙어 그걸 박치기로 뚫어내려는 게 얼핏 미련해보였지만, 모비딕은 얼음 너머에서 저를 도발하는 하랑에 열이 잔뜩 올라있었다.
"벌써 지쳤어?"
하랑은 비웃으며 얼음섬의 끝자락에 섰다. 모비딕은 물대포를 쏘며 그 도발에 화답했다.
"학습능력이 없네!"
견제구로 쏘아진 물대포를 피한 하랑은 곧장 몸을 뒤로 날렸다. 견제와 동시에 수면 위로 뛰쳐 오른 모비딕은 허공에서 하랑을 노려보며 입을 벌렸다.
우웅--!!
모비딕의 입에 마력의 구가 일렁거렸다. 하랑은 혀를 차며 수면을 얼리고는 뒤로 미끄러졌다. 모비딕이 입을 더욱 크게 벌리며 브레스를 뿜었다.
쿠아아아아! 얼어붙은 수면을 긁으며 직선으로 쏘아진 브레스가 하랑을 덮쳤다. 파도를 머금은 브레스가 하랑을 으깨버릴 듯 쏘아졌다.
"흥!"
하랑은 여유롭게 전방으로 손을 뻗어 마력이 방사했다.
곧게 뻗은 얼음창의 창끝에서 다시 퍼져나간 얼음이 우산처럼 살을 만들고, 하랑은 그 사이 캐노피를 얼음으로 채워 창대를 두손으로 꽉 붙잡았다.
"이 정도 공격은 말이다!"
브레스는 하랑이 만든 원뿔형 방어막에 빗겨나가며 수면을 때리고, 하늘로 솟구쳤다. 하랑은 아주 수월하게 저가 만든 얼음의 우산으로 브레스를 막아냈다.
"그 새끼 공격이랑 비교하면 한참 멀었어!"
하랑이 우산을 든 그대로 땅에서 점프했다. 순간적으로 몸이 허공에 뜬 덕분에, 브레스에 밀려 그대로 육지를 향해 날아갔다.
■■■?!
브레스가 멎은 모비딕이 그대로 얼음섬 위에 떨어졌다. 가슴 부분이 얼음섬에 부딪히자 모비딕은 크게 고통스러워했다.
■■■■■■■!!
비늘 사이에서 마력의 물대포를 뿜으며 난동을 부린다. 제 공격이 자꾸 통하지 않는 저 미꾸라지같은 숙적의 행동에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보였다.
언제 자신이 이런 굴욕을 맛본 적이 있단 말인가. 나하에서 열린 차원문을 넘어온 그 날부터 그는 괴수들의 왕이었고 바다를 지배하는 폭군이었다. 백만에 달하는 오키나와의 사람들을 수장시켜 죽인 학살자였다.
그런 자신이 지금 인간의 모습을 한 정령에게 농락당하고 있다. 모비딕은 그것이 너무나도 수치스러워 분노의 포효를 내뱉었다.
■■■■■■■■■!!!
모비딕을 중심으로 거대한 소닉붐이 사방으로 퍼졌다. 수면에서 생긴 충격에 바다에 파도가 일고, 해안선에 다다랐을 때는 어느덧 쓰나미가 되었다.
"와. 진짜 높네."
백사장에서 슬리퍼에 들어온 모래를 털어내던 하랑이 파도를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파고만 거의 5m에 달할 정도로 모비딕의 포효는 대단했다.
"근데 진짜로 학습능력이 없긴 하구나."
하랑은 그저 씩 웃으며 맨발로 바닷물을 살포시 밟았다.
"소용없다니까!"
쩌저적!
순식간에 바다가 얼었다. 해안을 덮치러 몰려오던 파도는 그대로 빙벽이 되었다. 육지로 헤엄쳐오던 모비딕은 그 얼어붙은 파도에 당황하며 멈춰섰다.
"너, 오키나와에서 9년 가까이 잠만 쳐 잤구나? 누구는 9년 동안 뭐 빠지게 훈련했는데."
마력이 넘쳐흐른다. 힘이 넘쳐흐른다. 이전까지 사용한 정령의 힘이 남의 논에서 힘들게 당겨온 것이라면, 지금 사용하는 정령의 힘은 얼마든지 뽑아써도 모자라지 않은 화수분과도 같았다.
"근데 여기는...."
하랑이 슬쩍 뒤를 둘러봤다. 그곳에는 하랑이 이전에 얼음창으로 세워둔 울타리가 늘어져있었다. 하랑은 자신이 디딘 백사장이 어디인지 퍼뜩 눈치챘다.
"대박. 지금 해운대까지 날아온 거야?"
하랑은 우산같은 창을 제 어깨에 걸쳤다. 그게 꼭 파라솔을 차리러 온 여행객같아서 퍽 우스웠다.
여유로웠다. 힘이 생기니 확실히 마음의 안정이 생기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모비딕은 여전히 저를 잡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 하랑이 손목을 들어올렸다.
"여기는 설화공주. 아직 어그로 저한테 잡혀 있어요."
[유인 잘했어! 혹시나 여객선 쪽으로 오면 어쩌나 싶었는데!!]
"......."
하랑은 발목으로 넘어간 슬리퍼를 발바닥으로 밀었다. 등에서 절로 식은 땀이 흘렀다.
"아, 하하하. 그럼요. 집정관. 제가 누군데. 인명 피해는요?"
[하나도 없어! 네가 만든 울타리 덕분에 괴수들 민가로 올라오지도 못해! 곧 지원군 도착할 거니까, 조금만 참아봐!]
"...꼭 참아야 해요?"
하랑은 얼음을 부수며 달려오는 모비딕을 향해 창끝을 조준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방해되는 슬리퍼를 벗고 맨발로 백사장을 내달린다. 빠르게 백사장을 넘어 바다에 발을 디디는 순간, 수면을 얼리며 그 위를 달린다.
■■■■■■!
모비딕이 화답하듯 헤엄쳐온다. 마치 제 돌진과 하랑의 랜스 차징을 비교해보자는 듯, 하랑이 만들어놓은 얼음벽 위를 미끄러지며 높이 뛰어오른다.
"와."
제 머리 위에 짙게 생긴 그림자에 하랑은 감탄했다. 전장 50m에 달하는 고래 괴수에게 깔리게 생겼음에도, 하랑은 여유가 넘쳤다.
"돌진말고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구나."
하랑은 제자리에 멈춰서자 모비딕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지만, 모비딕은 그대로 파도를 넘어 고개를 내렸다.
■■■■■■■■!
허공에서 쏘아지는 물대포를 유유히 피하며, 하랑은 제 손에 들린 얼음의 랜스에 마력을 쏟았다. 바닷물 위에서 자세를 잡느라 무게중심이 흔들릴 것 같았지만, 오히려 바다는 하랑의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다리를 감싸안았다.
어깨 위로 올린 손에 하얀 손길이 포개어진다. 마치 함께 창을 던지려는 듯, 아이처럼 조막만한 손은 하랑의 손을 굳게 감싸쥐었다.
셋. 둘. 하나.
■■■■■!
파도를 넘어온 모비딕이 수면 아래로 떨어진다. 모비딕이 쩍 벌린 입에서 생성된 브레스가 하랑을 덮쳤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비딕에게 그대로 깔릴지도 모른다. 걱정어린 하얀 손길에 하랑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내가 뭐하러."
하랑은 얼음의 날개를 펼쳤다. 두 팔에 마력을 전부 끌어모아 근력을 강화하고, 랜스를 집어던졌다.
새액-! 얼음창의 끝은 정확히 모비딕의 브레스를 향해 돌진했다.
"니랑 맞서 싸워주겠냐?"
하랑은 랜스를 모비딕의 입을 향해 집어던진 그 반동을 이용해 날개를 펄럭였다.
수면을 스치듯 날아 백사장에 착지하는 사이, 모비딕의 거구가 그대로 랜스와 바닥을 들이받았다.
캬아아아아! 랜스가 모비딕의 입안을 찌름과 동시에 거대한 지진이 백사장을 울렸다.
콰아아아! 모비딕이 이마를 그대로 바닥에 찍었다. 모비딕의 머리가 바닷속 모래사장에 움푹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모비딕의 배 아래가 꿈틀거렸다.
파앙-!
풍선을 터트리는듯한 경쾌한 소리와 함께 하랑의 얼음창이 하늘로 솟구쳤다. 브레스를 뚫고 목젖을 찌른 얼음의 랜스는 그 추진력을 잃지 않고 모비딕의 위장까지 뚫었다.
구구구...! 바닷가에 있던 고층 건물 하나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창 공사중이던 건물은 힘없이 백사장을 향해 무너졌다.
"......부실공사네. 응, 부실공사야."
하랑은 그대로 백사장에 내려앉았다. 바닥에 머리를 파묻은 모비딕이 몸이 경련하다가 기우뚱하며 기울었다.
백사장, 하랑의 방향으로.
"...어머나."
저것까지 떨어지면 건물 장난아니게 부서질텐에. 하랑은 급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 순간, 바람이 살랑거리며 하랑의 머리칼을 간질였다.
"참(斬)."
어느새 하랑의 옆에 착지한 남자, 하야테는 칼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하야테는 하랑에게 눈썹을 으쓱였다. 하랑이 얼척없다는 얼굴로 빈정거렸다.
"마무리 일격 신경 안 쓴다며?"
"위험해보여서 구해준 건데? 큭큭."
"퍽이나."
"...Fuck?"
하야테가 일어남과 동시에, 기울어지던 모비딕의 육체가 수 십 갈래로 갈라졌다. 복부부터 꼬리까지 산산조각 난 모비딕의 몸은 그대로 수면에 떨어져 가라앉았다.
"해, 해운대가?!"
하랑이 피바다로 변한 부산 앞바다를 보며 성큼성큼 달려가 하야테의 멱살을 잡았다.
"지금 남의 앞바다 오염시키고 뭐하는 짓이야?!"
"하하하! 왜?! 일단 쓰러뜨렸으니 됐잖아. 안 그랬으면 저거 건물 하나 더 쓰러졌을 걸?"
하야테는 유들유들 웃으며 동쪽편의 고층건물을 가리켰다. 수백미터 짜리 건물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랑은 한창 공사중인 그 초고층 아파트가 유성의, 은유하의 것임을 깨닫고 슬며시 멱살을 놓았다.
"......하, 조차삘까보다."
"뭐? 아, 오늘 번역기 진짜 이상하네. 먹통인가?"
하야테는 구겨진 스카프를 손으로 펴며 스마트워치를 문질렀다. 하랑은 그 여유가 넘치는 얼굴에 금이 가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삑. 둘의 워치에 집정관의 명령이 떨어졌다.
[집중해! 모비딕 시체에서 아직 괴수 신호가 잡힌다!]
"......!"
"...이런."
하야테가 검을 빼들고, 하랑이 허공에 얼음창을 만들어냈다. 모비딕이 죽은 바다가 부글부글 끌어오르기 시작했다.
콰과과과! 핏빛 바다에서 거품과 함께 하얀 점액질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하랑과 하야테는 생리적인 혐오감에 질겁을 하며 스크린을 확인했다.
"뭐, 뭐야 이 숫자는?!"
"10, 100, 1000?! 이거다 모비딕이야? 모비딕이 왜 이렇게 많아?!"
부글부글. 두 히어로는 점액질을 뿜어내며 꿈틀거리는 그것들을 보며 표정이 굳었다.
설마. 설마. 아닐것이다.
그러나 그 예상은 슬프게도 너무나도 잘 드러맞았다.
""꺄아아아아악?!""
형언할 수 없는 수 천 마리의 무언가가 보라색 장기를 뿌리며 해안선으로 헤엄쳐오기 시작했다.
# # #
# 평양 사이드
<그 시각, 압록강.>
캉! 검을 손으로 가로막는다. 상대는 재빨리 검을 회수하려 들지만, 그보다 이쪽의 주먹이 더 빠르다.
"커헉!"
명치를 찌른 주먹에 히어로는 눈이 뒤집히며 쓰러졌다. 이걸로 276. 제법 많이 쓰러뜨렸지만 아직 그 수가 징글징글하게 많이 남아있다.
"그러고보니 석하랑 고생 좀 꽤나 할 것 같은데."
"야! 놀지말고 싸워!"
덕배가 바닥을 구르며 화살을 피했다. 뱀같이 움직이는 화살은 덕배를 지나쳐 나를 향해 꿈틀거리며 날아온다.
"아. 덕분에 안좋은 기억이 떠올랐잖아요."
나는 손을 들어올려 화살을 태워버렸다. 저 멀리 건물 위의 사수가 혀를 차는 모습이 눈에 훤해, 나는 덕배의 후드를 잡고 건물을 향해 집어던졌다.
"덕배 받아라!"
"□□□아!!"
덕배는 포물선을 그리며 건물을 무너뜨렸다. 건물에서 화염거인이 나타나 건물을 부수고, 마침 옆에 있던 A급 히어로에 의해 상반신이 터졌다. 나는 재빨리 날아올라 덕배의 코어를 수습했다.
죽었다 부활하는 괴인의 특성을 한껏 살리며 중국 히어로들을 쓰러뜨려나갔다. 이걸로 벌써 7번째 죽음이던가.
"쟤 또 죽었어? 나 참."
팬텀이 촉수로 히어로의 목을 조르다 바닥에 내팽겨쳤다. 히어로는 왠지 모르게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실실 웃다가 기절했다. 팬텀이 내게 다가왔다.
"갑자기 왜 그래? 벌써 지쳤어?"
"아뇨. 그냥 꿈틀거리는 게 생각나서 조금.... 아! 팬텀이 그렇다는 게 아니에요. 오해하지 말아요."
팬텀의 가면 속 눈이 반쯤 감겼다. 나는 곧장 변명을 풀었다.
"모비딕 있잖아요. 일단 그것도 쉐도우라서 2페이즈가 있거든요?"
"응. 그렇겠지. 그래."
"안 믿으시네. 읏차."
여전히 팬텀의 표정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팬텀을 안아들고 하늘로 날아 땅에 떨어지는 포격을 피했다.
콰앙! 흙먼지가 비산한다. 팬텀은 이제 익숙한 자세로 팔로 내 목을 감싸안았다.
"모비딕 2페이즈가 어떻길래? 어려워?"
"아니요. 무척 쉬워요. 보너스 스테이지나 다름없는데...."
나는 팬텀을 안고 쏟아지는 포격을 피해 유유히 하늘을 날았다. 크게 반원을 그리듯 날며 원거리 공격을 쏘아대는 히어로들 한가운데에 이르자, 팬텀이 그대로 뛰어내려 히어로들을 촉수로 때려눕혔다.
그리고 덕배를 부활시켜 바닥에 떨어뜨렸다. 공중에서 화염 거인이 부활하며 히어로들을 덮쳤다.
"모비딕은 죽으면 2페이즈가 시작돼요. 거구 째로 얼려버리거나 내장까지 다 태워버려야지, 괜히 상처내고 두동강 내고 그러면 난리가 나요. 내장에서 튀어나와서."
"...내장?"
팬텀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나는 막 영창을 하려던 바람술사의 안면을 무릎으로 찍으며 착지했다.
"네. 모비딕 2페이즈 이름은 따로 있어요."
나는 생각만으로도 혐오스러워 오한이 들었다.
"아니사키스(Anisakis)."
고래회충. 나는 차마 팬텀에게 그 뜻을 말할 수 없었다.